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령왕과 게이타이천황은 형제였다
형 무령왕과 아우 게이타이천황이 각각 한반도 백제와 일본열도의 왜를 지배한 이후 그 후손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양국의 문화를 꽃피웠다. 그리하여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위기에 처하자 왜의 텐치천황은 구원병까지 보낸 것이다.
홍윤기 한국외국어대 연수평가원 교수·문학박사
의자왕과 죠메이천황은 숙질간 |
지 난 호에서 필자는 왜나라의 죠메이천황(舒明皇, 629~641년 재위)이 백제 의자왕(義慈王, 641~660년 재위)의 선대(先代) 혈족임을 지적했다. 말하자면 죠메이천황이 백제 왕족이라는 사실인데, 그 근거로 일본의 고대 통사인 ‘부상략기’(扶桑略記, 13세기경의 왕조 불교사) 기록을 예시했었다.
우선 ‘부상략기’(죠메이천황 11년, 12년 조)에는 죠메이천황이 서기 641년 10월9일 백제궁(百濟宮)에서 서거한 것으로 나타난다. 죠메이 천황 서거와 관련해 일본의 관찬 역사책인 ‘일본서기’(720년 편찬)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죠메이천황은 백제강(百濟川) 옆에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고, 구중탑(九重塔)을 세웠으며, 640년 10월에는 백제궁을 지어 이사했고, 이듬해인 641년 10월9일에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그런데 ‘부상략기’에는 아주 묘한 말이 나온다.
“642년 2월에 백제 사신이 내조(來朝)하여 선제(先帝)의 상(喪)을 조문했다.”(皇極王皇 원년 2월 조).
서기 642년은 백제 의자왕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해다. 의자왕은 전 해인 641년 3월에 아버지인 무왕(武王, 600~641년 재위)이 승하하자 후사를 이었던 것이다.
죠메이천황이 서거했을 때 왜왕실에서는 즉각 본국인 백제로 사신을 보내는 한편으로, 죠메이천황의 국장(國葬)은‘백제(百濟)의 대빈(大殯)’이라는 백제왕실의 장례법에 따라 3년상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 슬픈 부보가 왜의 사신에 의해 백제왕실에 알려진 것은 죠메이천황이 서거한 지 약 2개월 뒤였으며, 이에 의자왕은 황급히 조문사를 왜로 보낸다. 조문사가 백제를 떠나 뱃길로 약 2개월이 걸리는 왜국의 왕도(王都) 나라(奈良)의 백제강 옆 백제궁에 당도한 것은 642년 2월의 일이었다. 그 당시 한일간 항로는 선박편으로 왕복 약 4개월이 소요되었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백제의 의자왕과 왜나라 백제궁의 죠메이천황은 어떤 관계였던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사람 사이는 숙질(叔姪)간이다. 서로는 똑같은 백제 왕실의 혈족이면서 의자왕은 죠메이천황의 조카다. 즉 죠메이천황은 의자왕의 아저씨로 ‘부상략기’에 기록된 ‘선제(先帝)’인 것이다.
일본에서 건너온 백제 동성왕 |
여 기서 먼저 백제 의자왕과 왜나라 죠메이천황이 숙질간이 되는 계보를 자세하게 밝혀 두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이 계보는 시간을 한참 거슬러올라가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 455~475년 재위)대에서 시작한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살해된 개로왕에게는 두 왕자가 있었다. 장남이 개로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문주왕(文周王, 475~477년 재위)이며, 차남은 곤지왕자(昆支王子)였다.
곤지왕자는 그의 장남 모대왕자(牟大王子)와 함께 일찍부터 왜국의 백제왕부에 건너가 살고 있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왜나라의 백제왕부가 오우진천황(應神天皇, 4세기 말경~5세기 초엽) 때부터 이미 나라(奈良)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우진천황 때에 백제 근초고왕의 아들인 아직기(阿直岐)왕자, 오경박사 왕인(王仁) 등이 왜왕실에 건너가서 왕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백제 본국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제22대 왕인 문주왕이 재위 2년 만에 살해되었고, 이어서 문주왕의 장남인 삼근왕(三斤王, 477~479년 재위)이 제23대 왕으로 등극하는데, 그마저 재위 2년 만에 후사도 남기지 못한 채 서거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되자 왜 왕실에 살고 있던 문주왕의 생질이자 삼근왕과는 사촌간인 모대왕자(牟大王子)가 백제 제24대 왕인 동성왕(東成王, 479~501년 재위)으로 추대된다. 이에는 모대왕자의 아버지인 곤지왕자(문주왕의 동생)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곤지왕자는 장남인 모대왕자를 백제 왕도인 웅진(熊津, 곰나루, 지금의 공주)으로 보내 백제 본국의 왕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곤지왕자는 아들인 동성왕이 서거한 후에는 그의 둘째 손자인 사마(斯麻, 동성왕의 차남)를 다시 백제 본국에 보내 동성왕의 후사를 잇게 했다. 바로 그가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武寧王, 501~523년 재위)이다. 또한 곤지왕자는 셋째 손자인 오호도(男大迹, 동성왕의 삼남)를 왜 왕실의 천황으로 앉혔는데, 바로 게이타이천황(繼天皇, 500~531년 재위)이다.
무령왕과 게이타이천왕은 친형제 |
무 령왕과 게이타이천황이 친형제임은 고대 금석문이 입증하고 있다. 무령왕이 서기 503년에 아우인 게이타이천황을 위해 왜나라로 보낸 청동거울인‘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이 그것이다. 이 청동거울이 ‘인물화상경’이라 불리는 것은 왕이며 왕족 등 말을 타고 있는 9명의 인물이 거울에 양각돼 있기 때문인데, 백제의 기마문화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무령왕이 아우에게 보내주려고 만든 ‘인물화상경’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돼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일본에서는 이 ‘인물화상경’을 처음에는 ‘스다하치만신사화상경(隅田幡神社畵像鏡)’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한동안 우에노의 국립박물관 전시장에 내놓고 전시하더니 근자에 와서는 전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다. 박물관 어디엔가 비장해 놓은 것 같다.
아무튼 ‘인물화상경’은 지름이 19.8cm인 둥근 청동제 거울인데, 바깥 둘레를 따라 빙 돌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癸未年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柴沙加宮時, 斯麻, 念長壽, 遺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銅二百旱, 作此鏡.’
이상과 같은 한자어 명문은 현대의 일본 역사학계가 판독하고 있는 글자들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서기 503년 8월10일, 대왕(백제 무령왕)시대, 남동생인 왕(게이타이천황, 오호도)이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의 이름)께서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여 보내주시는 것이노라.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파견하며,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
이 명문은 무령왕이 친동생 게이타이천황이 건강하게 오래도록 잘 살라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형제간의 뜨거운 우애가 물씬 느껴진다.
그런데 일본학자들 중에는 이 명문에 대해 엉뚱한 주장들을 펼치면서 본말을 전도하는 이도 있다. 대표적인 게 명문에 나타난 계미(癸未)년이 서기 몇 년을 가리키느냐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서기 503년의 계미년을 서기 433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水野裕說), 서기 263년 설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서기 263년 설을 주장한 사람은 다카하시 겐지(高橋健自, 1871~1929년) 박사였다. 그는 청동제 거울을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橋本市)에 있는 스다하치만신사(隅田八幡神社)라는 사당에서 찾아낸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거울을 찾아낸 후 1914년에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일본 사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서기 263년 설은 오늘날 일본학계에서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묵살당하고 있다.
또 후쿠야마 토시오(福山敏男) 교수는 필자처럼 서기 503년 설을 지지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가 명문의 ‘남제왕(男弟王)’은 게이타이천황이라고 말하면서도 그의 형인 ‘대왕(大王)’은 백제의 무령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왜나라의 닌켄(仁賢)천황이라고 엉뚱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무령왕과 게이타이천황이 친형제 관계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령왕의 이름(諱)이 ‘사마(斯麻)’라는 것은 일본의 어느 역사학자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을 입증해주는 소중한 기록인 금석문이 있다. 1971년 7월8일에 발굴된 무령왕릉(충남 공주 소재)의 묘지석(墓誌石)이 바로 그것이다. 묘지석에는 무령왕의 휘가 ‘사마’라고 새겨져 있어 확고하게 입증됐던 것이다.
여기서‘일본서기’의 잘못된 기록도 밝혀둘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 461년 조에는 “백제 무령왕은 개로왕의 동생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곤지왕자가 새부인과 함께 백제로부터 왜나라로 가던 중 쓰쿠시(筑紫)의 카카라노시마(各羅島)라는 섬에서 태어난 아기가 백제 무령왕이다”라고 씌어 있다.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무령왕은 곤지왕자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다.(‘三國史記’)
백제왕가와 왜왕가의 계보 |
아 무튼 곤지왕자의 후손인 무령왕과 게이타이천황의 혈연관계를 밝힌 문헌과 고고학적 유물을 근거로 백제왕족과 왜왕들의 계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 본국에서는 곤지왕자의 아들이자 문주왕의 조카인 동성왕(제24대)→동성왕의 차남인 무령왕(제25대)→무령왕의 왕자인 성왕(제26대)→성왕의 장남인 위덕왕(제27대)과 차남인 혜왕(제28대)→혜왕의 장남인 법왕(제29대)→법왕의 왕자인 무왕(제30대)→무왕의 장남인 의자왕(제31대)으로 법통이 이어진다.
백제왕부인 왜나라 쪽에서는 동성왕의 삼남인 게이타이천황→게이타이천황의 장남인 안칸천황, 차남인 센카천황, 또 다른 아들인 킨메이천황→킨메이천황의 형제 자매들인 비다쓰천황, 요우메이천황, 스천황, 스이코천황→(한 대를 건너뛰고) 비다쓰천황의 손자인 죠메이천황→죠메이천황의 태자인 텐치천황으로 혈맥이 이어진다.
한일 양국의 왕 계보에 따르면 동성왕의 7대손이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되고, 동성왕의 6대손이 왜나라의 죠메이천황이 된다. 죠메이천황은 ‘신동아’ 99년 10월호에서 밝혔다시피 나라의 백제강가에다 백제궁을 지었던 사람인데, 그가 바로 의자왕의 아저씨뻘이 되는 것이다. 또 죠메이천황의 아들인 텐치천황은 당연히 의자왕과 같은 항렬의 형제간이 된다.
그렇기에 의자왕의 백제가 망하게 되자, 텐치천황은 그 당시 왜 왕실에서 살고 있던 의자왕의 왕자인 부여풍(扶餘豊)을 본국 백제로 보내 왕위를 계승하도록 지원했다. ‘일본서기’에서는 서기 661년 5월 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5월에 대장군 히라부(比邏夫) 등이 선사(船師,선장) 170척을 이끌고, 풍장(豊璋,부여풍 왕자) 등을 백제국에 보내고, 조칙으로서 풍장 등으로 하여금 그 위(位)를 계승시켰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본서기’가 기록한 시점보다 약 반 년이 이른 시기인 ‘서기 660년 말에 풍장 등이 백제에 당도했다’고 아오키 가즈오(靑木和未) 교수는 ‘일본서기’(岩波書店, 1979)의 본문 주석에서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사인 ‘삼국사기’도 백제본기 660년 조에 “왜국에 있다가 온 옛왕자 부여풍을 맞이해서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망할 당시 백제와 왜왕실의 깊은 유대 관계를 묘사하는 글귀도 적지 않다.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사자(使者)를 보내 원병을 청했다.”(백제본기)
“왜병의 배 400척이 백강(白江)에서 불탔고, 왕인 부여풍은 탈출해서 피신했으나 행방을 알 길이 없으며, 고구려로 도망쳤다는 소문이 있다.”(백제본기)
“의자왕의 다른 왕자인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들의 부하와 더불어 왜군과 함께 항복했다.”(백제본기)
이런 기록들은 백제가 공격을 당할 당시 왜왕실에서 모국의 패망을 막기 위해 왜병과 군선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일 양국의 실권자, 곤지왕자 |
한 편 동성왕의 아들들인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을 각각 권력의 일인자로 등극시킨 할아버지 곤지왕자야말로 그 당시 한일 양국에 걸쳐 막강한 왕가 세력을 형성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곤지왕자는 그 후에도 계속 왜 왕실에서만 살다가 가와치(河內) 땅에서 서거하게 된다.
지금 오사카부(大阪府)의 하비키노시(羽曳野市)가 그 옛날의 가와치 터전인데, 이곳에는 유명한 ‘곤지왕신사(昆支王神社)’가 있다. 이 신사는 ‘아스카베신사(飛鳥戶神社)’라고도 불리는데, 곤지왕자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지내고 있는 사당이다. 이 터전에 대해 옛 문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유랴쿠조(雄略朝)에 백제로부터 건너온 백제왕족인 곤지왕은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의 조상으로서 이 터전을 본거지로 삼았었다. 조선의 ‘삼국사기’의 고증에 의하면 그가 건너온 것은 유랴쿠조보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 인교조(允恭朝) 무렵(5세기 초)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조상신(백제)을 제사 모시는 씨신(氏神)으로서 아스카베신사(飛鳥戶神社)를 창사(創社)했다. 또한 씨사(氏寺)로는 아스카산 죠린지(飛鳥山 常林寺)라는 사찰을 산의 남쪽 기슭에 조영하고 있었다.”(‘古田文書’).
이와 같이 곤지왕자는 생전에 왜 왕실에서 백제왕가의 조상신 제사를 도맡았으며, 죽어서는 왜나라 백제왕부의 제신이 되었던 것이다. 아스카베신사는 곤지왕자의 아들 중 하나인 비유왕(比有王)도 중세 말까지 제사지냈다고 한다.
현재 곤지왕신사가 자리잡고 있는 일대는 곤지왕자의 후손들인 아스카베씨(飛鳥戶氏) 후나씨(船氏) 등 백제인 왕족들이 살고 있던 큰 고장이다. 그렇기에 이 일대에는 백제인 고분 수천 기가 있었고, 1999년 현재까지도 588기의 옛무덤들이 그 옛날의 백제인 자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가와치 아스카(河內飛鳥)’라고 일컬어지는 이 고장에서 주목받는 고분지대(古墳地帶)로는 우네비산(畝傍山) 서쪽 기슭에 퍼져 있는 고분들과 니이자와천총(新澤千塚)을 들 수 있다.
특히 1960년 초 ‘니이자와 126호분’에서 발굴된 ‘방제형 금관(方製形金冠)’은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왜냐하면 이 방제형금관과 똑같은 것이 1971년 우리나라 무령왕릉의 왕비 머리 부분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방제금관과 똑같은 금관이 발굴된 ‘니이자와 126호분’의 주인공 역시 모름지기 백제계 왜왕비의 무덤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보인다.
그뿐 아니라 이 무덤에서는 무령왕릉의 왕비 발 끝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형태의 ‘청동 다리미’도 출토된 바 있어서, 니이자와 126호분의 장법(葬法)이 모국(母國) 백제왕가의 장법과 동일하다는 것을 웅변해주는 것 같다. 실제로 니이자와천총에서 발굴된 무덤들은 대부분 한반도 양식인 횡혈식(橫穴式) 고분이라는 공통점도 보이고 있다.
한편, 니이자와천총 바로 근처에 천황릉(天皇陵)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다음의 보고서를 보자.
“니이자와천총에 들어서면 곧 눈에 띄는 것은 왼쪽으로 보이는 센카천황릉(宣化天皇陵)이다 … 센카천황릉 앞에 서서 서쪽의 도로 양쪽으로 퍼지는 야트막한 구릉들을 바라보자면, 참으로 많은 고분들이 겹칠 듯이 있다.”(奈良縣 敎育委員會‘新澤千塚一二六號墳’)
이 보고서에서 주목해볼 것은 센카천황(535~539년 재위)이다. 무령왕의 동생인 게이타이천황의 차남이 다름아닌 센카천황이기 때문이다. 백제 무령왕릉의 유물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 출토된 니이자와 126호분. 그리고 니이자와 고분에서 바라보이는 센카천황릉은 무령왕 조카의 무덤이고…. 아무튼 니이자와천총은 백제인 왜나라 왕부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물인 것이다.
닌토쿠천황이 천도한 백제군 터전 '난파진' |
그 런데 니이자와천총의 고분들은 언제, 누가 조성한 것일까. 카도와키 테이지(門脇禎二, 1925년~ ) 교수는 전체적으로 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형성된 후 6세기 전반기에 이르면서 쇠퇴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飛鳥’, 1995).
그러므로 니이자와천총은 백제인들이 북규슈(北九州)로부터 일본 내해(內海)인 세코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본토인 오사카(大阪)지방으로 상륙해 교두보를 탄탄하게 이루게 된 시기에 조성됐을 것이다.
그 당시 오사카 나루터는 그 이름이 나니와쓰(難彼津)였고, 이 나루터의 명칭은 백제인 왕인 박사가 서기 405년에 붙인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拙論‘現代文學’, 1977. 2월호). 이노우에 마사오(井上正雄)씨는 일찍이 1922년에 “나니와쓰는 그 무렵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항구였으며, 이 나니와쓰라는 항구를 본격적으로 건설한 것은 백제인들이었다”고 옛 문헌을 인용해 밝힌 바 있다(‘大阪府全志’, 淸文堂, 1922). 참고로 나니와쓰로부터 동북쪽 인접한 곳에 바로 백제인들의 무덤인 니이자와천총이 자리잡고 있다.
또 나니와쓰, 즉 난파진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본국 백제로부터 고대 왜나라 본토에 진입하는 데 가장 좋은 항구였다. 본국으로부터 인력과 물자를 수월하게 지원받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난파진 일대가 백제왕부의 새 터전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기에 오사카 일대의 옛날 명칭은 ‘백제군(百濟郡)’이었다. 마치 영국 브리타니아의 가장 큰 도시였던 요크(York) 출신들이 대서양(大西洋)을 건너가 아메리카 땅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새로운 항구를 뉴욕(New York)이라고 이름붙였듯이, 고대 백제인들도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일본 열도에 건너가서 이룬 새로운 식민지 항구를 난파진(나니와쓰)으로 명명하고 이 일대에 백제군(百濟郡)이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 백제군이야말로 5세기 초에 가와치왕조(河內王朝)를 시작한 닌토쿠천황(仁德王皇)의 본거지였다. 백제인 닌토쿠천황은 부왕인 오우진(應神)천황을 계승해서 왕위에 등극한 후 곧 왕궁을 나라(奈良) 땅으로부터 지금의 오사카 땅인 난파진으로 천도했던 것이다. 그래서 난파진은 가와치 땅을 포함해 닌토쿠천황의 이른바 ‘가와치 왕조’의 번영의 터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노우에 마사오는 그의 저명한 고대백제 지정학사(地政學史) 격인 ‘오사카부전지’(大阪府全志, 1922)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백제군(百濟郡)에는 그 옛날 남백제촌(南百濟村)과 북백제촌(北百濟村)이 설치돼 있었다. 남백제촌에는 응합촌(鷹合村), 사자촌(砂子村), 중야촌(中野村)이라고 하는 대단위 행정구역들이 있었다. 응합촌의 경우는 닌토쿠천황 43년(5세기 중엽) 9월에, 아이고(阿耳古)가 잡은 매(鷹)를 백제인 주군(酒君, 사케노키미)에게 사냥에 쓸 매로 길들여달라고 맡기면서 닌토쿠천황이 이 터전에다 응감부(鷹甘部)라는 관청을 설치시킨 데서 생겨난 지명이다. 그 당시 닌토쿠천황의 다카쓰궁(高津宮)은 난파진에 있었으며, 이 고장과 거리가 가까웠다. 백제의 주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 고장에서 장례를 지냈으며, 닌토쿠천황은 그에게 ‘응견신(鷹見神)’이라는 시호(諡號)까지 내렸던 것이다.
북백제촌에는 금재가촌(今在家村)을 비롯해서 신재가촌(新在家村), 금림촌(今林村) 등 큰 행정구역이 속해 있었다. 또한 천왕사촌(天王寺村)은 본래 백제군에 속한 큰 행정구역이었다. 그 밖에도 석천백제촌(石川百濟村)과 백제대정(百濟大井) 등의 지역이 난파진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주군과 닌토쿠천황의 교유는 ‘일본서기’에도 기록돼 있다.
“닌토쿠천황 43년 9월1일에 아이고가 이상한 새를 잡아다 천황에게 바치면서, ‘저는 항상 그물을 치고 새를 잡는데, 전에는 이런 새를 잡아본 일이 없습니다. 신기하기에 올리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천황은 주군(酒君)을 불러서 ‘이것이 무슨 새냐’고 물었다. 주군이 대답하기를 ‘백제에는 이런 종류의 새가 많습니다. 잘 길들이면 사람을 곧잘 따릅니다. 또한 빠르게 날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새도 잡아옵니다’ 하고 말했다. 이것은 지금의 매다. 왕은 매를 주군에게 주어서 길들이게 했다. 주군은 얼마 안 되어 길들였다. 그는 가죽끈을 매의 발에 묶고 작은 방울을 꼬리에 달아, 팔뚝에 얹어 천황에게 바쳤다. 천황은 이날 모즈노(百舌鳥野)에 납시어 사냥을 했다. 그때 암꿩이 많이 날았다. 그래서 매를 풀어서 잡으니 금세 수십 마리나 잡게 되었다. 이 달 처음으로 응감부(鷹甘部)라는 부서를 설치했다.”
닌토쿠천황이 총애했던 주군(酒君)은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백제에서 건너와서 가와치조정에 근무했던 근신(近臣)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타계하자 천황이 애도하며 ‘응견신’이라는 시호를 내렸던 것이다. 현재 가와치에는 큼직한 주군의 비석이 서 있어서, 그 옛날의 발자취를 입증해주고 있다.
최초의 백제인 지배자 오우진천황과 칠지도 |
이 렇게 고대백제가 본격적으로 왜나라를 경영한 것은 난파진의 가와치왕조 때부터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로 입증된다. 여기서 난파진의 백제군을 개척한 닌토쿠천황과 그의 아버지이자 왜나라 최초의 백제인 지배자인 오우진천황(應神, 4세기경)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오우진천황이 모국 백제의 후왕(侯王)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은 한일 사학계 초미의 관심사인 칠지도(七支刀)에 나타난다. 일본책 ‘고사기’(712년 편찬)의 오우진천황기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아직기 선생을 통해 암말과 수말 한 필씩을 바쳤다(貢上). 또한 횡도(橫刀) 및 큰 거울(大鏡)도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또 ‘일본서기’(720년 편찬)에는 진구우황후(神功皇后, 오우진천황의 생모) 52년조에 “칠지도(七枝刀) 한 자루, 칠자경(七子鏡) 한 개(一面)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쳐(獻)왔다”고 돼 있다.
이와 같이 칠지도 등을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갖다 바쳤다’는 투의 기사는 뒷날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조작될 당시에 써넣은 것이라는 데는 일본 사학자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학자 오오노 스즈무(大野晋, 1919년~)의 연구논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고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아직기 선생을 통해서 일본 국왕에게 횡도(橫刀)와 큰 거울(大鏡)을 바쳤다고 돼 있다. ‘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이 ‘칠지도(七枝刀)’와 ‘칠자경(七子鏡)’을 바쳤다고 돼 있다. 이 기사는 서기 367년으로 추정이 되는 곳에 씌어 있다.
그런데 현재 보면 야마토(大和, 奈良縣 天理市)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칠지도(七支刀)가 있고, 이 칼에 ‘태화(泰和) 4년(369)에 헌상(獻上)한다’는 대목이 있다. 지(支)는 옛날에 지(枝)와 상통했던 글자이므로, 고사기에 등장하는 횡도(橫刀)나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칠지도(七枝刀)나 이소노카미신궁의 칠지도(七支刀)는 똑같은 칼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까닭에 아직기 선생은 369년에 이 칼을 가지고 왕실에 건너왔다고 하겠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직기 선생은 경전(經典)에 능통했고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도래하여 정주(定住)한 것은 태화 4년이라고 하는 칠지도(七支刀)에 새겨진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서기 369년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오오노 교수의 주장에 필자도 대체로 공감한다. 단 그의 논술에서 백제왕이 보낸 칠지도를 왜왕에게 ‘헌상(獻上)한다’는 대목은 이 칼에 새겨진 명문을 180도 뒤엎고 있다고 하겠다.
헌상인가, 하사인가 |
그 러면 지금부터 1630년 전에 백제에서 제조된 칠지도의 앞면과 뒷면에 새겨진 한자어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칼 앞면의 한자 명문은 다음과 같다.
‘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午正陽 造百練鐵 七支刀 以酸百兵 宜供供供候王 □□□□作’
칼의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先世以來夫有此刀 百滋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이상과 같은 한자어 명문은, 녹이 슨 칠지도의 글자(금상감)들을 일본 학자들이 다각적으로 판독해낸 것이다. 이 한자어 명문을 필자가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서기369년(태화 4년) 음력 5월16일 병오날 대낮에 무수히 거듭 단금질한 강철로 이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적병을 물리칠 수 있도록 후왕에게 보내주는도다.’
(뒷면) ‘선대 이후에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 및 귀수세자는 성스러운 말씀으로서 왜왕을 위해서 만들어주는 것이니, 이 칼을 후세까지 길이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
이와 같이 당시 백제 근초고왕과 귀수세자는 전대미문의 훌륭한 칠지도를 만들어서 왜에 있는 백제왕국의 후왕인 오우진천황에게 보내준 것이다. 그 칼로 왜왕은 모든 적군을 무찔러서 백제 식민지의 보전에 힘쓰며 번창할 것을 어명(御命)한 것이었다.
이 칠지도의 명문은 누가 읽더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하행문(下行文)임을 알 수 있다. 즉 본국 백제의 근초고왕과 귀수세자(貴須世子, 뒷날의 근구수왕, 375~384년 재위)가 왜의 오우진천황과 그의 후세를 축복하며 보낸 보도(寶刀)인 것이다. 실제로 당시 왜국은 백제인 후왕이 거느리던 백제의 터전이었음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말하자면 칠지도의 명문은 한일고대사에 있어서 백제가 일본을 백제왕부로서 경영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품인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일본 사학자들이 하사설을 뒤엎으려고 상납한 것이라는 헌상설을 내세우는 등 엉뚱한 주장을 하므로, 그들의 소론(所論)에 대해 부득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사사전’(日本史辭典, 高柳光壽·竹內理三編, 角川書店, 1976)의 칠지도(七支刀) 항목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철검. 나라 텐리시(天理市)의 이소노카미신궁의 신역(神域)에서 나옴. 이 칠지도(七支刀)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52년조 기사에 보이는 칠지도(七枝刀)에 해당된다고 여겨지고 있다. 전체 길이 약 75cm. 칼몸(刀身)의 좌우에 각 3개씩 양날의 가지칼(枝刀)을 서로 번갈아 뻗쳐 나오게 만든 생김새이며 실용적인 칼은 아니다. 칼몸체(刀身)의 양면에는 금으로 상감된 60여 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칠지도는 그 당시 동(東)아시아 각국의 이해와 깊게 관련되어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설(定說)이 없다. 서기 369년에 백제왕이 왜왕(倭王)을 위하여 만들었다고 이해되며, 백제에서 온 헌상품(獻上品)으로 보는 설이 있고,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下賜)한 물건이라는 설, 그 밖에 동진(東晋)에서 백제왕을 통해 왜왕에게 하사한 물건이라는 설이 있으며, 명문(銘文)을 ‘고사기(古事記)’ 및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왜왕에게 바쳤다(貢上)는 기사와 단순하게 연결짓는 것은 비판을 받고 있다. 국보.”
먼저 교토대학(京都大學)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년~) 교수의 하사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우에다는 칠지도를 연구 검토하느라 3번이나 이소노카미신궁에 찾아가서 칠지도를 만지면서 칼 앞뒷면의 명문을 조사한 학자다. 우에다는 그의 저서(‘倭國의 世界’, 1976)에서 상세하게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칠지도에 새겨진 60여 글자 중에 판독(判讀)이 곤란한 개소(個所)도 있어서, 전문(全文)을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고심해서 해독(解讀)해 밝혀진 것을 따르자면 칼의 명문 그 어디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했다고 증명할 수 있는 글귀는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52년조 기사를 빙자하여 ‘헌상설’이 별로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지금까지 주장돼왔다. 명문 해석은 우선 명문 그 자체에 의거해야만 한다. ‘일본서기’는 귀중한 고전(古典)이기는 하되,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완성된 ‘일본서기’에 의거해 칠지도의 명문을 해독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본다.
칠지도의 명문에는 백제왕이 ‘왜왕을 위해서 만들어준 것이며, 이 칼을 후세까지 길이 잘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고 되어 있으며, 이 칼을 만든 주체(主體)도 백제왕이다. 그뿐 아니라 칠지도처럼 생긴 칼이 중국에서 단 한 자루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동진(東晋)을 칠지도의 주체(主體)로 보려고 하는 설(說)의 허점이다.
반면, 한국에는 칠지도와 유사한 철기가 있다. 내가 실제로 본 것은 1962년에 경북 칠곡군 인동면 황상동 1호 고분에서 출토된 길이 24cm의 철기와, 1971년 부산시 동래구 오륜대유적에서 발굴된 길이 21cm 및 14.3cm의 이형(異形) 철기다. 이것들도 칠지도(七支刀)와 마찬가지로 칼의 좌우 양쪽에 가지(枝)가 3개씩 나와 있다. 경남 함양 상백리의 고분군에서도 그런 것이 출토되었는데 의장용(儀仗用)이라고 한다.
그 당시 백제 세력은 한층 막강한 국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위치에 있던 백제왕이 왜왕에게 복속(服屬)해서 칠지도를 헌상(獻上)했다고 하는 것은 백제 쪽 정세를 살필 때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다. 더구나 명문 그 자체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확증할 만한 글귀는 없다. 백제왕이 ‘모든 군사(百兵)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벽사(僻邪)의 주도(呪刀)를 만들어 왜왕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군사 동맹을 강화시키려는 것이었으리라.
‘고사기’의 오우진천황조(應神天皇條)를 보면, ‘백제국의 근초고왕이 횡도(橫刀) 및 큰 거울(大鏡)을 바쳤다(貢上)’고 써 있다. 그런데 횡도와 큰 거울이 ‘일본서기’에서는 칠지도(七枝刀)와 칠자경(七子鏡)으로 쓰고 있다. 어쩌면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칠지도(七支刀)가 실제로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칠지도(七支刀)에 대한 기사를 쓴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칠지도와 관련해 객관적인 입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작된 역사서 '일본서기' |
우 에다가 지적한 것처럼 ‘일본서기’는 허위 기사가 많이 들어 있어서 매우 악명 높은 역사책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 기재된, 사실과 다른 기사들이 언제 어떻게 씌었는지는 반드시 구명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 일본사학계에서는 ‘일본서기’며 ‘고사기’ 등이 8세기 초에 편찬될 당시부터 허위 기사가 실린 것인지, 아니면 뒷날 원본(原本) 기사들을 붓으로 베끼던 필사(筆寫) 과정에 조작된 것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단지 지금까지는 기사가 조작되었다는 문헌적 비판이 계속돼왔고, ‘신공황후의 신라침공설’이며 가야 지방의 소위 ‘임나일본부설’이 조작된 기록이라는 몇몇 사실만 확인됐을 뿐이다.
필자가 추찰(推察)하건대 ‘일본서기’ 등의 허위 기사들은,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년)가 무사정권을 집정하던 시기에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왜국이 백제왕국의 지배를 받아온 사실들을 일본 역사 기록에서 뒤집어놓지 않고서는 조선 침략에 대한 위신이 서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를, 칠지도(七枝刀)라고 하면서 공상(貢上)이니, 헌상(獻上) 따위의 글자로 터무니없이 조작하고, ‘신공황후의 신라 침공설’이며 ‘임나일본부설’ 등 사실(史實)이 아닌 한반도 침략설을 들이대는가 하면, 실존하지도 않은 진무천황(神武天皇) 등 9명의 인물들을 왕으로 만들어 일본사 연대를 늘리는 따위의 역사 변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실존하지도 않은 일본왕 조작 기록에 대해서는 나오키 코우지로(直木孝次郞, 1919년~) 교수가 그의 저서(‘日本神話と古代國家’, 1990)에서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천황의 기원(起源)을 가능한 한 오랜 옛날로 만들기 위해서, 있지도 않았던 천황 이름을 조작해 첨가시켰다. 또한 참위설(讖緯說)에 입각해서 스이코여왕 9년(601년)부터 1260년 전(BC 660년)을 진무천황의 즉위년(卽位年)으로 만들었다. 이 제1대 진무천황의 이야기도 천황가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사실(史實)로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현대 일본 사학자들도 ‘일본서기’ 등 역사책들이 조작·변조된 것을 계속해서 논증·비판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 |
다 시 칠지도 문제로 돌아가자. 칠지도가 중국 땅 동진(東晋)에서 만들어져 백제왕을 통해 왜왕에게 하사됐다는 설은 쿠리하라 토모노부(栗原朋信)의 주장이다. 그는 칠지도 뒷면 명문에 있는 ‘성음(聖音)’이라는 글자를 ‘성진(聖晋)’이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백제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준 왜왕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황제 해서공(海西公)이 칠지도를 제작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증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칠지도 명문을 문맥상으로 볼 때 ‘성음(聖音)’을 ‘성진(聖晋)’으로 해독하는 경우, 문장이 전혀 성립되지 못한다. 둘째로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게 하사하던 전후 시기에 있어서, 백제는 ‘어려운 사정(窮狀)’에 처해 있기는커녕 한반도에서 매우 강력한 국력을 한창 과시하던 시기였다. 이 점은 앞에서 논술한 우에다 마사아키도 지적한 바 있다.
우리 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더라도 백제는 태화(泰和) 4년(서기 369년)에 남하하던 고구려를 맞아 격렬하게 싸우면서 오히려 북진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371년에는 백제군이 고구려 왕도였던 평양에 침입했고, 그 때문에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331~371년 재위)이 전사했던 것이다. 따라서 쿠리하라 토모노부의 동진설은 황당무계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칠지도가 이소노카미신궁에서 발견된 것은 1873년에서 1874년경의 일로 추찰된다. 이 칼을 찾아낸 사람은 스가 마사토모(管政友, 1824~1897년)였다. 역사학자였던 스가가 이소노카미신궁의 관리 책임자인 궁사(宮司)가 된 것은 1873년이었는데, 궁사 직책을 맡은 후 칠지도를 보고(寶庫)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그는 칠지도를 처음 보게 된 확실한 연대는 밝히지 않은 채, 신궁에 부임한 초기에 이 칠지도를 꺼내보니 칼에 녹이 슬어 있어서 스스로 녹을 떼냈더니, 칼 몸체(刀身)에 금상감된 글씨가 나타났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칠지도의 그림을 그대로 본뜬 습본(摺本; 지면을 접어서 펼쳐보도록 한 책)이 나온 것은 1875년 7월15일의 일이다. 당시 니나카와 시키타네(川式胤)가 이 습본을 세상에 펴냈는데, 습본이 공표되자 일본에서는 즉시 큰 화제가 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고대 백제왕이 왜왕을 후왕으로 거느리면서 칠지도를 하사했다는 명문이 습본에 그대로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크게 당황한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아닐 수 없었다고 본다. 당시 일본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2~1877년) 등은 1871년경부터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워 공공연하게 조선 침략을 획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1872년 11월28일에는 메이지천황(明治天皇, 1867~1912년 재위)의 ‘징병고유(徵兵告諭)’가 포고되었다.
‘…예부터의 군제(軍制)를 보완해서 해군과 육군을 설치하며, 전국의 국민은 누구나 남자 20세가 된 자는 병적에 편입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이었다. 급기야 1875년 9월에 일본의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서해에 침공해서 강화도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 군부는 이듬해인 1876년에는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년)를 특명전권대신으로 내세우고 군함 6척과 400여명의 군인까지 강화도에 보내 위협 시위를 하면서 조선 정부를 강압했고, 끝내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하던 시기에 칠지도 습본이 출판되었으니,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무언가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았을까.
칠지도에서 없어진 네 글자 |
칠 지도의 명문을 살펴보면, 명문 끝쪽의 4개의 글자가 깎여 있다. 즉 □□□□作으로 되어 있다. 누가 이 4개의 글자를 깎아버린 것인가.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그 네 글자는 누군가에 의해서 고의(故意)로 깎인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칠지도 칼몸체(刀身)의 앞뒷면에는 금상감으로 60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아까운 것은 칼의 아래쪽 약 3분의 1 되는 지점이 부러져 있으며, 명문(銘文)도 깎여 떨어진(削落) 부분이 적지 않으며, 고의(故意)로 깎았다고 생각되는 개소(個所)조차 있다.”(‘石上神宮と七支刀’, 1973).
이 칼을 이소노카미신궁에서 처음으로 찾아내고, 녹을 떼내 금상감이 된 명문을 세상에 알린 것은 스가 마사토모였음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그가 칠지도의 녹만 떼어낸 것이 아니고, 네 글자도 깎아버렸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는 칠지도 앞뒷면이 검게 녹슬어 있어서 모든 녹을 떼내고 금상감이 돼 있는 명문 글자들을 찾아냈다고 했으므로, 그가 녹을 떼내면서 네 글자를 깎아버렸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그는 1877년에 이소노카미신궁 궁사직을 떠나, 일본 군국주의 내각이었던 태정관(太政官)의 편사국(編史局)으로 자리를 옮겨갔고, 다시 1888년에는 도쿄대학의 편사국 편사관이 되었다. 그는 편사국에서 일하면서 ‘임나고’(任那考, 1893)라는 논문을 써냈는데,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갖다 바쳤다는 ‘일본서기’의 헌상(獻上) 기사를 들이대는가 하면 ‘일본서기’의 허위 기사인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역설(力說)했다.
그가 임나고라는 논문을 발표한 시기(1893년)는 25만명의 일본군이 이미 조선반도에 들어갔고, 머지 않아 청나라로 밀고 들어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 중책을 맡은 그도 아마 일본 군벌(軍閥)의 중압(重壓)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임나고’가 일본의 조선침략의 역사적 근거를 대는 데 이용됐다고 치부해 두더라도, 백제왕의 신보(神寶)인 칠지도 앞면의 네 글자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깎여버렸던 것인가.
스가 마사토모가 이소노카미신궁의 책임자(궁사)로 근무하던 시기(1873~1877년)였을까, 아니면 그 후의 일일까. 필자는 일본의 군국주의가 날로 팽창하여, ‘정한론’을 구체적으로 보강시킨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이 주창된 1885년 3월16일 이후의 일이 아닐까 추찰한다.
또 이런 일을 저지른 장본인은 군국주의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필경 깎여버린 그 넉 자에는 백제왕국이거나 백제인 도검(刀劍)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명문에 백제왕과 왕세자가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다는 것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닌토쿠천황과 왕인박사 |
백 제 근초고왕에게서 칠지도를 하사받은 오우진천황이 서거한 때는 서기 402년으로 추찰된다. 그리고 그의 제4왕자 오오사자기노미코토(大雀命)가 태자였던 우지노와키이라쓰코(제3왕자)의 간곡한 권유에 의해 오우진천황을 뒤이은 것은 서기 405년의 일로 본다. 이 당시의 역사적 사실은 905년에 백제인 학자 기관지(紀貫之, 키노쓰라유키, 872~945년, 관료·학자·歌人)가 편찬한 ‘코킨슈우(古今集)’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오오사자기노미코토가 왕자였을 당시다. 그는 제3왕자와 동궁(東宮) 자리를 서로 양보하는 바람에, 등극하지 않은 채 3년이 경과했다. 이때 왕인(王仁)이 딱하게 여긴 나머지 노래를 지어 읊었다. …오오사자기노미코토를 왕위에 오르도록 권유하여 지은 노래는,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 잠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오우진천황 때 백제에서 건너와 왕자들의 스승이 되었던 왕인 박사는 제4왕자를 3년간 비어 있던 왕위에 등극시키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는 왕인이 왜 왕실에서 누렸던 위세도 능히 추찰케 해주는 대목이다.
왕인은 또 이 시가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의 ‘오사카 항구’를 그 당시 이름인 ‘난파진’으로 명명하며, 고대 왜나라 최초의 시가인 와카(和歌)를 지어 불렀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이 자랑하고 있는 와카라는 시의 효시는 다름아닌 왕인의 시가(詩歌) ‘난파진가’였던 것이다(拙論‘現代文學’, 1997년 2월호).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왕인이 왜나라 최초로 와카를 지었을 당시는 일본 땅에 문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왕인은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향찰(鄕札)처럼, 한자를 차용어(借用語)로 삼아 선주민의 왜말로 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주민의 왜말을 한자 차용어로 표기하는 것을 ‘만요우카나(萬葉假名)’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우리 나라 삼국시대의 이두(吏讀)와 향찰(鄕札)을 합친 것과 같은, 일본 고대어에 대한 한자식 표기법이다.
닌토쿠천황릉의 비밀 |
한 편 닌토쿠천황 묘에서는 왜나라가 백제왕부였음을 증명하는 청동거울도 발견돼 학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현재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수대경(獸帶鏡)’이 그것이다. 지름 23.5㎝의 이 수대경은 1908년에 미국 보스턴 박물관 소장품으로 등록됐는데, 1872년 일본 오사카의 닌토쿠천황(仁德天皇, 5세기) 왕릉이 산사태로 인해 왕릉 일부가 부서지면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쿄대학의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1917년~) 교수는 이 닌토쿠왕릉 출토의 ‘수대경’ 청동거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미국의 보스턴 미술관에는 닌토쿠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우수한 유물들이 진열되고 있다. 하나는 후한(後漢)의 ‘수대경’이며, 다른 하나는 남선(南鮮, 한국 남부)에서 많이 제작된 호화로운 칼자루 ‘환두병(環頭柄)’이다. 이 두 가지 유물은 이미 1908년(明治 41년)에 미국 보스턴 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어 있었고, 미술관 목록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다. 이 유물들은 닌토쿠릉의 앞쪽 석관(石棺)에서 나와 외국으로 유출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가 일반인에게는 의외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분 도굴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늘날 전문가들에게조차도 출입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신엄(神嚴)한 천황릉(天皇陵)조차도 실은 과거에 도굴당한 예가 많다. 헤이안(平安)시대(794~1192년)에는 세이무천황릉(成務天皇陵)이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 사건에 관계된 코우후쿠지(興福寺) 승려 등 16명이 유형(流刑)당하기도 했다.
여하간 이노우에 미쓰사타는 보스턴 미술관의 ‘수대경’이 일본 닌토쿠왕릉에서 출토된 도굴품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거울이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노우에의 견해는 보스턴 미술관이 발행한 일본어판 도록(圖錄, ‘ボストン美術館 東洋美術名品集’, SELECTED MASTERPIECES OF ASIAN ART 1890~1990 Museum of Fine Arts, Boston)에 기록된 ‘수대경’ 설명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것 같다. 이 도록은 ‘수대경’에 대해 “후한시대에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는 추측성 설명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편집 등에 관계한 사람들은 일본인들이었다. 보스턴 박물관에는 55년이나 근무했던 동양부 부장(東洋部 部長) 도미타 코우지로(富田幸次良, 1890~1976년)를 비롯해 4명의 일본인 직원이 있었다. 이들 중 누군가가 도록 설명문을 쓰면서 ‘수대경’ 청동거울을 고대 중국의 것으로 추찰한 것 같다.
그러나 1971년에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청동거울인 ‘의자손수대경(宜子孫手大鏡)’이 보스턴 미술관의 ‘수대경’과 지름이 똑같을 뿐 아니라, 거울에 주조된 짐승 문양 등도 거의 똑같음을 국립공주박물관(김종만학예사·김영원 관장)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밝혀낸 바 있다.
‘의자손수대경’의 사신(四神) 그림 부조의 경우 주작(朱雀), 청룡(靑龍), 백호(白虎)는 ‘수대경’ 그림 부조와 서로 중복시켜 살펴볼 때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의자손수대경’의 현무(玄武)그림은 부식이 워낙 심해 잘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똑같은 청동거울에는 사신 부조 외에 세 발 가진 새인 삼족오(三足烏)며 두꺼비 등 문양이 7개의 젖꼭지 같은 돌기(突起)인 사엽좌유(四葉座乳) 사이사이로 가느다란 선(線)으로 배치돼 안쪽 테두리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7개의 사엽좌유가 새겨진 백제 청동거울이 백제에서 왜왕에게 보냈다고 하는 ‘칠자경(七子鏡)’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일본서기’(神功皇后 52년 조)에 의하면, 백제 사신 구저 등이 칠지도(七枝刀) 한 자루와 칠자경(七子鏡) 한 개(一面) 및 여러 종류의 중보(重寶)를 왜왕에게 보내준 것으로 밝혀져 있다. 또 ‘고사기’(應神天皇 條)는 백제 근초고왕이 아직기선생으로 하여금 암수 말 2마리와 횡도(橫刀) 및 큰 거울(大鏡)을 갖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이 두 기록이 공통성이 있음을 시인한다.
현재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수대경’ 및 무령왕릉 출토의 ‘의자손수대경’이 서로 매우 닮았다는 것은 일본 학자들도 시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의 모리 코우이치(森浩一) 교수는 두 거울(수대경 및 의자손수대경)에 대해 연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리는 “중국에서는 이런 종류의 거울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 거울이 중국에서 출토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KBS TV 인터뷰, 1999. 5. 15일 방영)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는 이 두 거울을 복사(複寫)해서 제작한 장소가 백제냐, 아니면 일본이냐 하는 것이 규명돼야 한다면서 수대경의 일본 제작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문제의 수대경이 ‘일본서기’가 전하고 있는 ‘칠자경’이라면 그것은 명백히 백제가 보내준 것이니 논외의 대상이다.
그런데 ‘수대경’이 단순히 닌토쿠천황릉 출토품이라면 그 청동거울이 일본에서 제작됐다고 하는 가설이 논의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리의 일본 제작 가설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닌토쿠천황 당시인 5세기에 일본에서는 그 어떤 청동거울도 만들었다는 증거나 보고가 지금까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대경과 함께 1872년에 닌토쿠천황릉의 산사태로 출토되었다고 하는 다른 부장품(환두병, 삼환령 등)의 국적도 살펴보건대, 모두 고대 한반도에서 제작된 것들임이 입증된 바 있다. 이를테면 큰 칼자루인 환두병의 경우 이것과 거의 같은 것이 1971년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고 삼환령의 경우도 이와 똑같은 것들이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본래 명칭이 ‘칠자경(큰 거울)’인 ‘수대경’이 오사카 가와치의 닌토쿠천황릉에서 출토된 까닭은 무엇일까. 닌토쿠천황은 오우진천황의 제4왕자로 오우진천황을 계승했으므로 칠자경도 부왕으로부터 전승된 것으로 추찰된다.
이제 이 글의 결론을 도출해보자. 오우진천황대에 백제에서 전해진 칠지도, 그리고 오우진천황의 아들인 닌토쿠천황의 무덤에서 발굴된 청동거울, 그리고 무령왕이 그 아우인 게이카이천황에게 전한 인물화상경 등은 모두 왜나라 야마토(大知)왕조가 백제의 후왕(候王)들이 다스리던 백제왕부(百濟王府)였음을 입증하는 매우 귀중한 고고학적 증거 자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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