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의 집권과 쇄국정책의 파탄(破綻)
대원군정권은 종래부터 쌓여왔던 국내의 폐정을 개혁하여 봉건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오래동안 전제정치를 실시했으나 드디어 사회내부에 잠재하는 반대세력 때문에 그 정권은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대원군정권은 역사의 발전방향에 배치(背馳)되는 왕권강화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그 정권은 먼저 강력한 민중세력의 반항에 부딪치게 되었으며, 그 다음에는 지배계급 내부에 있어 민비일파(閔妃一派)를 중심으로 하는 외척의 새로운 세력이 대두하여 내부경락(內部軋轢)으로부터 빚어지는 격한 정쟁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민중세력의 반항은 경복궁 재건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실시한 가혹한 부역노동 및 각종의 강제 징세와 통화팽창정책 실패에 의한 피해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지배계급 내부에 있어서는 먼저 유생집단이 서원철폐령을 원한으로 삼아 대원군에 반대했으며, 왕족의 외척인 권문세가는 대원군의 독재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하야를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지배층내부의 알력은 특히 대일 국교회복문제(國交恢復問題)를 에워싼 대외정책 수행에 있어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대원군은 이러한 반대세력, 특히 그 중에서도 민비척족일파(閔妃戚族一派)가 유생집단세력을 사주(使嗾)하여 올린 상소문(上疏文) 한장에 의하여 정권을 탈취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대원군 일파의 정치상의 패퇴는 먼저 국내정정(國內政情)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즉, 대원군의 며느리 민비를 중심으로 하는 여흥민씨 일족에 의한
흥선대원군초상그리고 묵란도와 필적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권은 민승호(閔升鎬) · 민겸호(閔鎌鎬) · 민태호(閔台鎬)등이 장악하였고 정무(政務)는 민승호(閔升鎬)가 중심이 되어 섭행(攝行)하게 되었다. 그때문에 국왕의 이름으로 대원군이 중용했던 좌의정 강로(姜**)와 우의정 한계원(韓啓源) 등을 위시하여 그 계열의 인물은 거의 모두가 정부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민씨정권은 대원군의 보수 · 개량정책(改良政策)에 반대하는 새롭고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양반지배계급 중의 다른 한 사람을 새 주인공으로 대치한데 불과한 것이었다. 민씨일파가 대원군정권에 반대한 것은 종래의 폐정을 개혁하고 또한 외래침략세력에 대응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갖고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막연히 정적(政敵) 대원군을 정권으로부터 추출하고 자기들의 욕망인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데에 있었다. 거듭말하거니와 민씨일파가 대원군정책에 반대한 공격의 초점은 대내정책에 있어서는 서원철폐문제와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대일국교회복거절의 건(件)이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한갓 표면상의 구실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허약한 봉건국가를 전진 발전시켜 번영케 한다든가 혹은 도탄에 빠져있는 국민을 생각하는 애국적인 정신에서 건전한 투지력과 뚜렷한 정치의식을 갖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문에 그들의 집정(執政)은 단순한 정권쟁탈전에 의한 양반지배계급 내부의 '정권교체'에 불과했고, 그 결과는 대원군 정권보다도 더욱 반동적(反動的)이며, 진취성이 없는 것이었다. 바꾸어서 말하면 그 정권교체는 땅에 떨어진 조선왕조의 위신과 권위 및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에 빠져있는 봉건적 양반지배체제를 유지 보호하기 위한 초조 · 동요 · 불안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민씨정권은 집정을 하자마자 유생집단의 요청에 호응하다시피 하는 한편 대원군집정 때 혁파되었던 모든 관제(官制) 내지는 행정체계를 다시 갱신하는 등 대폭적인 수술을 가함과 동시에 대원군이 그토록 국시(國是)로 고수해오던 양이쇄국정책(攘夷鎖國政策)을 포기하고 일본을 비롯하여 구미제국과 연달아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그 개국정책은 결코 자주적으로 세계 대세에 순응하려는 확고한 역량하에서 수행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지배체제를 유지 연장하기 위하여 청국의 종용과 일본을 비롯한 외래 선진 자본주의 제국의 강요에 못이겨 굴복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운양호(雲揚號)사건과 강화도조약
조선과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임진왜란 직후 성립된 덕천막부(德川幕府) 이래 정상적인 수교를 유지했으며, 막부가 쇄국을 했을 때에도 우리 나라와의 국교는 각별히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교관계가 조선은 철종 말엽부터, 그리고 일본은 막말(幕末)의 소란기 때 내외다사(內外多事)로운 복잡한 문제등이 야기되어 정세가 심히 혼란됨으로써 자연히 정지상태에 빠지고 맡았다.
그러나 이미 일본은 미국의 강요에 못이겨 개국하고 (철종 5년,1854), 유신혁명(維新革命)에 의하여 막부를 타도한 후 천황제정부(天皇制政府)를 수립하였다.(고종 5년,1868) 이러한 혁명은 근대화의 길을 열고 서구문명의 적극적인 도입과 아울러 여러 개혁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방향은 시민정권의 성장이 아니라 '농민일규(農民一揆)' 및 '자유민권운동'의 탄압, 무사(武士)의 관료화, 정상(政商)의 육성 등에 의한 번벌정부(藩閥政府)의 방향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명치정부의 외교정책 중에는 개화주의와 더불어 낡은 양이주의(攘夷主義), 그리고 약소국가에 대한 침략주의가 포함되고 있었다. 그러한 정책은 봉건적특권을 상실하고 있었던 불평무사군(不平武士群)의 반동적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자본주의의 성장발전을 꾀하는 입장에서도 주장되었다. 따라서 부국강병과 침략주의 등은 명치정부의 일관된 정책으로 구현되었다. 즉, 그 침략의 대상은 구미열강제국의 침략에 의하여 약체성을 폭로한 아시아제국이었으나 그 중에서도 지정적(地政的)으로 가장 가까운 우리 조선에 먼저 마수를 뻗고자 하였다. 그래서 일본은 우리 정부에 '왕정복고'를 통보함과 동시에 몇차례나 사절을 파견하여 국교회복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우리 대원군정권은 엄중한 쇄국정책을 실시중에 있었으므로 이미 구미제국과 개국하고 있었던 일본을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고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우리 조선에 대하여 침략의 근본방침이 정해져 있는 일본이 그러한 것을 언제까지나 좌시할 리가 없었다. 그때문에 일본에서는 불평무사군의 '정한론(征韓論)
이 일어났는데 일본정부는 이것을 이용하여 유신정권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고 그러한 대한강경론을 억제하기 보다 오히려 이용하여 그들의 유신정부에 대한 여러 반대운동 내지는 반정부세력의 화살을 밖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그래서 일본국내는 한때 정한론이 비등하게 되고, 정부내에서도 즉시 정한을 주장하는 서향융성을 중심으로 하는 무단파(武斷派)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는 암창구시(岩倉俱視)등의 문치파(文治派)가 대립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치파의 주장 또한 정한 그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반대가 아니라 다만 좋은 시기를 노리어서 하자는 신중론이었다.
정한론 논의도
그러나 일본은 드디어 고종 12년 5월경부터 우리 나라의 쇄국정책을 무너뜨릴 결심으로 침략적인 출병의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운양호(雲揚號) 등의 군함 3척을 우리 영해에 순유(巡游)시켜 사건을 도발(挑發)하기 시작하였다. 운양호의 함장 정상양형(井上良馨)이 자기정부에서 받았던 훈령의 내용은 대마해협 및 우리 동남해안의 측량을 끝내는 대로 그 서해안을 북항하면서 청국의 우장(牛莊)에 이르는 데까지의 수로를 측량하라는 데 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사명이었지, 그 배후에 숨겨져 있었던 참다운 사명은 우리나라를 자극케 하는 도발행동을 일으키고, 다른 한편에 있어서는 그러한 음모에 의하여 자연히 비등하게 되는 일본의 세론(世論)을 정한강경론으로 전환해 가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일본군함
그래서 운양호 등의 군함은 예정된 계획대로 5월 25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 부산항에서 연습을 하면서 포격을 굉굉울려 부산 · 동래일대의 시민을 놀라게 하였다. 이 불법행위에 경악한 동래부사 황세연(黃世淵)은 왜관에, 주재중인 삼산(森山) 이사관(理事官)에 엄중항의를 하고 즉시 철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측은 처음부터 그 연습이 우리 관민을 위협하려는 군사적 시위를 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만큼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 때문에 우리 관민은 이것을 임진왜란의 재발이라 간주하고 격한 항일 적개심에 불탔던 것이다.
이 군사연습에서 조선에 충분히 위협을 가한 운양호는 부산을 출발, 다시 우리 동해안을 북상하여 동월 22일 함경도 영흥만(永興灣)에서 3일간 정박하였다. 그리고 25일에는 출항하여 경상도 영일만(迎日灣)을 거쳐 29일에는 재차 부산에 기항(寄港)했다가 7월 1일에는 장기(長崎)에 귀착(歸着)하였다. 이것으로써 운양호의 제 1차의 군사적 도발행위는 완료되었던 것이다.
운양호의 제 2차 도발행위는 동년 9월 19일 인천 월미도(月尾島) 앞바다에 출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은 항로측량(航路測量)이라는 구실하에 한강입구에 침입하여 불법으로 강화요새 부근의 수심을 측량하였다. 이것을 발견한 우리 수비대가 정지경고로서 발포를 하자, 운양호측은 즉시 이에 응사(應射)했을 뿐만 아니라 초지진 포대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는 한편, 그 다음날에는 영종도의 요새를 점령하여 포대를 파괴하고 다수의 우리 군민을 살상하였다.
개항전 인천항
강화도의 요새들은 병인 · 신미양요 이후 10년간에 걸쳐서 우리 정부가 무엇보다도 온갖 힘을 집중시켜 방비한 곳이었다. 벽첩(壁疊)를 공고히 하면서 군기를 개선했고, 식량을 저장했는가 하면 기예도 연마했고, 또한 은상으로써 장병을 격려하는 등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1척의 군함에 의한 단 한번의 공격으로서 동포(銅砲) 36문(門)을 약탈당하고 패퇴했다는 것은 장병들의 전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태는 민씨정부를 너무나도 실망케 하는 일이며, 대원군이 정권으로부터 하야한지 불과 1년여에 강화도방비의 허술함이 폭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장병의 사기가 쇠퇴해졌다는 것은 민심이 민씨정부로부터 이미 이탈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덕진진포대
그런데 일본이 침략행위를 이처럼 갑자기 과감하게 취하게 된 동기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고종 10년(1873)에 청국시찰을 끝내고 귀국한 중신(重臣) 부도종신(副島種臣)의 내각 각료회의에서 한 「조선문제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보고에 기인됨이 컸다. 부도(副島)는 각료회의에서 청국정부는 조선의 내치외교에 관한 자주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과 또한 러시아 정부의 불간섭주의도 아울러 보고 하였던 것이다. 이 보고를 청취한 후의 각료들의 태도라는 것은 거의 모두가 구미열강이 조선에 진출하기 이전에 일본이 먼저 무력으로써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앞으로 국제각축무대가 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갔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일본침략주의자들이 도발했던 '운양호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예기소망(豫期所望)한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 사건을 전보로 보고 받았던 일본정부는 '이젠 절호의 구실을 잡게 되었다'고 즐거운 태도로 육 · 해군에 긴급지시를 내림으로써 만반의 침략적인 군사준비를 갖추도록 명하였다.
원세개의황제즉위식
한편 일본정부는 삼유예(森有禮)를 주청공사(駐淸公使)로 북경에 급파하여 청국정부에 대해 청국은 금후 조선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것, 일본은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여 강화성부근에서 일어난 운양호사건의 배상을 청구하며, 또한 통상조약을 체결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수교케 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살주벌(薩州閥)의 육군중장겸참의(陸軍中將兼參議) 흑전청륭(黑田淸隆)을 전권변리대사(全權辯理大使)로 임명하고, 부사(副使)에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장주벌의 정상형(井上馨)을, 그리고 궁본소일(宮本小一)과 삼산무(森山茂) 외무대승(外務大丞)등을 수행원으로 하는 전권단(全權團)을 구성하는 외에 이들의 외교담판을 지원하기 위하여 근위(近衛, 수도)와 대판(大阪) · 웅본(熊本) · 광도(廣島) 등의 각 진대(鎭臺)에서 뽑힌 혼성여단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정 · 부사를 비롯하여 문무수행원 약 30명으로 된 이 전권단 일행은 혼성여단의 정예병력 약 800여명과 함께 군함 5척에 분승하여 곧 품천항(品川港)을 출발하고 1월말경에는 부산근해에 닻을 내렸다. 그후 그들은 서서히 서해안을 북상하여 고종 13년 1월 2일(음력)에는 경기도 남양만에 머물렀다가 동월 16일에는 전권단 일행이 강화부에 상륙했던 것이다. 당시 강화도에 정박중이던 그들 군함의 광경은 3척의 수송선(輸送船)마저 채화(彩畵)로 위장함으로써 원거리에서 보면 마치 대포로 무장된 군함과 같이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수법으로 편성된 전권단은 강화에서 무력적인 시위를 하고 상륙한 후 조선의 문호개방을 강박하였다.
일본 간부회의
그런데 이 동안의 우리측 상하의 동향을 살펴보면 정부당국은 대일관계에 있어 무지 · 무능했던 탓인지, 아무런 대책도 수립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며, 일반민중측의 동향으로서는 유림들이 은거지로부터 환도한 대원군과 합세하고 대일수교반대의 기세를 올리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고, 결국은 개국을 권장하기 위한 청국사절의 도착과 더불어 좌의정 이최응(李最應)의 소위 완화책이 건의됨에 따라 국왕도 이에 찬성하고 접견대신(接見大臣)에 신헌(申櫶), 부관(副官)에는 윤자승(尹滋承)을 임명하여 강화부로 파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이 육 · 해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써 우리 양반지배계급을 위협한 수법은 그들이 13년 전에 미국의 아시아함대사령관인 페리제독에 굴복하고 '신내천조약(神奈川條約)'을 체결한 과정을 모방하여 적용한데 불과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 접견대신 일행과 일본 전권단 사이에 벌어진 강화회상(江華會商)은 고종 13년 1월 17일(양력 2월 11일)에 때마침 일본군함으로부터 그들의 기원절(紀元節)을 축하하는 포성(砲聲)을 들어 가면서 강화부내 연무당(鍊武堂)에서 개최되었다.
연무당
이 첫날 회상에서는 우리측에서 대관 신헌(申櫶) · 부관 윤자승 · 종사관 홍대중 · 반당(伴**) 강위 · 군관 서찬보(軍官徐贊輔) · 훈도(訓導) 현석운(玄昔運) 등이 참석했고, 일본측에서는 전권대신 흑전청륭(黑田淸隆) · 동부전권(同副全權) 정상형(井上馨) · 수원(隨員) 궁본소일(宮本小一)와 삼산무(森山茂) 등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서로가 인사를 나눈 후 수병(戍兵)의 발포문제, 기호문제(旗號問題), 팔호순숙(八戶順叔)의 조선비방 기사문제, 서계불수리문제(書契不受理問題), 양국대표의 권한문제를 의제로 할 것을 논의했으나 비교적 무난하게 끝내고 연회에 들어갔는데 이때 우리측은 우(牛) 5두(頭)와 계(鷄) 50수(首)를 일본측에 보내어 외교적인 예의를 표시하였다. 두번째 회상은 진무영집사청(鎭撫營執事廳)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날은 처음부터 일본측이 수호통상조약에 관한 초안을 제시한 후 강경한 태도로 담판하였기 때문에 온종일 쌍방의 논쟁으로 소일하게 되었다. 당일의 회상내용을 요약하면 일본측의 조약 필요성의 주장과 우리측의 부정론으로 맞서게 되었는데 끝내는 흑전(黑田) 일본전권(日本全權)은 자기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양국의 교제는 즉시로 두절될 것이다"라는 협박적인 발언까지 하면서 강요하였다.
조선과 왜의 회담
세번째 회상은 정월 19일에 역시 전날과 같은 장소에서 개최되었는데 흑전 일본전권은 이때도 전일에 수교했던 수호조약문의 신속한 승인과 조인을 강요하고 만약 조선측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강화해협에 대기중인 일병(日兵)을 한강하류인 인천 · 부평 지방에 상륙시켜 점령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강화도에 있어 양국사신의 담판이 이처럼 난관에 봉착하고 있을 때, 우리 조정에서는 국왕이 정월 20일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김병학 ·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원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과 박규수(朴珪壽) 그리고 영의정 흥인군(興寅君) 이최응 · 우의정 김병국 등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을 소견(召見)하여 대일방침 및 그 대책을 논의한 끝에 대일개국을 결정함과 함께 수호통상에 관한 협상권을 접견대신에 위임토록 하였다.
네번째 회상은 우리측의 요청에 따라 정월 26일(양력 2월 20일) 연무당에서 계속되었다. 이 회상에 일본측은 우리측이 제시한 의정부 조회안(照會案)에 대하여 '운양호사건'에 관한 진사(陳謝)의 구절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수락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조약의 비준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군주의 서명검인(署名鈐印)을 고집하는 등 생트집을 부렸다. 따라서 이날의 회상은 이러한 문제를 에워싸고 드디어 결렬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측은 비준문제에 관하여 조선측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다하였다. 그들은 회상의 백지화와 전권단의 철수 등을 부르짖고, 특히 흑전 자신이 일부 부하를 인솔하고 퇴장하는 소동을 벌이면서 위협적인 태도를 또다시 취하는 등 갖은 추행을 다하였다. 즉 흑전은 퇴장할 무렵에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힐문적인 내용의 소위 『절교서(絶交書)』라는 것을 우리 전권에게 수교하였다. 이처럼 억세게 일본측에서 협박을 계속하니 실로 주객이 전도되어 드디어 우리 전권이 그들의 요구를 수락하고 현안해결에 동의하였다. 따라서 병자 2월 초2일 (양력 2월 26일)에는 일본측이 제시한 초안을 거의 수정없이 승인하게 되었고, 그 다음 날에는 강화부 연무당에서 조인하는 행사가 거행된 후, 우리 측의 비준서가 교부되었다. 그런데 '강화도조약'(한일수호조약)의 중요한 내용의 조항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은 20개월 사이에 부산 이외에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상민(日本商民)의 거주, 무역에 대한 각종의 편리를 제공할것.(제4 · 5관(款))
② 일본은 조선의 연해 · 도서 · 암초 등을 자유로 측량하여 도지(圖誌)를 작성할 수 있다.(제 7관)
③ 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영사를 파견하고, 조선내에 거주하는 일본상민의 범죄(단 형사사건)는 일본관원이 심단(審斷)한다.(제 8 · 10관)」
굴욕적인자세
이 조약의 내용이 발표되자 수도 장안은 물론, 전 국내가 소연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원군을 비롯하여 배외사상으로 무장된 유생들이 궐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민씨정권의 대일국교회복책에 무엇보다도 불평불만을 가졌던 대원군은 의정부의 대신과 재상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그들의 연약한 외교를 통렬히 공격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그러한 정치행동에 마치 호응하다시피 한 유생들도 각지에서 궐기하였는데 특히 면암(勉庵) 최익현은 유생 홍재구(洪在龜) 등 50여명을 이끌고 경복궁 광화문밖에 진복(進伏)하여 승정원에 봉장(封章)을 던진 후 대일국교회복에 강경히 항의하였다. 그런데 '한일(강화도)수호조약'은 실로 근대조선정부가 외국에 대하여 최초로 체결한 조약이었으며 또한 최초의 호혜평등이 아닌 불평등조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쇄국은 무너지고 개국정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 조약이 우리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불평등조약이라는 이유는 조약의 제1관에서부터 일본정부가 우리 내정에 간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타 각관(各款)에 있어서도 군사 · 정치 · 경제적으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제1관에 있어 '조선은 자주국가이며, 일본과 평등권을 보유하고 있다'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을 표면상으로 얼핏보면 이 조약이 마치 평등 또한 공정한 입장에서 체결된 것 같이 그럴듯하게 관찰되나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청국의 조선에 대한 정치적 우월권을 부인하는 데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이 청국의 종속국가라는 위치에 있어서는 조선을 불원간 일본의 식민지로 전환시키는데 있어 매우 불편하므로 이 조약에 의하여 조선의 국제법상의 지위를 명백히 함으로써 청국의 형식적인 종주권을 부인하려는 데 진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조약이 침략자의 협박에 의하여 강요된 것이라고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는 이유로서는 제2관(款)에 있어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할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우리 정부의 정책에 일본의 영향을 줄 무제한의 가능성을 개척했으며, 제 4 · 5관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의 3개 항구를 개방시킴으로써 침략적인 소위 무역이란 것을 하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토지와 가옥 등을 차용한 권리를 취득함으로써 거류지를 설정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제6관에서는 일본은 그들의 함선이 조난당할 경우 해난자(海難者)를 구원받게 할 수 있는 특별취급을 받게 되었으며, 제7관에 있어서는 우리 연해의 측량을 자유로이 하며 해도작성(海圖作成)과 답사를 할 수 있는 규정을 설정하였는데, 이것은 일본이 우리 조선에 대하여 금후의 정치 · 경제 · 군사상의 침략에 있어 중요한 거점을 획득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8관에서는 일본은 약탈적인 무역과 개항장에 있어서의 이권보호를 위하여 관리를 임명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다. 이것은 일본이 자국상인의 이익과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우리 항구에 영사관을 파견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9관에서는 우리 정부자신이 우리 나라의 무역을 통제할 수 없도록 되어 있으며, 또한 일본상인은 관세를 지불하지 않는 권리를 장악토록 되어 있다. 그리고 제10관에서는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특히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있는 점이다. 이 조항에 의하여 일본은 일방적인 영사재판권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일본 침략주의자는 우리 나라에서 어떠한 만행을 감행하여도 우리 관헌(官憲)당국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간섭이나 처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제11관에서는 장래의 통상장정(通商章程)과 그 각관의 세목 혹은 금후 필요한 규정은 서울 또한 강화부에서 6개월이내에 개최될 양국전권위원의 회담에 의한다는 것과, 그리고 마지막 제12관에 있어서는 이 조약이 조인되는 즉시로 모든 조항이 발효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강화도조약
이와 같이 조선은 이 조약에 의하여 굴욕적인 의무를 일방적으로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 어느 조항에 있어서도 아무런 의무나 제약도 받고 있지를 않다. 이러한 불평등한 조약을 통하여 일본은 조선에 정치 · 경제 · 군사적으로 자유자재로 진출할 수가 있게 되었다.
조선봉건사회는 이 조약을 분수령으로 하여 그 이전과 이후가 명백히 구별된다. 다시 말하면 '한일수호조약' 이전의 우리 나라는 쇄국정책을 고수하는 국가로서 자급자족경제가 지배하는 봉건사회 체제였으며, 이 이후의 우리 사회는 외국자본주의세역의 침입 때문에 자급자족 경제체제가 급속한 템포로서 해체되어 반식민지과정으로 전락되어 가는 과정으로 구별이 된다.
이 조약 이후, 일본세력의 우리 나라에 대한 침식은 급속히 추진 전개되었다. 일본은 동년 7월 24일(음력 7윌 6일) 한일수호조약 제11관의 규정에 따라 11개 조항에 이르는 수호조약부록(修好條約附錄) 및 역시 11개 세측(細側)에 이르는 통상장정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본은 이 통상장정을 통하여 이젠 해적과 같은 약탈행위를 더욱 노골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일본은 약간의 선박세 이외에는 관세를 전혀 수납치 않아도 자기들의 상품을 매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그 부록조약에 의하여 자신들의 화폐를 조선의 여러 통상항구 및 그 부근지역에서 통용할 수 있는 권한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재산을 팽장시킬 수 있는 특권을 보유받았음과 하등의 다름이 없으며 또한 조선의 금융을 교란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조약에 의거하여 일본은 실질적으로 조선의 엽전 · 동전 · 백동전 등을 그들의 화폐와 교환하여 대량으로 끌어 내어 갔기 때문에 금융고갈을 초래하여 조선경제는 파탄되어 갔다.
요컨대 이 강화도(한일수호)조약에 의하여 조선의 대외무역은 일본의 거의 독점물이 되고 심지어는 해외운수까지도 일본선박의 독점사업으로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조선은 불평등한 이 개국조약 때문에 처음부터 일본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해외시장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지위에로 완전히 전락해 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은 온갖 악랄한 정책과 수법을 써가면서 우리 나라에 침입하여 정치 · 경제를 교란했던 것이다. 그후 일본은 초대 주한공사로 화방의질(花房義質)을 서울에 파견하여 공사관을 서대문 밖에 있는 백합지(百合池) 부근에 설치케 하고 그로 하여금 더욱 본격적으로 정치 · 경제사회를 혼란시켜 반식민지화의 결정적인 전기를 만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미국과의 개국
일본에 개국한 조선은 일본자본주의 세력의 침식으로 인하여 청 · 일 양국 세력의 심한 투계장이 되었다.
청국은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건대, 조선을 구미제국에 개국시키는 것은 도저히 피할 수 없으며, 그 개국을 서두는 것이 자국의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청국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조선과 구미열강제국과의 조약교섭을 촉진하여 그 조약교섭 과정에 개입하고 조선의 열국과의 조약체결을 청국의 조선에 대한 종속관계를 강화하는 한 수단으로 하려고 기도하는 한편, 일본에 의한 조선무역의 독점을 막고자 그 대항조치로서 구미제국과의 조약교섭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요컨대 청국의 이러한 정치적 의도에 의하여 구미제국에 개국할 것을 거의 일방적으로 우리 정부에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구미제국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우리 나라와의 수교를 희망했던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이미 1865년경에, 동방아시아에 있어 자국의 해군근거지 획득문제를 심의할 무렵에 조선을 미래의 근거지의 하나로 설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책에 기인되었는지 미국은 고종 5년(1868)에 발생한 대동강(大同江) 상의 '제너럴 셔어먼(General Sherman)호사건'을 위시하여 고종 8년 (1871)에는 로저스(John Rodgers)제독이 인솔한 아메리카 태평양함대의 강화도 요새 기습사건, 즉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신미양요(辛未洋擾)'등을 통하여 조선에 진출하고자 과열적인 의욕을 표시한 바 있었다. 그 후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자 일본과 청국에게 알선을 요청하여 그 양국으로 하여금 우리 대외정책에 간섭을 하게 하는 등 퍽 다각적인 외교수완을 보이기도 하였다. 바꾸어서 말하면 이 무렵의 미국은 개국교섭사 슈펠트(Shufeldt)대령을 군함 타이콘더로우거(Ticonderoga)에 탑승시켜 특파사절로 파견하여 대한개국(對韓開國) 교섭을 시도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일본을 끌어들여 목적을 달성하고저 했으나 조선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가자 그 후 부터는 청국에 의지하여 도중에 종주권문제를 에워싸고 다소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으나 끝내는 수호조약 체결에 성공하였다.
청국이 미국의 대한개국교섭에 적극협조한 이유는 한미수호조약에 청국의 종주권을 명문화함으로써 정치적 우월권을 보장받아 동방으로 부터의 일본세력과 북방으로 부터의 제정러시아의 침입에 대비하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 종주권문제는 미국의 반대로 막바지 교섭의 심의과정에서 조문에서 삭제되고 청국의 발상은 무위로 끝났다.
그런데 고종 19년(1882) 5월 22일에 제물포에서 우리측 전권대신(全權大臣) 신헌(申櫶)과 미국측 전권대관(全權大官) 슈펠트 사이에 조인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은 전문 14조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지적해야 할 것은 제1조이다. 여기에서는
「만약 제삼의 강국이 조약체결국인 양국중의 어느 한 나라에 대하여 공정하지 못한 태도를 취한다던가 혹은 압박을 가하는 경우에는 이에 관한 통지를 받은 쪽의 정부는 문제를 친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우호적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
한미수호통상조약정본/미국
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만약 우리 나라가 타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하는 경우 미국은 원조를 해야한다는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국은 그 후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그 제1관의 조항을 낡은 신짝 버리다시피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를 일본침략주의자의 희생물로 제공하기 위하여 일본에게 적극적인 원조를 했던 것이다. 요컨대 이 조약에 있어서는 조선에 대해서는 의무를 부가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권리의 행사를 규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4관에서는 영사재판권을 규정하고 또한 제14관에서는 미국을 최혜국으로 우대할 것을 보장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제국과 체결한 최초의 조약임과 동시에 미국의 독점적 이익을 보장한 서구자본주의국가에 굴복했던 최초의 불평등조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에서는 이 조약의 체결 후 부사직(副司直) 이응준(李應浚)을 청국군함으로 북경에 파견하여 조약전문 및 청한종속(淸韓宗屬) 관계에 관한 조회문(照會文)과 한 · 미 양국의 전권위임장(全權委任狀) 등의 사본을 청국정부에 교부하였다. 바로 이 때가 6월 11일이었다. 한편 미국에 있어서는 이 조약이 동년 7월 29일에 상원에 제출되어 외교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3분의 2의 다수로써 가결되고 그 다음 해 1윌 9일에는 아아더 (Chester A. Arthur) 대통령의 비준을 받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하여 미국에서는 초대주한전권공사로서 푸우트(Lucicus H. Foote)가 임명되어 동년 5월 12인 군함 모노카시호에 탑승하고 인천 제물포에 입항하였다. 그는 동월 18일에 우리 전권대신인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영목(閔泳穆)과 비준서 교환을 무사히 완료한 후, 그 다음 날에는 국왕을 배알하고 휴대해온 자국대통령의 국서를 상정하였다. 이 때의 그의 수행원은 동경주재 미국공사관 서기관 고와드(Gustavus Goward)와 비서 스퀴더 (L. Scudder) 그리고 스미 쏘니앤 협회(協會)의 쪼이(pierre L. Jouy) 등이었다. 공사관으로서는 정동에 있는 척족 민씨소유의 사저를 구입하여 사용하였는데 바로 이달이 5월 20일이었고, 이 건물은 그 후 미국정부 소유로되어 계속 공사관으로 사용되었다.
한청상민수륙무역장정 (韓淸商民水陸貿易章程)
고종 19년(1882) 9월 조선은 또한 청국과 '한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물론 이것은 청국의 강요에 의한 것이지 조선의 자주적 의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부터의 청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문제로 매우 신경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그 조약 제1관에 조선의 자주독립이 명기되어 있으므로 청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이 약화해졌다는 것과, 또한 신흥 일본자본주의 세력의 진출이 날이 갈수록 팽창하여 오히려 청국의 종주세력이 조선에서 밀려 나가고 있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직예총독(直隸總督) 이홍장(李鴻章)은 북양통상대신(北洋通商大臣)을 겸하여 조선관계의 사무를 관장하게 되자 이러한 추세를 명민히 파악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에 관한 매사를 간섭하여 실추된 종주국의 지위를 회복하려고 노력 하였다. 이홍장의 그러한 의도에 의하여 체결된 「한청수륙무역장정(韓淸水陸貿易章程)」은 전문 8개조로 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종래의 봉건적 종속관계를 명문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국상인의 통상상(通商上)의 특권을 보장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조약은 독립국가간의 조약이 아니라 종주국과 조공을 바치는 국가사이에 체결된 일종의 행정적인 결정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조약도 부족했던 탓인지 청국은 고종 20년(1883)3월에 다시 전문 24개조로 된 「봉천여조선변민교역장정(奉天與朝鮮邊民交易章程)」을 강요하여 조인을 보게 하였다. 이 조약의 제3조에는 우리 민간인의 포어(捕魚)가 압록강 하구에서는 금지되어 있고, 제8조와 제19조에는 조공전례(朝貢典禮) 때의 조선사신 부경(赴京)에 관한 통관규칙과 교섭수속이 규정되어 있다. 특히 우리 한민족으로서 울분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제36조이다. 이것에는 '조선이 청국을 칭할 때는 <천조(天朝)> 혹은 <상국(上國)>을 사용해야 한다'라고 하였고, 또한 '문서를 왕복할 때에는 조선은 <동국(東國)>으로 칭해서는 안된다'라는 규정마저 하고 있다. 조선이 신라이래 동국이라 칭했던 것은 중국의 '중(中)'에 대해서 조선을 동국이라 하여 양국이 평등하다는 뜻에서 사용한 것이었다. 청국은 이처럼 구체적인 서식과 절차를 정해 가면서까지 종속관계를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청국은 이러한 불평등한 내용의 조약을 조선으로 하여금 이행 시키기 위하여 고종 20년(1883) 양 10월 23일에 진수당(陳樹棠)을 초대(初代) 총영사의 자격으로 서울에 파견하여 '총판조선상무(總辦朝鮮商務)를 맡도록 하였던 것이다
선진자본주의제국 (先進資本主義諸國)과의 개국
한미수호통상조약'과 '한청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된 후 조선은 기타의 선진제국과도 '수호통상조약'을 연달아 체결하였다. 먼저 고종 20년(1883) 양 11월 26일에는 한영(韓英) 한독수호조약(韓獨修好條約)이 체결되었다. 한영조약의 비준서 교환은 그 다음 해인 4월 28일에 재차 내한한 북경주재 영국공사 파아크스(Sir Harry Parkes)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병시(金炳始) 사이에 이루어지고, 5월 1일에 우리 국왕에게 그가 신임장(信任狀)을 봉정함으로써 청한양국공사(淸韓兩國公使)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총영사 에스톤(W.G. Aston)에게 외교 교섭사무를 대행케 하고 동월 11일에 다시 임지인 북경으로 귀환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영국이 오래전부터 희망하던 조선과의 수교는 마침내 정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한독조약의 비준서교환은 고종 21년(1884) 양 11월 18일에 해군대령 젬부쉬 (Zembsch)가 초대 주한독일공사로 부임함에 의하여 양국간의 국교가 정식으로 열리게 되었다.
이에 앞서 이해 7월 7일에는 한러조약(韓露條約)이 조인되어 전관공사에는 웨베르(Carl Waeber), 그리고 부공사(副公使) 란겔(Baron N. Wrangell)을 각각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태리(伊太利)와도 7월 26일에 조약이 성립하였다.
이밖에도 고종 23년(1886)에는 불란서와, 고종 29년(1892)에는 오스트리아, 광무(光武) 5년(1901)에는 벨기에 광무 6년(1902)에는 덴마아크등과도 각각 수교조약을 체결하고 서울에 공관을 설치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선진제국과의 조약에 있어서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일률적으로 영사재판권과 거류지의 설정, 군함의 자유출입, 여행 및 무역의 자유 등에 관한 특권을 보장함으로써 무조건 최혜국대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수동적으로 세계자본주의무대에 연결되어 반봉건적, 반식민지화과정을 밟게 되었다.
근대문물의 수용과 섭취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여 일본을 비롯 선진열강제국과 수교통상조약을 맺자 국내에는 외국의 새 문화를 수입하기에 착안하였는데 특히 이러한 운동은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 일행이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김기수 일행은 고종 13년(1876) 5월 22일에 부산을 출범하여 동 29일에 동경에 도착한후, 일본정부의 주선에 의하여 근대화된 일본의 군대 및 각지의 산업과 교육시설 등을 시찰하고 일본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어짐에 따라 개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7월 31일 서울에 귀환하여 국왕에게 복명보고(復命報告)하기를 "일본측의 성대한 접대를 비롯하여 천황의 인격, 일본인의 풍속 · 인품, 또한 그 군대 · 병기 · 교육 등에 관하여 호감을 갖고 복명하였다"[註12] 특히 그 중에서도 "일본은 이미 17개국과 통상무역을 하고 있으며, 일본의 부강책은 모두 통상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보고에 놀란 국왕은 고종 18년(1881) 8월에 근대적 국가로 발전하는 일본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하여 김홍집을 단장으로 하는 제2차 수신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40여일간에 걸쳐 일본의 국가시설 및 군사, 교육, 공장등을 시찰하고 귀국하여 유신일본의 발전상을 크게 칭찬하였던 것이다.
또한 고종 18년(1881) 9월에 우리 정부는 김윤식(金允植)을 영선사(領選使)로 삼아 69명의 청년학도를 이끌고 청국 천진(天津)에 가서 청나라의 모든 신식기계에 대한 지식과 문물을 배워오게 하였다. 즉 그들은 천진기기제조국(天津機器製造局)에서 근대적인 기술교육을 습득한 후 귀국시에는 김윤식과 함께 청국정부에서 기증한 막대한 과학기술서적과 그 밖에 따로 구입한 기계를 반입하여 문명개화의식 전파에 기여 하였다. 김윤식은 그당시 청국에서 국왕에게 상소하여 문명개화를 위한 새로운 지식의 섭취와 자주외교를 강조한 바 있었는데 귀국후에도 그러한 식견을 살려 국가 정책에 때때로 반영케 하였다.
이밖에도 고종 18년(1881) 4월에 어윤중 등 12명의 신사유람단이 일본을 순유한 후 귀국하여 신흥일본의 변모상태에 관한 견문기를 서술하여 국내의 개화풍조를 일으키는데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시찰단에 함께 수행했던 송헌빈(宋憲斌)의 『동경일기(東京日記)』와 강진형(姜晋馨)의 『일본록(日本錄)』등의 일본견문록(日本見聞錄) 및 안종수(安宗洙)의 『농정신편(農政新編)』도 문명개화를 선양하는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김옥균 ·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당파 수뇌들이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모방하고자 했던 개화운동도 신문화를 섭취하려던 동경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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