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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구)세상사 이모저모

빚 권하는 사회

by 현상아 2007. 5. 15.
최화수의 세상읽기 - 논설고문 동아대 초빙교수


내핍·절약도 헌신짝
'무대출'이면 팔불출(?)

'가치 투자의 달인' 워런 버핏 회장의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 주총. 세계 곳곳에서 2만7000명이 몰려든, 이른바 '오마하의 축제'인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버핏 회장과의 질의응답 시간. 켄터키에 사는 10세 소녀가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냐?"고 물었다. 버핏 회장이 답했다. "무엇보다 빚을 지지 않는 것이다."

같은 시각, 한국에선 "국민의 20%가 빚내어 살고 있다"는 현대경제연구원 보고서가 발표됐다. 우리나라 저축률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23.2%에서 지난해 3.5%로 급락했다. 지난해 소득 하위 20% 가구들은 월평균 36만 원의 빚을 끌어다 썼다. 빚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저소득층 가계부채가 위험수위에 이른 것. 빚을 지지 않아야 돈을 번다는 말이 이들에겐 얼마나 무색한가.

빚은 빚을 부른다. 지난해 가계빚은 무려 60조 원이 늘어나 562조 원에 이른다. 가구당 3640만 원이다. 빚을 끌어다 쓰는 것은 정부가 한술 더 뜬다. 참여정부 들어 국가채무가 무려 150조 원이 더 늘어나 작년말 현재 284조 원 규모다. 나라 빚이나 가계빚이나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정부가 앞장서 빚 지고 서민이 따라가는 꼴이다.

1921년 소설가 현진건(玄鎭健)은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한다. 일제 치하 조선의 지식 청년이 시대상황에 절망하여 술을 벗삼고 주정꾼으로 전락한다. 그 아내는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라고 탄식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술이 아니라 빚을 권한다. 자나깨나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것이 빚 권유하는 소리이다. 신용카드에서 고리사채까지 갖가지 유혹들로 요란하다.

"무이자 무이자 무이자…"-남녀 성악가가 오페라 아리아 부르듯 한다. 실은 돈 쓰기를 권하는 CF이다. CF나 CM송뿐이겠는가. 전단지와 명함광고, 문자메시지와 스펨메일까지 무차별적이다. 무이자(無利子) 무담보에 최단시간 대출… 이런 유혹들이 얼마나 달콤한가. 말대로라면 그야말로 '대출천국'이 아닐 수 없겠다.

바야흐로 '대출천국 대한민국'에서 대출 안 받으면 팔불출 취급이다. 빚 내서 집을 사야 부자가 된단다. 돈을 모아 집 사려면 집값이 너무 올라 어림없다는 것. 나라 정책도 장단을 맞춘다. 모기지론으로 대출받아 집 구입하고, 그 집으로 역모기지론 대출 받아 노후를 보내라는 것. 빚에서 시작, 빚으로 끝내자는 식이다.

이런 세상이니 너도나도 빚 무서운 줄 모른다. 잘 사나 못 사나 자녀들을 외국유학 아니면 어학연수 보낸다. 외식이며 해외여행 가는 것을 우습게 알고, 결혼할 때 한살림 차려주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소득은 제자리인데 씀씀이만 커진 것. 어쩌다 우리는 내핍과 절약의 미덕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쳐버린 것일까?

하지만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빚이다. 소득 대비 가계부채가 1.42배에 이른다. 한국은행은 주택가격 하락과 금리 상승에 따른 가계발(發) 신용위기를 이미 경고한 바 있다. 이 가계빚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1997년 외환위기, 2002년 카드대란에 이은 또 하나의 위기상황이 먹장구름과 같다.

높은 이자를 물면서 원금을 갚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카드빚의 종착점에서 끔찍한 범죄행위로 내몰린 사례도 흔하지 않은가. 서민의 소득을 늘려주기보다 소비를 조장하여 빚만 늘리는 정부의 정책부터 고쳐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절약과 내핍이라도 권장하고 나설 일이다.

수많은 서민들은 무거운 빚더미에 짓눌려 있다. 정부는 이들에게도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어야 한다. 어떻게 돈을 벌게 하겠는가? "빚을 지지 않는 것이다"-워런 버핏 회장이 그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정부는 저소득층의 소득을 획기적으로 높여주든지,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있는 묘안을 제시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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