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우의 朝鮮이야기(26)] 그 많던 왕씨는 어디로 사라졌나?
- 조선 건국 직후 강화도 등에 강제이주… ‘왕씨 제거’ 기습작전으로 집단 수장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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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안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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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왕(王)씨들은 어디로 갔을까? 당시의 통계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500년 가까이 이어진 고려였기에 조선 건국 당시 왕씨의 수는 대단했을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지 사흘 후인 1392년 7월 20일 태조 이성계는 대사헌 민계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고려왕조의 제사를 받들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왕씨를 강화도와 거제도에 옮겨 살도록 명을 내렸다.
이성계는 물론이고 신하들도 왕씨의 존재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는 명나라로부터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외적으로 불안정 요인이 컸던 것이다. 태조3년(1394년) 1월 21일 사헌부·사간원·형조 등 형률을 맡고 있는 3개 기관이 합동으로 왕씨를 제거해야 한다는 글을 올린 것도 그런 불안감의 발로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윤허하지 않았다. 자칫 민심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는 중대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신하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려 십여 차례에 걸쳐 끈질기게 왕씨 제거를 주장했다.
실상은 분명치 않지만 왕씨들이 연루된 이런저런 모반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이성계는 사헌부에 명을 내려 강화도 등에 거주하고 있는 왕씨들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신하들의 왕씨 제거 주청은 4월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결국 4월 14일 이성계는 도평의사사에 그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한다. 왕씨들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일부 신하는 섬에 유배하는 정도에서 왕씨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지만 소수였고, 절대다수는 왕씨의 완전제거를 역설했다. 결국 왕씨 제사를 담당해야 하는 공양왕의 동생인 왕우 삼부자를 제외한 모든 왕씨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왕우의 딸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결혼했으니 이성계와 왕우는 사돈이어서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이보다 참혹한 순간이 또 있었을까?
이렇게 해서 왕씨의 씨를 말리는 작전이 개시되었다. 당시 왕씨들은 강화도와 거제도 외에 삼척에도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중추원 부사 정남진과 형조의랑 함부림은 삼척, 형조전서 윤방경과 대장군 오몽을은 강화도, 형조전서 손흥종과 첨절제사 심효생은 거제도로 파견되었다. 모두 개국에 큰 공을 세웠던 이성계의 최측근이었다.
작전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바로 다음날 윤방경 등은 왕씨를 모두 색출해 강화나루에 수장(水葬)시켰다. 거제도의 작전은 4월 20일에 이뤄졌다. 마찬가지로 수장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왕족이었고 그 밖의 왕씨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돼 “모두 목을 베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왕씨의 서얼들까지 잡히는 대로 참수했다.
이어 이성계는 고려 때 왕씨 성을 하사 받은 경우에는 본래의 성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왕족이 아닌 경우라도 왕씨 성은 모두 어머니쪽 성으로 바꾸도록 엄명을 내렸다. 왕씨들의 관직진출이 금지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행정력이 미비한 상태였으니 아무리 정부에서 완벽하게 왕씨를 제거했다고 해도 살아남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왕씨 색출작업은 태종 때도 계속된다. 태종13년(1413년) 태종은 의정부에 명을 내려 “사찰에 있는 중들 중에서 나이 15세 이상 40세 이하의 경우 출생지와 조상 계통을 샅샅이 조사해 보고하라”고 했다. 아무래도 사찰은 불교국가였던 고려에 동조하리라고 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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