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프리카공화국 보카사 대통령②
아프리카 현대사에서 최악의 독재폭군으로 꼽히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보카사 황제, 그는 17명의 부인과 56명의 자녀를 둔 호색가였다.
1965년 군참모총장이었던 보카사는 당시 자신의 사촌형이었던 다코 대통령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보카사는 자기 나라에서 가장 다수 종족의 가문 출신으로 교육받은 에리트층이었다. 청년 시절에는 세네갈의 생 루이(St. Louis) 프랑스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가했다. 아내 중 베트남 여성이 끼어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1977년 12월 4일 초호화판 황제대관식이 수도 방기 시내의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대관식을 위해 이 나라 총예산의 절반인 약 2억달러을
썼다. 황제의 의상은 나폴레옹 황제가 착용했던 것과 같은 모양의 모자와 신발을 파리에 주문해 만들었다. 대관(戴冠)을 위한 황관(皇冠)의
제작비만 해도 무려 미화 5백만달러가 들었다. 황비는 물론 새로 맞아들인 아랍계 신부였다.
보카사는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괴기한 통치수법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1971년에는 어머니날을 기해 모든 여성 죄수들을 석방하고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성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같은 해 모든 절도범의 귀를 잘랐다. 그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전국
중-고교생들에게 교복착용을 명령했고 자신의 부인이 이를 독점적으로 공급했다. 교복값은 물론 시중 가격보다 훨씬 더 비쌌다. 학생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시위를
벌였으며,
급기야는 대학생까지 합세하여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보카사는 데모 진압 과정에서 학생 200여 명을 학살했다. 이런 폭군에게 당시 프랑스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옛 정의를 생각하여 특사를 파견, 보카사에게 선정을 베풀 것을 충고했다. 그러나 보카사는 "황제에게 감히 대통령 따위가
간섭을 한다"며 프랑스 특사를 물리쳤다.
보카사 황제는 대관식에 지출한 과도한 비용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1979년 가을 리비아 카다피 국가원수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출국했다. 이런 기회를 노리고 있던 프랑스는 방기 주둔 자국병력 1,300명과 불만을 품고 있던 이 나라 군인들과 합동으로 보카사 정권을
타도하고 다시 옛날의 다코 대통령을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보카사는 다급한 나머지 프랑스로 항공기의 기수를 돌려 망명을 요청했으나 매정하게
거절당하였다. 그는 항공기에 탑승한 채 10시간 이상을 공중선회하다, 간신히 코트디브와르 정부의 착륙 허가를 얻어 아비장에서 떠돌이 망명생활을
했다.
독재폭군 보카사가 실각 직후 파리에서 발간되는 저명 주간지 〈엑스프레스〉는 "보카사의 별장 냉장고에서 사람의 넓적다리가 나왔고, 연못에는
악어 두 마리가 있었는데 사람 뼈가 거기서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이 때문에 보카사는 식인종이라는 설이 유포되기도 했다. 당시 이 말을
전해들은 외교소식통들은 보카사가 많은 아내를 거느리기 위해 인육을 정력제로 즐겨 먹었을 것이라고 수군대기도 했다.
유종현〈한양대 문화인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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