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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디자인 및

의자 ...

by 현상아 2006. 12. 6.






 

사람의 몸은 의자에 앉도록 디자인되지 않았다. 인체공학자들은 수많은 연구를 하면서 의자에 오래 앉을수록 몸은 점점 더 망가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의자에 앉은 자세는 폐, 소화기관, 척추, 허리근육과 신경계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한다. 하루의 대부분을 앉아서 지내는 현대인들의 몸을 왜곡시키고 다양한 질병을 낳는 원흉이 바로 의자인 셈이다. 사람이 의자에 앉아 생활한 기간은 인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대단히 짧다.



 

몸이 의자에 앉도록 디자인되지 않은 것처럼 의자 역시 앉으라고 디자인한 것이 아니다. 의자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던 시절, 의자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귀족들이 길게 기른 손톱이나 치렁치렁한 가발 같은 것이었다. 거추장스럽기만 한 손톱과 가발은 하루종일 일해야 먹고살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평생 해 볼 수 없는 것이다. 즉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표시였다. 마찬가지로 의자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통치하는 자들의 상징물이었다.


극소수의 사람이 절대적인 권력을 쥐던 시절, 세상에서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왕, 황제, 종교의 우두머리 같은 절대 권력자였다. 그런 사람을 ‘권좌(權座)에 올랐다’고 표현하는 이유다. 회의의 의장을 영어로 ‘의자사람(Chairman)’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의자는 평범한 가구가 아니라 왕관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중세에는 소수 귀족들에게까지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고, 재산이 더 축적되고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에 비로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권력의 상징이라는, 의자가 생겨난 본질적 기능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크기와 재료, 장식으로 의자는 더욱 강력한 권력의 상징, 부의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


 

의자가 대중화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계가 마련해 주었다. 20세기 전까지 극소수의 권력자, 귀족, 자본가를 제외한 절대 다수의 사람은 몸을 수고롭게 움직여야만 먹고살 수 있었다. 즉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수고로운 노동을 기계가 대체해 나가자 현대의 노동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장부를 정리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결국 기계는 수많은 관리직 노동자, 즉 의자에 의지한 노동자를 양산했다. 따라서 의자는 대량 생산되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장인들이 일일이 나무를 깎고 장식을 붙여 생산하는 방식으로는 산업사회의 엄청난 수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 의자는 기계생산시대에 맞게 효율적으로 디자인되어야 했다.
기계생산시대, 대량생산시대에 걸맞게 의자 디자인을 혁신한 주인공은 모더니스트들이었다.



 

오늘날 명품 의자로 각광받는 르 코르뷔지에의 셰즈롱그,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로셀로나 의자,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실리 의자, 알바르 알토가 나무를 구부려 제작한 의자 시리즈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들 모더니스트들이 디자인한 의자는 정말 대중화되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들은 대량 생산에 맞는 단순한 의자를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대중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값싼 의자, 편안한 의자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사실 모더니스트들이 디자인한 의자는 자신들의 철학과 이상을 표현하는 도구 이상이 되지 못했다. 즉 그들에게 의자는 창작 욕구를 토해 낼 아주 적절한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모더니스트들은 과거의 권력과 신분 과시형 의자에서 완전히 탈피한 혁신적인 스타일을 창조했지만, 그것 역시 새롭게 부상한 엘리트 계층의 신분을 과시할 뿐 진정으로 대중에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돈 번 티를 내려고 아르마니를 입고 벤츠를 타듯, 자신의 사무 공간을 모더니스트들의 의자로 장식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유로운 창작 욕구를 더욱 부채질하여 더 기괴하고 도저히 앉을 수조차 없는 의자를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의자에 대한 반성으로 생겨난 것이 인체 공학을 바탕으로 한 몸에 딱 맞는 의자, 건강을 해치지 않는 의자, 편안한 의자다. 의자는 이제 창작 표현의 대상을 넘어 과학이 되었다. 척추의 구조와 움직임에 따라 유연하게 반응하는 최첨단 의자들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돈 채드윅이 디자인한 아론 의자는 이러한 인체공학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의자는 무려 200만 원을 호가한다. 20세기의 의자는 민주화되었다고 하지만, 유명 디자이너가 애써 만든 이른바 굿 디자인 의자들은 여전히 대중과 먼 거리에 있다. 그 의자들은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서 과거 왕과 귀족의 의자처럼 행세한다. 정말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이 편안히 앉을 수 있는 값싸고 튼튼하고 아름다운 의자는 나올 수 없는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안타깝게도 ‘없다’이다. 그것은 비행기의 이코노미 의자를 비즈니스나 일등석 의자로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들에게 정말 편안한 의자는 값싸고 불편한 의자들인지 모른다. 우리가 학생 시절에 앉았던 나무 의자, 오랫동안 앉으면 삐걱거리고 흔들려서 나중에는 땔감이 되는, 그런 이름 없고 하찮은 의자 말이다. 그러나 너무 낙심하지 마라. 어차피 우리 몸을 해롭지 않게 하는 완전한 의자는 만들 수 없다. 사람이 의자를 떠나 끊임없이 움직이든지, 의자 생활을 천만년 지속하여 우리 몸이 의자에 맞게 진화하지 않는 이상, 명품 의자에 앉는 사람이나 싸구려 의자에 앉는 사람이나 몸이 망가지기는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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