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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다큐멘터리 및

발해 시조 대조영 -2

by 하공별자함 2007.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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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高唐) 최후(最後)의 승부(勝負)-2

 

 

무모한 가우리와의 패권 전쟁은 두 나라를 모두 지치고 피폐하게 만들었다. 만약 이번 전쟁에 가우리를 이기지 못하면 당나라도 망하고 말 것이다. 최후의 결심을 한 장안(長安) 정부는 국가의 운명을 걸고 사력을 다하기로 각오하였다. 서기 661년 4월, 하남북(河南北), 회남(淮南) 등 67주(州)에 걸쳐 총동원령을 내려 35만 명의 추가 병력을 징집하여, 76세의 노장 소정방이 이끄는 남펴라[南平壤] 공략군에 무려 27만 명의 지원군을 보냈다.

 

가우리가 제아무리 강국이라 하여도 이번만은 버텨낼 수 없을 것이다.

 

역전의 노장군 소정방은 이미 남부여 멸망이라는 전공을 세운 명장이다. 27만의 당군은 남펴라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항복이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연개소문 시절의 작전 참모장인 선도해를 중심으로 맹수 같은 가우리의 장수들이 남펴라 작전에 투입되어, 성을 중심으로 안팎으로 진을 치고,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하며 가우리군에 대한 공포심이 충만한 중국 시골 출신의 허수아비 군사들을 쉴 새 없이 괴롭혀 대니, 실라의 도움을 받아 남부여를 공략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벌어졌다.

27만이라는 대군으로 성을 포위한 기세는 좋았으나, 가우리군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용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으며, 당군은 대군임에도 불구하고 가우리 땅에 들어가면 귀신이 되어야 돌아온다는 소문에 기가 죽고, 또 강제 징집당한 오합지졸이어서 제 목숨 보존하기에 정신이 없는 한심한 상황이었다.

 



서기 661년 8월, 크말치 남생(男生)이 이끄는 요수 방위군(遼水防衛軍)은 오랜 소강 상태를 깨뜨리고, 드디어 설필하력의 북방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당군은 허겁지겁 패주하였으나, 남생군은 추격할 수가 없었다. 서울인 펴라의 방위가 비어 있었고, 남부 전선의 최대 요충인 남펴라가 소정방군에게 포위당해 있기 때문이었다.



남생이 겨우 전선을 정리하여 주력군을 펴라성 방위에 다시 배치할 무렵, 즉 서기 662년 정월, 예상했던 대로 당은 방효태 장군을 선도로 10만 명의 수군을 편성하여 펴라를 직접 공격해 왔다.

때마침 마의 삼각주인 남대황의 방위선 구축을 끝마친 남생군은 살수와 패수로 쳐들어오는 방효태군을 가우리 수군의 전통적인 작전을 그대로 연출하여 궤멸시켰다. 이 때, 방효태와 그의 13명의 아들들을 포함하여 10만 명의 당군을 전멸시키는 대첩을 거두었다. 이른바 제2의 살수대첩이다.

 



요수의 설필하력군을 격파한 데 이어 살수에서 방효태군을 몰살시킨 가우리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남생은 이제야 주력군을 이끌고 남펴라로 향하니, 남펴라를 공략한 후 펴라로 진공하려던 소정방군은 오히려 남생군에게 역포위당하여 고립되고 말았다.

 

살수에서 대승을 거둔 가우리 수군은 당과 남펴라 간의 수로(水路)를 완전히 봉쇄하니, 소정방의 27만 군은 심각한 식량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식량문제가 심각해지자, 소정방은 남쪽 웅진 도독부의 유인원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유인원 역시 복신의 부여 다물군에게 부여성이 포위당하여 실라에게 도움을 애걸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제 마지막 방법은 실라에게 동맹국의 명분을 내세워 군량미를 구걸하는 것뿐이다. 소정방의 요청을 받은 실라는 마지못해 최소한도의 식량을 원조하기로 결정하였다.

 



동맹군이었던 당(唐)과 실라는 서로의 숨은 목적을 의심하는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라로서는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정방의 27만 명 외에도 1만 7천 명의 웅진 도독부도 있어서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 때 김춘추[太宗武烈王]가 죽고, 신왕으로 법민(法敏)이 즉위하여 거대한 부여를 삼킨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부여 정벌에 큰 도움을 준 당군에 대하여 빚을 갚아야 한다는 국론에 따라 김인문, 김양도(金良圖) 등 아홉 장수를 동원하여 대거(大車) 20량을 만들어 쌀 4천 섬, 벼 2천 섬을 남펴라 전선으로 보냈다.

 



실라의 양곡 수송 작전에 크게 고무된 소정방도 별동군을 파견하여 군량미를 인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라군의 수송작전은 가우리의 첩보망에 낱낱이 탐지되어 가우리 측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펴라로 향하는 실라의 수송부대가 겨우 칠중하(七重河)에 도착하였을 때,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던 가우리의 복병을 만나 풍비박산으로 깨어지고, 수송중이던 식량은 모조리 가우리군에 탈취당하였다. 결국 굶주림에 지친 소정방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겨우 수천 명의 결사대만이 대장 소정방을 호위하여 바다로 빠져나와 장안으로 도망쳐 가고 말았다.

발해는 태양민족임을 뜻하는 “밝은 해”를 줄인 “밝해”의 소리말을 한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대신국의 “신(辰)”자는 우리말로 크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진”으로 발음하여 대진국으로 읽는데, 크다는 의미를 두 번 강조하는 “대신국”으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 또한 대신국의 국호는 이외에도 “세상의 중심 땅“을 의미하는 가우리[句麗]라는 국명을 계속 쓰기도 했는데 대쥬신제국사에는 대가우리(=대씨가우리 大氏高句麗)로 표현되어 있다.
밝해, 고려 등이 고가우리[高句麗]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가우리[句麗]”라는 국명를 사용하였기에 대쥬신제국사에서는 이를 구분키위해 고구려=고씨가우리(고씨 왕조의 가우리), 밝해=대씨가우리(대씨 왕조의 가우리), 고려=왕씨가우리(왕씨 왕조의 가우리) 등으로 국명이 표현되어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고가우리[高句麗]의 고(高)를 성씨(姓氏)로 오인한 잘못임을 여기서 밝히며 앞으로 출간되는 대민족통사 시리즈에서는 고구려(고가우리)→위가우리, 대가우리→밝해, 고려→왕가우리로 국명이 지칭됩니다.
참고로 고가우리[高句麗]의 고(高)자는 크다, 높다의 뜻 외에도 위(上)의 뜻이 함축되어 있어 위가우리(위대한 가우리, 큰가우리)로 표현하였음을 밝혀둡니다.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Good Actual Condit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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