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만사 이모저모/Health 119

혈관 조절해 암세포 잡는다

by 현상아 2008. 7. 10.

 

 

혈관 조절해 암세포 잡는다

암세포가 자리잡을 때 새로 생겨나는 혈관을 막아서 굶겨 죽이는 방법 개발 중…혈관 신생을 촉진해 심장마비 등을 막는 방법은 더 빨리 상용화될 것으로 보여

얼마 전 최준환(46)씨는 20여 년 동안의 교사 생활을 접었다. 당뇨로 망막의 중심부에 있는 황반에 혈관들이 자라나 실명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처음에 한쪽 눈에 여러 개의 미세한 물질이 보이더니 갈수록 사물이 뿌옇게 보였다. 이때만 해도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1개월도 지나지 않아 시력이 급격히 떨어져 사물의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는 바깥 부위를 덮고 있는 맥락막(안구혈관막)에서 혈관신생이 이뤄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었다. 만일 초기에 혈관신생 억제제를 사용했다면 실명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뒤늦은 후회에 땅을 쳐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 혈관신생을 제어하려는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뇌로 가는 혈액의 80%가 통과하는 목 부위 경동맥 혈관을 초음파 장치로 촬영한 이미지
최근 황반변성으로 실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미 녹내장과 백내장 등을 제치고 성인 실명 제1 원인으로 자리잡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00년 7631명이던 20∼40대의 황반변성 환자 수가 2004년 1만3673명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건양의대 김안과병원 망막센터 조성원 교수는 “서구식 식생활, 고도 근시, 자외선, 흡연 등으로 황반변성에 의한 실명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혈관신생을 억제하는 약물이 개발되고 있지만 손상된 세포를 제대로 되살리지는 못한다. 생활습관을 바꿔 위험인자를 줄이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의 치료법이다.”
 
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혈관
 우리 몸에 퍼져 있는 혈관의 길이는 12만5천km나 된다. 이들이 인체 곳곳으로 뻗어나가 생명현상에 필수적인 피를 전달한다.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정도로 긴 혈관의 실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겨우 피부를 통해 엷은 푸른빛이 감도는 굵은 혈관을 어렴풋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건강검진 과정에서 혈액을 뽑을 때 붉은 피를 품은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으면서 실체를 보곤 한다. 이때 혈관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혈압이나 콜레스테롤 등의 수치를 통해 혈관의 건강 상태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제대로 혈관의 상태를 살피려면 고가의 특수 영상장치를 이용해야 한다.


△ 한 생명공학연구소 연구원이 혈관신생을 억제하는 신물질을 실험하는 모습.

이렇게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혈관이 생명 현상을 이어가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한다. 특히 미세한 혈관이 형성되면서 암세포가 성장하기도 하고, 당뇨에 의한 실명 같은 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암과 망막질환, 자궁내막증 등이 나쁜 혈관이 과다하게 생성되는 질환이라면 심근 조직의 괴사나 허혈성 질환은 좋은 혈관이 사라지는 데서 비롯된다. 혈관신생이 많거나 적거나 문제인 셈이다.
 
서울대병원 김효수 교수(순환기내과)는 “혈관신생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방법을 찾는다면 많은 난치성 질환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아 가능성의 영역에 있다”고 말했다. 혈관신생이라는 용어가 낯설게 느껴지지만 전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인체에서는 끊임없이 혈관신생이 일어난다. 상처가 났을 때 모세혈관이 만들어지면서 부위를 아물게 하고, 여성들이 생리를 할 때도 새로운 혈관이 생긴다.
 
수정란 발생 과정에서 배아가 발달하는 것도 혈관신생에서 비롯된다. 이런 혈관신생은 정상적인 생리조건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성인은 모세혈관의 내피세포가 거의 분열하지 않는다. 설령 분열이 일어난다 해도 보통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린다. 다만 암에 걸렸을 때 종양세포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운반할 통로로 쓰일 혈관이 우후죽순 격으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혈관신생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현재 개발되는 혈관신생 관련 약물은 암 치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연히 인체에 해로운 혈관신생을 막는 물질이다. 1960년대에 암세포가 암의 진행을 빠르게 하려고 특이한 물질을 분비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혈관신생인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 하버드대학의 주다 포크먼 박사는 “암세포를 굶겨 죽이는 방법”을 제안한 바 있다.
 
암세포가 영양분을 공급받는 혈액이 들어갈 통로를 막아서 암세포의 전이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30여 년의 연구에도 암세포를 굶겨 죽이는 방안은 확립되지 않았고 일시적으로 굶기는 방안만 나왔을 뿐이다.
 
암을 조기에 진단할 수도
지금도 암을 잡는 혈관신생 저해제 연구에 연구자들이 몰리고 있다. 혈관신생을 억제하면서 종양에 의해 만들어진 혈관을 제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종양에 딸린 혈관은 구조적으로 혼란스럽게 얽혀 있으면서 부풀어오르는 등 정상적인 것과 차이가 있다. 특히 종양 혈관에 있는 ‘인테그린’(Integrin)이라는 분자는 일반 혈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에 따라 특정 단백질 분자로 인테그린을 구별해 정상 혈관은 그대로 두고 종양의 혈관만 파괴하려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종양의 혈관이 특정 단백질을 모두 가지고 있지 않아 손쉽게 공략하지는 못하고 있다. 현재 암에 맞서려면 약물에 의한 화학요법의 방사선 요법을 사용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치료법이 여러 암의 성장을 막을 수 있다 해도 일시적인 호전 이상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암세포의 사멸을 이끌어내는 혈관신생 저해제가 미래의 암치료에 쓰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게다가 혈관신생을 통해 암을 조기에 진단할 수도 있다. 종양에 의해 혈관신생이 일어나면 암의 임상적 징후가 나타나기 전에 혈관신생 분자들의 혈중 농도를 통해 암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각각의 종양에 걸맞은 혈관신생 저해제를 개발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 혈관신생 저해제는 종양제거에 널리 쓰일 것인가.현재 대장암과 자궁암 등에 효과가 있는 혈관신생 억제제가 시판되고 있지만 일시적으로 수명을 연장할 뿐이다.

이미 종양을 잡는 혈관신생 저해제가 개발돼 임상에 적용되기도 한다. 미국 제넨테크사가 개발한 ‘아바스틴’(Avastin)은 최초의 혈관신생 억제제로 시판되는 말기 유방암·대장암 치료제다. 혈관내피세포성장인자(VEGF)라는 혈관신생 조절 단백질을 표적으로 삼아 암세포에 혈관을 만들지 못하도록 한다.
 
유방암의 경우 기존 치료제인 ‘택솔’과 병용했을 때 평균 11.4개월 동안 종양이 신생혈관으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힘을 쓰지 못했다. 문제는 아바스틴의 생명연장 효과가 수개월에 지나지 않으면서 치료비가 많게는 한 달에 1천만원 이상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혈관신생 저해제의 효과를 의심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일반적인 환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치료약이면서도 적응증이 제한돼 있고 부작용까지 나타난다는 이유에서다.
 
혈관신생 저해제의 부작용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만일 혈관신생이 불충분하면 심장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는 혈액이 모자라게 된다. 이때 핏줄이 막히거나 줄어들면서 빈혈 상태인 허혈(虛血)에 빠질 수 있다. 이로 인해 심장마비가 생겼을 때 심근에 혈액을 공급하는 동맥에 혈액이 응고되어 막히면서 조직이 괴사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자칫 혈관신생 저해물질을 항암제로 사용하다 허혈성 심장질환에 노출될 수도 있는 셈이다.
 
막히는 고속도로 대신 국도 이용하듯이
새로운 혈관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이 암세포를 죽이는 데 널리 적용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견줘 혈관 생성을 촉진해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실용화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이뤄질 듯하다. 심장마비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환자의 심장에 새로운 혈관을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맥경화증으로 인한 허혈성 관상동맥 질환이나 말초동맥 질환, 버거씨병 같은 질환이 혈관신생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들 질환은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이 막혀 하혈 부위에 심한 통증이 나타나고 심장이나 다리가 괴사에 빠져 썩게 된다. 심지어 환자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한다.
 
실제로 심장이 허혈 상태인 심근경색증은 혈전이 용해되거나 제거되지 않으면서 심장운동을 맡은 심근의 일부가 괴사된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젊은 남성들이 걸리기 쉬운 버거씨병은 심한 통증과 궤양을 일으킨다. 문제는 상처에 감염이 생겨 잘 아물지 않아도 뾰족한 치료법이 없다는 데 있다.
 
이런 질병에 걸리면 혈관확장제나 혈류개선제, 콜레스테롤 저하제 등을 사용하지만 만족스러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래서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려고 풍선확장술이나 혈관 우회로술 등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환자들이 사지를 절단해야 하는 막다른 상황에 놓이곤 한다.


이처럼 막힌 혈관을 확실하게 뚫는 방법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만일 고속도로의 상습 정체 구간이라면 대체 고속도로를 뚫을 수도 있지만 인체의 혈관을 다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이용하는 방법을 인체에 적용하는 수밖에 없다.
 
거미줄처럼 얽힌 국도를 이용해 고속도로 정체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처럼 말이다. 미세한 대체혈관을 만들어 막힌 혈관을 대신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미 혈관신생 요법이 개발되기도 했다. VEGF 같은 혈관성장 촉진 유전자를 직접 투약하거나 혈관신생을 돕는 유전정보를 지닌 바이러스나 세포를 인체에 넣는 방식이다. 현재 혈관생성인자의 안전성과 효력을 검증하는 임상실험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VEGF를 비롯한 태반성장인자 등을 이용해 최적의 혈관신생 조건을 찾아내 적정 투약량을 결정하려는 것이다.
 
성인의 골수에 있는 내피 줄기세포를 이식해 혈관이 재생될 길을 열기도 한다. 서울대병원 심혈관센터 연구팀은 중증의 심근경색증 환자에게 유전자 재조합 ‘백혈구 증식인자’(G-CSF)를 주입해 말초 혈액에서 줄기세포를 분리해 관동맥에 투여했다. 이 실험에서 환자들은 심장의 수축 기능이 5%가량 향상됐다. 환자의 골수 줄기세포를 심근에 주입한 홍콩대학 심장 노화연구소팀의 실험에서도 심장 좌심실의 혈액 박출량이 4% 증가했다.
 
이런 사실은 골수 줄기세포가 심장조직을 재생하고 새로운 혈관을 생성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장기적인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치료 효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심장 수축 기능이 확인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10%가량 향상돼야 상업적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내피 줄기세포를 이식했을 때 휴지기 상태에 있던 작은 종양이 성장할 수도 있다. 미국 하버드의대 종양생물학 석좌교수 라케시 제인은 “혈관신생과 암이 밀접한 관계에 있어 위험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혈관이 생기면서 심장병을 일으키는 관상동맥판이 커져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밝혔다.
 
골수 줄기세포로 심근경색 치료 가능할까
국내에서도 시판을 위해 임상실험을 벌이는 혈관신생 유도제가 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고규영 교수(생명과학)팀이 2004년에 개발한 ‘콤프앤지원’(COMP-Ang1)이다. 이 물질은 건강한 혈관을 만들고 혈관내피세포의 손상을 막아주는 단백질이다. 애당초 고 교수팀은 건강하고 염증 없는 혈관을 생성하는 단백질로 족부궤양을 치료하려고 했다.
 
그런데 콤프앤지원이 국내에 3만5천여 명의 환자가 있는 만성신부전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신장병 치료제로 개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된 전임상실험에서 생쥐의 신장 모세혈관을 재생시키고 신장의 염증 반응을 억제해 신장병 진행을 막는 효과를 보였다. 아직까지 혈관은 제대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영상기법과 분자 실험의 발달로 종양의 비정상적 혈관 구조가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이미 혈관종이나 대장암 등에서 효과를 보이는 혈관신생 관련 ‘치료용 항체’가 여러 암을 한꺼번에 잡을 날이 다가오는 셈이다. 이때는 혈압 강하제만큼의 비용으로 종양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KAIST 고규영 교수는 “혈관신생 치료제가 만성질환 치료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한다. “일부 부작용은 있더라도 효과를 무시할 정도는 아니다. 언젠가는 안전한 경구용 치료약이 혈관을 다스려 암을 불치병 목록에서 뺄 것으로 기대한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