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어머니 생일 선물로 만든 판화
▲ 폴 쟈쿨레 <둥지> 다색목판 39.5 x 30cm 1941년 (개인소장)
★...집에서 참새를 기르던 시절이 있었다. 6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농촌의 초가집이나 기와집 처마 밑에는 참새 둥지가 많았고, 동네 아이들에게 호기심과 장난의 대상이었다. 참새부부는 일년에 두세번씩 둥지에서 알을 낳았고,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오면 어미새는 둥지와 들판을 부지런히 오가며 새끼들에게 먹이를 날랐다. 그러다 간혹 어미새가 제때에 먹이를 갖다주지 못하면 먹성이 좋은 새끼들은 입을 벌리며 울음소리를 냈고, 그러면 마당에서 해바라기를 하던 할아버지들은 울음소리를 안스러워하며 근처에서 벌레를 잡아 처마 밑에서 둥지를 내려 어미새 대신 먹이를 줬다.
<둥지>는 사람과 참새가 함께 살아가고, 참새가 할아버지의 자식이던 시절의 모습을 프랑스 화가 폴 쟈쿨레(1896-1960)가 다색목판화로 만든 작품이다. 외국인 화가지만 인자하고 자애로운 우리의 할아버지 표정을 섬세하면서도 생동감있게 그렸고, 뒷배경에다 토마토와 연두색 잎사귀를 그려넣음으로써 참새 둥지와 어울리는 자연적 환경으로 화면을 구성하였다.
폴 쟈쿨레는 <둥지>를 어머니 생일 선물로 준비한 작품이다. 참새에게 먹이를 주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통하여, 어머니가 자신에게 베푼 사랑을 나타내려 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작품의 낙관까지 참새모양으로 만드는 등 세밀한 곳에까지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심장질환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는 이 작품을 판화와 크리스마스 카드로 제작하여 '어머니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는 1896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3살 때 아버지가 도쿄외국어대학에 교수로 부임하게 되면서 온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25살 때인 192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32살 때 어머니가 경성제대에 재직 중이던 일본인 의학박사와 재혼하자, 어머니를 만나러 서울을 자주 오가며 우리나라 사람들과 삶의 모습을 판화로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판화수업을 받았지만, 일본을 소재로 한 작품보다는 우리나라과 중국, 특히 남태평양군도 원주민들의 인물과 삶의 모습을 수채화와 다색목판화로 남겼다. 우리나라에서는 1934년에 개인전시회를 했고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순회 전시회를 했다.
어머니가 서울에 살았기에 1928년부터 우리나라를 오가던 그는 1931년 전남 영암 출신 나영환씨를 조수로 맞았고, 1949년에는 나영환씨의 딸을 입양하여 한국인과 한 가족을 이루며 작품 활동을 하였기에 우리나라에 대한 이해가 각별했다.
▲...왼쪽은 쟈쿨레가 독일인 후원자와 1930년대 후반에 찍은 사진 사진으로, 맨 오른편에 앉아있는 남자가 나영환씨고, 뒤의 세사람은 나씨의 동생들이다. 오른쪽은 쟈쿨레가 양녀 나성순씨와 1957년에 찍은 사진이다
★...폴 쟈쿨레는 나영환씨 일가 외에도 많은 한국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1934년부터 작품에 등장시켰다. <둥지>의 할아버지는 그가 우리나라에 머물 때 붓글씨를 가르쳐주던 선생님이었고, <문안편지>라는 작품에 나오는 아주머니는 어머니집 가정부였다. 이러한 우리나라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그는 우리나라를 소재로 36점 이상의 다색목판화와 100여점 이상의 수채화와 드로잉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우리나라 소재 작품들은, 우리나라 근대의 삶을 모습을 매우 잘 이해한 상태에서 만들었기에 서사적 이야기 구조가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쟈쿨레의 <둥지>를 한참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옛그림 중에도 <둥지>와 비슷한 소재로 '어머니의 사랑'을 보여주는 작품이 떠오른다.
▲...변상벽 <모계영자도> 비단에 수묵담채 94.4 x 44.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30년에 태어난 화원 출신 화가 변상벽의 닭과 병아리 그림이다. 그림 뒤편 바위 틈 사이에 있는 나무에 찔레꽃이 한 송이 피어있고, 어미 닭이 병아리들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인데, 탁월한 미술사가였던 고 오주석이 극찬한 작품이다. 외국 박물관에서도 여기저기서 닭 그림을 많이 보시겠지만 이렇게 정답고 살가운 그림은 다시 없어요!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선한 작품을 그리고, 또 그것이 좋아서 벽에 걸어 두고 흐뭇해했던 우리 조상들의 삶이 얼마나 순박하고 착한 것이었는지 절로 느껴 집니다. (오주석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147 쪽) 변상벽과 폴 쟈쿨레는 태어난 곳, 살아온 시대, 그림을 표현하는 기법은 다르지만, '자식사랑'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작가정신에서는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두 화가가 갖고있던 작가정신의 친연성은 아래의 세부도를 비교하면 좀 더 확실해진다
▲...<모계영자도> 부분
★...어미 닭이 벌을 잡아 병아리들에게 나눠주기 직전의 모습이다. 오주석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서 "햇병아리들이 하나같이 예쁜데 이 모이를 누구 입에 넣어줘야 할까요? 참 걱정입니다" 라며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중간 휴식 시간에 양계장을 하는 수강생이 '암탉은 모정이 아주 살뜰해서 먹이를 잘게 부숴서 먹기 좋게 흩어 준다'고 설명을 해줘서, 그때서야 병아리들이 입을 벌리지 않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변상벽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주둥이를 다물고 있는 병아리를 그렸으니, 그가 얼마나 철저한 화가 정신을 갖고 닭과 병아리를 관찰한 후에 그림을 그렸는지를 알 수 있다.
▲...<둥지> 부분
★...폴 쟈쿨레 역시 참새들의 생태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새 사진을 보면, 주둥이는 그림에서 처럼 노랗고, 날개짓을 못하는 새끼참새는 배가 고프면 주둥이를 잔뜩 벌리고 먹이를 달라고 보챈다. 참새는 먹이를 많이 먹고 성질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마토가 열리는 여름의 참새 먹이는 곡식이 아니라 잠자리나 벌레라니, 쟈쿨레의 세심한 관찰력과 사실주의적 표현방법도 변상벽과 비슷하다.
변상벽도 참새를 그린 그림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묘작도>에 보면 다섯마리의 참새가, 나무 위로 올라오려는 고양이에게 놀라 지저귀는 모습이 있는데, <둥지>에서의 새끼참새와는 다른 어미참새들의 모습이지만, 필치가 세밀하다는 점에서는 역시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두화가에게서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꽃과 나비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모계영자도> 부분
★...변상벽은 괴석 뒤에 찔레꽃을 그리고 그 꽃으로 나비와 벌이 날아오는 모습을 그렸다. 그뿐 아니라 괴석 사이에 구멍을 만들어 그 사이로도 나뭇잎을 그렸다. 변상벽은 이런 섬세한 감성을 갖고 있었기에 고양이와 닭을 많이 그렸고, 그래서 '변 고양이', '변 닭'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폴 쟈쿨레 <남태평양의 선인장> 다색목판 39.5 x 30cm 1941년 (개인소장)
★...폴 쟈쿨레도 꽃과 나비를 많이 그렸다. 위의 작품은 꽃과 나비만으로 그림을 완성시켰고, 인물이 나오는 그림에도 꽃과 나비를 많이 포함시켰다. 그 이유는 그의 취미가 나비 수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비 수집을 위하여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다녔고,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의 나비까지 수집하여, 훗날 1만 4천 점의 나비표본을 오사카 자연박물관에 기증하였다
▲... 폴 쟈쿨레 <남태평양 디스탄트 섬의 꽃> 30 x 39.5cm 1940년 (개인소장)
★...이 그림은 쟈쿨레의 작품 중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몇 안되는 작품 중의 하나로, 남태평양에서 느낀 푸른 원색과 바닷가에 피어난 강열한 색상의 꽃을 그려 '색채의 향연'을 보여준다. 바다 위에 갈매기 두마리를 그려 넣어 지나치게 정적으로 보이지 않게 했고, 수평선 위에 짙은 푸른색과 노란색를 표현해 푸른 색만의 단순함에 변화를 주면서, 남태평양의 '화려한 원색적 정취'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폴 쟈쿨레 <자화상> 종이에 수채 34.5 x 29.5cm 1942년 (Kelton Foundation 소장)
★...이상의 작품에서 볼 때 쟈쿨레는 감수성이 매우 풍부했던 작가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섬세한 감수성은 수채화로 그린 자화상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자화상은 화가들이 가장 어려워 하는 작업 중의 하나인데, 그는 자신의 감수성을 나타내는 듯한 연두색 바탕 위에 자존심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완성했다.
그는 실제로 화가로서의 자존심이 대단해 자신의 작품을 전시회를 통해 판매하기 보다는, 1년 단위의 작품 구입 계약을 맺는 애호가들에게 작품을 보내는 방법을 취했다. 자신의 실력을 믿고 1년에 제작하는 작품을 모두 구입하라는 대단한 자존심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자존심이 강한 화가였지만, 양녀 나성순에게 쏟은 정성은 지극했다. 그래서 그는 1954년, 양녀 나성순과 그녀의 생부 나영환씨와 함께 세계일주를 떠났다. 그러나 미국 영사관에서 비자 발급을 거부하자 그는 나성순에게 나이아가라 폭포를 꼭 보여주고 싶었다며, 캐나다를 통해 폭포를 구경시켜주는 살뜰한 부성애를 보여줬다.
폴 쟈쿨레는 1960년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전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양녀 나성순씨에게 물려주었고, 나성순씨는 2005년 12월 양아버지의 다색 목판화 전작 165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여 쟈쿨레의 한국사랑을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에서는 쟈쿨레의 판화를 다양한 문화상품으로 만들었으니, 우리나라와 우리나라 사람들을 사랑했던 쟈쿨레는 이렇게 우리의 곁으로 왔다.
출처 : 한겨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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