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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에겐 친구는 없고 국익만 있다

by 현상아 2006. 12. 15.

스파이에겐 친구는 없고 국익만 있다
냉전 이후 첩보전은 정치ㆍ군사 → 경제로 확대…
장비 발전해도 사람에 의한 정보 수집이 가장 중요

부시 미국 행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2001년 3월,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서로 외교관 50명씩을 추방하는 등 마치 냉전시대를 방불케 하는 대결을 벌였다. 당시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 악화는 스파이 사건에서 비롯됐다. 연방수사국(FBI)이 한 달 전 체포한 27년 경력의 현직 요원인 로버트 필립 한센을 수사한 결과, 엄청난 국가 비밀이 러시아로 넘어간 사실이 밝혀졌다.

▲ 러시아 해외정보국(FSB) 건물의 전경.

부시 행정부는 러시아에 강력하게 경고하기 위해 워싱턴 주재 러시아 외교관을 대거 추방했고, 러시아도 이에 대응했다. 부시 행정부의 조치는 냉전이 한창이던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미국 행정부가 러시아 외교관 80명을 추방한 이래 가장 큰 규모였다. 한센은 무려 18년간 스파이 활동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넘긴 극비 정보는 미국을 위해 일한 러시아 스파이의 신원 등을 비롯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미국이 1980년부터 수억달러를 들여 워싱턴 주재 러시아 대사관 지하에 도청용 비밀 땅굴을 뚫었다는 정보까지 러시아에 흘러들어갔다. 이후 양국 관계는 미국이 추진하는 테러와의 전쟁을 러시아가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함에 따라다시 회복됐다.

▲ 구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의 최고 책임자 마르쿠스 볼프와 그의 아내.
스파이는 매춘에 이어 두 번째로 인류가 가장 오랜 기간 해온 직업이란 말이 있다. 특히 스파이 사건은 국가들의 분쟁 원인이 될 수도 있고, 전쟁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스파이 한 명이 수집한 정보가 한 국가의 운명이나 정책 노선을 바꾸기도 한다. 각국의 스파이 활동은 냉전시대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계속 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데다 잠재적 적국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스파이 활동은 국익에 필수적인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96년 대만 총통선거를 앞두고 중국과 대만에는 전쟁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선거에 나선 리덩후이(李登輝) 당시 총통이 ‘대만 독립’을 주장하자 중국이 대만해협에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전쟁 불사를 선언했다. 대만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 미국은 항공모함 전단을 급파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이 쏜 미사일은 실제 살상력은 전혀 없는 ‘공포탄’이었다. 이는 대만의 정보기관인 국가안전국 소속 스파이 장즈펑(張志鵬)이 중국 인민해방군 류롄쿤(劉連崑) 소장과 사오정중(邵正忠) 대교(우리나라의 대령급)를 돈으로 매수, 알아낸 비밀정보였다.

대만은 이런 정보 덕분에 중국이 말로만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대만도 2003년 대표적인 방위산업 연구기관인 중산(中山)과학연구원 전직 연구원인 예위전(葉裕鎭)을 스파이 혐의로 체포한 바 있다. 기계 부품 제작업체를 경영했던 그는 1990년대 사업차 베이징에 갔다가 중국 정보기관에 포섭됐다. 그는 중산과학연구원의 현직 연구원을 통해 차세대 야간전투용 레이더와 F-16 전투기의 핵심정보를 입수, 중국에 넘겼다. 중국과 대만의 스파이 전쟁은 지금도 한창이다.

스파이 전쟁에 ‘허니 트랩(honey trap·미인계)’을 비롯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일본 정부는 6월 외교관 연수 책자에 ‘친하게 접근해 오는 이성을 조심하라’는 문구를 명기했다. 또 다른 국가 정보기관에 포섭돼 정보를 제공했더라도 솔직하게 보고하면 처벌을 완화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가 이런 조치를 내린 이유는 2004년 5월 발생한 중국 상하이(上海) 총영사관 영사의 자살사건 때문이다. 이 영사는 술집을 드나들다 만난 호스티스와 성관계를 맺었다.

이 사실을 알아챈 중국 정보기관은 영사를 협박, 정보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영사는 총영사관과 본국 외무성 사이에 오가는 전문(電文)을 담당하는 베테랑 전신관이었다. 중국 정보기관은 영사를 통해 일본의 암호문이 작성되는 시스템과 이를 해독하는 방법 등을 빼내려고 했다. 영사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외교 문제화했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국제 첩보전에서는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적국은 물론이고 동맹국의 정보도 수집한다.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한 이후 ‘50년 혈맹’인 중국과 북한 간에 이상(異常)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도 정보 때문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북한이 10월 9일 핵실험을 실시하기 바로 전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일간지 ‘참고소식’은 북한이 조건부로 핵실험을 중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할 것이란 정보를 중국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홍콩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이와 관련, 수년 전 중국 옌지(延吉)시 국가안전국 책임자가 북한 정보기관에 30만달러에 매수돼 중국의 북한 내 정보망이 일거에 와해됐다면서 이후 중국의 대북 첩보망은 사실상 공백상태라고 보도했다.(2006년 10월 15일자)

미국과 혈맹 관계인 이스라엘도 미국에 대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FBI는 2004년 국방성 정보분석관 래리 프랭클린을 스파이 혐의로 체포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프랭클린은 미국의 대(對)이란 정책을 이스라엘에 몰래 넘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각국의 치열한 첩보전에서 우방국이란 말도 한낱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셈이다.

냉전 이후 국제첩보전의 주요 영역은 경제 분야로 옮겨지고 있다. 특히 경제 분야의 수집에서는 피아(彼我)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소속 요원 5명이 1995년 2월 프랑스 정부 고위 관리에게 접근해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임하는 프랑스 정부의 전략을 탐지하다 적발됐다.

프랑스는 당시 파리 주재 미국대사관 외교관 5명을 추방했다. 이후 파리에선 더 이상 CIA의 첩보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최근 첩보전의 추세는 사람을 이용하는 정보 수집이 늘었다는 것이다. CIA의 경우, 지난 20여년간 위성이나 첨단 도청장비 등을 이용하는 이른바 ‘엘린트(ELINTㆍELectronics INTelligence)에 첩보 활동을 의존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고급 정보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

이에 따라 ‘휴민트(HUMINTㆍHUMan INTelligence)’, 즉 사람에 의한 첩보활동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CIA는 상사원ㆍ연구원ㆍ언론사 특파원ㆍ종교인ㆍ평화봉사대원으로 위장한 스파이를 대량으로 각국에 파견하고 있다. 미국의 첩보전 대상 국가는 과거에는 구 소련이었지만 현재는 중국으로 바뀌었다. 중국도 미국 내에서 첩보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FBI는 지난해 중국 스파이들이 대거 업계에 침투, 경제정보를 빼내갈 우려가 있다면서 업계에 경계령을 내리기도 했다.

FBI는 현재 세계에서 스파이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하고 있는 국가로 중국ㆍ러시아ㆍ쿠바ㆍ이란을 꼽고 있다. 스파이 소설의 대가인 영국 작가 존 르 카레는 스파이를 ‘지정학적 연금술사’라고 지칭한 바 있다. 스파이가 국제관계의 지정학을 바꿀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21세기 들어 첨단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스파이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타하리, 1차 대전 때 프랑스군 5만명을 위태롭게 하는 정보를 독일에 넘겨”

▲ 마타하리
스파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누구일까? 가장 많이 알려진 스파이는 아마 마타하리일 것이다. 인도네시아 말로 ‘여명의 눈동자’란 뜻의 마타하리는 네덜란드 출신의 스트립 댄서였다. 본명은 마가레타 젤러.

마타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프랑스 당국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총살됐다. 마타하리는 매혹적인 미모를 이용, 프랑스 군부와 정계의 고위층, 재계 인사, 네덜란드 총리 등을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여 비밀정보를 빼냈다.

당시 판사는 그녀가 독일에 넘긴 정보가 프랑스군 5만명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었다면서 사형을 선고했다. 그녀는 자신이 스파이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재판은 너무 간단하게 끝났고, 전시 상황이라는 명목으로 사형 집행도 서둘러 이루어졌다. 1999년 비밀 해제된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관련 문서에는 마타하리가 군사정보를 독일에 넘겼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고 밝히고 있다. 마타하리가 실제로 스파이였는지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동서냉전의 상징물인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17주년이 되던 11월 9일, 구 동독의 전설적인 스파이 총책 마르쿠스 볼프가 사망했다. 볼프는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의 대외정보부(HVA)를 30여년간 지휘했던 인물이다. 그는 3000여명의 스파이를 서독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에 침투시켰다. 이 중에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개인 비서였던 귄터 귀욤도 포함돼 있다. 귀욤의 부친이 한때 브란트와 인연이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귀욤을 서독으로 위장망명시켰다. 귀욤은 1973년 스파이 혐의로 체포될 때까지 서독과 NATO의 각종 일급비밀을 동독에 넘겼다. 미국 등 당시 서방 정보기관이 그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20년이 걸렸다. 때문에 그에게는 ‘얼굴 없는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클라우스 푹스
소련이 1949년 8월 원폭실험에 성공하자 당시 유일한 핵 보유국인 미국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후 6개월이 지나면서 미국의 핵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영국의 핵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가 소련에 기밀을 건네준 혐의로 체포됐다. 푹스는 독일 출신으로 영국에 망명한 과학자이지만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소련의 도움을 주기 위해 핵 개발 계획을 넘긴 것으로 드러났다.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50주년인 1995년 고인이 된 옌바오항(閻寶航)에게 보리스 옐친 대통령 명의의 훈장을 수여해 공로를 표창했다. 만주군벌 장쉐량(張學良)의 고문관이던 그는 중국 공산당의 비밀당원이었다. 그는 1941년 5월 중국 주재 독일 무관을 위한 파티에 참석했던 국민당 고위 인사들로부터 독일의 소련 침공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즉시 상관인 저우언라이(周恩來) 공산당 충칭(重慶)대표에게 보고했고, 중국 공산당 본부는 6월 16일 모스크바에 긴급 전문을 보내 관련 정보를 알렸다.

스파이 세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은 영국의 킴 필비일 것이다.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소련 공산당의 지시로 1930년대 영국의 해외 정보국인 MI6에 들어가 승진을 거듭하며 영국과 미국의 대 소련 첩보전을 무력화했다. MI6 국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신분 노출 위험에 처한 그는 1963년 소련으로 망명했다.

이후 소련 최고의 영예인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1988년 그의 장례식에는 소련 공산당 주요 간부가 모두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다. 스파이 세계에는 하나의 철칙이 있다. 절대로 신분을 노출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름이 알려진 인물보다 더욱 뛰어난 스파이가 아직 많이 있을 것이다.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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