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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및

마라의 죽음 -3

by 현상아 2006. 10. 3.
후원자의 취향에 따라 그림 소재 변천
<「두 발을 적시고 있는 여인과 풍경」, 니콜라 푸생, 1650년, 캔버스에 油菜.>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는 지난해 12월부터 「서양미술 400년 푸생에서 마티스까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박물관 등지에서 온 120여 점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19세기 유럽 귀족들의 사교·문화공간이었던 살롱의 분위기를 살린 전시장도 인상적이다. 그림을 감상할 때는 그 그림이 그려진 역사적 배경을 알면 이해하기 쉽다.
 
  서양의 미술은 후원자의 취향에 따라 변화했다.
 
  서양 古典主義(고전주의) 미술품들은 기독교 신화와 관련된 그림이 主流를 이룬다. 당시 예술가들 사이에 종교적인 열기가 고조됐던 걸까? 답은 간단하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미술품을 가장 많이 사들였기 때문이다.
 
  건축과 그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교회를 건축하면서 그림 수요가 늘어났다. 일부 성직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聖書에 나오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그림밖에 없었다.
 
  18~19세기에는 정치 권력자들이 성직자를 제치고 미술의 최대 후원자로 등장했다. 궁정화가들은 왕과 왕비, 귀족들의 그림을 그려 댔다. 왕족과 귀족들은 가족들의 모습, 자신이 일하거나 사냥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정치화가 다비드
 
  「푸생에서 마티스까지」 전시회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개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첫 번째 작품은 니콜라 푸생의 「두 발을 적시고 있는 여인과 풍경」이다. 이 작품은 15세기 풍경화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 준다. 푸생은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의 원조로 불린다. 그에게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화가의 시각에 따라 구성된 자연이다. 푸생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화면의 질서를 중요시했다.
 
  푸생은 풍경화뿐만 아니라 그리스·로마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문학에 심취해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문학 작품의 한 장면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그려냈다.
 

  두 번째 작품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다.
 
  마라는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 처형에 앞장섰던 급진적 혁명가이다. 그는 샤를로트 코르테라는 여성에 의해 욕실에서 암살당했다. 마라가 죽은 다음날, 국회는 마라를 추모하는 그림을 다비드에게 의뢰했다. 다비드는 루이 16세의 궁정화가였지만, 마라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이 그림에서 마라를 혁명을 위해 죽은 순교자로 묘사하고 있다.
 
  「마라의 죽음」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면 하단에 있는 나무상자이다. 나무상자에는 「마라에게 다비드」라는 서명이 있다. 이것은 나무상자의 의미보다는 비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 그림은 정치적 목적을 띤 그림으로서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당시 「미술계의 폭군」으로 불린 다비드는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서 단두대로 보내질 뻔했다.
 
  특사로 풀려난 그는 한동안 정치를 떠나 그림에 전념하지만 1797년 나폴레옹을 만나 그의 궁정화가가 됐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초상화와 정치 선전화를 그렸다.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王政復古(왕정복고)가 된 후, 역적으로 몰린 다비드는 벨기에로 망명했다가 자살했다. 『내 그림은 말이 아닌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할 정도로 행동적이었던 그는 자신의 零落(영락)을 참을 수 없었다.
 
 
  앵그르와 쿠르베
 

  세 번째 작품은 앵그르의 「샘」이다. 앵그르는 18세기의 귀여운 누드화에서 벗어나 古典的 균형미가 잡힌 누드화를 그렸다. 앵그르는 40세 때인 1820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70세 때 파리에서 완성했다.
 
  이 작품 모델의 포즈는 앵그르 작품 「비너스의 탄생」 등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앵그르는 「샘」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됐으며, 만년에 누드화에 심취해 「터키 욕탕」을 남겼다.
 
  다비드의 수제자였던 앵그르는 정치 성향을 띠지 않는 그림을 그렸지만, 그도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이탈리아에서 한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하지만 부르봉 왕가의 화해 정책으로 「루이 13세의 서원」이라는 그림을 들고 파리로 금의환향했다. 그는 권력의 비호 아래 아카데미 회원, 미술학교 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며 지내면서 생전에 많은 영예를 누렸다.
 

  이번 전시회에 「좁은 길」 등의 그림이 출품된 구스타브 쿠르베 역시 누드화를 많이 그렸다. 그도 앵그르처럼 「샘」이라는 제목의 누드화를 그렸다. 이 그림을 본 나폴레옹 3세는 채찍을 내리쳐 그림을 찢어 버렸다고 한다. 女體가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졌다는 이유 때문이다.
 
  쿠르베는 그의 사실주의 畵風(화풍)이 인기를 끌어 후원자가 많았다. 그의 초상화는 이런 후원자들의 의뢰로 그려진 것들이 많다. 하지만 쿠르베는 사회를 그리고자 했다.
 
  그는 급진적 사회주의자 프루동의 사상에 심취해서, 자신의 급진적 정치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가 노동자와 농부들을 많이 그린 것도 그 때문이다.
 
  제2 帝政 시절, 정부가 쿠르베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고자 했으나,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 3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쿠르베는 『나는 훈장보다 자유가 좋다』고 거절했다.
 
  쿠르베는 1871년 파리 코뮌(普·佛전쟁 와중에 파리에 수립됐던 極左 혁명가들의 정권)에 적극 참여했다. 파리 코뮌이 정부군에 의해 유혈 진압된 후 그는 스위스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쿠르베는 고향 마을을 그리워하면서 풍경화에 심취했으나, 화가로서의 명성은 거기서 끝이 났다.
 
  다비드, 앵그르, 쿠르베의 그림들은 교회에 이어 화가들의 후원자로 등장한 정치권력과 화가들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행복을 그린 화가 르누아르
 

  다음으로 눈여겨볼 작품은 인상파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대본 낭독」이다. 이 작품은 르누아르의 그림 중에서 가장 작은 작품이다(9×7㎝). 너무 작아 관람자들을 놀라게 한다.
 
  르누아르는 『그림이란 결국 벽을 장식하려고 하는 거야. 따라서 가능한 한 화려해야 해. 내게 그림이란 소중하고 즐겁고 예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통속적일 정도로 행복한 그림, 특히 당시 상류층 여성들의 생활을 많이 그렸다.
 
  「책 읽고 있는 소녀」, 「피아노 치는 소녀」 등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부드러운 터치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어 마치 한 장의 스냅 사진을 보는 듯하다.
 
  그는 만년에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했는데 죽는 순간까지 그림에 대한 열정을 꺼뜨리지 않았다.
 

  프랑스 브르타뉴와 타이티를 소재로 하고 있는 고갱의 소묘 작품도 인상깊다. 고갱은 주식 거래인으로 일하다가 주식 시장이 붕괴한 후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믿고 가정을 버리면서까지 화가의 길로 들어섰으나, 만년까지 가난과 매독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이 지상의 낙원이라고 생각했던 南태평양의 타이티섬으로 들어갔다. 섬 생활에 실망한 그는 대신 타이티의 잃어버린 신화에 심취했다.
 
  고갱은 타이티 신화에 관해 「노아 노아」라는 저서를 남겼는데, 자신의 판화로 삽화를 넣었다. 타이티에서 그린 작품들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왔으나, 그의 원색적인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파리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그는 타이티로 돌아가 죽음을 기다렸다.
 
 
  20세기 최고 색채의 화가 마티스
 

  「20세기 최고의 색채의 화가」라고 하는 앙리 마티스의 「재즈 도판」 시리즈 넉 점도 눈길을 끈다. 이 그림들은 색종이를 오려 붙인 혁신적인 작품이다.
 
  마티스는 돈을 벌기 위해 한때 복제화를 그려 생활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찾았다. 대담한 원색과 단순한 선으로 그려진 그의 작품은 질서를 느끼게 해준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시도를 했던 마티스는 이렇게 말했다.
 
  『드로잉 작업을 할 때 나의 연필이 종이 위에 남기는 궤적은 어둠 속에서 길을 더듬는 사람의 몸짓과 비슷하다. 내 앞에는 길이 나 있지 않다. 나는 그저 이끌릴 뿐이다』
 
  역사가 거창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 역사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흐름 앞에서 화가들은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색으로 표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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