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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럭셔리 및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7 대 성당 ...

by 현상아 2007. 1. 16.
 




당이라고 하면 단순히 미사를 올리거나 종교적인 수행을 하는 곳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유네스코가 선정한 건축물 중에서도 성당들을 살펴보면 종교적인 역할 이외에도 예술과 문화, 역사가 만들어진 곳임을 알 수 있다. 규모와 건립시기, 건축양식, 역사적 의미를 두고 선정된 예술과 역사를 바꾼 세계의 아름다운 성당을 재해석한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스탄티누스 당시는 황제 난립시대로 6명의 황제들이 있었다. 그중 콘스탄티누스와 막센시우스가 가장 강력했는데, 그들은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승리 후 그의 모친 헬레나 왕후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경해 오던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공포한다. 이렇게 성 베드로 대성당은 32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49년에 완공되었다. 15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원래의 대성당은 1,100여 년의 역사를 지켜오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와 확장 등으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성당 건축물 중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역시 돔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돔을 세우기 위해 1557년 탐부로를 세우면서 1558년과 1561년 사이에 나무로 된 돔의 모형을 제작하였다.

1564년 2월, 아흔이 다 된 노장 미켈란젤로가 운명하기 직전, 탐부로는 완성되었으며 그 위에 이미 설계를 마치고 모형까지 만들어 놓았던 돔을 세우는 일이 관건이었다.미켈란젤로의 후계자였던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그의 조수 도메니코 폰타나의 지휘 감독 아래, 600여 명의 인부들이 밤낮으로 공사를 계속한 결과, 1588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한 지 22개월 만인 1590년 6월, 이 거대한 돔은 완공되었다. 그리하여 대성당의 모습은 다시 라틴형 십자가의 모양으로 변화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한 번 바뀌게 된 것이다.


1629년 바로크 예술의 대가 잔 로렌조 베르니니가 이으면서, 신축 대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베르니니가 해야 할 일은 대성당의 내부를 좀 더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다. 시대적으로는 이미 바로크 양식이 절대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반해, 대성당의 거의 대부분은 브라만테에서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어 있어, 이 두 양식을 조화시키면서도 접목시키는 일이 매우 어려웠던 일 중의 하나였다고 훗날 베르니니는 그의 전기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대성당 내부에서 잘 볼 수 있는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세운 4개의 청동 기둥과 그 천장 덮개, 그리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의 중심이 바로 제대 밑에 있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과 돔의 중심에 일직선으로 이어지도록 고안한 점, 또한 십자가가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한 점은 베르니니의 위대한 예술적 세계를 대변해 주고 있다.

 

캔터베리의 역사는 597년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이 앵글로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베네딕트회의 수도사 아우구스티누스를 해협 너머로 파견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켄트 왕국의 애설버트(AEthelbert) 왕이 먼저 세례를 받고 그의 신하들이 뒤를 따르는 등 선교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캔터베리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 한가운데 교회를 건설했다.대성당은 훗날, 본래 예배의 장소였던 이곳에 세워졌다.16세기 중반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청과 절연하고 가톨릭 수도회의 활동을 억압하기전까지

수도원은 계속 확대되었고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성 마틴(St. Martin)에게 바쳐진 작은 교회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성당 동쪽의 구릉 위에 자리잡은 이 교회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본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1077년 노르망디 출신으로는 최초로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랜프랭크가 대성당 건축에 손을 댄 이후 성당 공사는 중세가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초기 건물 중에는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지하실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조각이 아름다운 콜로네트(colonnette)와 1160년경에 제작된 희귀한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1174년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당시까지 남아 있던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들이 소실되고, 오늘날 영국 고딕 양식의 걸작으로 꼽히는 건물들이 새로 증축되었다. 특히 동쪽 측랑과 영국에서 가장 긴 커다란 성가대석이 있는, 토머스 베켓 대주교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건설된 트리니티(Trinity)예배당이 돋보인다. 또한 ‘흑태자’라고도 알려진 웨일스의 왕자 애드워드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시신이 캔터베리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12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스테인드글라스는 그 아름다움에 있어 프랑스의 샤르트르(Chartres) 대성당이나 부르주(Bourges) 대성당과 견줄 만하다. 170미터 길이의 네이브와 대성당의 서쪽구역은 대화재에 의해 훼손되지는 않았지만, 극단적인 플랑부아양 고딕 양식의 유행에 대응해 발달한 퍼펜디큘라 스타일의 비례에 맞춰 14세기에 재건되었다.건물 내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찌를 듯이 뾰족한 아치형 천장이 좋은 예인데, 특히 캔터베리의 자랑인 1496년에 세워진 아름다운 벨 해리 타워(Bell Harry Tower)를 비롯한 탑들의 천장이 주목할 만하다.

 


9세기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지어진 쾰른 대성당은 예부터 ‘모든 독일 성당의 모후’라고 불렸다. 독일 제국 최초의 교회를 짓는 것인 만큼 그때까지 만들어진 어떤 교회보다도 크게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쾰른 대성당 참사회는 당시 가장 유능한 건축가였던 마이스터 게르하르트에게 야심찬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게르하르트에 이어 대성당의 성가대석을 만든 아르놀트와 요한네스 부자도 이 고딕 양식의 성당을 건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이 모델로 삼은 것은 아미앵 대성당이었다. 성당 안에는 14세기 초반 이후 중세 최고의 금속공예품이라 일컬어지는 유명한 동방박사 3인

의 관이 놓여 있다. 최초의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동방박사 세 사람의 유골이 이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은 쾰른 대성당의 의미와 명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또 이곳은 쾰른 대주교의 집전으로 아헨에서 즉위식을 마친 독일 왕들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기도 했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대성당 건축의 자금줄인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시청이나 귀르체니히 축제 극장같이 자신이 속한 시민 사회를 위해서만 일을 했기 때문에 작업 속도는 매우 느려졌다. 결국 대성당 건축은 16세기 초반에 이르러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 성당은 몸통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후 300년 동안 작업은 중단되었다. 60m 높이의 3층까지 짓다가 그만둔 남쪽 탑 위에는 중세의 크레인이 그대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다른 곳은 대부분 1층 이상도 올라가지 못했는데, 이런 곳에는 임시 지붕을 만들어 덮어 놓았다.


대성당을 구경한 괴테는 “창조의 한가운데에서 완성되지 못한 채 굳어버린 세계적 건축물”이라고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19세기 초반 낭만주의 등장과 함께 중세를 미화하고 재발견하면서 대성당 건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또 대성당의 서쪽 건물의 설계도가 발견되면서 대성당 건축은 다시 시작되었다. 북쪽 탑과 남쪽 탑의 4m 높이 외벽은 요한네스가 14세기 초에 이미 끝낸 상태였고, 이제 나머지 부분도 중세의 설계를 따라서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중단을 극복하고 건축을 시작한 지 38년 만에 대성당은 ‘독일 최고의 국보’로 완성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는 드네프르 강을 따라 발달한 도시다. 키예프는 러시아 도시들의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성스러운 장소로 인식되고 있으며 실제로 구 소련시대에는 소련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며 우크라이나의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의 중심지이다.


독일의 한 역사학자가 키예프를 400개 이상의 성당이 있는 도시라 설명한 것처럼 정말 많은 성당이 우크라이나에 분포되어 있다. 단순히 예배를 보는 성당만 있는 경우도 있고

수도를 하는 수사들이 함께 거주하는 수도원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민속종교만 있던 우크라이나에 성인 블라디미르는 기독교 중에서도 그리스 정교가 가장 적절하다고 선택한 후 988년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격상시켜 국민들이 비잔틴 의식에 따라 세례를 받도록 했다. 그 후 야로슬레이브 현자에 의해 11세기에 건축된 소피아 성당은 키예프 그리스 정교의 중심지로 ‘신 콘스탄티노플’로 상징된다.


소피아 성당은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모방해 로마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동부유럽의 오래된 성당 중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성당으로 세계적으로도 탁월한 건축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성당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일부 남아 있다. 그리스어로 소피아라는 말은 지혜를 의미하며 지혜의 주인인 예수의 화신을 나타낸다.


소피아 성당 안에 들어가면 색은 조금 바랬지만 부분적으로 처음 만들어진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중앙의 둥근 천장에 모자이크로 되어 있는 예수의 성상과 반원형 벽에 모셔져 있는 성모 오란타이다. 내부 모습은 17세기 이후 그대로이며 소피아 성당 광장으로 들어오기 위한 입구 역할을 하는 76m의 종루는 바로크 양식으로 1699~1706년에 세워졌다. 성당 내부에 지금과 같은 바로크 양식이 남아 있게 된 것은 17, 18세기 성당을 복원하면서 건축양식이 일부 바뀌었기 때문이다.

 


포위 공격을 2년 동안 끈질기게 감행한 끝에 1248년 11월 23일,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의 무어인들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당당하게 도시 안으로 입성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알 안달루스’ 지역에서 발달한 이슬람 건축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기독교인들이 돌아왔다는 것은 그들의 종교 의식도 다시 시작됨을 의미했지만 미사를 올릴 만한 성당이 없었기 때문에 대주교는 50년 전에 알 모아데 왕조가 세운 모스크를 성당으로 개축했다. 대성당 건축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1401년이었다. 본래 모스크가 서 있던 자리 위에 하나의 네이브와 4개의 측면 아일, 25개의 예배당을 거느린 길이 116미터, 폭 76미터의 대성당이 솟아올랐다. 세비야 대성당은 완공 당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규모가 컸

다. 구조 공사가 마무리되기까지 100년이 소요되었고 내부 장식이 완성되기까지 또다시 300년을 기다려야 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발견한 뒤 세비야로 들어온 막대한 부 덕분에 커다란 창문과 레타블로(retablo: 주석판에 그리는 종교적 그림), 무리요(Murillo), 수르바란(Zurbaran), 고야(Goya) 등이 그린 아름다운 그림으로 성당을 장식할 수 있었다. 수많은 그림 이외에도 성당 안을 수놓은 다른 걸작품으로는 1482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스페인에서 가장 정교하다고 손꼽히는 높은 제단과 웅장한 타원형의 집회실을 들 수 있다.


대성당에는 9개의 문이 있다. 주 대문인 푸에르타 마이요(Puerta Mayor)는 서쪽에 있고, 북문인 푸에르타 델 페르돈은 무데하르 양식의 완벽한 본보기로서 알 모아데 모스크의 일부를 허물지 않고 그 위에 지었다. 무데하르는 이슬람과 기독교 건축이 융합한 결과 탄생한 양식이다. ‘무데하르’라는 용어는 본래 재정복 이후에 결정한 이슬람교도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푸에르타 델 페르돈을 지나면 이슬람 율법에 따라 구획되고, 세정의식을 행하는 데 이용되는 수조가 있는 파티오 데 로스 나란호스(Patio de los Naranjos, 오렌지 안뜰)가 나온다. 대성당의 맞은편에는 913년 알모라비데(Almoravide) 칼리프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때 세워진 요새 궁전, 알카사르가 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12~13세기에 지어진 불가사의한 건축물로서 서양에서 가장 완벽하게 잘 보존된 중세 기독교 유적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유산이다. 4,000개의 인물 조각상과 5,000명의 인물을 표현해놓은 스테인드글라스는 인간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태양빛에 강렬하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세계 각처에서 성지 순례를 오는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샤르트르 대성당을 누가 건축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익명의 천재 건축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건축 사조인 고딕 양식을 창조했다. 로마네스크 성당의 견고한 벽이 사라지고, 하늘을 향해 치솟은 날렵한 건축형태가 탄생한 것. 서쪽 파사드의 양 옆 자리를 차지하는 2기의 높은 탑, ‘낡은 종루(Cocher Vieux)’와 ‘새로운 종루(Cocher Neuf)’는 12세기에 세워졌으며 훗날 융기

된 지붕을 얹어 플랑부아양 양식의 출현을 예고했다. 서쪽 파사드의 ‘왕의 문’은 왕관을 쓴 예수의 조각상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으며, 샤르트르 대성당에 조각된 4,000여 점의 인물상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성당의 실내는 어두웠고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빛이 유일한 장식이었는데,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실내 장식이 처음으로 건축의 일부가 되었다.
아치를 향해 뻗어 오른 둥근 기둥, 4각 기둥, 다각형 기둥으로 이루어진 기둥의 ‘숲’이 조화로운 ‘자연’의 분위기를 연출하여, 일기의 변화에 따라 숨바꼭질하는 빛과 그림자가 단조로움을 깨뜨리고 있다. 그러나 1205년에서 1240년 사이에 제작된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1,200여 개의 창문에서 빛이 어둠을 누르고 승리를 거둔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성인들의 생애와 성경, 중세의 일상생활에서 찾아낸 장면들을 표현하고 있다. 목수와 물레방앗간 주인, 대장장이, 상인, 음악가, 한껏 차려입고 활보하는 귀족, 성직자, 순례자 들이 이들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게다가 묘사된 인물들은 성당 재건에 헌신했던 사람들과 동일 인물이기 때문에 이들 장면이 보다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중세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달리 비할 데 없는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피렌체는 르네상스 예술의 상징이자 마사초, 피에로 델라프란체스카, 보티첼리,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그림이 꽃을 피운 도시다. 도나텔로가 우아한 청동상을 조각하고,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가 건축계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 성당의 웅장한 돔을 세움으로써 그 원칙을 따랐던 곳이 바로 피렌체였다.


이탈리아어의 아버지 알리기에리 단테(Alighieri dante)가 태어나고 근대적·과학적 방법론의 창안자이자 운동 법칙의 발견자인 갈리레오 갈리레이를 반긴 도시 역시 피렌체였다. 600년 동안 계속되었던 놀라운 창의성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유산을 남겼다.또한 피렌체에는 유럽에서 4번째로 큰 성당(성 베드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쾰른 대성당)인 두오모 성당이 있다.두오모 성당의 캄파날레(종탑)는 1334년 지오토가 설계한 것으로 유

명하다. 종탑의 높이 는 85m로 돔보다 6m가 낮으며 흰색, 연두색, 분홍색 등의 토스카나 대리석으로 만들어 웅장하면서도 화려하다. 또한 종탑은 지오토가 죽은 지 22년 지난 1395년 완공되었다. 두오모 성당의 돔은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의 판테온을 보고 모방하여 설계한 것으로 1463년 완공되었다. 돔 내부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은 바사리의 작품이지만 추카피에 의해 완성되었다. 두오모 성당 앞에 위치한 세례당의 동쪽문은 “천국의 문”이라며 미켈란젤로가 감탄한 문으로 기베르티가 20년 걸려 만든 문이다. 원본은 무세오 델로 페라 델 두오모에 있는데 21년에 걸쳐 북쪽문을 완성한 기베르티에게 동쪽문(1424~1452)을 작업해 줄 것을 의뢰 받아 만든 문으로 구약성경의 내용을 주제로 했다고 전해진다.

 

Good Actual Conditio...

에디터_배주현 참고서적_《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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