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가 친구이거나 연인이던 혹은 심지어 가족의 일원 이라 해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소 오만한 발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기분은 조금 우울하다.
나는 사랑에 빠져있고 그 사랑에 자신하고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내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 혹은 내 사랑의 방식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알고 있다고, 아니 이제 알 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또 나름대로의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이 산행을 마감하며 그러한 나의 모든 생각이 정말 오만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허상임을 알게 되었나 보다.
신륵사에서 영봉으로 오르는 초입은 상당히 완만하고 너무 정비가 잘 되어 마치 서울 근교의 유원지에 온 착각이 들 정도였다. 길 위로 떨어진 낙엽들은 반은 비에 젖고, 또 반은 아직 녹지 않은 눈에 덥혀 패잔병처럼 흩어져 있고, 그 떨어진 낙엽들을 쓸쓸히 바라보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경사가 가파르게 변하고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거친 숨소리만이 고요한 산속에 퍼지고 있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았음에도 춥지 않을까 하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을 만큼 날이 포근하다. 잠시 쉬어가는 모퉁이에서 뒤를 돌아보니 구름 사이로 빨간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그 해를 바라보는 가슴속에도 한줄기 빛이 들어오는 듯하다. 이른 아침 출발한 나의 하루가 충분히 길 것이고 비교적 여유롭게 이산과 이 자연을 만끽하리라는 설렘을 빨갛게 떠오르는 저 해가 증명해주는 듯하다.
마을에서 출발한지 2시간 30분만에 영봉 정상에 서게 되었다. 멀리 펼쳐진 능선과 구름들의 조화로운 모습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감히 내려다본다고 표현할 수 없는 그 경이로운 모습을 눈 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조용히 담아 갈 것이다.
해는 높이 떠서 세상을 비추고 있지만, 저 아래 구름 낀 골짜기 사이로는 아직 빛이 새어들지 못하는지 어둠과 적막함이 남아 잠든 듯 고요하다. 눈을 감고 얼굴로 그리고 몸으로 쏟아지는 초겨울 아침의 햇살을 그 순수하고 따스한 자연의 햇살을 느껴 보았는가? 그 햇살이 나의 몸을 덥히고 영혼도 덥히고 어느새 나는 그 산의 정상에서 혼자만의 자유로움에 충만하여 행복한 미소를 띄고 있다. 그래 나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가슴으로 전해오는 지금 이 느낌이 사랑이 아니라면 세상에 사랑은 없을 것이다. 엉치뼈가 시큰해지며 가슴이 뭉클하게 내려앉는 그런 사랑만이 사랑은 아닌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 수 있는 믿음과 여기 산이 있고 또 내가 서있음으로 오로지 두 발과 시선만으로 연결된 그런 사랑도 사랑일 것이다.
보덕암으로 향하는 하산 길은 예상보다 조금 길었고 지도상에 나타난 것 보다는 많이 거칠었다. 영봉을 지나 가파르게 이어진 중봉을 넘는 길은, 적당히 내린 눈으로 보이는 것 보다 훨씬 미끄러웠고 벼랑으로 내려진 철 계단은 시골마을 허름한 이발소에 그림으로 걸렸다면 나름대로 멋있었겠지만, 그 길을 걸으며 잠시 고개를 내밀어 보니 아찔한 낭떠러지에 현기증이 나며 오금이 저려왔다. 어느 정도 내려왔을까? 오랜만에 왼쪽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지고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신하던 사랑이 이렇게 빨리 식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오르기 전 그 설렘과 두근거리는 호기심이 사라지고 새로운 그리움이 찾아 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제 이산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마주치는 산이 있고 마음에 담아둔 산이 항상 있고 그래서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다음에 이 길을 다시 찾아 이 칼끝 같은 벼랑에 다시 선다 해도 기억은 남아있으나 어쩌면 생소하게 낯선 설렘일지 아니면 기억하는 그리움일지 알 수가 없다.
저 아래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온다. 반갑다. 살면서 개 짖는 소리가 반갑게 들릴 수도 있구나!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보덕암은 작고 조용한 절이다. 스님이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산을 오르며 지불하는 국립공원 입장료(문화재관람료)의 상당 부분을 절에서 떼어 간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나쁘지만, 그래도 이렇게 힘든 산행을 마치고 절로 들어서면 마음이 아주 넉넉하게 포근해진다. 그 산의 정상에서 만끽하던 햇살의 따스함과는 또 다른 여유로움과 모두를 용서해 줄 것 같은 너그러움이 절 속에 있는 듯하다. 등산화를 벗고 대웅전 옆 문으로 들어가 익숙한 방법으로 배를 올려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떠올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돌이켜본다. 그들에게는 행복을 그리고 나에게는 겸손함을 달라고 빌어 본다. 아니 어쩌면 겸손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파렴치한 놈이다. 그리고 내 잘못의 용서와 이해를 구해본다.
서울은 늘 그렇듯이 복잡하게 나를 맞아준다. 코를 파고드는 정체 불명한 서울의 냄새에 저절로 인상이 구겨진다. 언젠가는 영원히 떠나서 사리라는 꿈을 꾸어 본다. 후후 용서를.. 나를 포함한 이 서울의 모든 잘못에 용서를 구해보며 이번 산행을 마감한다. |
출처 : 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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