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와 화순을 잇는 너릿재 옛길. 양옆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이 떨어져 길 양쪽 바닥을 하얗게 수놓았다. |
▲ 환산정이 있는 서성저수지. 서암절벽 앞의 수몰나무들이 가지마다 싹을 틔워 황홀한 풍경을 빚어낸다. |
▲ 대원사의 사철나무에 매어놓은 목탁. 머리로 목탁을 치면 마음을 닦을 수 있다니 이보다 쉬운 수행이 또 있을까. |
▲ 일일레저타운은 멋대가리 없는 이름과 달리 계절이 바뀔 때마다 황홀한 풍경을 빚어낸다. | | |
너릿재 넘는 옛길
광주에서 화순으로 넘어가는 고개, 너릿재. 이 고갯길을 넘으면 보성으로, 장흥으로 이어진다. 갑오농민전쟁 때 농민군이 무더기로 처형돼 ‘널(棺)재’로 불렸던 곳. 너릿재는 한때 털털거리는 시외버스가 숨가쁘게 넘었던 옛 길이다. 너릿재 아래로 터널이 뚫린 게 1972년의 일이니, 벌써 35년 전의 이야기다. 고개 밑으로는 차들이 맹렬한 속도로 달리지만, 옛 고개는 세월을 비껴 시간이 느릿느릿 간다. 이제는 쓰임새를 잃었고, 외지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아늑한 옛길에는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무성하다.
산길에서 마주친 김화자(여·61)씨는 대뜸 “너무 늦었다”고 아쉬워했다. 김씨는 “1주일 전만 해도 이 길이 환장하게 이뻤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이제는 볼 것 없다”고 했지만, 파릇파릇한 밝은 녹색으로 가득찬 산 길에 마치 눈이 내리듯 벚꽃잎이 흩날리는 풍경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김씨의 말대로 ‘환장하게 이쁜’ 벚꽃은 보지 못했지만, 바람에 화르르 지고있는 아름다움이, 만개한 꽃의 아름다움에 앞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너릿재는 차를 타고 넘을 수도 있지만, 걸어서 넘는 게 열 배쯤은 좋다. 느릿느릿 걸어야만 길 양 옆으로 피어난 들꽃이며 건너다 보이는 산들의 신록과 산벚꽃의 아름다움도 찬찬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길가의 벚꽃은 지고있지만, 지금 깊은 산의 산벚나무는 순백색의 꽃을 달고 가장 화려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너릿재는 정상을 기점으로 광주쪽은 포장도로고, 화순쪽은 비포장 산길이다. 포장도로는 오솔길을 아스팔트로 덮은 정도이고, 비포장도로라고 해도 잔돌이 깔린 평탄한 길이다.
어느쪽에서 넘건 상관없지만, 광주쪽에서는 길을 찾기 어려우므로 너릿재 터널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의 소공원에서 출발해 다시 넘어오는 길을 택하는 편이 좋다.
화순의 환산정
너릿재를 넘어서면 화순이다. 화순에서 보성쪽으로 길을 잡으면 주암호를 만나게 된다. 그 길의 중간쯤에는 마치 ‘비밀의 정원’처럼 숨어있는 정자 환산정이 있다. 처음에는 ‘남도 땅의 수 많은 정자들 중의 하나이겠거니…’하는 생각에 그저 지나치려 했지만, 길을 물으려 말을 붙인 마을 어귀의 촌로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먼 길 온거 거튼디, 여그는 꼭 보고가야 하지라”. 그렇게 속는 셈치고 찾아 들어간 길이었다.
환산정은 섬처럼 물 한가운데 있다. 농사를 위해 1967년에 제방을 쌓았다는 서성저수지. 우뚝 서있는 서암절벽 앞에 찰랑찰랑 서성저수지의 물이 가득 차있다. 물빛은 살을 벨 듯 푸르다. 수몰나무들이 물 밖으로 내민 가지마다 연초록 신록이 매달려 있다.
정자는 저수지 안쪽의 작은 섬의 나무들 사이에 세워져 있다. 가느다란 오솔길을 따라 물 가운데로 들어서면 그곳에 정자가 서있는 것이다. 밖에서 정자를 바라볼 때나, 정자에서 밖을 바라볼 때나 모두 기가 막힌 경치다.
환산정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정자로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백천 류함이 청주까지 진격하다가,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은거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안으로 끓는 울분을 삭힌 그는 ‘환산정을 짓고’란 제목의 시에서 ‘세상이 어지러워 처음 세웠던 꿈 다 그르쳤고 / 깊숙히 산수 좋은 곳에 만년을 의지하리’라고 썼다. 그가 만년을 의지하리라던 환산정은 당초 깊숙한 산중에 세워졌는데,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물 한가운데 서게 됐다. 산으로 둘러싸여있다고 해서 정자의 이름을 ‘환산(環山)’이라고 붙였지만, 지금은 물로 둘러싸여 있으니 ‘환수(環水)’란 이름이 더 어울릴 법하다.
정면 4칸, 측면 2칸, 단층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 그 앞으로는 류함의 절개를 상징하듯 소나무 거목이 물쪽으로 가지를 내뻗고 있다. 정자는 문화 류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한동안 입구를 철망으로 막아놓았다가 최근들어 개방했다.
저수지 주변에는 이곳의 경치를 알아본 눈썰미 좋은 이들이 별장을 지었다. 서울 근교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국적불명의 가벼운 날림식 별장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양식의 집들이 차분하게 들어서있다.
보성 대원사
주암호에서 가까운 대원사는 보성에 있지만, 화순에서 더 가깝다. 그래서 화순 사람들은 더러 ‘보성 대원사’가 아닌 ‘화순 대원사’라고 부른다. 화순에서 환산정을 지나는 15번 국도를 타고가다 주암호를 만나 물길을 따라 꺾어들어가면 5.5㎞에 달하는 벚꽃길을 만난다. 벚꽃은 절정을 이미 넘어서 낭자하게 꽃잎을 뿌리고 있다. 때마침 내린 봄비에 도로에는 젖은 벚꽃 잎들이 스티커처럼 붙어있다.
대원사의 나이는 1500살쯤. 아도화상이 서기 503년 봉황의 인도로 터를 잡았다는 구전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 서있는 절집이 그만한 나이를 먹은 것은 아니다. 여수·순천 사건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불탔고, 지금의 건물들은 대략 20여년 전에 세워진 것들이다. 절집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유려한 선으로 쪼아낸 불상의 모습이나 동자의 모습을 한 지장보살이 모두 털실로 짠 빨간 모자를 쓰고 있다.
어디선가 본듯한 모습.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서 만났던 인도 양식의 불상과 겹쳐진다.
대원사는 엄숙한 금기를 강요하며 꾸짖는 부성(父性)의 수행장소라기보다는, 포근하고 안온한 모성(母性) 영역에 더 가깝다. 그 때문인지 절집의 선은 부드럽고, 꾸며진 모습도 아기자기하다. 대원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바로 연지문으로 들어서는 길이다. 연못 옆에 서서 돌다리를 지나 연지문으로 들어서는 불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한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연지문 뒷편으로는 목련이 꽃잎을 활짝 열었고, 그 옆에는 핏빛 동백꽃이 툭툭 떨어지고 있다.
연지문으로 들어서는 길 양쪽에는 ‘세계 최대’라는 사철나무 두 그루가 서로 손을 맞잡고 있다. 나무에는 수박만한 목탁과 일반 목탁이 나란히 걸려 있다. 머리로 치는 목탁이라는데, 큰 목탁은 남을 위해서, 작은 목탁은 나를 위해서 치는 것이다. 한번 부딪히면 나쁜 기억이 사라지고, 두번 부딪치면 지혜가 밝아지며, 세번이면 원수도 용서하게 된단다.
주암호변 레저타운
일일레저타운. 이름이 참 멋대가리 없다 싶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진작가들이 모인다는 곳. 그곳이 바로 주암호변에 있다. 역시 화순과 더 가깝지만, 행정구역은 순천이다.
15번 국도에서 대원사로 가는 반대편 길로 가면 주암호를 끼고 도는 소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곳이다. 주암호로 흘러드는 물을 가둔 작은 저수지에 일일레저타운이 들어서있다. 그저 몇채의 건물과 야외테이블을 갖춘 정자들이 세워져있을 뿐이어서 ‘타운’이란 이름이 민망스러울 정도다.
민가가 드문 깊은 산중에 자리잡아 자연경관도 아름답지만, 이곳을 ‘명소’로 만든 것은 단연 저수지에 놓여진 다리다. 나무와 철제와이어, 철판 등으로 만들어놓은 다리는 섬 한가운데 정자가 세워진 작은 섬과 연결된다. 낭창거리는 다리는 그림같은 풍경에 강한 악센트를 준다. 물가 주변으로 세워진 정자들도 눈길을 잡는다. 휘어진 나무만을 골라 기둥으로 세워 지은 정자는 독특한 정취를 자아낸다.
이곳은 김계환(61)씨가 지난 1988년 송어양식장을 만들면서 가꾼 곳. 서울의 한 대학에서 교직원 생활을 하다가 고향근처로 낙향하면서 양식업에 손을 댔다. 그러나 ‘물이 맞지 않아’ 송어양식은 큰 재미를 못봤다. 그러다가 조경을 하고, 식당으로 전업했다. 그러나 깊은 산속의 식당을 찾아올 리 만무했다. 그렇게 어려움을 겪다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지금은 명소가 됐다. 그렇다고 식당영업이 잘 된다는 뜻은 아니다. 손님들이 풍광만을 즐기며 사진을 찍다가 훌쩍 떠나는 까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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