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속의 해학
---민중의 해학시인 김삿갓
리처드․럿트
金삿갓 하면 누구나 알지만 그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겨우 1863년의 일인데도 그의 일생을 정확히 조사할 수가 없다. 그가 대개는 漢詩로 많은 詩作을 한 것은 틀림없는데, 그의 시가 口傳으로 보존되었기 때문에 正典을 추려낼 수가 없다. 두어 세대를 지나는 동안에 그는 民俗學에 흡수되었으며 사실 지금은 그가 지었다고 하는 많은 시는 한국에서 膾炙하는 재치있는 漢詩一團에 속하는 것이다. 삿갓이 韓國文學史에서 당연히 차지하여야 할 위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도, 한국문학을 개관함에 있어 그에 언급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한국에서처럼 口傳文學이 뛰어난 중요성을 가지거나 문학전통에 있어서 民間說話가 흥미있고 그렇게 탁월한 국민문학에서 김삿갓의 작품이 희극적이라 하여 그를 도외시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겠다. 더구나 김삿갓에 얽힌 일화와 그의 詩가 傳統的인 韓國의 유머의 성격에 관해 제공하는 증거를 輕視하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金삿갓에 대한 연구가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마멸될 위기에 놓여 있는 민속 전통을 유지하려는 데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관광 인쇄물과 일간․주간지들은 그가 남긴 일화를 끊임없이 게재한다. 50년말에 있었던 노래는 지금도 불리운다. 그에 관한 책 몇권이 책방에서 언제나 팔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계 제2차대전에 李應洙가 편집해낸 시집 한 권쯤 손에 넣기는 어렵지 않다 해도 현재 그의 시를 제대로 편집하여 출간한 책은 없다. 李應洙는 그가 아직 대학생이었을 때 김삿갓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어 30年代에는 애써 모은 자료를 新聞에 발표하였다. 1939년에는 삿갓의 詩選을 출간했고 1944년에는 증보판으로 註譯을 달아 再版하였다. 이 책은 뒤이어 나온 대부분의 출판에 참고가 되어 왔다. 일본이 전쟁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던 그 당시에 순수하게 한국적인 주제를 다룬 책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驚異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이지 그 詩集은 1944년 2월에 첫 출판이 된 이후 同年 5월에 再版되었던 것이다.
이응수는 金笠(삿갓)에 대한 간단한 傳記를 싣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詩人의 손자와 두 명의 증손자에게서 대부분 들어 모은 것이다.
김삿갓은 1807년 권세가문인 莊洞金氏집에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炳淵인데 예명을 蘭皐라 했다. 1811년 東北部에 있는 咸興에서 군관을 지내던 김삿갓의 祖父 金益淳은 北南部 평안도 宣川의 防禦使로 전관하였다. 거의 이때 洪景來亂이 터졌다. 이 亂은 文官과 지방행정 관리의 행악과 西北人의 政界 생활을 방해하는 西北人 차별대우에 대한 격분의 폭발이었다. 늦가을에 발생하여 순식간에 반란세력이 커졌는데 폭도들이 宣川에 達했을 때 金益淳은 大醉, 잠에 빠져 있었다. 반란은 얼마 후 진압되고 별 탈없이 평정되었다. 그러나 金益淳은 삭탈관직 당하고 1812년 초 직무태만으로 처형되었으며 그의 일가는 滅門을 당하였다.
어린 소년 炳淵과 그 형은 하인의 손으로 구출되어 황해도에 숨어살면서 당시 풍습에 따라 한자와 문법을 익혔다. 가족에 대한 죄가 풀렸을 때 그는 그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십대에 결혼을 하였다. 그가 20세 되었을 때 翯均이 태어났다.
金笠은 그의 가문이 비천하게 되었던 상태에 모멸을 느껴 집을 떠나 팔도강산을 종횡무진 떠돌아 다니며 방랑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몰골은 천한 걸인이었으나 그가 받아온 양반 교육은 그의 풍모에 엿보였다 한다. 그는 삼 년만에 집에 돌아와 次子 翼均을 낳기까지 머물다가 다시 방랑의 길에 나섰다. 가족은 충청도 해안 가까이의 結城에 살고 있었는데 김삿갓은 가끔 나타나 가족의, 특히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으나 그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익균은 부친을 찾아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였다. 한번은 安東에서 그를 찾았으나 익균이 잠든 새 노인은 사라져 버렸다. 다시 平康에서 만났으나 실패하고 또 全北 礪山에서는 수수밭에 들어가 대변을 본다 하고는 들어간 후로 나타나지 않은 채 마지막이었다.
삿갓은 1863년 전라도 同福에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익균은 선친을 강원도 寧越 근방의 太白山에 모셨다. 그에 대해 더 이상 알아 볼 필요는 없다. 우리가 그의 방랑 생활을 좀더 상세히 안다 해도 그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한국 유머 전통에서 그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더 잘 알게 되지도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신분을 감추어 자유로이 행동하고 그가 가 버린 후 후 사람들이 자기들과 말을 주고 받았던 사람이 바로 김삿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영리하고 반항적이며 재치있고 반쯤밖에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려 했다. 일생동안 그는 성공적으로 그리했으며 그가 죽은 후 남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김삿갓이라는 인물과 언제나 붙어 다니는 이 “삿갓”이란 비모자를 이르는데 아직 한국 농부에게 애용되고 있으며 머리에 쓰는 소박한 것으로 챙이 넓고 납작한 원추형이다. 그는 이에 대한 시를 썼다.
浮浮我笠等虛舟 醉來脫掛着花樹
一着平生四十秋 興到携登翫月樓
牧堅輕裝隨野犢 俗子衣冠皆外飾
漁翁本色伴白鷗 滿天風雨獨無愁
(가뿐한 내 삿갓이 마치 空虛한 輕舟 같이 偶然한 曲折과 機綠으로 한 번 쓰게 시작된 것이 어느덧 四十平生을 지내 보내었구나. 이 삿갓은 본래 더벅머리 牧童이 輕裝하고 野犢을 따라 들로 소먹이러 나가는 때의 道具요, 漁翁이 백사장의 海鷗를 동무하여 고기 잡을 때에 본색을 나타내는 雨裝이다. 내 한 번 술이 大醉하면 이것을 벗어들고 看花하는 수목의 가지에 갖다 걸고 홀연히 흥이 심중에 떠오르면 翫月할 다락 위로 가지고 올라간다. 그런데 세상 속인들의 衣冠이란 다 外飾에 지나지 못하여도 내 이 소박한 삿갓은 滿天에 풍우가 騷할 때에도 避雨客들의 模樣을 悠然히 바라보며 都是 우려가 없는 것이로다.)
그의 시의 대부분이 당시에 한국 문인들이 습작하던 형식으로 쓰여졌다. 자기 대사를 노래로 할 수 있어야 했던 피이프스 시대의 영국 신사와 같이 조리있는 내용의 시를 쓸 줄 아는 것이 양반의 필요한 敎養이었다. 한자를 빌어 쓴 이 시는 당(唐)대에 발달한 韻律法의 규칙에 따른 전통적인 시형식이었다. 이 운율법의 기본은 英詩에서 音節의 强弱으로 운율의 배정을 하는 것처럼 詩의 글자들을 音調에 따라 배열하는 것이었다. 對句가 하나뿐인 짤막한 詩도 그것 자체로서 가치있는 작품이었으나 둘, 셋 또는 그 이상의 二行連句로 이루어지는 것이 적당하다. 만일 네 쌍의 連句가 있으면 그 둘째와 셋째는 위에 든 詩에서처럼 두 行 사이에 밀접한 문법적 對應이 이루어져야 한다.
醉來脫掛着花樹
興到携登翫月樓
이러한 二行連句의 구조는 앞 사람이 읊은 詩句의 끝글자로 시작하여 시를 지어내는 게임으로 자못 인기가 있었다. 즉 도전자가 첫 句의 韻을 제안하고 이를 이어 二行시를 끝막는 것이 있고 혹은 도전자가 첫 句의 운을 제안하고 화답자가 二行時로 그것을 끝마치는 경우도 있다. 김삿갓이 이를 즐겨했다는 얘기가 많다.
作詩의 기술은 韻이 필요함으로 해서 더욱 정교해졌다. 운을 맞출 글자가 詩에 반드시 있어야 했다. 詩會는 대개 이러한 韻을 띠어 주고 시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이 韻字들은 이 韻字들은 적당한 순서로 적당한 자리에서 쓰여져야 했다. 문자가 난해하면 할수록 그것을 써서 시를 이루어내는 시인의 성공은 두드러진다. 김삿갓은 가장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 없는 韻을 가지고도 결코 본 일이 없어 명성을 떨쳤다.
한번은 村落의 訓長이 <요구한다>라는 뜻의 「覓」이라는 애매한 字가 끝으로 오게 하여 詩를 지으라고 하였다. 律을 지어내면 하룻밤 자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조건이었다. 김삿갓은 첫 줄을 이렇게 불렀다.
許多韻字何呼覓
(허다한 운자가 있거늘 하필 이 멱자를 내었는가.)
심술궂은 훈장은 제二행의 운을 같은 자로 주었다. 삿갓이 답하기를,
彼覓有難況此覓
(그가 難字를 구하노라 애를 쓰는데 항차 참말 이 멱자에 이르러서야)
하니 훈장은 제三행도 같은 자를 놓았다. 이렇게 되자 시인은 그의 antitheme를 제시하게 되었다.
一夜宿寢縣於覓
(일야숙침이 멱자 한 자에 달렸으니)
주인은 제四행에도 같은 운자를 부르니 삿갓은 시를 슬쩍 돌려 다음과 같이 야유하였다.
山村訓長但知覓
(산촌훈장은 멱자밖에 모르는 모양.)
농담이 지나치면서도 가볍게 스친다. 要는 漢字를 얼마나 솜씨있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말장난으로 문학적인 유머를 일삼았다.
한국어는 말재롱이 더욱이 다양하다. 왜냐하면 漢字로 쓰든지 한글표기든지의 선택이 있는데다 漢字로 쓰여진 句節이 글자 하나 하나의 뜻에 따라 한글로 읽혀지면 그것이 한글로 쓰여졌을 때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고 또한 漢字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한글로 읽히면 또 다른 뜻이 되기 때문이다. 삿갓은 막걸리 한 사발을 놓고 여러 사람들간에 시회가 벌어진 곳에 끼어 들었다. 韻字는 銅, 곰, 지네로 주어졌다. 삿갓의 시는 한시의 규칙으로 지어졌으나 운은 한글로 읽어야한다.
主人呼韻太環銅
我不以音以鳥熊
(주인이 운을 부르는데 너무 <고리>고 <구리>니 나는 音으로 하지 않고 <새곰>으로 하리다.)
獨酒一盆速速來
今番來期尺四蚣
(탁주 한 동이를 빨리빨리 가져오라. 이번<내기>에는 <자네>가 <지네>.)
말장난이 가장 정교하게 된 이런 종류의 詩들은 결혼 피로연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漢詩로 지어졌으나 音으로 읽어야 되는 것이다.
天長去無執 江亭貧士過
花老蝶不來 大醉伏松下
菊樹寒沙發 月移山影改
枝影半從地 通市求利來
(하늘은 길고 길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은 늙어서 나비도 찾아오지 않도다. 국화포기는 찬 모래밭에 피는데 꽃가지는 땅에 닿을 듯이 늙어졌도다. 강가의 정자에 가난한 선비가 지나다가 노곤히 취해서 소나무 밑에 엎드려지도다. 달이 비끼니 산그림자도 바뀌었는데 장꾼들은 돈을 벌러 오더니라.)
이것은 가을 詩의 몇 가지 주제를 결합한 잘 짜여진 詩다. 소리내어 읽으면 音은 한글로 전혀 다른 뜻을 가진 것이 많다.
「천장」에는 「거무집」이 끼고
「화로」에선 「겻불내」가 나는구나
「국수」는 「한사발」인데
「지령」은 「반종지」라.
「강정」「빈사과」와
「대추」「복송아」가 있도다.
「월 - 리」「사냥개」야.
「통시」「구릿내」만 맡고 오느냐!
糞便學적 유머는 시골사회의 특수한 현상이며 文明人의 외설로 잘못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屋外 변소의 냄새를 피할 수 없고 인간과 짐승의 성에 대한 관심이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는 농가에 꽃피운다. 이것은 얼출을 화끈하게 하는 모욕을 하는 方便으로 쉽게 이용된다. 삿갓도 山村訓長의 행실에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從諸未十
先生來不謁
이러한 극도로 화를 돋우는 작은 詩에서 한국인이 듣는 이 시의 효과는 이렇다.
서당은 「내조지」며
방안은 「개존물」이라
생도는 「제미십」이요
훈장은 「내불알」이라
같은 수법으로 선조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집에 분풀이를 하면서 삿갓시인은 그의 농을 반복함을 꺼리지 않았다.
年年臘月十五夜
君家祭祀乃早知
祭尊登物用刀疾
獻官執事皆告謁
(해마다 돌아오는 섣달 보름날 밤은 그대 집의 제사인줄 이내 알았노라. 제사에 올린 음식은 칼솜씨가 빨라서 현관과 집사는 모두 있는 정성을 다하였도다.)
이것이 한자로 쓰여 있다면 모욕을 당하고 있는 이 불운한 사람들이 詩가 너무도 분명하게 들려 주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는 사실에 아이러니가 있다.
해마다 섣달이면 十五夜 밤에
네집의 제사에는 乃早知라
제사에 올린 음식에는 用刀疾을 치노니
헌관과 집사는 모두 皆告謁같도다.
固有名詞를 이용하여 시에 말장난을 넣음으로써 모욕을 당하는 종류도 있다. 그러나 외설적인 것은 아니다. 네 사람의 양반, 이른바 선비님네들이 앉아서 상투적 문구를 주고 받고 있었다. 삿갓이 그들의 토론에 대해 시를 한 수 지으니
六月災天鳥坐睡(趙坐首)
九月凉風蠅盡死(承進仕)
月出東嶺蚊簷至(文僉知)
日樂西山烏向巢(吳鄕首)
그러나 詩가 포함한 글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아래와 같았으므로 아무도 야유를 받아 마음이 상한 사람은 없다.
(六月災天에 새가 앉아 졸고 九月凉風에 파리가 다 죽더라. 달이 東嶺에 나매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해가 西山에 떨어지매 가마귀가 둥우리로 향했더라)
이러한 희롱은 역시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예를 든다.
日出猿生原
猫過鼠盡死
黃昏蚊簷至
夜出蚤席射
여기서 元生員, 徐進士, 文僉知, 趙碩士는 各己 各行의 후반에서 이름으로 조롱을 당하고 있다. 위의 두 글은 다 삿갓이 지었음이 거의 분명하나 그가 지은 다른 작품들의 다수와 함께 민속학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친근한 모토가 된 <一怒日老, 一笑一少>, 중국어의 성교에 관한 별명「柳花」에서 나온 <柳柳花花,즉 버들버들하더니 꼿꼿해지더라>라는 학생들의 낄낄거림, 내리는 눈에 대한 좀더 장식적인 二行連句,
飛來片片三春蝶
踏去聲聲六月蛙
(날려오는 白雪조각은 삼월 나비 형상이요, 밟히는 白雪 소리는 개구리 소리더라.)
등등 위에 말한 것들이 김삿갓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모든 것이 수수께끼 혹은 경구의 희극적인 전통의 일부로 되풀이 되고 있다.
수수께끼나 희롱은 순전히 그리고 단순하게 漢字만 가지고 될 수도 있다. 가령
仙是山人佛不人
鴻惟江鳥鷄奚鳥
永消一點還爲水
兩木相對便成林
(仙字를 破字하면 선인인데, 과연 仙人은 山에 산다. 佛은 不人, 鴻은 江鳥요, 닭은 奚鳥로다. 永點에서 일점을 消去하면 水가 되니 永水는 곧 형제간 그리고 나무가 두 사람 이상 합하면 수풀을 이룬다.)
한자의 구조를 분석한 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자는 좀더 신랄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삿갓은 尹씨의 마을에서 푸대접을 받고는
東林山下春草綠
大丑小丑揮長尾
五月端陽愁裡過
八月秋夕亦可畏
(동림산 아래에 봄풀이 푸르니 큰 소와 작은 소가 긴 꼬리를 흔들더라. 오월 단오에는 잡힐가 해서 근심 속에서 지내었고 팔월추석에는 또한 죽을까 봐서 두려웁도다.)
이것은 울분을 토한 짧은 詩이나 통렬하다. 왜냐면 소「丑」자에 꼬리가 붙으니 尹자가 되기 때문이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嫁三十食
숫자를 나타내는 글자들이 순전히 한글발음과 어휘로 읽혀진다면 시가 의미하는 것은 아래와 같다.
(스무나무 아래에 앉은 설은 나그네에게 망할 놈의 촌에서는 쉰 밥을 준다. 인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에- 돌아가 내 집 설은밥을 먹음만 같지 못하다.)
먹는 것에 관한 문제가 항상 선행하고 있다. 아래의 詩는 各行이 한자의 「竹」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 단어의 「竹」대신 「대」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한글의 「대」는 「…하는 대로」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詩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장난을 유의하고 읽으면
此竹彼竹化去竹 賓客接待家勢竹
風打之打浪打竹 市井賣買歲月竹
飯飯粥粥生此竹 萬事不如吾心竹
是是非非付彼竹 然然然世過然竹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대」로,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대」로 부쳐 두게. 손님의 접대에는 집안형편「대」로 하고 장거리의 팔고 사는 건 시세「대」로 하렸지, 만사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그렇고 그런 세상을 그런「대」로 지나가세.)
김삿갓 詩集에는 한글의 글자모양으로 뜻을 알아내는 것이 몇 개 안된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의 詩는 무의미할 것이다.
腰下佩기억(ㄱ)
牛鼻穿이응(ㅇ)
歸家修이을(ㄹ)
不然點디귿(ㄷ)
「기억」은 낫이요, 「이응」은 코뚜레, 「이을」은 자기(己), 그리고 「디귿」은 꼭대기에 점이 없는「亡」자다. 이 글을 새겨 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다.
(네 허리에는「기억」자 낫을 차고, 쇠코에는「이응」자 코뚜레를 뀌었구나. 집에 가서 「이을」자의 몸을 닦아라. 그렇지 않으면 「디귿」자에 점을 찍고 망하리로다.)
이 시는 다르게 번역되어 다른 律들과 함께 구전되어 오는 것도 있다. 순수한 삿갓의 창작이 아닐른지 모르나 유머라는 같은 체제에 속한다.
윗트가 특색인 이러한 장르에서 훌륭한 솜씨를 보이는 것은 四言絶句이다. 이 형식은 후반부에서 두 개의 한자가 교대로 반복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도록 되어 있다. 한 글자가 몇 가지의 문법적인 기능을 할 수 있고 또한 두 가지 뜻을 가질 수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특이한 詩型이다. 예를 들어 是는 『…이다』라는 뜻과 『…이 옳다』의 두 뜻을 가지며 非는 『…아니다』, 혹은 『…그르다』를 의미한다. 시를 낭독해 보면 점잖지 못한 성(性)적인 말장난의 암시를 느낄 것이다.
年年年去無窮去 是是非非非是是
日日日來不盡來 是非非是非非是
年去日來來又去 是非非是是非非
天時人事此中催 是是非非是是非
(해마다 해는 가되 無窮히 가고 날마다 날이 오되 不盡히 오도다. 해가 가고 날이 오되 또 가서 天時와 人事가 그 중간에 생겨나도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함도 옳지 않지는 않으며 그르지 않은 것을 옳다고 하는 것이 그르지 않으나 옳은 것이 옳고 그른 것이 그르다하는 것은 옳지는 않다.)
문자의 반복 사용은 詩 자체에 기묘한 느낌을 부여한다. 삿갓이 지은 몇몇 시는 묘기나 매끄러움이 없어 이 기법을 쓰는데 이러한 二行連句에 깊이 감동되는 한국인들이 있다.
松松栢栢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소나무 잣나무 바위는 돌고 돌아 물이며 산이며 가는 곳마다 기묘하도다.)
이것은 金剛山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중의 하나이다. 더 교묘한 방식으로 쓴 것은 다음 것이다.
沙白鷗白兩白白
不辨白沙與白鷗
漁歌一聲忽飛去
然後沙沙復鷗鷗
(모래도 희고 갈매기도 희어 둘다 희니 白沙와 白鷗를 분별할 수 없도다. 漁歌一聲에 홀연히 날아가니 그런 후에 모래는 모래, 백구는 백구대로 되더라.)
관례적으로 내려오는 새와 꽃에 대한 이미지를 사용한 다른 시들은 收斂性을 시인의 특징으로 보이고 있다.
雪中梅寒酒傷妓
風前橋柳誦經僧
栗花己落방尾短
榴花初生鼠耳凸
(눈 속의 寒梅는 술에 취한 妓女같고 바람에 搖動하는 橋邊의 버들은 經을 외는 중같더라. 밤꽃이 떨어지니 삽살개 꼬리가 짧아진 것 같고 석류꽃이 처음 피니 쥐귀가 불쑥 들어난 形局이다.)
시인은 불교승과 儒學者들에게 조롱을 퍼부었는데 특히 그들이 그를 반가워 할 눈치가 아니면 더욱 심했다. 많은 근거에서 우리는 김삿갓이 우선은 아무 쓸모없는 여행자로 밖에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詩會에서 그를 환영하지 않는 주인들에 창피를 주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환영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敎科課程의 초기에 배우는 책 중의 하나, 孟子를 아직 읽고 있었다면 그가 결혼을 했건, 어른모자를 썼건 간에 불쾌한 찬사를 들었을 것이다.
方冠長竹兩班兒
新買鄒書大讀之
白晝猴孫初出袋
黃昏蛙子亂鳴池
(뿔난 冠을 쓰고 長竹을 문 兩班의 종자가 새로 孟子를 사서 크게 읽더라. 그 모양은 白晝에 원숭이 새끼가 처음으로 어미 배에서 나온 것 같고 글 읽는 소리는 황혼에 개구리들이 연못에서 어지러이 우는 것 같다.)
양반집 자제들은 십대에 혹은 더 어렸을 때도 결혼했으므로 생도가 아주 나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매우 어린 신랑을 보고는 시를 한 수 지었는데 주제의 가능성을 보아서라도 온유한 시라고 생각해야 한다.
畏鳶身勢隱冠蓋
何人咳嗽吐棘仁
若似每人皆如此
一腹可生五六人
(솔개를 무서워하는 身勢가 冠 밑에 숨으니 어떤 사람 기침 뱉어진 대추씨 같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두 이같이 작은 것이라면 한배에 五六人은 놓을 수 있을러라.)
그러나 動物과 한배 새끼라고 비교하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불친절한 집주인에게 삿갓이 지어준 무례한 作別詞 가운데서 開城에 사는 주인을 상대로 한 것이 가장 유명하다. 開成이란 이름은 李氏王朝가 14세기 말에 그곳에서 서울로 천도할 때 주어진 이름이다. 그전까지는 松都라고 불리웠으며 인근의 山은 松山이라 했다. 삿갓은 개성에 와서 음식과 잠자리를 얻을 수가 없으매 중국 古代의 지독한 황제 秦始皇에 개성주민들을 비유하여 그의 감정을 표출시켰다.
邑號開城何閉門
山名松嶽豈無薪
黃昏逐客非人事
禮儀東方子獨秦
(읍 이름은 성을 연다고 했는데 어찌 문을 닫으며 산 이름은 소나무 산인데 어찌 나무가 없다 하느냐. 날이 저물었는데 손을 쫓으니 사람의 인사가 아니며 예의 동방국에서 이곳만이 진시황같이 흉악하도다.)
남에게 모욕주기를 즐겨하는 그의 성질은 화를 내게 한다기 보다는 기쁨을 주는 게임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그는 回甲宴에 오게 되었다. 이러한 잔치는 古來의 한국 전통에 있어 한 사람의 일생의 절정이며 그의 아들들은 특별한 행사로 축하를 해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삿갓은 한 수를 지었다.
彼坐老人不似人
(저기 앉은 노인은 사람같지 않고)
하고는 아들들이 노하여 질책하자 말머리를 돌려 끝맺기를,
疑是天上峰眞仙
(天上에서 내려온 神仙인가 하노라.)
라 하였다. 그러므로 제 二귀절에서 그것이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해도 별반 놀랍지 않았다.
其中七子皆爲賊
(그 가운데 일곱 아들들은 다 도적이라.)
그리고는 詩를 마칠 때 변명하기를
偸得王桃獻壽宴
(不老長生의 천도복숭아를 훔쳐다가 회갑잔치에 드리었다.)
당시 사회상에 대한 풍자에는 더 이상 毒說이 있을 수 없다. 그가 그린 게으른 아낙네는 漢字를 한 글자도 몰라서 결코 이런 詩는 읽어보지 못할 것이다.
無病無憂洗浴稀 動身便碎廚中器
十年猶着嫁時衣 搔首愁着壁上機
乳連褓兒謀午睡 忽聞隣家神賽慰
手拾裙虱愛簷暉 柴門半掩走如飛
(병도 없고 근심도 없으되 빨래와 목욕이 드물어 십년을 하루같이 嫁時에 하여온 옷을 입더라. 포대기에 싼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매양 낮잠을 꾀하고 속옷의 이를 잡느라고 처마의 햇볕을 사랑하더라. 몸을 움직이면 부엌의 그릇을 깨뜨리고 머리를 긁으며 벽에 걸린 베틀을 근심하더라. 이웃집의 굿하는 소리를 들으면 사리짝 문을 반쯤 닫고 달려가기를 나는 것 같이 하더라.)
무당을 불러 마귀를 쫓거나 感謝祭를 지내는 따위의 式은 시골에서 특히 즐기는 일 중의 하나였으며 특별히 마련된 음식은 제사의 중요한 面貌이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接客이 그로 하여금 詩를 쓰게 했다. 이때에는 그의 감정이 표현되어 있되 諷刺는 들어 있지 않으며 그의 불평은 삶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終日綠溪不見人 光黑器皿虞陶出
幸尋斗屋半江濱 色紅麥飯漢倉陳
門塗女媧元年紙 平明謝主登前途
房掃天皇甲子塵 若思經宵口味幸
(종일 시내를 끼고 가되 사람을 보지 못할러니 다행히 小屋을 半江에 찾았도다. 문에는 女媧氏 元年때 종이를 발랐고 방은 天皇氏 甲子年에 먼지를 쓸었더라. 빛이 검은 그릇들은 舜임금때 그릇에서 나오고 빛이 붉은 보리밥은 漢나라 광에서 묵었더라. 날이 새자 사례하고 길을 떠났으나 혹 이날밤 지낸 것을 생각하면 입맛이 쓰더라.)
과객이 방랑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그는 결코 독신의 승려는 아니었다. 그가 妓女나 다른 여자들을 만났음이 이야기로 전해지고 또한 많은 시가 이를 주제로 하고 있다. 항상 노인의 행세를 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십대의 방랑은 어떤 매력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시에서 나비와 꽃같은 전통적인 이미지를 희롱에 대한 隱喩로 사용하곤 했다.
深香狂蝶半夜行
百花深處摠無情
欲採紅蓮南浦去
洞庭秋波小舟驚
(深香하는 狂蝶이 半夜에 行하니 百花가 깊은 곳에서 모두 無情하더라. 「紅蓮」을 캐고자 南浦로 가니 洞庭湖 가을 물결에 小舟가 놀라더라.)
매춘부의 이름 紅蓮은 에로틱한 比喩를 암시한다. 洞庭은 한국시에 자주 등장하는 중국 중원 지방에 있는 유명한 호수이다. 같은 주제가 좀 더 우아하게 그리고 더욱 직접적으로 취급되어 있는 것이 있다.
客枕肅條夢不仁 昭君玉骨胡地士
滿天露月照吾隣 貴妃花容馬嵬塵
綠竹靑松千古節 人性本非無情物
紅桃白李片時春 莫惜今宵解汝衣
(객으로 자는 벼개가 쓸쓸하고 꿈이 어수선한데 하늘 가득히 쓸쓸한 달빛은 외롭게도 비쳐 준다. 곧은 대와 푸른 소나무 같은 절개는 천고에 드문 절개요 붉은 복숭아와 흰 오얏꽃은 잠시동안의 봄빛이라네. 王昭君같은 미인도 죽어서는 뼈가 오랑캐 땅의 흙이 되고 양귀비같은 절색도 馬嵬坡의 한줌 티끌이 되었노라. 인간의 심정이 본시 무정한 것이 인매 오늘밤에 네 몸의 옷풀기를 섭섭히 여기지 말라!)
여기에조차 풍자의 기미가 있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貞節과 유교의 德을 상징하는 데 즐겨 자주 쓰이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詩心은 봄꽃의 특성을 고르게 평가하고 있다. 대체로 봄이 주는 연상은 愛情과 性慾이다. 그러나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은 서리와 용감히 맞서 이김으로 해서 때로는 고상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이 詩에는 中國歷史上의 가장 유명한 두 여인━━王昭君과 楊貴妃를 연관시킴으로써 일시적 無常이 강조되었다. 王昭君은 강제적으로 야만인의 신부가 되어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에서 죽었고 楊貴妃는 唐황제의 첩으로서 그녀의 美는 전설적이었으나 황제를 파멸로 몰아넣고 수행원에 의해 馬嵬에서 무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모든 여성의 미는 티끌로 化하는 거인데 왜 순결해야만 하느냐?
이러한 사항들은 個人의 색채를 띠기는 하였으나 역시 한국 李朝 후기의 대부분의 계급에 유행하던 약간 너저분한 일면을 提示하고 있는 셈이다. 심할 때는 삿갓의 漢詩는 거의 인쇄할 수가 없다. 그러나 愛慾에의 示唆는 빈번히 비틀린 타당성을 보여 준다. 妾을 데리고 사는 남자의 생활을 읊은 詩는 야유를 벌임기 없이 同情조차 보이고 있다.
不熱不寒二月天 開中笑時渾似品
一妻一妾最堪憐 翻身臥處變成川
鴛鴦枕上三頭並 東邊未了西邊事
翡翠衾中六臂連 更向東邊打玉拳
(마을 들뜨는 不熱不寒 한 二月 天氣는 一家에 共住하는 一妻一妾에게 제일 가련하도다! 남편과 더불어 원앙枕上에 누우면 세 머리가 列을 짓고 비취이불 속의 여섯 팔이 나란히 눕도다. 셋이 웃을 때에는 혼연히 品자가 되고 그 누운 形狀은 川字를 만들었도다. 東邊에서 끝나기도 전에 西邊으로 드러눕고 東邊으로 향하여 玉拳을 쳐 주며 위로하도다.)
원앙이 수놓아진 벼개와 비취이불은 옛부터 新婚침실의 상징이다. 品字를 이룬다 함은 네모 하나가 입을 가리키는 것이고 川字는 세 사람이 누워 있는 모양이다.
西歐人들에게는 糞便詩의 다른 종류라고 생각되는 것이 삿갓 詩의 다른 면모를 보인다. 즉 가정적인 주제의 선택이다. 삿갓은 관례적인 양식대로 일상생활에서 용납되는, 아름답고 고운 사물에 대해 詩를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는 늘상 사용하는 사물을 종종 시에 담았다. 그런데 韓國 古典傳統에는 이를 설명할 만한 요소가 있다. 즉 그들나름으로 위대한 시인이라고 알려진 李濟賢과 李奎報같은 중세 시인들이 그림과 동물, 까만 새끼 고양이의 재주, 모기의 습성에 대해 시를 지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즉각적으로 詩的인 영감이 오지 아니하는 것을 詩의 주제로 제시하는 것은 시짓기 경합에서 일종의 도전 형태이다. 이렇게 김삿갓도 溺缸(요강)에 대해 읊는다.
賴渠深夜不煩扉 堅剛做體銅山局
令作團隣臥處圍 灑落傳聲練瀑飛
醉客持來端膽膝 最是功多風雨曉
態娥挾坐惜衣收 偸閉養性使人肥
(요강의 덕분으로 밤중에 번거롭게 드나들지 않으니 편히 누운자리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매우 고맙더라. 술주정꾼도 가져다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어여쁜 婦女가 깔고 앉으면 살이 보일까 속옷을 걷도다. 堅剛한 그 몸은 銅山을 做倣하고 쇄- 하고 小便이 떨어지는 소리는 瀑布를 연상케 한다. 가장 공로가 큰 것은 비바람치는 새벽이고 모든 곡식의 거름이 되어 사람을 살찌게 하도다.)
만일 요강에서 아무러한 德이, 至高한 도덕적인 美德이 발견될 수 없었다면 이 시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慈悲하고 謙遜한 태도로 모든 사물을 대하여 거기에 詩的인 음악과 풍부함을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지니고 다닌 지팡이를 조그마한 詩로 옮기면서 그는 자기 삶의 방식을 엿보인다.
千里行裝付一柯
餘錢七葉尙云多
囊中戒爾深深在
野店斜陽見酒何
(十里행장이 다만 한 가지 短杖인 나의 신세에 남은 돈 엽전 일곱잎이 전재산이더라. 囊中에 있는 너 엽전에게 내 간곡히 경계하노니 깊이깊이 들어가 있거라. 夕陽에 野店의 주막에 가서 술이 당기면 어떻게 하는가.)
크고 작은 해충들은 십구세기 한국에 있어서 불가피한 존재였다. 우리는 삿갓의 시에서 파리와 이(虱)를 발견한다.
飢而吮血飽而擠 形雖似麥難爲麯
三百昆虫最下才 字不成風未落梅
遠客懷中愁午日 問爾能侵仙骨否
窮人腹上聽晨雷 麻姑搔首坐天臺
(주리면 피를 빨고 배부르면 떨어지니 三百 곤충 중에 가장 下等이다.遠客의 품 가운데서 午日을 근심하고 걸인에 배 위에 晨雷를 듣더라. 형상은 비록 밀같으나 누룩이 될 수 없고 글자는 風字를 이루지 못하니 梅花가 뭇 떨어지더라. 네게 묻노니 능히 신선의 仙骨에도 침노하겠느냐. 麻姑 할미가 머리를 긁고 天臺天에 앉았더라.)
이는 한자로 쓰면 「바람 風」에서 한 쪽이 떨어져나간 虱이다.
보들레르 만큼은 덜해도 김삿갓은 고양이를 보고 詩的 靈感을 여러 번 얻었다.
乘夜橫行路北南 貴客床前偸美饌
中於狐狸傑爲三 老人懷裡傍溫衫
毛分黑白渾成繡 邦邊雀鼠能驕慢
目狹靑黃半染籃 出獵雄聲若大膽
(밤을 타서 길 南北을 횡행하니 너는 狐狸와 더불어 三傑이 되었도다. 검정털 흰털로 고운 무늬를 수놓았고 눈은 노랑 자위에 푸른 동자가 박혔으니 半은 남빛일러라. 貴客 밥상에서 맛난 반찬을 훔치고 老人 품속에 들어가 溫杉을 걸치더라. 어디서 새나 쥐가 능히 교만은 피우느냐? 사냥나가는 호통이 들리지 않느냐!)
때로는 가정내의 일에 대한 그의 시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매력을 갖게 된다. 요리에 관한 것인데 하나는 송편, 또 하나는 花煎이다.
松餠은 납작하게 만든 쌀 반죽을 동그랗게 하여 만든다. 단물을 반죽에 넣고 반으로 접어 둥그런 가장자리에 오무린다. 통통한 모양이 된다.
手裡廻廻成鳥卵
指頭個個合蚌唇
金盤削立峰千疊
玉箸懸燈月半輸
(손에 놓고 뱅뱅 굴리면 새알이 되고 낱낱이 조개같은 입술을 맞추더라. 금쟁반에 천봉우리를 疊疊히 깎아올리고 옥젓가락으로 반달같은 송편을 먹더라.)
花煎은 야외 피크닉을 가는 이른봄에 만들며 얇은 밀가루 반죽을 놓고 자주빛 진달래 꽃잎을 누른다.
鼎冠撑石小溪邊
白粉靑油煮杜鵑
雙著挾來香滿口
一年靑色腹中傳
(작은 시냇가에서 솥뚜껑을 돌에다 고여 놓고 흰 가루와 푸른 기름으로 杜鵑꽃을 지지도다. 쌍젓가락으로 집어다 먹으매 향기가 입에 가득하여 一年의 봄빛을 뱃속에 전하도다.)
이런 종류는 他國에서 兒童을 위해 쓰여졌던 詩類와 가까워지는데 자기 그림자에 대한 다음 시가 그러하다.
進退隨儂莫汝恭 枕上若尋無覓得
汝儂酷似實非儂 燈前回願忽相逢
月斜岸面驚魁狀 心雖可愛終無言
日午庭中小矮容 不映光明去絶蹤
(진퇴하는데 나를 따르는 이가 너처럼 공손한 이가 없어 겉모양은 너나 내가 꼭 같으나 실상은 나 자체가 아니구나. 달빛이 언덕에 어른대면 놀란 도깨비형상이고 대낮에 들 가운데 있을 적에는 우스운 난쟁이 모양일러라. 베개 위에서 찾자면 찾을 수가 없다가 등잔 앞에서 돌아다보면 홀연히 만나도다. 마음은 비록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끝내 말이 없으니 광명이 없으면 영영 종적을 잃고 마는구나.)
삿갓에게 연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곱사등이에 대한 시가 야유인가?
人皆平直爾何然 臥如心字無三點
項在胸中膝在肩 立似弓形小一絃
回首不能看白日 慟哭千秋歸去路
側身僅可見靑天 也應棺槨用團圓
(사람은 다 平直한데 너는 어찌하여 그러냐. 목은 가슴 가운데 있고 무릎은 어깨에 있도다. 머리를 돌이켜도 白日을 잘 보지 못하고 몸을 옆으로 돌이켜 겨우 靑天을 볼러라. 누우매 心字에 세 점이 없는 것 같고 일어 서매 줄이 없는 활모양 같도다. 아- 千秋에 통곡할 일은 죽어서 돌아갈 때도 응당 둥근 棺槨을 쓸 게 아니냐.)
걸인의 시체를 보고 읊은 것은 전혀 비웃음이 없는, 더욱 연민을 자아내는 詩다.
不知汝姓不職名 一尺短笻身後物
何處靑山子故鄕 數升殘米乞時糧
蠅侵腐肉喧朝日 奇語前村諸子輩
鳥喚孤魂吊夕陽 携來一簣掩風霜
(路上에 쓰러져 죽은 乞人아. 내 네 姓名을 모른다마는 어느 곳 靑山이 네 고향이냐. 파리는 썩은 살에 모여들어 朝日을 분주롭게 하고 가마귀는 네 孤魂을 불러 석양에 吊喪하더라. 一尺되는 짧은 지팡이는 唯一한 遺物이요. 주머니에 있는 數升의 식량은 乞時의 糧食이로다. 앞 마을의 諸少年에게 부탁하노니 한 삼태 흙을 가져다 이 시체의 風霜이나 가려주게.)
이리하여 삿갓시인이 남긴 작품은 그가 그르다고 본 모든 것을 除外한, 한국 李氏王朝에 있던 삶의 기쁨과 슬픔을 대변한다. 이 시의 보헤니아니즘적인 가락은 옛날 中央아시아 지방에서 유목민의 생활을 하던 선조들도 귀를 기울이게 하고 지금의 한국 청년들에겐 여름 휴가에 無錢여행을 떠나도록 권장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산의 부름과 바위의 고요함에 감동하도록 만들고 있다. 사회에 대한 반항이 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改革하고자 하는 情熱이 부족하다.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비웃었다. 그의 사고방식은 禪이라 하는 것에 가깝다. 더 고귀한 일을 합리화하거나 가르침이 없이 다른 것으로 轉向하여 자신과 대중을 위로한다. 이것은 민중의 시인이 하는 방식이요, 김삿갓의 그것을 특이하게 韓國的인 표현의 樣式을 보인다. 李應洙가 진지하게 그러했듯이 그의 주제를 무슨 주의로 분석, 분류하여 하는 것은 문제의 核心을 잃은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인의 생활에서 터져나오는, 김삿갓이 지닌 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 나라의 높은 도덕적 미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道德家로서의 정신적 건강을 보장하는 자신을 웃어 버릴 수 있는 성질이다.
그러나, 그가 썼다고 하는 시에서 비롯하여 창조된 인물과는 다른, 삿갓이란 인물이 있다면 그는 또 하나의 전형적인 한국적인 특질을 진실로 가지고 있다. 삿갓은 재치있고 빈정대며 超道德的인 만큼 삿갓은 美에 대해 민감하다. 그는 금강산을 비롯, 팔도강산을 유람한 끝없는 여행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곳을 소재로 많은 시를 썼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에 나타난 유머만을 집중적으로 보아 왔으나 다른 면을 언급하지 않은 채 두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남원에서 한국 로만스 중에 가장 인기있는 春香과 몽룡이 처음 만난 정자를 보았을 때 시인은 대단한 감흥을 맛보았다.
南國風光盡此樓 千里-笻鞋孤客到
龍城之下鵲橋頭 四時笳鼓衆仙遊
江空急雨無端過 銀河一脈連蓬島
野濶餘雲不肯收 未必靈區入海求
(三南의 풍광은 이 廣寒樓에 다하였으니 바로 龍城 아래 鵲橋 머리에 솟아 있도다. 물없는 江에는 소나기가 끝이 없이 지나가고 들이 넓으니 구름은 늘 떠 있더라. 千里길을 孤客이 지팡이와 짚신을 의지하여 오르고 四時 風流소리가 그치지 않고 神仙이 놀더라. 은하수 한 줄기가 蓬萊島와 連해 있어 반드시 靈區를 바다에 들어가 구할 것이 아니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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