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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및

모딜리아니의 사랑...

by 현상아 2006. 9. 4.

이번 회에는 화가들의 모든 연애담들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로 기록되는 모딜리아니의 러브 스토리를 이야기해 드릴까 합니다. 서른 여섯 살의 나이에 가난과 마약, 알코올 중독에 찌들고, 결핵까지 걸려 피를 토하며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절절한 사랑이야기는 그의 작품 만큼이나 유명하지요. 살아서는 아내에게서만 사랑을 받았으나 죽어서는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슬픈 운명의 화가, 모딜리아니. 그의 사랑은 파리의 전설로 불리고 있습니다.

니체의 <신곡>을 외우며 자신의 작품에 <신곡>의 한 구절을 쓰기도 하던 그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자는 <신곡>에 등장하는 여인과 같은 이름이었던 베아트리스 였습니다. 어쩌면 그 이름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는 지도 모르겠네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였던 그녀와 전쟁 같은 사랑을 나누던 시기는 바로 1차 대전으로 전 유럽이 전쟁 한가운데 있을 때였습니다.

술과 창녀들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에게 예술가로서의 감성을 일깨워준 그녀는 지적이고, 우아한 교양을 추구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림을 그리세요. 당신은 화가니까.” 라는 그녀의 한마디에 모딜리아니는 자신있게 붓을 들었고, 그녀는 곁에서 그녀만이 줄 수 있던 영감을 그에게 불어넣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독히 가난했던 그들의 생활과, 너무나 열정적이었던 그들의 정서는 자주 불협화음을 만들었습니다. 유치한 그들의 싸움은 처음엔 단순한 말싸움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모딜리아니에게 흠뻑 두들겨 맞기도 했던 베아트리스는 그를 자신의 집에서 내쫓았고, 결국엔 말 한마디 없이 영국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는 지옥 같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이제 막 그림 공부를 시작하던 열 아홉의 순진했던 소녀 였습니다. 우연히 파리의 한 술집에서 마주친 그녀의 미소에 모딜리아니는 가슴이 아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지요.

보수적인 카톨릭 집안에서 엄격하게 자란 잔느 에뷔테른느는 열 네살이나 연상이면서 병들고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던 그와의 결혼 허락은 꿈꾸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동거를 시작했고 곧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천사 같은 그녀는 모딜리아니를 천국으로 인도했고, 그는 그 곳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을 시작했습니다. 그만의 초상화 스타일들이 그 시기에 완성되었고, 대부분의 그림들이 그 시기에 제작되었습니다. 물론 모델은 잔느였구요.

야자나무 열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잔느는 순결하고 고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리고 그녀만의 완전한 사랑으로 상처투성이인 그의 인생을 치료하였습니다. 모딜리아니는 마약을 끊었고, 술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다툼도 줄였고, 이전의 방탕했던 모든 생활을 접었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배는 고팠지만, 그들은 충만한 행복감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했던 삼 년 동안 스물 여섯 점이나 되는 잔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와 그녀는 사랑을 나누었고,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위대한 천재화가의 운명은 비극적으로 끝나고 맙니다. 평생을 괴롭혀온 결핵과 뇌막염으로 인해 모딜리아니는 1920년 11월 차갑고 거친 그의 작업실 안의 더러운 침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잔느는 야수처럼 그의 시체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아무리 친구들이 잡아 떼어도 떨어질 줄 몰랐으며 오래도록 입맞춤을 합니다.

한참 후에 병원 문을 나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6층이었던 자신의 집 창문에서 뛰어내려 천국에 있을 남편의 영혼을 따릅니다. 9개월된 뱃속의 아이와 함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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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의 초상 (1918)]
모딜리아니는 긴 목과 긴 얼굴, 그리고 우아한 자태를 특징으로 하는 잔느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 데요. 특히 어디를 바라보는 지 알 수 없는, 모호하고도 신비로운 그녀의 눈빛은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잔느와 함께 하는 시간이 그의 인생의 황금기였듯, 잔느가 등장하는 그의 그림들도 그의 대표작들이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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