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마저 잠겨버린 고요한 들녘. 소나무 두어 그루가 이정표처럼 서있고, 산 귀퉁이엔 눈 덮인 농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지붕 양끝에 도깨비가 새겨진 뾰족한 기왓장에도 눈이 쌓여 뭉툭해졌다. 이랑까지 눈 속에 잠긴 조각 밭에는 까투리를 쫓았음직한 개 발자국만 또박또박 박혀 있는 저물녘. 처마 아래 백열등은 늙은 할아버지의 기침소리처럼 가끔씩 깜빡깜빡 거린다. 내 마음 속 깊이 남아있는 겨울풍경이다. 그러고 보니 훌쩍 삼십 수년이 지났다. 전라도 나주 큰 집에서 봤던 눈 덮인 들녘의 풍광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이 풍경은 두고두고 가슴에 박혀 중학교 때는 친구들에게 보낼 성탄 엽서에 내가 본 겨울 풍경을 그려 넣기도 했다. 눈송이를 그린다며 하얀 물감을 묻힌 헌 칫솔을 튕기다 옷을 버려 어머니에게 꾸지람도 많이 들었지만…. 이후 여행 기자로 10여 년을 돌아다니면서 설경 좋은 곳을 쫓아다녔는데, ‘여기다’ 싶었던 곳이 바로 평창 도암면 차항마을 일대다. 차항마을은 용평스키장에서 불과 10여분 거리에 있을 정도로 가깝다.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이면 고만고만한 들녘에 불과하다. 한데 눈이 쌓이면 완전히 딴 세상으로 변한다. 차항마을 주변에는 크고 작은 목장이 있다. 눈 덮인 목장에 소나무만 두어 그루 서 있는 모습이 어찌 보면 외국의 들녘을 연상시킬 정도로 이국적이다. 원래 차항 뒤편의 큰 봉우리는 소황병산 줄기로 백두대간의 길목이다. 마을은 수백 길 아래 아늑하게 앉아있다. 주변은 산이라기보다는 구릉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대고 있는데 오목한 것이 여인의 젖가슴처럼 곱다. 이 구릉 지대의 설경은 일본 홋카이도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비에이와 비슷하다. 이왕 나온 김에 비에이 얘기를 조금 해보자. 야마다 신조라는 이름난 일본의 사진작가가 있었는데, 국토순례를 하며 사진을 찍다 홋카이도의 풍경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는 아예 홋카이도로 옮겨 90년대 후반, 생을 마칠 때까지 홋카이도의 풍경을 담았다. 그가 죽은 뒤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홋카이도를 찾았는데, 바로 이 비에이의 설경에 숨이 탁 막혔다고 한다. 차항마을은 11월부터 눈이 내리지만 가장 눈다운 눈이 내리는 것은 1월 이후다. 10여 년을 들락거리며 관찰해보니 점점 눈이 늦어진다. 11월 풋눈은 양이 적어도 춥고 차갑다. 한겨울 눈은 양은 많아도 포실포실 내리는 따뜻한 솜 눈이 많다. 행여 설경을 사진으로 담고 싶은 사람이라면 대관령에 대설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면 된다. 눈도 시간이 지나면 때를 타는 법이다. 영동고속도로 횡계 IC에서 빠진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용평, 왼쪽 ‘유천’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하면 차항마을 길이다. 전봇대가 붙어있는 붉은 벽돌집을 따라 오른쪽 샛길로 빠지면 차항마을 목장지대가 시작된다. 승용차가 다닐 수 있지만 겨울철에는 반드시 체인을 준비해야 한다. 황태덕장(033-335-5942)은 천변에 있는 황태전문점. 황태국이 맛있다. 원래 이름은 송천회관이었는데 지난해 이름을 바꿨다. 그때도 장사는 잘됐는데 왜 이름을 바꿨는지는 모르겠다. 주인은 똑같다. 황태회관(033-335-5975)은 황태덕장 바로 옆에 붙은 집인데 이 집 역시 황태요리 전문점이다. 횡계 로터리 인근 새마을금고 옆 2층에 있는 납작식당(033-335-5477)은 오삼불고기 전문점이다. 수도권 내에서 올 한해 가장 다양한 이슈로 주목을 받았던 곳은 단연 파주다. 헤이리와 경기영어마을, 파주 신도시 발표 이외에 파주를 알리게 된 또 한 가지의 키워드는 ‘벽초지문화수목원’이다. 벽초지문화수목원(031-957-2004 www.bcj.co.kr)은 서울에서 약 1시간 안팎의 거리에 있어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찾아가는 길이 ‘과연 이곳에 수목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파주 시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있다. 그 덕에 헤이리와 영어마을처럼 사람이 북적이지 않고 조용히 산책하기 좋은 코스로 아는 사람들만 알고 지내다가 올 여름 즈음 인터넷을 통해 급부상한 공원이다. 벽초지문화수목원은 2005년 9월에 오픈한 곳으로 부지 확보와 수목원 조성에만 꼬박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을 들여 조성된 곳이니만큼 울창한 수목들과 다양한 식물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산책로와 넓은 잔디, 그리고 수목원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호수까지 자연스러우면서도 꼼꼼하게 계산된 조화가 돋보이는 곳이다. 게다가 수목원 측의 노력으로 세심하고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어 개장한지 1년이 넘었지만 늘 쾌적한 상태로 마음 편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벽초지문화수목원은 사계절의 풍경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지만 가장 감동적인 풍경은 벽초지의 겨울, 그중에서도 흰 눈이 하얗게 내린 날의 풍경이다. 빼곡한 나뭇가지들에 앉은 아름다운 눈꽃과 그 나무들이 만든 아치형 산책로를 걷다 마주치게 되는 호수, 그리고 그 옆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정자가 함께 보이는 무심교 근처를 걷고 있노라면 세상 시름을 다 잊을 수 있을 듯 평온해진다. 혹시 날씨가 너무 춥지 않을까 걱정하지는 말자. 이곳에는 따끈한 차와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도 있거니와 차로 20분 정도만 움직이면 꽤 맛 좋고 인심 좋은 소박한 맛집들을 찾아갈 수도 있다. 자유로 문산 방면 문발 IC로 나와 광탄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방축삼거리에서 우회전 후 직진하면 우측에 벽초지수목원 입구가 나온다. 약수촌가든(031-953-0062)은 마당 넓은 시골 식당이다. 토종닭이 한 마리 그대로 들어가는 닭죽과 닭 바비큐 전문점으로 닭죽은 찹쌀과 멥쌀을 섞어 들깨, 황율, 마른 은행을 넣고 토종닭을 큼직하게 썰어 넣어 아주 부드럽게 끓여 주는데 슴슴하면서도 입에 착 붙는 깊은 맛이 일품이다. 닭 바비큐는 쫄깃한 식감과 바삭한 껍질, 적당히 간이 맞은 촉촉한 육질이 더해져 고소하면서도 깔끔한 맛을 낸다. 특히 직접 담가 내 주는 겉절이, 석박지, 통배추김치 맛은 가히 일품이다. 반구정 나루터집(031-953-2472)은 자유로를 타고 임진각 쪽으로 달리다 보면 찾을 수 있는 장어구이집이다. 이 집의 메뉴는 장어구이와 메기매운탕 두 가지. 그중 장어구이는 전국에 소문날 만큼 유명하다. 장어는 주문을 받으면 그때그때 구워서 내주는데 양념을 발라가며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굽기 때문에 처음엔 은은하게 나는 숯불향기에 취하고, 한 입 베어 물면 단맛과 매콤함이 어우러진 간장양념을 듬뿍 머금은 장어의 부드러운 맛에 반하게 된다. 나루터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임진강이 내려다보는 시원한 반구정에서 산책을 하는 것도 훌륭한 디저트다. 수려한 산세와 넉넉한 인심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영월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겨울 여행지로 안성맞춤이다. 그곳에 가면 솥에서 금방 쪄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찐빵 한 접시, 뜨끈한 꼴두국수 한 그릇을 먹으며 순박한 사람들의 인심을 덤으로 얻을 수 있어 더욱 좋다. ‘편안히 넘어가라’는 뜻을 가진 영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과거에는 그만큼 사람들이 넘나들기 어려운 오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천연자연이 잘 보존된 웰빙 여행지로 급부상했다. 여름철 웅장한 산세를 자랑했던 숲은 이제 흰 눈을 이불 삼아 뒤집어쓰고 조용히 엎드려 있다. 눈 내린 겨울 풍광이 마치 수묵화처럼 담백하게 느껴진다. 겨울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과 넉넉한 인심을 만나고 싶다면 영월에서도 주천면이 제격이다. 주천(酒泉)면은 이름처럼 술이 나오는 샘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신일리 주천강에는 해마다 겨울이면 쌍 섶다리가 놓인다. 섶다리는 전나무로 뼈대를 삼고 ‘섶’이라 불리던 잔 나뭇가지로 장식한 다리. 주로 강수량이 줄어드는 초겨울에 놓아 사람들이 편안하게 통행할 수 있게 하는데, 여름에 물이 불어나면 자연스럽게 떠내려가는 방식이다. 주천면에 놓이는 섶다리는 다리 2개가 나란히 놓이는 점이 독특하다. 숙종 때 강원감찰사 일행이 장릉으로 참배 갈 때 가마꾼이 지나가기 편하도록 섶다리를 2개 놓은 데서 유래했다.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놓인 섶다리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면 바로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된다. 수주면 무릉리의 요선암도 놓치면 아까운 겨울 풍광을 자랑한다. 꼬불꼬불 소나무 숲길을 올라가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아담한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요선암이다. 요선암은 1913년에 ‘숙종대왕 어제시문’ 봉안을 위해 지은 정자다. 정자에 서면 소나무 사이로 주천강의 물길이 한눈에 들어와 가슴속 묵은 체증이 확 풀릴 만큼 시원한 감동을 준다. 영동고속도로 남원주 IC 혹은 중앙고속도로 신림 IC에서 빠진다. 88번 지방도를 타고 영월 방향으로 가다 597번 지방도를 만나면 주천 방향으로 직진하면 나온다. 신일식당(033-372-7743)의 꼴두국수는 메밀로 만든 손칼국수로 ‘하도 많이 먹어서 꼴두 보기 싫다’는 데서 유래된 재미있는 이름이다. 감자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꼴두국수 한 그릇이면 겨울 추위가 싹 사라진다. 한 장에 5백원 하는 메밀부침개를 곁들이면 한 끼 식사로 푸짐하다. 만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주인 할머니가 손으로 빚은 김치 만둣국을 꼭 먹어봐야 한다. 김치소를 듬뿍 넣은 만두는 먹어도 먹어도 자꾸 손이 간다. 주천묵집(033-372-3800)의 도토리묵밥은 쌉싸래하면서도 야들야들한 맛이 일품. 따라 나오는 조밥을 말아 먹으면 몇 번 씹을 사이도 없이 훌훌 넘어간다. 감자를 강판에 갈아 수제비처럼 끓인 감자옹심이도 영월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여행의 마무리는 찐빵으로 하면 좋다. 안흥찐빵이나 황둔찐빵처럼 이름나지는 않았지만 맛은 훨씬 더 훌륭한 주천찐빵집이 읍내에 있다. 주천 농협 앞에 위치한 주천찐빵(033-372-4936)은 부드러운 팥소와 잘 발효된 밀가루 반죽이 잘 어울려 자꾸 먹게 된다. 선물용으로도 그만이다. 겨울여행은 독특한 멋과 맛이 있어 매력적이다. 순백의 눈꽃이 핀 겨울산과 스키장도 겨울여행지로 안성맞춤이지만, 겨울바다의 낭만과 정취도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꽁꽁 언 마음까지 녹일 수 있는 서해의 낙조와 철새들의 군무, 그리고 별미가 있어 좋은 곳이 천수만 간월도다. 천수만 지역은 겨울 드라이브 코스로도 제격이다. 간월도는 어리굴젓으로, 천수만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겨울 여행지다. 게다가 지척에 안면도, 남당리 포구, 천북 굴 구이 단지 등이 있고 굴, 새조개 등 겨울 별미도 풍성하다. 서산 천수만을 끼고 있는 간월도는 원래 섬이었다. 그러나 서산 A·B 지구 간척사업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육지가 된 섬이다. 간월도를 겨울 여행지로 손꼽는 이유 중 하나는 간월도의 겨울은 낭만이 넘치기 때문. 포구를 걷다 보면 쓸쓸함이 바람처럼 불어오지만, 간월도 부두에 구름처럼 떠있는 배들은 낭만을 더해준다. 바로 음식점으로 사용되는 고깃배들이다. 간월도가 유명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간월암이란 작은 암자 때문이다. 간월암은 물이 빠지면 넓은 갯벌이 드러나 뭍이 되지만, 물이 들면 섬이 되는 암자다. 절 담벼락 너머가 망망대해인 아름다운 고찰이다. 간월암 마당에서 담벼락 너머 좌우로 죽도, 황도, 안면도 등이 늘어 서 있고 저 멀리 천수만 끝까지 펼쳐진 바다가 참으로 아름답다. 겨울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겨울바다 풍경도 근사하지만 간월도의 해넘이는 뭉클한 감동을 준다. 간월암에서 바라보는 천수만의 낙조와 달맞이가 무척 운치가 있다. 흔히 볼 수는 없지만 간월암 설경과 일몰이 어우러진 풍경은 진경산수화가 따로 없다. 천수만 철새 도래지는 보통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철새들이 만들어 내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데, 특별히 탐조장소로 적당한 곳은 천수만 방조제 공사를 할 때 유조선으로 물막이를 했던 곳을 알리는 홍보 판 부근과 간월도 입구 부근이다. 해마다 겨울철이면 ‘서산 간월도 바다음식축제’와 ‘천수만 철새기행’도 열리니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가볼 만한 여행지로 제격이다.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에서 빠져나와 29번 국도를 잠시 타고는 다시 40번 국도와 96번 지방도로를 연결해 안면도를 이정표 삼아 10분가량 달리면 간월도 입구 철새축제 행사장이다. 큰마을횟집(041-662-2706)은 미식가들 사이에 영양굴밥이 맛좋기로 소문난 곳. 굴, 밤, 대추, 은행 등을 넣어 돌솥에 갓 지어낸 밥은 상큼한 굴 맛과 차진 밥이 어우러져 미각을 돋운다. 다시마 육수에다 간장, 달래, 갖은 양념으로 맛을 낸 달래양념장은 영양굴밥의 감칠맛을 더한다. 간월도 오뚜기횟집(041-662-2708)은 새조개샤브샤브가 맛있는 집이다. 새조개는 쫄깃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구수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이 여느 패류와는 사뭇 다르다. 맛동산(041-669-1910)에서는 서산 특산물인 굴을 이용해 특허까지 낸 영양굴밥과 청국장을 맛볼 수 있다. 영양굴밥을 주문하면 냄새만 맡아도 식욕을 자극하는 청국장이 서비스로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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