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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구)세상사 이모저모

순장 殉葬- (장례)

by 현상아 2009. 4. 27.

순장 殉葬- (장례)

 

지배층에 속한 인물을 장사지낼 때 주변 사람들을 함께 묻는 것.
순사(殉死)·순송(殉送)이라고도 한다. 자진해서 죽는 경우도 있었으나 강제로 묻히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산 채로 묻는 일도 있었으나 죽여서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말이나 개를 함께 묻는 것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순장은 사회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뉜 뒤 고대 초기에 널리 유행한 장례풍속이었다. 고대 오리엔트 지방이나 초기 그리스 사회 및 중국·일본을 비롯해 우리나라에서도 행해졌다. 오리엔트 지방의 경우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우르(Ur) 유적 무덤에서 순장사실이 다수 확인되었고, 초기 그리스의 경우도 호머의 〈일리아스〉에 묘사된 바와 같이 노예가 개와 함께 화장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풍속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주로 은(殷)나라 때 성행하기 시작하여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을 순장시킨 무덤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 풍습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면서 급격히 쇠퇴했으며, 이후 예외적으로는 청대(淸代)까지도 유제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는 고대사회 초기에 성행하다가 차츰 사람을 대신해서 하니와[埴輪:흙인형]를 부장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고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유적으로 순장사례가 증명된 것은 드물다. 따라서 일본의 경우 아직까지 순장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초기 고조선과 관련된 유적인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에서 각각 100여 명이 넘는 순장사실을 확인했다. 〈삼국지〉 위지 부여전에 의하면 "부여 풍속에 제가(諸加)의 장례 때는 사람을 죽여 순장하며 많을 경우 100여 명에 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 동천왕이 죽어 장사지낼 때 가까운 신하로서 따라죽고자 한 사람이 많아 금지했으나 묘소에서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라는 기록이 있어 자발적으로 죽는 경우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신라에서는 502년(지증왕 3)에 금지되기 전까지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했음이 확인되어 우리 고대사회에서도 널리 행해지던 장례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인 조사를 통하여 순장사실이 확인되는 경우는 양산 부부총(夫婦塚), 경주 황남동 98호분, 의성 탑리고분 등이 있다. 특히 가야지역 고분에서 많은 사례가 발견되는데 창녕 계성리 고분, 고령 지산동 32·34·44·45호분, 고령 본관동 고분군, 동래 복천동 11호분 등이 대표적이다. 순장을 하는 풍습은, 지배층은 죽어서도 살아서와 같은 생활을 누려야 한다는 믿음에 뒷받침되어 행해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반적인 풍습으로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고대사회에서 피지배층이 처한 사회적 지위와 관련이 깊다. 즉 지배층에게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장악당한 다수의 피지배층이 존재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고대사회의 지배체제가 집권화됨과 아울러 생산력이 발달하고 노예노동이 중시되는 한편 피지배층의 지위가 향상되면서 순장은 서서히 소멸되어갔다. 특히 불교가 수용되어 죽음에 대한 관념이 이전과 전혀 달라지면서 더이상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자료출처 : 다음 백과사전

 

 


[제21회]
[17세 가야소녀는 왜 순장당했나?]


▣방송 : 2009. 4. 27(월) 23:30~24:15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신재국 PD
▣글 : 김근라 작가

 

2007년 창녕 송현동 15호분의 발굴현장.
3~5세기 가야 최고 수장급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 안에서 네 구의 순장인골이 발견되었다!
그 중 가장 온전한 인골은 17세 소녀로 추정된다.
죽은이를 위해 산사람을 함께 묻는
잔혹한 고대의 장례풍습 순장.
1500년 전 가야 소녀의
순장 인골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순장의 증거들

학계에서는 순장을 한 봉분 안에 동시에 묻혔으며 추가장의 흔적 없어야 하고 순장자는 강제로 묻히며 주피장자와 확연한 종속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송현동 15호분 발굴팀은 순장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고분의 외부부터 내부구조까지 스캐닝을 통해 정밀 분석에 들어갔다. 송현동 15호분의 봉토는 1500년 전 조성 당시 그대로로 추가장이라면 발생했을 교란이 없었다. 그리고 인골과 유물의 배치도 추가로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순장 무덤이 확실했다.

네 구의 인골은 순장자였다.
   -그 중 한 명은 17세 가야소녀!

창녕 송현동 15호분의 인골을 수습한 결과, 순장자는 네 명이었다. 세 구의 인골은 도굴꾼들로 인해 훼손되어 2~30대라는 연령과 성별만이 드러났지만, 북벽에 위치한 온전한 한 구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정보를 내놓았다. 인골의 넓적다리 뼈를 통해 대략의 키를 추정한 결과 150~160㎝정도의 키를 가졌다. 치아는 다 발달이 되지 못했고, 성장판조차 닫히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 온전한 인골을 10대 가야 소녀라고 결론지었다.
▲송현동 15호분에서 발굴된 온전한 순장인골 ▲부장된 유물과 세구의 순장 부분 인골

왕과 함께 묻힐 수 있는 자, 누구였을까?

송현동 15호분의 순장자들은 기존의 가설처럼 전쟁 포로나 미천한 계급의 노비가 아닌 죽은이의 가장 측근의 인물들로 ‘리스트’로 선별되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순장 유골과 부장되어 있는 철제관식이나 마구류, 무기류, 금제장신구들은 순장자가 관리, 마부, 호위무사, 시종 등의 주변인들이었음을 알려준다. 즉, 순장된 사람들은 중간계급 이상의 신분이 낮지 않았던 가야인들이었던 것이다.
▲송현동 15호분에서 발굴된 장품(왼쪽부터 토기, 마구류, 금제세환)

좀 더 정확한 단서를 얻기 위해 순장자들의 인골에 축적되어 있는 음식의 기록을 통해 생전 식생활 분석, 식생활 수준을 알아보았다.

순장자는 왜, 어떻게 죽음을 맞았을까.

인골 수습 당시, 발굴팀은 인골의 형태와 누운 자세를 주의 깊게 살폈다. 인골들은 매장 당시 그대로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간격이었다. 이들은 생매장이 아니라 죽은 후에 묻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죽은 이를 위해 주변의 이들을 죽여 함께 묻은 것일까? 현세의 삶은 죽어서 저승에서도 지속된다. 이것은 가야인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래서 실생활에 필요한 유품들과 측근 사람들까지 죄다 무덤 속으로 안고 들어갔던 것이다.


고대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던 순장의 풍습은 가야권을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순장의 폐지는 어떤 국가 혹은 지배집단의 권력의 강도가 약해짐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한 단계 더 성숙한 국가로 성장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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