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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다큐멘터리 및

조선시대무기

by 하공별자함 2006.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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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류(刀劍類)

 

 인검(寅劍)
인검은 일종의 의장용 보검(寶劍)이다. 동양에서는 천(天)에 대한 사상이 강했던 관계로 왕이 하늘의 아들인 천자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하늘의 아들에게 거역하는 자를 징벌한다는 의미 때문에 형벌을 의미하는 부월(斧鉞)을 정벌군 장수에게 줌으로써 장수의 권위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에 수면문(獸面文)이나 성좌(星座) 등이 부월에 표현되었다. 왕으로부터 병권을 상징하는 부월을 받은 장수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장검을 소지하게 된다. 통상 이 장검은 상징물이었기 때문에 시종이 별도로 들고 지휘자의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인명을 좌우하는 지휘자의 통솔의 의미와 승리를 상징하는 용맹의 의미로 인해 칠성검이나 인검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권위용의 검 외에도 소유자의 무운을 비는 의미로 싯귀를 새기고 실존하지 않은 동물을 그려 새겨 넣거나 화문(花文)을 그려 넣어 상(祥)스러운 무기로 만들려고 하였다.
인검은 간지의 인(寅 : 호랑이, 예로부터 호랑이는 무를 상징)자 들어가는 때에 제작된 칼로 무(武)의 기운이 강하여 부월이 상징하는 바를 구현한다고 생각하였다.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 이 네가지가 모든 적용되는 시기에 제작된 칼을 사인검(四寅劍), 세가지가 겹칠 때 제작된 칼을 삼인검(三寅劍), 두가지가 겹칠 때 제작된 칼을 이인검(二寅劍)이라고 한다.
참고로 {성종실록} 권90, 성종 9년 3월 계유조에는 "창원군(昌原君)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고읍지(古邑之)라고 일컫는 여인을 알지도 못하며, 전후에도 여인을 살해한 일이 없습니다. 집안에 다만 삼인검(三寅劒)과 삼진검(三辰劒)이 각각 한 자루씩 있을 뿐이고, 또 환도(環刀)는 없습니다."라고 나와있다. 여기서 삼인검과 삼진검은 동일하게 하나의 의장용 군기(軍器)였음이 분명하다. 또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가 출정하는 신립을 불러 보검(寶劍)을 하사하고 이일이하 제 군사들이 명을 거역할 때에는 이 검으로 다스리라고 하였다. 이 검 역시 인검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검일 것이다.

 

사인검(四寅劍)

 

시대 : 조선 제원 : 120.4cm 소장 : 육군박물관 사인검(四寅劒)이라는 명문과 북두칠성(北斗七星) 문양이 상감(象嵌)되어 있다.

 

 

 

 

 

 

 

 

 

 

 

삼인검(三寅劍)
 

시대 : 조선 제원 : 130.5cm 소장 : 고려대박물관 삼인검(三寅劒)이라는 명문과 북두칠성(北斗七星) 문양이 상감(象嵌)되어 있다.

 

삼인도(三寅刀)
 

시대 : 조선후기 제원 : 길이 90cm 소장 : 전쟁기념관 인검(寅劍)과 같은 의미를 지닌 칼로서 어피로 장식되었고, 三寅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운검(雲劍)
 

운검은 임금을 호위하던 운검 무사들이 차던 칼이다. 원래 운검(雲劍)은 2품 이상의 무반(武班) 두 사람이 큰칼[雲劍]을 차고 임금의 좌우에 서서 호위하는 임시 벼슬로 나라에 큰 잔치나 회합이 있어 임금이 임어(臨御)할 때 유능한 무장(武將) 중에서 믿는 사람을 골라서 임명하였다. 정식명칭은 별운검(別雲劍)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칼은 칼집을 어피(魚皮)로 싸고 주홍색으로 칠하였으며, 장식은 백은(白銀)을 사용하였다. 이 칼이 사용자의 명칭을 따 운검이라 하였다.

별운검(別雲劍)
 

별운검은 임금을 호위하던 운검 무사들이 차던 칼이다. 원래 운검(雲劍)은 2품 이상의 무반(武班) 두 사람이 큰칼[雲劍]을 차고 임금의 좌우에 서서 호위하는 임시 벼슬로 나라에 큰 잔치나 회합이 있어 임금이 임어(臨御)할 때 유능한 무장(武將) 중에서 믿는 사람을 골라서 임명하였다. 정식 명칭은 별운검(別雲劍)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칼은 칼집을 어피(魚皮)로 싸고 주홍색으로 칠하였으며, 장식은 백은(白銀)을 사용하였다. 이 칼이 사용자의 명칭을 따 별운검이라 하였다.

칠성검(七星劍)
 

시대 : 조선 제원 : 길이 82cm, 칼몸 59cm, 자루 22.6cm 소장 : 육군박물관 일종의 보검으로 북두칠성(北斗七星)문양이 상감되어 있다.

환도(環刀)
조선시대 사용된 대표적인 군도(軍刀)로, 군도는 크게 예도(銳刀) . 왜검(倭劍) . 제독검(提督劍) . 쌍검(雙劍) . 쌍수도(雙手刀) 등의 종류가 있었다. 환도는 예도의 일종으로 허리에 차는 칼로서, 전체 길이는 1m 정도이다. 환도라고 부르게 된 것은 칼집이 있어 고리를 달고, 이 고리에 끈을 드리우고 그것을 찬데 있었다. 일반적으로 요도(腰刀), 패도(佩刀)라 호칭하기도 한다. 환도는 전투용 무기였지만 개인이 소지할 적에는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더욱 중요시되었다. 이렇듯 평상시의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높아지자 휴대의 간편성과 비상시의 사용성에 중점을 두게 되자 환도의 제원은 점차 짧아지고 가벼워졌다. 그러나 임란이후 왜검에 대응하면서 점차 길어지고 예리해졌다. 아울러 병사들의 필수 휴대무기가 되어 단병기의 주종이 되었다. 당시 훈련도감군에게 지급되었던 무기 규정을 살펴보면 환도는 마군(馬軍)과 포수(砲手) 살수(殺手)인 보군(步軍) 모두에게 분급된 단병기임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의 단도(短刀)나 제독검(提督劍)은 모양과 제원에 있어서 조선후기의 환도와 동일하였다.
횃대(護身刀)
 

개인 호신용 칼로 평상시에는 방안에서 옷을 걸어 두는 횃대로 사용하였다고 하여 횃대라는 명칭이 생겼다.

월도(月刀)
월도는 일반적으로 그 칼날의 모양이 반달과 같다하여 언월도(偃月刀)로 불리고 있다. 조선식과 중국식이 있는데 자루의 길이가 6척 4촌 날의 길이가 2척 8촌, 무게가 3근 14량으로서 칼날의 위 부분이 넓적한 것이 특징이었다. 언월도는 실전에서 사용하지 않고 조련이나 의장의 웅장함을 시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조선의 월도는 얇아서 가을의 가랑잎 모양처럼 조잡했다. 반면에 중국식은 모가 크게 나서 위맹을 떨쳐서 적의 간담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중국식은 무게를 무겁게 하여 보통 사람이 들 수 없도록 만들었다. 유명한 언월도는 그 무게가 80근이나 혹은 120근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 월도류는 일반적으로 모양과 용도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호칭되기도 하였다. 끝이 날카로운 피도( 刀) 참마도(斬馬刀) 혹은 감도( 刀), 눈섶과 같은 미첨도(眉尖刀), 봉의 부리와 같은 봉취도(鳳嘴刀), 반달과 같은 언월도, 머리가 굽은 굴도(屈刀), 앞이 모가 난 방도(方刀) 등이 있다.
마상월도(馬上月刀)는 월도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 마상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이러한 호칭이 붙었다. 마상도(馬上刀)는 길어야 하는데 앞은 말머리를 지나야 하고 뒤는 말꼬리를 지나야 한다. 마상월도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관우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이다. 청룡이라 불러짐은 {춘추번로(春秋繁露)}에서 유래된 것으로 칼은 좌청룡의 기상이 있었다. 또 언월도의 제도는 용구(龍口)가 칼날을 머금고 칼날 가운데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을 새겼던 것이다.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던 관우공은 조선에 있어서는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시에 관우공의 혼령이 나타나서는 평양성전투와 울산 도산성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해서 사당을 세웠다. 남대문과 동대문 밖에 사당을 세워 조선을 구해준 군신(軍神)으로 참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칼을 앞세우고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대하여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사대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삼장군 언월도(李森將軍 偃月刀)
시대 : 조선후기
지정 : 시도유형문화재 63호(1976. 01. 08)
제원 : 길이 191.5㎝,무게 2.9㎏
소장 : 이재명(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이삼 장군은(1677∼1735)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숙종 31년(1705) 무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경종 때에는 포도대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으며, 영조 원년(1725) 어영대장을 지냈다. 영조 3년 훈련대장이 되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어, 함은군에 봉해졌다. 상월면 석종리에 무덤과 영당이 있고, 주곡리에 있는 고택에 이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언월도에 용광사우두성(龍光射牛頭星)이라는 명문이 새겨 있다.

 

창류(槍類)

 

 

장창(長槍)
길이는 1장 5척 창자루는 주목이 제일이라고 척계광(戚繼光)의 말을 인용하면서 당시 중국식과의 차이점을 밝히고 있다. 즉, 오늘날 창끝에 혈조(血槽)가 있다. 창날 아랫부분에 작은 석반을 대고 창자루 아래에 준이 있다.고 하여 훨씬 발전한 장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기원은 치우 황제가 더불어 싸운 것이 창이고 제갈량이 나무로 창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길이가 1장 2푼이고 창끝은 철로 되어 있다.에서 밝히고 있다. 장창법은 중국에서 양씨가 정통하였다. 기예로서의 장창법은 전보와 후보로 나뉘어서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오는 장창법 24세중 명 진영에서 조차 12세만 전해져 온 것을 한교(韓嶠)가 창조 개발한 것이다. 즉 기효신서에 나오는 장창법 24세를 새로 구성하고 조선인의 체격과 정서에 맞게 창조하였거나 혹은 전래의 장창법을 체계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명의 원병이 평양성을 탈환한 것도 주로 장창 돌격법에 의존한 것이라 한다.

죽창(竹槍)
죽창은 자루의 재료가 일반 나무가 아니라 대나무로 만들었으며, 그 길이가 20척으로 장창보다 길었다. 머리날이 4촌, 손잡이가 5척이며, 손잡이 이상은 물감을 칠했다. 장창과는 달리 석반(錫盤)이나 준( )이 없었다. 이 창은 제갈량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죽창은 나무자루로 된 장창에 비해서 가벼운 장점이 있었으나, 중간이 휘어지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왜창은 이 단점을 보완하여 대나무를 쪼개서 이것을 모아서 아교로 붙이어 굳게 하고 옻을 칠했던 것이다. 왜창은 길이가 20척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굳센 날이 매우 날카로웠다. 또한 조그마한 힘에도 매우 깊이 들어갔으며, 허리부분을 잠시 굽혀 놓아도 곧바로 펴지는 탄력성이 있었다. 기예 자체는 다른 것에 비하여 단조로운 편이나 병장기가 길고 창끝의 날카로운 날로써 좌우로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다수의 적을 압도할 수 있다.

기창(旗槍)
기창은 일명 단창(短槍)이라고도 한다. 날의 길이가 9촌, 자루의 길이 9척으로 장창의 반절 크기 정도였다. 창의 전반적인 형태는 장창과 동일하여 석반 이하에는 검고 흰 칠을 번갈아 했으며, 다섯째 마디쯤에 황색이나 홍색의 작은 깃발을 달았다. 중국의 기록에서는 기창이 명(明)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고려사} 여복지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기창이 의장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예로서의 기창은 중견을 습격하거나 기습을 당했을 때의 혼전에 대비한 것이기 때문에 저돌적인 돌격 자세와 함께 전투 좌우로 자유자재한 공격법을 습득하게 위한 기법으로 편성되었다.

타살무기류(打殺武器類)

 

편곤(鞭棍)
편곤은 도리깨 모양으로 된 공격형 무기로 적을 내리치는데 편리한 무기이다. 편곤은 조선식과 중국식 두 가지가 있었다. 조선식은 편곤의 편(鞭)의 길이는 8척 9촌, 자편(子鞭)의 길이는 2척 2촌 5푼, 곤(棍)의 길이는 10척 2촌 5푼으로서 모두 단단한 나무로 만들었다. 머리 부분이 철을 재료로 했기에 철편곤 혹은 철편이라고도 하였다. 편곤은 특히 성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수성, 공성전에 유리한 무기이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는 두사람이 갑을로 각각 왼손으로 편과 곤을 나누어 잡고 처음 용약재연세(龍躍在淵勢)로부터 시작하여 상골분익세(霜 奮翼勢) . 대당세(大當勢) 등의 공방(攻防) 자세를 취함으로써 심신의 단련을 도모할 수 있는 편곤보(鞭棍譜)가 기술되어 있다.
마상편곤(馬上鞭棍)은 편곤이 보병용 무기인데 비해서, 마상편곤은 기병용이었다. 마상편곤도 조선식과 중국식의 두 가지가 있었다. 조선식은 편의 길이가 6척 5촌이고, 자편의 길이가 1척 6촌으로 보병용인 편곤보다 제원면에서는 작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 국왕의 시위군(侍衛軍)이 마상편곤으로 고양에서 적을 막았는데 대로에서 일격을 당해 즉시 패하고 말았다. 이는 시위군의 마상편곤이 연결 고리가 매우 짧을 뿐만 아니라 그 자루도 약했기 때문이다. 이후 만드는 법은 개량하여 자루는 둘레의 차가 크고 굽게 하고, 6개의 고리를 이어서 길게 하였다. 또 도리깨는 4개의 네모난 철엽(鐵葉)을 대고 두루 못을 쳐서 못이 뾰족 뾰족 튀어나오게 하였다. 이 마상편곤은 여러 가지 장점이 모여서 치는 무기로는 제일 좋다.

곤봉(棍棒)
곤봉은 이미 고대로부터 무기로 사용했으며, 고려조에서도 백봉(白棒)으로 군사를 무장시킨 일도 있었다. 곤봉은 봉의 이점과 찌르는 칼날의 이점을 이용한 무기이다. 곤봉의 길이는 7척, 무게는 3근 8량, 칼날의 길이 2촌이며, 가운데 칼날이 있는데 한 면에는 등이 세워져 있고 한 면에는 피 흠인 혈조(血槽)가 있다. 곤봉을 만드는 법은 6가지가 있다. 단단한 나무를 재료로 하여 길이 4∼5척에 그 위 부분은 철로 싼 것. 머리부분에 예리한 칼날을 달은 것. 날도 낚시도 없고 철 끌개만 댄 것. 곧은 침을 위에 대어서 이리 어금니 같이 된 것. 동체와 끝이 고루 큰 것. 보리 타작하는 도리깨와 같은 것으로 몽둥이에 날이 없었는데 칼날의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서 2촌이 넘지 않는 범위에서만 오리 주둥이와 같이 두드려서 칼날을 만들었다. 이는 몽둥이와 칼의 기능을 복합시킴으로써 두 가지 서로 단점을 보완시켜 주었다. 남방 지역에서는 곤(棍)이라하고, 북방 지역에서는 백봉(白棒)이라 하였다. 대개 옛날에는 철로 머리를 만들었는데 척계광(戚繼光)이 처음 날을 덧붙였다. 곤봉의 명칭은 모양과 기능에 따라 달랐는데, 창의 길이를 줄여서 만들어서 창과 비슷한 모양의 수( ), 막대기 모양의 장(杖)과 같은 뜻의 정( ), 몽둥이 모양의 오(吾), 도리깨 모양의 부( ) 등이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곤봉보를 살펴보면 척계광의 {기효신서}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면서 하나의 교전보를 이루고 있어 수련을 위주로 하는 편성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나무를 방망이 모양으로 깍은 날의 면수를 붙여서 만든 육방곤(六方棍) 즉, 육모방망이로 부르는 곤봉류는 조선시대 일반 순라군과 나졸들의 일상적인 호신무기가 되었다.
육모방망이(六方棍)
 

시대 : 조선 제원 : 길이 38 ~ 55cm 소장 : 전쟁기념관 조선시대의 나졸(羅卒)들이 순찰을 돌 때에 들고 다녔던 곤봉류의 타살무기이다.

철퇴(鐵槌) 철편(鐵鞭)
철퇴와 철편은 일종의 철제 곤봉으로 근접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타살무기의 하나이다. 철퇴는 가격하는 부분에 집중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큰 뭉치를 형성하였다. 투철퇴(投鐵槌)는 약간 떨어진 적을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무기이다. 철퇴 머리부분을 손잡이 끈으로 연결하여 회전시켜 공격하는 무기이다. 그 모양은 원형의 형태에 그 외부에 예리한 뿔 모양을 돌출시켜서 가격시에 충격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철편은 철퇴와 함께 근접전에 유효한 무기이다. 철편의 형태는 철간(鐵簡)과 비슷한 채찍 모양으로 일명 고들개 철편이라고도 한다.
이삼장군 철퇴(李森將軍 鐵槌)
시대 : 조선후기
제원 : 길이 62cm, 무게 1.3kg
소장 : 이재명(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산20-9)
이삼 장군은(1677∼1735)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숙종 31년(1705) 무과에 급제 하였다. 조선 경종 때에는 포도대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으며, 영조 원년(1725) 어영대장을 지냈다. 영조 3년 훈련대장이 되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어, 함은군에 봉해졌다. 상월면 석종리에 무덤과 영당이 있고, 주곡리에 있는 고택에 이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철퇴는 둥근 철구에 자루를 끼웠고, 철구에는 못과 같은 것이 박혀있다.
철편(鐵鞭)
 

시대 : 조선후기 제원 : 총길이 46㎝이고, 고들개 길이는 9.5㎝ 소장 : 창덕궁 손잡이와 고들개 사이에는 쇠고리로 연결하였고, 또한 은입사(銀入絲)로 완자문을 시문하였으며, 손잡이에는 천아융(天鵝絨)으로 감싸 휴대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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