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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다큐멘터리 및

마타 하리

by 현상아 2007.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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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 하리(1876. 08. 07. ~ 1917. 10. 01.)

환상 illusion


[육군 장교로 양가의 자녀와 결혼하기를 희망한다]는 1894년 암스테르담의 한 신문 광고를 본 18세의 소녀인 마가레타 젤러는 "이제는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서 응모를 하였다. 하지만, 이 광고는 육군 장교의 친구가 그를 비웃기 위해서 장난친 것이었지만,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었다. 마가레타 젤러는 39세의 육군 대위인 루돌프 맥클리오드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마가레타 젤러는 루돌프 멕클리오드가 배속된 동인도 제도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마가레타 젤러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지만, 젊은 장교나 농장주들과 심심찮은 염문을 뿌렸다. 또한, 그는 동인도 제도의 종교적인 춤에 매료되었고, 이것은 후에 그에게 터닝 포인트가 된다.

남편인 루돌프 맥클리오드도 주색잡기에 탐닉하였고, 때로는 마가레타 젤러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 총알이 장전된 권총으로 아내를 위협한 적도 있었다. 아들의 유모를 강간하였고, 이 사실을 알고서 분노한 유모의 애인은 아들을 살해하였다. 후에 루돌프 맥클리오드는 유모의 애인을 목 졸라 죽이는 것으로 아들의 복수(?)를 하였다고 한다. 해외 근무를 끝내고 네덜란드로 돌아온 1903년에 마가레타 젤러와 루돌프 맥클리오드는 정식으로 이혼하였다.

만 28세이던 1905년에 마가레타 젤러는 네덜란드를 떠나서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가 파리에 간 이유는 단순히 "남자들로부터 도망친 여자들이 가는 곳이 파리라고 생각해기 때문"이라고 한다. 파리에서 댄서로 데뷔한 그는 에밀리 기메를 우연히 알게 되고, 그 인연으로 프랑스 최고의 동양 전문 박물관인 기메 박물관에서 오리엔탈 댄스를 상연하였다. 보석을 박아 넣은 브라자와 안이 다 들여다 보이는 의상을 몸에 걸치고서 춤을 추는 그의 모습에 관객들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또한 물랑루즈에서도 춤을 추기도 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말레이시아어로 태양을 뜻하는 여명의 눈동자라는 [마타 하리]로 개명하였다. 검은 머리칼과 크지도 작지도 않는 적당한 175cm의 키, 황금과 같이 빛나는 밀색 피부, 야무지게 생긴 얼굴에 젖은 눈동자 등 그의 외모는 이국적인 매력으로 넘쳐 흘렀다. "자신의 어머니는 인도의 한 사원에서 춤을 추던 댄서로, 그를 낳다가 죽었고, 그는 사원의 승려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힌두교의 신인 시바에게 바치는 신성한 춤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마타하리는 말하면서, "13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힌두교 사원의 제단 앞에서 누드 댄스를 선보였다"고 그럴듯하게 말하였지만, 사실은 그는 네덜란드의 평범한 시골에서 태어났고, 실제로는 인도네시아나 아시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한다.

그에 대한 소문은 이내 파리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가는 곳마다 그의 파격적인 춤은 화제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마자, 마타 하리는 연합군의 군사 기밀을 빼내는 스파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왜 그가 스파이가 되었는지, 그 이유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비밀 번호 H21이 된 그는 자신의 몸과 머리 등을 사용해서 첩보 활동을 하였다. 독일군 장교를 유혹하거나 애인인 러시아 장교의 환심을 사기 위한 돈이 필요해서 프랑스의 스파이가 되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어쨌던 그는 질투심과 욕망, 성욕 등을 교묘하게 자극해서 고관대작이나 장교들을 조종하였다.

하지만, 그는 1917년 이중 스파이 혐의로 프랑스군에 체포당하였다. 체포되던 당시에도 그는 호텔에서 알 몸인 채로 의자에 앉아서 미소로서 그를 체포하러 온 정보요원들을 맞이하였다고한다. 마타 하리는 섹스의 댓가로 돈을 받았지만, [군복]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군인들에는 무료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남자의 욕망을 이용하였지만, 실제로는 남자란 증오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애인으로는 각국의 장교들은 물론이고, 독일의 황태자, 항공회사의 사장, 네덜란드 평의회의 위원장 등도 있었다. 30 후반이 된 그는 17, 8세의 어린 소년을 애인으로 삼았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표명하는 모든 남자들에게 OK하지는 않았다. 식사 예절이 나쁘다는 이유로 군수품 브로커를 뻥 차버리기도 하였다. 마타 하리는 "솔직히 말해서 춤은 잘 추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은 것은 내가 처음이었기에 인기가 있었다."고 자신의 인기 비결을 밝히기도 하였다.

마타 하리와 관련된 자료는 18cm의 두께에 이를 정도였지만, 지금 현재 증거로서 남아 있는 것은 쓰잘데기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비밀 무기 - 눈에 보이지 않는 글씨를 쓰는 잉크가 사실은 섹스 후에 피임용으로 주입하는 수은이었다고 한다. 마타 하리의 이중 스파이 혐의와 관련된 재판은 파리 제3 군법 회의에서 다루어졌다. 애인 중의 한 명인 메틀 크뢰네는 그를 변호하였고, 외무장관이던 또 다른 애인인 쥐르 캉봉도 자진해서 증언대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그와의 관계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다른 애인인 고급 군인은 "그와는 일면식도 없기에 증인이 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재판정으로 편지를 보냈고, 마타 하리는 "나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니 정말 어이가 없다. 정말로 뻔뻔스러운 남자다."고 큰 소리로 비웃었다고 한다.

제3 군법 회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마타 하리가 빼낸 군사 기밀은 연합군 5만병을 죽일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1917년 10월 15일 새벽에 그는 눈가리개도 하지 않고 알몸으로 처형대에 올라서 41년간의 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형당하지 전에 그는 임신 여부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다(프랑스의 법에서는 임신부는 형의 집행을 모면할 수 있었다). 애인인 매틀 크뢰네가 그를 구명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서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이라고 증언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타 하리는 "그런 이유로 살아남기는 싫다."면서 임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마타 하리는 12명의 사수가 발사한 1개의 총탄 - 나머지 11발은 공포탄이었다 - 에 맞고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아름다운 알몸에 매혹된 한 명의 병사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던지, 사수 중에 그의 애인이 있어서 마타 하리를 대신해서 기총 소사를 맞았다던지 하는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사후에 추가된 거짓들이다. 게다가, 그의 애인이 총살대를 매수해서 그를 죽은 것으로 위장하였다는 이야기도 떠돌고 있지만, 근거라고는 쥐꼬리도 없는 거짓이다. 실제로는 마타 하리는 죽은 후에도 고독하였다. 마타 하리의 사체는 그 누구도 떠맡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해부용으로 의과대학에 기부되었다고 한다.

마타 하리, 그는 정말 이중 스파이일까? 제3 군법 회의는 유죄를 선언하였지만, 지금 현재까지 그가 독일군의 스파이였다는 명백한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의 사후에 나온 영화나 책 등으로 인해 그는 희대의 팜므파탈이 되었을 뿐이다. 그와 관련된 진실은 여전히 어둠 저편에 남아 있다. 그의 이름과는 달리 그는 태양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평론가인 이노우에 아츠오의 원문을 약간 편집한 글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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