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 그 끔찍한 역사 1편"을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스레브레니차(Srebrenica) 대학살
1992년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이슬람계 43%, 세르비아계 35%, 크로아티아계 18%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 1991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고 연방을 이탈하면서 유고 연방은 와해되기
시작, 이어 1992년 세르비아계가 많이 살고 있는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포하면서 세르비아계와 이슬람계간의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했다.
보스니아의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유고로부터 독립을 원했지만, 세르비아계는 더 이상 연방이 산산히
와해돼 ‘대세르비아’가 무너져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후 벌어진 4년 동안의 보스니아 내전은 25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인구 400만명 가운데 40%가 난민화하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결국 UN 평화유지군이 보스니아 내전에 개입,
무력에 의한 중재에 나섰다.

스레브레니차(Srebrenica)는 세르비아 군대가 점령지에 섬처럼 둘러싸인 이슬람계
거주지역이었다. 세르비아 군의 잔학한 인종청소를 막기 위해 UN 평화유지군이 안전지대로 설정, 보호하고 있었다.
보스니아
내전 발발 3년째인 1995년 7월11일, 세르비아계 군총사령관인 락토 믈라디치 장군이 이끄는 세르비아 군대가 스레브레니차로 진입.
이후 5일간 이슬람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2차 대전 이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인종청소를 자행한다.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한 믈라디치는 여자들을 차에 태워 이송시키며, 모두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남자 가족들과는 나중에
만나게 해주겠다고 공지했다.
 학살을 위해 주민들을 분리하는 학살의 주범,
믈라디치.
그러나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믈라디치의 군대는 스레브레니차의 모든 남자들을 60대 분의 대형 트럭에 태워
처형 장소로 압송,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살육을 시작한다.
 스레브레니차 피난 행렬을 향해 발포하는 세르비아 탱크.
희생자의 대부분은 손발이 묶이고 눈이 가리워진 채 기관총으로 난사당해 죽었고, 시신들은 불도저로 밀어 구덩이에
매장시켰다. 나중에는 총알이 떨어졌는지, 상당수의 희생자들을 그냥 불도저로 밀어 생매장시키기도 했다.
세르비아 군은 학살을
즐겼다. 이들은 점령지로부터 도망가던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시키다가 죽였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코와 입술과 귀 등이 잘리는 무시무시한
고문을 당하지 않으려 자살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피난가는 여성의 아이가 울자 시끄럽다며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이 모는 앞에서) 목을 잘라
죽이기도 했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도록 강제하고 그 장면을 즐기기도 했다.

 살육의 현장 발굴 장면
이때의 학살극으로 8천명의 이슬람계 남자들이 살해된 것으로 공식 집계. 그러나 암매장 됐다가 발굴된 주검 수만
2만여구, 아직도 1만 7000여명은 실종상태로 기록됨.
이런 무시무시한 대학살극이 자행됐음에도 유엔 등 국제사회는 학살을
방관하다시피 했다. 스레브레니차에 주둔했던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은 100여명에 불과했고, 세르비아의 침공 당시 지원 요청에도 아무런
응답을 보내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슬람계 보스니아인들을 선별해 넘겨주기까지 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네덜란드 정부는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에 대한 자체 보고서가 나온 후 내각 총사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다.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의 주범, 믈라디치와
카라디치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믈라디치와 세르비아계 지도자인 라도반 카라디치 등 10명은 세르비아 정부
등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고 10년째 도피 중이다.
르완다 대학살
르완다 지방은 투치족과 후투족이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던 땅이었다. 그러나 벨기에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르완다를 침공하면서 1916년부터 1962년까지 40년 가까이 르완다를
식민 지배했고,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철저한 종족 분리정책을 폈다.
 가장 많은,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던 르완다 키갈리
지방
벨기에는 소수인 투치족에게 종족적 우월성을 부여하고, 종족의 실체를 엄격히 분리하는 신분증을 발급했다. 벨기에는
한쪽에만 경제와 교육의 특혜를 베풀면서, 투치족과 후투족의 반목을 키워갔다. 르완다 종족 간 내부 반목을 확대함으로써 민족 간의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식민 지배의 합리화 명분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지배방식은 이미 영국에 의해 정착된 다단계 식민지배 정책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지독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다수의 후투족 반발과 분노는 수십년간 누적됐고, 1959년
대규모 항쟁이 벌어지는 등 두 부족은 끊임없는 유혈극을 벌이게 된다.
1962년 르완다가 벨기에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고 1970년대부터 다수의 후투족은 정권을 잡기에 이른다. 후투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하바리마나 대통령이 집권한 뒤로 르완다 정권은
후투족의 권익 신장,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투치족의 세력을 억누르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1994년 4월 하바리마나 대통령과
후투족의 수장이 탄 비행기가 테러에 의해 격추돼 둘다 즉사. 이는 과거의 영화를 되찾으려던 투치족의 정치세력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인
것으로 밝혀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르완다는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대학살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자신들의 정치적 지도자가 투치족에 의해 암살된 것을 목도한 후투족들은 수십년간 쌓아왔던 분노를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후투족 민병대들은 곧바로 투치족을 가리지 않고 살육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투치족 뿐만 아니라 평화와 타협을 주장하는 후투족
정치인까지 모조리 학살했으며, 심지어 학살에 동참하지 않는 동족들까지 가리지 않고 죽였다.
르완다는 전국적인 살육 광란에
빠져들었고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불과 3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80만명에서 100만명에 달하는 투치족과 후투족 온건파들을 살육했다.
후투족들은 투치족의 남자, 여자, 어린이들을 가리지 않고 눈에 띄는대로 잡아 죽였는데, 대부분 벌채용 칼로 무자비하게 몸을 절단해 죽였다. 특히
교회와 같은 넓은 건물 안으로 사람들을 몰아 넣고 불도저로 건물을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건물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은 역시
벌채용 칼로 내리쳐 죽였다.
 약 3달동안 르완다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시체를
묻을 수가 없었다. 당시 르완다 도시 전역엔 시체가 널부러진채 그대로 썩어갔다.
 르완다 대학살의 생존자
이들은 지방 관청과 라디오 방송을 점거하고 지금 바로 투치족의 살육에 동참하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으며,
만일 살육에 동참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 역시 살육의 대상이 될 것이라 공언했다.
이 결과 1994년 4월부터
불과 100일 동안 르완다에선 100만 명 이상이 살육을 당했고, 이중 어린이의 희생자만 30만에
달했다.
이때도 역시 서방의 국가들은 이 사태를 철저하게 방관했으며, 심지어 아프리카에 주둔 중이었던 프랑스 군은 학살을
도와 사람들을 직접 죽이기도 한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르완다 대학살의 주범들.
 르완다 대학살의 진짜 주범은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만들었던
벨기에였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터키와 이란 북쪽 지방의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 민족은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고, 주위의 국가들이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할 때도 개종을 거부해 근방에는 아르메니아 민족만이 기독교 민족으로
남았다.

이 때문에 기회만 생기면 아르메니아를 이슬람 국가로 개종하기 위한 이슬람 제국들의 침략이 이어졌다. 15세기부터 오토만
제국이 중동과 발칸 전 지역을 정복하면서 아르메니아도 오토만 제국의 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이 벌어지기 전 오토만 제국에는 약 3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고 있었다.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한 틈을 타 아르메니아 인들은 오토만 터키 통치자들의 압제에 반발, 봉기했으며, 러시아가 터키를 침공하자 러시아군
편에 서게 된다.
이는 곧 엄청난 비극을 불렀다. 격분한 오토만 제국은 1915년 4월부터 자국 내의 아르메니아 인들을
조직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당시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 남자들을 학살하기 위해 18살 이상 50살 이하의 아르메니아
남자들을 모두 군대로 소집했다. 강제징집된 아르메니아 남자들은 터키군에서 얼마간 훈련을 받다 나중에는 모두 무장해제된 뒤 50명에서 100명
단위의 그룹으로 나뉘어 다리 건설과 도로공사 현장에 동원됐다. 얼마 뒤 이들은 모두 집단적으로 공사장에서 터키군에게 학살됐거나, 굶주림과 극심한
노동으로 죽어갔다. 이런 식으로 수십만명의 아르메니아 남자들이 터키군에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
남아 있던
어린이들과 부녀자들, 노인들은 모두 사막으로 강제 추방돼 처참하게 굶어 죽어갔다. 한 예로 35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을 시리아의 사막으로
추방했는데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단지 35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때의 대학살로 150만~2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3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 중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인구가 이런 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이때의 대학살로 인해 아르메니아 민족들은 고대 시대부터 살아온 땅과
가족과 재산을 잃고 전세계로 흩어지게 됐다. 현재 러시아에 200만명, 미국에 100만명을 비롯해 107개국에 모두
9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다.
터키의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나치가 2차 대전 중 치밀한 계획하에 유대민족 말살을 시도했을 때,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인 <나의 투쟁>에서
“지금 누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기억하는가?”라는 주장을 펴면서 유대인 학살을 적극 옹호 했다.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아르메니아는 터키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국을 건설하게 되지만 터키로부터 제대로 된 보상이나 사과를 단한번도 받은 적이 없다. 지금까지 터키
정부는 단 한번도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도리어 대학살건을 제기하는 아르메니아에 대해 국교 단절과 국경 봉쇄, 금수
조치를 통해 심각한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또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한 국가들에 대해서는 외교적 보복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아르메니아는 이웃 국가들로부터 고립되면서 경제적으로 엄청난 곤란을 당하고 있다.
그동안 터키 정부는 3천만달러 이상의 예산을
지출하면서 주로 미국 대학의 역사학자들을 매수해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혼신을 기울여왔다. 터키 정부는
일관되게 오토만 제국의 붕괴를 가져온 내전으로 30여만명의 아르메니아 인들과 수천명의 터키 인들이 죽었다고 오랫동안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프랑스, 폴란드 등 15개국은 이 학살으로 계획적인 인종대학살 인정, 그러나 미국은 이에 동조하지 않고 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풍자 만화.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주범은
영국과 터키였다. 영국은 아르메이나 지방을 경제적으로 철저히 수탈해 아르메니아 민족의 자립 능력을 무력화시켰으며, 이후 터키가 아르메니아를
유린하도록 방조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남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 운동이다.
박정희가 살해되자,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를
감행해 정권을 탈취, 국민들의 거센 민주화 요구를 묵살한다. 이에 평화적인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계염령을 선포, 전국의 민주화 시위를 폭력 진압하기 시작한다.
당시
광주에서는 조선대학교를 폐쇄한 군부의 조치에 항의해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신군부는 폭력을 동원해 진합한다. 이에 학생들은 광주
시민들과 합세해 시내에서 시위를 벌였고, 군대는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한 뒤, 곤봉과 대검까지 휘둘러 여러 명을
살상한다.
이 소식이 도시 전역에 퍼지자 광주 시민들이 봉기, 군부가 통제하고 있던 MBC 방송국과 시청을
점거한다. 5월 21일까지 30만명의 광주 시민들이 의거, 전두환 정권의 폭압해 항거해 무장 투쟁을 벌인다. 이들은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하기 위해 예비군 부대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을 함으로써 시위는 시가전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시민들의 저항으로 21일에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했고, 시민군은 이 날 오후에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광주 시민들은 외부와 고립된 채 스스로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고, 시민궐기 대회를 열어 '계엄 해제', '학살 책임자 처단' 등을 요구했다. 이 자치 기간 동안 광주에서는 단 한 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부는 광주의 민주화운동을 공산주의 불순분자와 폭도들이 주도하는 난동으로
규정한다. 5월 27일 5개 사단에서 차출된 공수부대와 군병력이 광주시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완전 통제하고 시민군을 포위하기 시작.
당시 광주 시민단체는 정부와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고자 의사 소통을 수차례 시도, 모두 실패에 그침.
21일부터
계엄군은 광주 시민에게 발포하기 시작했고, 광주 외곽으로 나가는 도로를 점령하고 이 곳을 지나는 양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계엄군은 26일부터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나서 광주 시내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27일 새벽에 상황실에서 끝까지 싸우던 시민군 대부분을 사살하고 도청을 접수하면서
열흘간의 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피흘리며
쓰러져갔다.
5.18 민주화운동으로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166명이 사망하고 47명이 행방불명되었으며,
28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 627명이 구속되었는데, 175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어 5명이 사형, 7명이 무기징역형의 선고를 받았다.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은 1981년 4월에 특별사면 및 감형으로 모두 풀려났다.

 많은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목숨을
잃었다.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됐던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8년에 노태우정부가 들어선 뒤 정식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받았고, 사건 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1995년에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책임자들을 구속하고, 사망.부상자에 대한 보상이 정해졌다.
 1995년 김영삼의 문민 정권에 의해 죄의 심판을 받는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1996년 미국에서 발간된 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국 카터 정권은 광주에서 민중 봉기의 세력이 커질 경우 휴전선을
방어하고 있는 국군 전력에 공백이 생길 것을 우려해 전두환 정권이 시민들에게 무차별 발포하도록 하는 반인륜적인 군사작전을 허용했다. 뿐만
아니라, 전두환 신군부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할 경우 미군이 직접 개입하는 계획까지 세워둔 것으로 밝혀졌다. (Tim Shorrock, “U.S.
Knew of South Korean Crackdown: Ex-Leaders Go on Trial in Seoul,” Journal of
Commerce 27, February 27,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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