타계 50주년 이중섭, 다시 죽다
내일은 ‘국민화가’의 50주기 그러나 추모행사·기념전시는 없다 작년 위작시비 이후 이름만 나와도 꺼린다 死後도 쓸쓸한 그 이름, 이중섭
▲ 불운했던 화가 이중섭은 타계 50주기도
쓸쓸하게 맞고 있다.
작년 위작사건 여파로 올 해 이중섭 50주기를 기리는 전시 하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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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일은 화가 이중섭(1916~1956)이 타계한 지 꼭 50주년이
되는 날. 하지만 이날은 미술인 30여명이 서울 망우리에 있는
이중섭의 묘소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는 것 외에는 예정된
공식 추모행사가 없다.
‘국민화가’의 50주기이건만 올 한 해 내내 기념전시 한 번 없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모든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이중섭에서
손을 뗐다. 경매에서도 1년이 넘도록 이중섭 작품은 다루지 않는다. 작년 한 해 미술계를 흔들었던 이중섭 위작 사건의 여파다.
“이중섭 50주기는 미술계는 물론 문화관광부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인데, 모두들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고 있으니
통탄할 일입니다.” 이중섭 연구가인 미술평론가 최석태씨의 말이다.
이중섭 위작 사건은 작년 3월 서울옥션에서 거래된 작품 5점 등의
진위(眞僞) 여부를 놓고 관계자들이 맞고소까지 한 사건.
검찰은 해당 작품들에 대해 사실상 위작 판정을 내렸고,
이후 이중섭은 한국 미술계에서 ‘피해야 할 화가’가 돼 버렸다.
미술계에서는 이중섭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리고 있다.
이중섭이 전시나 경매에 나오면 십중팔구 진위 시비가 붙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5~7월 덕수궁미술관 전시 때 나온
이중섭의 ‘물고기와 아이들’(1952~1953)은 감정위원 4명 중 1명이
위작이라고 주장하자 이런 사실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씨는 “정확한 증거 없이 어느 한 사람이
가짜라고 의견만 내면 선정적으로 다뤄지니, 소장자는 물론
화가에게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고 말했다.
한 큐레이터는 “이중섭 작품만 등장하면 근거 없이 진위 시비가
붙는 이상한 관행이 생겨서 소장가들이 전시에 작품 내놓기를
꺼리니 전시기획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술시장에서도 이중섭은 사라진 지 오래다. K옥션 김순응 대표는 “과거엔 이중섭의 드로잉이나
수채화도 좋은 것은 억대에 팔렸으니 박수근보다 더 블루칩 화가였는데,
이제는 컬렉터들이 굳이 이중섭 작품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아 시장이 다 죽었다”고 말했다.
미술평론가 김현숙씨는 “이중섭에 대해 너무 작품의 가격과 진위 문제에만 매달리다 보니
그의 예술적 가치가 얘기되지 않고 있는 것도 큰 문제”라며
“전시를 하기 어려우면 학술행사라도 해서 이중섭 50주기의 의미를 새겨야 할 텐데
미술계가 너무 소극적이어서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만물상] 이중섭 50주기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김춘수·내가 만난 이중섭).
피란지 부산에서 이중섭은 물감과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고 부두 막노동으로 연명했다.
그는 가난을 견디다 못해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 처가에 보내놓고
그리움과 미안함이 담긴 편지를 수없이 띄웠다.
▶6·25가 끝나갈 무렵 시인 구상(具常)이 폐결핵으로 쓰러졌다.
원산 시절부터 단짝 친구였던 이중섭이 한참 지나서야 병문안 와서 도화지를 불쑥 내밀었다.
큰 복숭아 속에 아이가 청개구리와 노는 모습을 그린 종이였다.
“무슨 병이든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복숭아 있잖아! 그걸 상(常)이 먹고 얼른 나으라고.” 가난한 이중섭에겐 과일 사 올 푼돈마저 없었다.
▶평안도 부잣집 아들 이중섭이 1950년 12월 월남해 처음 몸을 의탁한 곳이 서귀포였다.
네 식구가 몸을 포개야 하는 단칸방이었다. 그는 가족을 먹이기 위해 바다에 나가 게와 물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었다.
가난했지만 가족과 함께했던 서귀포 시절은 그나마 행복했다.
‘황소’ ‘섶섬이 보이는 풍경’ ‘서귀포 환상’ 같은 걸작을 그려냈다. 그래서 서귀포시와 조선일보는 해마다 9월이면
‘이중섭 세미나’를 서귀포에서 연다.
▶오늘 6일 이중섭이 떠난 지 50년 된 날이다. 그러나 변변한 추모행사 하나 없다고 한다.
올해 기념전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이중섭 세미나’가 거의 유일한 행사다.
경매에서도 이중섭 작품은 썰렁한 신세다. 작년 한 해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위작(僞作) 파문 탓이다.
작년 3월 경매시장에 나온 작품에 송사(訟事)가 붙었고 검찰이 이 작품들을 사실상 위작으로 판단하면서 그리 됐다.
▶“내 그림은 모두 가짜야.” 이중섭이 둘둘 만 작품 뭉텅이를 불살라버리라고 후배 김광림에게 줬다.
1955년 첫 개인전을 연 뒤 그림값을 떼어먹혀 낙담하던 끝이었다. 그
림을 간수했다 고이 돌려준 시인 김광림은 요즘의 위작논란을 씁쓸해한다.
이중섭은 티없는 세상을 그리며 세속을 불태운 자유인이었다.
걸작을 낳은 창작기는 고난이었고 생의 끝은 적막했어도 훗날은 영광이었다.
다만 얄팍한 세태가 그의 맑고 영원한 예술혼을 지금 잠깐 시샘해보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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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달과 하얀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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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네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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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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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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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제주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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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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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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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린이와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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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어린이와 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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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안고 게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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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와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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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집 화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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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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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와 담배대 | |
이중섭! 40년 그 짧은 예술의 삶
섶섬이 보이는 풍경
나무판에 유채, 41×71cm, 1951년
폭격의 위험을 피해 월남한 이중섭은 부산에서 다시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주민의 호의로 살 곳을 얻어서 비로소 안정을 얻게 되었다. 사는 집지붕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섬이 있는 바닷가 고요하고 깨끗한 느낌을 그린 것이 풍경화다. 뒷날 부산과 통영에서 그린 풍경화들에서 보이는 활달한 필치와는 사뭇 다르다.
서귀포의 환상
나무판에 유채, 56×92cm, 1951년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귤이 자라는 따뜻한 날씨와 작으나마 깃들 수 있는 집에서 비로소 안도한 이중섭의 마음을 느낄수 있다. 아울러 아이가 새를 타는 것으로 설정해서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적인 필치가 있으므로 북한에서 생활할 때 강요되다시피 했던 사실주의적인 태도가 남은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도원>과 함께 이중섭이 남긴 그림 중에서 가장 커다란 것에 속한다.
도원
종이에 유채, 65×76cm, 1953년 무렵
물이 있고 크고 작은 봉오리들이 있는 곳에 서있는 천도복숭아를 중심으로 네 명의 남자아이가 노는 광경을 통하여 낙원의 느낌을 나타냈다. 젊은 시절 애인에게 보낸 그림엽서들에도 이런 경향이 강했다. 통영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최재덕과 8.15 직후 서울에서 그렸던 벽화도 이런 소재였다고 하는데, 통영에서 멀지않은 산청이 고향이며,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월북하고 없었던 조선신미술가협회의 동인이었던 최재덕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호 대향 을 써서 대이상향 이라는 본래의 의미대로 낙원의 느낌을 물씬하게 풍기도록 하였다.
길 떠나는 가족
종이에 유채, 29.5×64.5cm, 1954년
헤어져 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자신은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광경을 그렸다고 했는데, 이 그림은 이를 옮긴 것이다. 서울에서 개인전을 성공리에 마치면 곧 만나게 될 가족에 대하여 희망에 차서 그린 것이다. 유화가 1점 더 있다. 그림의 테두리는 젊은 시절 큰 영향을 받은 루오가 쓰던 수법을 응용한 것으로 이중섭도 이를 자주 애용했다.
소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소는 중등 과정부터 즐겨 그리던 그림의 소재였다고 동창들은 전한다. 소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과 소로 상징되는 민족과 현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돌봐준 의사에게 선물한 이 그림은 그의 배려로 건강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마음을 그림에 보이는 평정한 모습의 소로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 <비둘기가 있는 가족>이 그려져 있다.
가족과 비둘기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가족을 그린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경쾌함이다. 가족이란 화기애애함이 넘치는 인간관계임을 강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이 그림은 재빨리 완성해 이런 느낌이 더더욱 강조되었고, 등장인물의 개별 특징이 또렷한 것이 큰 특징이다
황소
종이에 유채, 32.3×49.5cm, 1953년 무렵
소는 고개를 들면서 외치는 듯하다. 왼쪽으로 향한 얼굴과 오른쪽으로 향한 눈이 화면의 양쪽 모두를 지배하는 듯하다. 외침이 들리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하여 소의 얼굴과 목 주위를 유달리 주름지게 한 것으로 보인다. 코와 입에 가해진 선연한 붉은 색과 넓은 배경의 붉은 노을을 층지게 하여 이런 느낌을 강화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평원군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런 감회를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투계
종이에 유채, 29×42cm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고자 덤벼드는 설정이다. 푸르고 붉은 빛깔로 그린 닭 부분이 충분히 마른 뒤, 그 위에 덮은 검은 빛깔이 마르기 전에 물감칼로 덮은 물감을 긁어냄으로서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조응하는 색깔과 태세로 보아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타나는 색채적, 조형적 특징을 계승한 것이라 보인다.
횐 소
나무판에 유채, 30×41.7cm, 1954년 무렵 서울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흰 붓질로 된 득의의 작품이다. 소의 상태도 평정을 이루어서 심정이 안정된 가운데 최고조의 상태를 보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도판 16과 같은 붓질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검은빛과 흰빛을 아울러 추사체와 같은 붓질을 보이고 있다. 특히 머리와 또리 부분에 그런 표현이 강하다. 사의성 마저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아 서예를 비롯한 전통 예술에 대한 소양을 느낄 수 있다. 장자의 우화에 등장하는 솜씨 좋은 소잡이가 생각나는 그림이다
- 그림 갤러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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