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정인성기자
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푸른역사
이한수기자
1519년 서른네 살 김정국(金正國·1485~1541)은 정계에서 쫓겨났다. 기묘사화로 선비들이 죽어나갈 때였다. 국왕 비서(동부승지)처럼 잘 나가는 벼슬을 지냈던 그는 시골집으로 낙향했다. 고양군 망동리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팔여거사(八餘居士)’라 불렀다. ‘팔여’는 여덟 가지가 넉넉하다는 뜻. 녹봉도 끊겼는데 ‘팔여’라고? 한 친구가 생뚱맞은 새 호의 뜻을 물었다. 은퇴한 젊은 정객(政客)은 웃으며 말했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하게 먹고,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雪)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하게 맡는다네.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 했네.”
김정국의 말을 듣고 친구는 ‘팔부족(八不足)’으로 화답한다. 그의 내공도 만만치 않다. “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도 있더군.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고,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좋은 음악 다 듣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 여기지.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 부족한 게 있다고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저자(명지대 국문학과 교수)는 우리 한문학계에서 맛깔난 글을 쓰기로 손꼽히는 ‘글쟁이 학자’다. 그는 선비를 인물별로 나열하지 않고, 문헌 구석구석을 뒤져 주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생생한 삶을 주제별로 정리했다. ‘인생과 내면’ ‘취미와 열정’ ‘글과 영혼’ ‘공부와 서책’으로 장을 나눴다.
선비라고 해서 ‘도덕군자’들만 모은 것은 아니다. 남들이 손가락질 하든 말든 자기 취미에 푹 빠진 특이한 인물들도 등장한다. 18세기 사람 김광수(金光遂·1699~1770)는 서화와 골동품을 사들여 품평하는데 일생을 걸었다. 친구들은 그의 고칠 수 없는 ‘벽(癖)’을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김광수는 자신 같은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내가 문화를 선양해 태평시대를 수놓음으로써 300년 조선의 풍속을 바꾸어 놓은 일은 먼 훗날 알아주는 자가 나타날 수 있겠지.”
저자가 훑어 내리는 선비 취재는 때로 ‘기인(奇人)’을 만나기도 한다. 안면도에 살던 토정 이지함(李之?)은 계룡산 자락에 사는 친구 서기(徐起)에게 편지를 보냈다. “요새 학문에 진척이 있으신지요? 여기는 자식 놈이 감기를 앓고 있는데, 상태가 심해 걱정입니다. 내일 조카를 데리고 탐라(耽羅)를 가려는데 동행할 뜻은 없으신지요?”
내일 제주도에 함께 가자는 내용이다. 그러나 홍대용(洪大容)의 스승 김원행(金元行)은 이 짧은 편지에서 선비의 호기와 인품을 읽어냈다. “요즘 사람은 교외에 나가는데도 반드시 날을 잡고 양식을 장만한다고 법석을 떤다. 그러고도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다. 그런데 토정선생은 자식의 중병은 염두에 두지 않을 뿐더러 천리길을 가면서 약속을 내일로 잡았다. 하룻밤 사이에 말과 식량을 어떻게 마련하겠는가. 나는 이 편지에서 그 분들의 호쾌함을 보았다.” 이지함의 편지를 받은 서기는 제주도까지 동행하고 내친 김에 중국 남부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Good Actual Conditio...
눈 앞의 이익을 좇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친구가 가진 명품 벼루를 빼앗고 “소동파도 그런 일이 있다”며 우기는 유득공(柳得恭), 계집종을 희롱하다 아내에게 들켜 부끄러워하는 늙은 선비의 이야기를 읽으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반면 가난한 이웃과 나누기 위해 한끼에 한 홉씩 쌀을 덜어 ‘절식(節食)’을 실천했던 실학자 이익(李瀷)의 모습에선 엄격한 선비의 품격이 느껴진다. 깊은 우물에서 찬물을 길어 올려 마시는 듯하다. 정신이 번쩍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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