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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년을 헤아리는 우리 나라의 력사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강하였던 시기는 고구려시기였다. 고구려가 당시 강국이였다는것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고구려가 강국으로 위용을 떨칠수 있은것은 그가 자기의 존재 전 기간 사대를 모르고 시종일관 자주권을 고수한 나라였던것과 관련된다.
우선 고구려는 그 성립초기부터 독자성을 견지한 대국으로 력사무대에 등장하였다.
고구려가 B.C.277년에 부여출신의 귀족청년인 고주몽(동명왕)에 의하여 우리 나라 고대국가의 하나였던 구려국의 판도에서 우리 나라 력사상 첫 봉건국가로서 건국되였다는것은 이미 잘 알려진 력사적사실이다.
고구려건국설화를 보더라도 그의 건국과정에는 그 어떤 다른 민족에 의한 외적요인이 전혀 없었으며 같은 민족내부에서 서로 다른 지방출신들의 래왕과 결합이 있었을뿐이다.
옛 기록들에는 성립당시 고구려주변의 주민들에 대하여 고구려, 부여, 옥저, 예 등 여러가지로 쓰고있지만 《후한서》, 《삼국지》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이들은 모두 언어와 법속이 같은 고대조선족이였다. 조선반도 중남부지역의 주민인 《한》에 대해 말한다면 신라, 백제가 고구려와 언어, 의복, 풍속 등이 대체로 같다고 한 기록(《주서》, 《수서》)을 비롯하여 여러 문헌 및 고고학적자료들로 보아 역시 같은 겨레에 속하는 사람들이였다.
그것은 고려시기에 편찬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여 여실히 증명된다. 책이름이 보여주는것처럼 고려사람들속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민족의 나라들이라는 관념이 강하게 지배하고있었다.
만일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세 나라가 서로 다른 민족의 국가들이고 그들사이에 그 어떤 이질적인것이 존재했다면 감히 《삼국》이라고 말하지 못했을것이다.
결국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같은 겨레의 나라들이였으며 고구려는 중세초기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첫 국가였다.
이렇게 첫 걸음을 뗀 고구려는 건국이후 반세기남짓한 기간에 당시 이웃한 동족의 나라들과 지방정치세력들을 많이 통합함으로써 넓은 령토를 차지한 큰 나라로 장성하였다.
고구려가 건국초기에 대국이였다는것은 B.C.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인차 만리장성을 쌓은 사실 하나만 놓고도 잘 알수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진나라, 한나라이래로 중국의 동북쪽에 위치하고있었다. 말하자면 고구려는 이미 진나라때 중국에 알려질 정도의 대국이였던것이다.
만리장성은 바로 고조선, 고구려를 비롯하여 중국을 위협하던 여러 나라들과 종족들의 진출을 막기 위하여 쌓은것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그 어느 다른 나라의 외부적영향에 의해 성립되였거나 그 제약을 받은 소국이 아니라 건국초기부터 대국으로서의 체모를 갖춘 독립국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고구려는 시종일관 천자국, 황제국의 지위를 차지하고있은 대국이였다.
그것은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임금들이 자신들을 천자로, 황제로 자처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일반적으로 군주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봉건전제국가에서는 주로 최고통치자 즉 군주의 지위에 따라 국력이 평가되고 나라의 국제적지위가 달라진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고구려의 임금들은 천자들이였고 고구려는 명실공히 천자의 나라, 황제의 나라였다.
고구려임금은 처음부터 천자(대왕)였다. 그것은 시조 동명왕이 《천제의 아들》로 자칭한데서 알수 있다.
고구려에서 동명왕을 《천제의 아들》로 신성화한것은 바로 고구려왕이 다름아닌 천자의 지위를 차지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등 옛 문헌들을 통하여 알수 있는바와 같이 고구려임금은 평상시 《대왕》으로 불리웠고 4세기말엽에 이르러서는 명실공히 천자의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 《수서》(고구려전)에 보이는 고국원왕의 칭호 《소렬제》가 그것을 말해주고있다. 이 기록들이 대국주의적 및 사대주의적력사관에 물젖은 봉건사가들에 의해 편찬된 책들이라는것을 고려할 때 우의 내용은 결코 무시할수 없다. 그들자체도 천자, 황제로서의 고구려임금의 지위를 외면할수 없었던것이다.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고국원왕릉의 벽화에 보이는 《성상번》이라는 기발은 그에 대한 뚜렷한 증시로 된다.
요컨대 고구려의 최고통치자는 다른 나라 《황제》에게 종속된 《후왕》이 아니라 여러 제후들을 거느린 천자, 황제였다. 최고통치자가 이러할진대 그가 대표하는 국가가 다른 나라의 부용국이나 일개 지방정권이 될수 없다는것은 명백하다.
고구려임금의 황제적지위는 년호의 사용을 통해서도 립증된다.
중세기 동방나라들에서 년호의 제정은 황제만이 할수 있고 제후는 그것을 사용하는것이 관례로 되여있었다. 그러므로 년호문제는 최고통치자의 지위 나아가서 해당 나라의 독자성과 관련된다.
기록의 인멸로 전모는 알수 없지만 여러 금석문자료들은 고구려에서 년호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사람들이 직접 세운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에 보이는 《영락》, 《건흥》을 비롯하여 현재까지 남아있는 금석문들에서 고구려의 년호로서 찾아볼수 있는것만도 적지 않다.
다음으로 고구려는 자기 존립의 근 천년동안 대외관계에서 자주권을 확고히 고수한 나라였다.
강대한 국력과 높은 민족적자존심을 지니고있었던 고구려사람들속에는 사대주의가 없었으며 고구려는 언제나 자주적인 대외정책을 실시하였다. 고구려는 중국의 력대 나라들과 주동적인 외교무역관계를 맺으면서 자기에게 가해지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을 과감히 물리치고 자기의 존엄과 자주권을 영예롭게 지켜냈다.
고구려가 진행한 수많은 반침략투쟁은 고구려가 자기의 자주권이 침해당하는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부 력사책들에 고구려가 그 어떤 군에 속했다거니 속할것을 요구했다거니 하는따위의 기록과 《책봉》, 《조공》기사가 나오는것을 두고 마치도 그 무슨 주종관계의 표현이기나 한것처럼 여기는 견해들도 있지만 그것은 력사주의적립장을 벗어난 아전인수격의 사고방식이다. 우의 기록들은 어디까지나 당시 동방 여러 나라들사이에 존재한 관례에 따라 고구려가 맺은 외교무역관계, 그가 진행한 외교무역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고구려가 실지로 그 어느 나라의 속국이고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면 세기에 세기를 이어 거듭된 반침략투쟁에서의 고구려의 승리 특히 370년대 중국관내를 휩쓴 《유주진출》이나 7세기전반기 수백만에 달하는 이른바 대국의 군사적침략의 성과적격퇴는 상상도 못했을것이다.
력사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고구려는 대륙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결심에 따라 자기의 리익에 맞게 자주적으로 대외관계를 조성하였으며 그 어떤 책봉체계안에도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고구려는 천자국으로서 주변에 있던 동족나라들의 웃자리에 있으면서 대국행세를 하고있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자신을 천하의 유일무이한 황제로 자처하면서 주변나라들을 《번국》으로 보던 당나라임금도 고구려의 위력과 권위에 위압을 느끼고 고구려임금의 황제적지위를 인정하고 대등한 관계를 가지려고 하였던것이다. 《구당서》(고구려전)의 기록에 의하면 당고조는 신속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고구려로 하여금 《기어이 신하로 칭하게 해서 스스로 존대할 필요가 있겠는가》고 하면서 두 나라사이의 전쟁을 피하고 화목을 도모할것을 희망하였다.
당고조가 실토했듯이 고구려는 그 누구에 대한 신속관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고구려는 자기의 존재 전 기간 대외관계에서 민족적자주권을 확고히 고수하였으며 그것을 침해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단호히 짓부셔버렸다.
력사적사실은 고구려가 그 어느 대국의 《소수민족정권》이나 《지방정권》, 《속국》이 아니라 조선민족의 당당한 자주독립국가였다는것을 웅변으로 실증해주고있다.
지난날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고 삼국시기 력사발전에서 주도적역할을 논 동방의 천년강성대국 고구려는 영원히 조선민족의 력사에 남아있을것이다.
우선 고구려는 그 성립초기부터 독자성을 견지한 대국으로 력사무대에 등장하였다.
고구려가 B.C.277년에 부여출신의 귀족청년인 고주몽(동명왕)에 의하여 우리 나라 고대국가의 하나였던 구려국의 판도에서 우리 나라 력사상 첫 봉건국가로서 건국되였다는것은 이미 잘 알려진 력사적사실이다.
고구려건국설화를 보더라도 그의 건국과정에는 그 어떤 다른 민족에 의한 외적요인이 전혀 없었으며 같은 민족내부에서 서로 다른 지방출신들의 래왕과 결합이 있었을뿐이다.
옛 기록들에는 성립당시 고구려주변의 주민들에 대하여 고구려, 부여, 옥저, 예 등 여러가지로 쓰고있지만 《후한서》, 《삼국지》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이들은 모두 언어와 법속이 같은 고대조선족이였다. 조선반도 중남부지역의 주민인 《한》에 대해 말한다면 신라, 백제가 고구려와 언어, 의복, 풍속 등이 대체로 같다고 한 기록(《주서》, 《수서》)을 비롯하여 여러 문헌 및 고고학적자료들로 보아 역시 같은 겨레에 속하는 사람들이였다.
그것은 고려시기에 편찬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여 여실히 증명된다. 책이름이 보여주는것처럼 고려사람들속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민족의 나라들이라는 관념이 강하게 지배하고있었다.
만일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세 나라가 서로 다른 민족의 국가들이고 그들사이에 그 어떤 이질적인것이 존재했다면 감히 《삼국》이라고 말하지 못했을것이다.
결국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같은 겨레의 나라들이였으며 고구려는 중세초기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첫 국가였다.
이렇게 첫 걸음을 뗀 고구려는 건국이후 반세기남짓한 기간에 당시 이웃한 동족의 나라들과 지방정치세력들을 많이 통합함으로써 넓은 령토를 차지한 큰 나라로 장성하였다.
고구려가 건국초기에 대국이였다는것은 B.C.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인차 만리장성을 쌓은 사실 하나만 놓고도 잘 알수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진나라, 한나라이래로 중국의 동북쪽에 위치하고있었다. 말하자면 고구려는 이미 진나라때 중국에 알려질 정도의 대국이였던것이다.
만리장성은 바로 고조선, 고구려를 비롯하여 중국을 위협하던 여러 나라들과 종족들의 진출을 막기 위하여 쌓은것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그 어느 다른 나라의 외부적영향에 의해 성립되였거나 그 제약을 받은 소국이 아니라 건국초기부터 대국으로서의 체모를 갖춘 독립국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고구려는 시종일관 천자국, 황제국의 지위를 차지하고있은 대국이였다.
그것은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임금들이 자신들을 천자로, 황제로 자처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일반적으로 군주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봉건전제국가에서는 주로 최고통치자 즉 군주의 지위에 따라 국력이 평가되고 나라의 국제적지위가 달라진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고구려의 임금들은 천자들이였고 고구려는 명실공히 천자의 나라, 황제의 나라였다.
고구려임금은 처음부터 천자(대왕)였다. 그것은 시조 동명왕이 《천제의 아들》로 자칭한데서 알수 있다.
고구려에서 동명왕을 《천제의 아들》로 신성화한것은 바로 고구려왕이 다름아닌 천자의 지위를 차지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등 옛 문헌들을 통하여 알수 있는바와 같이 고구려임금은 평상시 《대왕》으로 불리웠고 4세기말엽에 이르러서는 명실공히 천자의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 《수서》(고구려전)에 보이는 고국원왕의 칭호 《소렬제》가 그것을 말해주고있다. 이 기록들이 대국주의적 및 사대주의적력사관에 물젖은 봉건사가들에 의해 편찬된 책들이라는것을 고려할 때 우의 내용은 결코 무시할수 없다. 그들자체도 천자, 황제로서의 고구려임금의 지위를 외면할수 없었던것이다.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고국원왕릉의 벽화에 보이는 《성상번》이라는 기발은 그에 대한 뚜렷한 증시로 된다.
요컨대 고구려의 최고통치자는 다른 나라 《황제》에게 종속된 《후왕》이 아니라 여러 제후들을 거느린 천자, 황제였다. 최고통치자가 이러할진대 그가 대표하는 국가가 다른 나라의 부용국이나 일개 지방정권이 될수 없다는것은 명백하다.
고구려임금의 황제적지위는 년호의 사용을 통해서도 립증된다.
중세기 동방나라들에서 년호의 제정은 황제만이 할수 있고 제후는 그것을 사용하는것이 관례로 되여있었다. 그러므로 년호문제는 최고통치자의 지위 나아가서 해당 나라의 독자성과 관련된다.
기록의 인멸로 전모는 알수 없지만 여러 금석문자료들은 고구려에서 년호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사람들이 직접 세운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에 보이는 《영락》, 《건흥》을 비롯하여 현재까지 남아있는 금석문들에서 고구려의 년호로서 찾아볼수 있는것만도 적지 않다.
다음으로 고구려는 자기 존립의 근 천년동안 대외관계에서 자주권을 확고히 고수한 나라였다.
강대한 국력과 높은 민족적자존심을 지니고있었던 고구려사람들속에는 사대주의가 없었으며 고구려는 언제나 자주적인 대외정책을 실시하였다. 고구려는 중국의 력대 나라들과 주동적인 외교무역관계를 맺으면서 자기에게 가해지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을 과감히 물리치고 자기의 존엄과 자주권을 영예롭게 지켜냈다.
고구려가 진행한 수많은 반침략투쟁은 고구려가 자기의 자주권이 침해당하는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부 력사책들에 고구려가 그 어떤 군에 속했다거니 속할것을 요구했다거니 하는따위의 기록과 《책봉》, 《조공》기사가 나오는것을 두고 마치도 그 무슨 주종관계의 표현이기나 한것처럼 여기는 견해들도 있지만 그것은 력사주의적립장을 벗어난 아전인수격의 사고방식이다. 우의 기록들은 어디까지나 당시 동방 여러 나라들사이에 존재한 관례에 따라 고구려가 맺은 외교무역관계, 그가 진행한 외교무역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고구려가 실지로 그 어느 나라의 속국이고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면 세기에 세기를 이어 거듭된 반침략투쟁에서의 고구려의 승리 특히 370년대 중국관내를 휩쓴 《유주진출》이나 7세기전반기 수백만에 달하는 이른바 대국의 군사적침략의 성과적격퇴는 상상도 못했을것이다.
력사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고구려는 대륙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결심에 따라 자기의 리익에 맞게 자주적으로 대외관계를 조성하였으며 그 어떤 책봉체계안에도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고구려는 천자국으로서 주변에 있던 동족나라들의 웃자리에 있으면서 대국행세를 하고있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자신을 천하의 유일무이한 황제로 자처하면서 주변나라들을 《번국》으로 보던 당나라임금도 고구려의 위력과 권위에 위압을 느끼고 고구려임금의 황제적지위를 인정하고 대등한 관계를 가지려고 하였던것이다. 《구당서》(고구려전)의 기록에 의하면 당고조는 신속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고구려로 하여금 《기어이 신하로 칭하게 해서 스스로 존대할 필요가 있겠는가》고 하면서 두 나라사이의 전쟁을 피하고 화목을 도모할것을 희망하였다.
당고조가 실토했듯이 고구려는 그 누구에 대한 신속관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고구려는 자기의 존재 전 기간 대외관계에서 민족적자주권을 확고히 고수하였으며 그것을 침해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단호히 짓부셔버렸다.
력사적사실은 고구려가 그 어느 대국의 《소수민족정권》이나 《지방정권》, 《속국》이 아니라 조선민족의 당당한 자주독립국가였다는것을 웅변으로 실증해주고있다.
지난날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고 삼국시기 력사발전에서 주도적역할을 논 동방의 천년강성대국 고구려는 영원히 조선민족의 력사에 남아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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