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40분, 일본 금택형무소 형장에서
윤의사는 십자가 형틀에 매어 두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이날 아침 7시 15분
“이날 아침 7시 15분
간사장이 간수 2명, 헌병 3명과 함께
양복을 입은 윤의사를 호송, 형장에 도착했다.
감옥장은 간수장에게 윤의사의 수갑을 풀게하고,
군의관에게는 건강진단을 하게 해 심신 모두 이상 없음을 확인한 후
윤의사에게, 5월 25일의 사형선고에 따라 형을 집행한다는 요지를 알렸다.
이때 감옥장이 "유언이 있느냐?"고 묻자
윤의사는 "이미 각오하고 있던 터라 말할 것이 없다"고 했고
감옥장이 다시 소지품의 처리에 대해 묻자
"필요없으니 좋을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그의 언어는 명료했고 그 태도는 침착했다.
감옥장은 간수장에게 윤의사의 눈을 가리도록하고
형틀 앞 거적 위에 꿇어 앉힌뒤 두손을 형틀에 묶은 다음
상오 7시 27분, 2명의 사수에게 총살을 명령했다.
사수 2명은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
윤의사의 미간을 명중시켜 윤의사는 출혈이 매우 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상오 7시 40분 군의관이 윤의사를 검시, 절명했음을 보고했고,
감옥장이 다시 확인한 뒤 사체 매장을 지시했다.”
(사형집행시말서에서)

이 사진은 윤의사가 총살형으로 순국하던
1932년 12월 19일, 일본 [북국신문]에 게재된 것이다.

1946년 5월초 재일동포 서상한, 박열, 이강훈 등이 윤의사 유해 봉환을 추진하여
한국인 청년 50여 명이 나서서 금택 교외에서 유해를 찾게 된다.
사흘 동안 이곳 저곳을 팠으나 발견하지 못했는데
석천현 출신 장병묘지 관리인 부인이던 노파(80여세)가 일러주는
쓰레기 하치장을 파서 가매장된 윤의사의 관,
십자가 형틀과 기타 유품을 순국 14년 만에 찾아냈다.
위 사진은 윤의사 유해를 발굴하는 장면이고,
아래는 쓰레기 매립장에서 발견된 윤의사의 관.

동아일보 1932년 11월 22일자 신문 기사.
윤봉길 의사가 오사카에서 사형이 집행될 것이라는 보도.
'상해폭탄범'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끕니다.

백범과 모든 거사 준비가 완료된 후 4월 26일,
거류민단사무실에서 윤의사는 '한인애국단선서식'을 거행하고
태극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가슴에는 스스로 쓴 '선서문'(아래)을 부착하고
왼손에 폭탄을, 오른손에는 권총을 들었다.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
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
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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