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6개월만에 와해된 반민특위(경향신문, 09. 1. 4)
올해는 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꼭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해방 후 민족적 염원을 담아 제헌국회에서 반민법이 제정되고 이듬해 1949년 1월 8일 화신 사장 박흥식 검거를 시작으로 활동을 개시한 반민특위는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출범 6개월 만에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1949년 6월 6일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사건이 그것인데, 백범 김구 선생은 이로부터 20일 뒤에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셨습니다.
요즘 저는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시절의 재판기록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지난 93년 도서출판 다락방에서 <반민특위 재판기록>을 영인본으로 출간한 바 있는데, 그 후 이를 번역하여 8년여에 걸쳐 한 잡지에 연재해왔습니다. 이걸 묶어서 책으로 출간하는 작업을 요즘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펴낸 영인본 자체가 총 17권이나 되다보니 번역본도 분량이 4~5권 분량이나 됩니다.
<반민특위 재판기록>. 총 17권으로, 권당 700여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어제도 저녁 늦게까지 교열작업을 했는데요, 한 대목에서 화가 치밀어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간단히 얘기하면 부산지역에서 헌병보로 활동하던 박종표(朴鍾杓) 라는 한 조선인이 이 지역에서 발생한 항일투쟁사건 관계자를 체포, 수사하면서 그 과정에서 항일 조선인들을 고문한 대목입니다. 더러 일제 당시 경찰의 고문 사례를 접한 적도 있습니다만, 박종표라는 이 자의 고문은 가히 기록할만 합니다.
아래 내용은 일제말기 항일사건에 연루돼 박종표로부터 고문을 당한 조영관이라는 분이 반민특위를 찾아와 박종표를 고발하면서 조사관에게 진술한 내용입니다. 아래 내용은 비단 이 분뿐만이 아니라 여러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진술한 내용이어서 신빙성이 아주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친일 경찰, 혹은 친일 헌병(헌병보조원 포함)들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받고 옥사했거나 혹은 큰 고통을 겪으신 지하의 애국선열들에게 삼가 머리 숙여 조아립니다.
반민특위에서 박종표에게 고문을 당한 조영관(曺永寬)의 '청취서' 첫 장
<청취서> (고발)
- 본적 : 부산부 아미동 1가 17번지
- 주소 : 상동
- 직업 : 목공업
- 성명 : 조영관 (曺永寬, 26세)
위 자는 단기 4282년 2월 27일 당 조사위원회에 임의 출두하여 아래와 같이 진술하다. 신상묵, 박종표의 소련계국제혈맹단사건(일명 ‘황학명 사건’)에 대해 고발하겠다고 요청함으로 취조한 바, 아래와 같음.
문-고발사건이 무엇인가?
답-‘소련계 국제혈맹단사건’인데 당시 江本(황학명의 창씨명)사건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문-고발인은 그 사건과 어떤 관계입니까?
답-본인도 연루자입니다.
문-사건의 내용은 어떤가?
딥-본인 등 연루자는 황학명을 중심으로 학병, 징병을 기피하고 민족적 의기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궐기할 결심 하에 중경으로 탈출하려는 계획이 탄로된 것입니다.
문-계획이 탄로된 단서는 무엇인가?
답-황학명이 제주도서 일본군 무전관계 부대에서 근무 시 이승만 박사의 조선독립에 관한 것이 발각되고 밀고(밀정은 일본명으로 坡平, 성명, 주소는 미상)로서 경북 안동에서 체포된 것을 계기로 동지 9명이 속속 피검되었습니다.
문-고발인이 피체된 경위는?
답-본인은 황학명을 중심으로 조국광복운동을 위하여 중경으로 탈출할 목적으로 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동지 3인중 서윤수와 자금조달을 담당하고 당시 부산부청 호적계에 근무하고 있던 박용달 동지와 모의하여 징병을 기피코자 허위사망신고를 제출, 처리케 하려다가 탄로된 것을 동기로 황학명 피체후 본인은 단기 4278년 1월 7일 부산 자택에서 박종표(일본명 新井源吉, 당시 부산헌병대 1등 헌병보)에 의하여 피체되어 부산헌병대 본부에 구검되었습니다. 피체 1주일 전 박종표는 부산부청 직원을 사칭하여 양곡 배급통장 조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문-피검된 동지는 몇 명입니까?
답-본인 등 9명입니다.
문-피검 후의 경위는?
답-1월 7일 피체된 후부터 동년 3월 13일 송치되기까지 약2개월간 본인은 동지와 같이 혹독한 고문으로 인하여 전신이 상하였으며 송치되어 부산형무소에서 미결 중 해방이 돼 석방되었습니다. (서윤수는 고문 결과 입원 후 병보석)그간 본인은 안질로 결국 형무소 내에서 왼쪽 눈을 실명하였습니다.
문-당시 헌병대의 사건 담당자와 그 역할은 무엇이었나?
답-이 사건의 전체적인 담당자는 신상묵 군조(軍曹, 현 중사 계급)였고, 고문은 신상묵, 박종표 두 사람이었는데 堤 군조와 大橋 조장 등도 가담하였습니다.
문-고문방법 등은 어떠했나?
답-곤봉, 죽봉, 죽검 등으로 난타하고 2, 3일간 굶기거나 잠을 재우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화로를 머리 위에 들고 있게 하고 두레박줄에 묶어 깊은 우물 속에 담구거나 이른 아침에 방화용 수조의 꽁꽁 언 물을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깬 후 결박한 채로 얼음물에 앉히고는 머리부터 빙수를 내리붓고는 거꾸로 매달아 전신을 얼음굴에 처박곤 했습니다. 이로써 실신하면 부채질이나 발로 차거나 불로 지지는 등 이루 상상할 수 없는 비인도적인 잔혹한 방법이었습니다. 박종표는 첫날 신문을 하면서 “너는 국적(國賊)이어서 살려둘 수 없으니 길거리에 끌고 다니며 대중들에게 망신을 시킨 후 죽이겠다”고 말하였으며, 압수한 사진첩 중에서 김원규(金原圭)의 사진을 보고 ‘누구냐, 어떻게 아느냐’고 묻길래 ‘나의 사돈이다’고 했더니 ‘독립운동의 동지가 아니냐, 자백하라’며 막심한 고문을 하였습니다. 이상의 고문으로 동상이 심하여 헌병대(유치장)와 본부(취조장)간의 왕래, 검사국, 형무소 등에는 맨발로 다녔습니다. 또 박종표는 피검자의 가정을 돌아다니며 ‘피검자는 국적으로 살아서 돌아올 수 없으니 이혼하고 개가(改嫁)하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조영관이 증언한 박종표의 고문 방법-1
고문 방법-2
고문 방법-3
문-피검 동지는 전부 송치되었습니까?
답-서윤수는 송치일 검사국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나머지 8명은 모두 송치되었습니다.
문-당시 송치된 동지들의 경위는?
답-황학명은 동경 武藏野무선전신학교 고등과 출신으로 일본군 제주도 무전관계 부대 근무 시 동지를 규합, 조국광복운동을 고취, 동지의 만주 및 중경 탈주를 추진하기 위하여 상삼봉, 만주 錦州(동지 3인 거주) 등을 수 차례 내왕, 부산과 중국간의 연락을 취하였고, 단파수신기에 의한 이승만 박사에 관한 방송을 유포하였는데 尹모의 밀고로 그 후 경북 안동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추교진은 동경 재학 시 학병기피 등으로 북해도로 탈출, 그 후 귀가하였다가 밀양서 체포되었습니다. 서윤수는 만주 금주에 거주하면서 자금조달을 하다가 부산서 체포되었으며, 이창석은 만주 금주서 토목 건축업을 하면서 하얼삔 육군(부대) 공사 중 지하시설 공사를 누설하여 만주서 체포되었습니다. 김우준은 만주서 피체되었으며, 신동균은 온양을 경유, 부산서 체포되었습니다. 박용달은 부산 호적계 재직 중 본인과 신동균이 모의하여 허위 사망신고를 처리, 그 후 大阪으로 징용 갔다가 대판서 체포되었습니다. 洪모도 대판에서 체포되었으며, 고문 후 형무소에서 빈사상태가 되어 병보석 되었습니다.
문-당시 죄명은 무엇이었습니까?
답-치안유지법 위반 외 외국위폐관리법 위반, 육해군 형법 위반, 공문서 위조, 인감 위조, 전시 도망죄, 국민총동원법 위반, 유언비어 (유포), 체신법 위반 등이었습니다.
문-사건명 등 기타에 대해 말하시오.
답-취조당시는 ‘江本사건’으로 통용되다가 그 후 신문발표 등으로 소련계국제혈맹단사건으로 불렸는데 이는 신상묵이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소련계’라는 것은 황학명이 동경서 재학시절 소련영사관에 우유배달을 한 관계로 붙여진 듯합니다. 당시 가장 중대시 하고 그렇기 때문에 고문도 최고로 심했습니다.
문-김원규에 관한 것은 어떤 사건입니까?
답-김원규가 주동한 사건인데 김원규는 박종표와 동래중학 동기동창생으로 동경서 해군항공기술양성소를 마치고 진해 해군 항공창 기사로 근무하던 유능한 청년이었는데 당시 동 항공창 폭파계획이 탄로돼 피검 후 징역5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연계자가 약 20명 정도라고 하며 사건의 담당자는 신상묵(진해 헌병분대 근무 시)이며, 신상묵이 부산헌병대로 전근 후 부산헌병대에서 약2개월간 계속 고문하였는데 그 때 박종표도 관여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위 본인에게 열람시킨 바 상위 없다 하고 서명 무인함.
공술자 조 영 관
단기 4282년 2월 27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김 지 홍
입회인 서 기 임 봉 재
끌려가는 친일파들. 가운데는 경방 사장 김연수, 마지막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나중에 변절한 최린.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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