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 Klimt . 1862 - 1918
성공과 파문을 동시에 일으키고 있던 구스타프 클림트는 대학의 프레스코 벽화의 밑그림들로
온갖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그림에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의학, 법학, 철학을 상징화 했는데, 그 중 처음으로 대중 앞에 공개된 법학의 그림이 논쟁의 핵심으로 대두되었다.
그림은 선과 악의 가치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하였는데, 이러한 도덕적 애매함이 비엔나의 부르조아 층에 용납될 리가 없었다.
또한 우울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에는 어디에나 과도하고 "병적인 관능성"이 깔려 있다고 비난했다.
결국 문화성에서는 프레스코 벽화들을 예정되었던 대학이 아닌 시립 현대 화랑에 전시하기로 결정하지만 작가 자신은 이를 비난하고 거부했다.
법학
철학
의학
이러한 파문에도 불구하고 클림트를 오스트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특히 환상적이며 섬세한 디테일을 돋보이게 하는 급박을 입힌 초상화는 부르주아 층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것은 이태리 성당의 화려한 모자이크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비잔틴 예술에서의 신비적 금욕을 유도하려던 것에 반해 클림트는 관능적 황홀감으로 변화시켰 금세공사의 아들로 자라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비잔틴 예술에서는 신비적 금욕을 유도하려던 것에 반해 클림트는 그것을 관능적 황홀감으로 변화시켰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비엔나 장식미술학교'에 들어가 전문적 미술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 창문 디자인,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가 비엔나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화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둘도 없는 예술적 동반자이자 동지였던 동생이 젊은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하고, 그 얼마 뒤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마저 뇌일혈로 사망하자,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경제적, 정신적 압박을 느꼈던 탓인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그것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을 뿐, 수 많은 여인과 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을 세상에 남겼다 하니 파블로 피카소는 명함도 못내밀 정도다!
믿거나 말거나 자신의 모델이 된 여성과는 꼭 잠자리를 했으며, 그의 별명이 '빈의 카사노바'일정도로 이 있을 만큼 그를 둘러싼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성하다.
다음 작품에 등장하는 임산부는 자신의 아들을 낳은 여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상디자이너였던 "에밀리 푸쉬케"와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에밀리의 의상도 직접 디자인해 줄 정도로 애틋했으나 서로 정신적 사랑만을 나누었다 전해진다.
에밀리 푸쉬케
구스타프 클림트가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대신해 상속을 요구하자, 결국 에밀리 푸쉬케가 죽은 클림트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남겨진 유산을 분배해 주어야만 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은 당대에도 이미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이미 그의 작품보다 더 퇴폐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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