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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다큐멘터리 및

한민족 역사의 첩자들 ...

by 현상아 2007. 4. 22.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첩자들
 
 
원효와 의상, 첩보 혐의로 구금
 
삼국 간의 군사 충돌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7세기 중반, 정확하게는 650년 신라의 승려 두 사람이 당으로 불법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두 사람은 당시 당나라와 고구려를 구분 지었던 요동 지역으로 길을 잡아 나가던 중 국경을 지키던 고구려 군사에 의해 수십 일 동안 감금당한다. 당나라행은 물론 무산되었고, 둘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신라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이들의 발목을 붙잡은 혐의란 것이 뜻밖에도 ‘첩자’였다.
 
얼핏 뜻있는 종교인이 구법 과정에서 당한 시련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대목이긴 하다. 하지만 관심의 초점을 구법승 두 사람이 아닌 그들에게 씌워졌던 ‘첩자’라는 혐의에 둔다면 우리 고대사 연구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뜻밖의 흥미진진한 연구거리와 조우할 수 있다. 바로 ‘첩자’라는 익명의 존재들이다. 역사에서 이들은 철저하게 조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행위는 개인이나 집단은 물론 한 나라의 운명까지 좌우할 정도로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
 
650년 첩자 혐의를 받고 수십 일 동안 구금되었던 두 승려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4 의해 제5 ‘의상전교’)에 남아 있으며, 두 승려는 다름아닌 원효와 의상이었다
 
 
스스로 첩자가 된 을지문덕
 
살수대첩은 고구려의 치밀한 작전의 승리이자 을지문덕이란 명장의 심리전과 기만술 등이 효과적으로 작용한 첩보전의 승리다. 을지문덕은 스스로 첩자로 분해 적진에 뛰어들기도 하고 거짓으로 항복하기 전에 수나라 장군의 마음을 떠보는 등 최고 수준의 교란전술과 용병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고구려와 수의 제2차 전쟁은 그 규모가 가장 컸고 또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다. 1차 전쟁을 겪으면서 고구려는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한 상태였고, 수는 양제 개인의 성격적 결함과 서역에서의 성공 등에 자만하여 결국 대세를 그르치고 말았던 것이다. 사전 준비는 물론 전략과 전술 등 모든 면에서 고구려는 수를 압도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고구려가 일찍부터 수의 변경에서 활발한 첩자 활동과 첩보전을 벌여왔다는 사실과 수나라 내부 고위관리를 포섭하여 내간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을지문덕이 서슴없이 수의 군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첩자 활동과 첩보에 따른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여기에 활용 등 을지문덕의 능수능란한 용병술이 가미되어 고구려는 완승을 거둘 수 있었다. 얼마 전 드라마 <대조영>에서도 언급되었던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보낸 시에서 말한 귀신 같은 책략’ ‘기묘한 계책은 고스란히 을지문덕에게 돌아가야 할 대목있었던 셈이다. 
 
 

 

 

   

 

 

승려 첩자, 도림
 
고구려의 장수왕은 즉위 63년째인 475 9월에 3만 명의 병력으로 백제를 기습하여 개로왕을 사로잡아 처형하고 수도 한산을 점령했다. 백제는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그런데 백제의 이 치욕스러운 패배의 이면에는 한 승려가 있었다. 그는 고구려가 치밀하게 준비한 백제 공략 시나리오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 첩자였다. 장수왕은 첩자를 모집했고 그는 승려의 신분으로 조국 고구려를 위해 첩자를 자원했다. 그는 죄를 짓고 고구려에서 도망쳐 온 것처럼 꾸미고 개로왕의 취미인 바둑으로 접근하여 신임을 얻은 다음, 현란한 말솜씨로 각종 대형 토목사업을 부추겨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개로왕은 말할 수 없는 후회와 함께 첩자 도림을 저주하면서 죽어갔다. 이 사건은 첩자 한 사람이 한 국가를 멸망의 문턱까지 몰고 갈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신념의 화신, 박제상
 
신라 눌지왕의 동생들을 구하고 장렬하게 죽은 영웅 박제상은 사실 첩자였다. 그는 변복과 잠입으로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었던 복호를 구해왔다. 그리고 왜국에 붙잡혀 있는 미사흔을 빼내오기 위해 자신을 고국을 배반한 자로 꾸며 왜로 건너갔다. 화려한 언술로 왜왕을 안심시킨 박제상은 미사흔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키며 첩보술을 훌륭하게 구사한 전형적인 첩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첩보술의 전문가, 김유신
 
신라의 명장 김유신은 침투 간첩 조미곤을 통해 백제의 최고위층 실세인 좌평 임자를 포섭하여 백제 정권의 동향을 면밀히 파악하였고, 그 결과 상대적으로 크게 힘들이지 않고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조미곤은 백제에 포로로 잡혀가 좌평 임자의 집에서 종노릇을 하다가 도망쳐온 인물이었다. 김유신은 이 조미곤을 사상적으로 철저하게 훈련시켜 다시 임자에게 보내 그를 포섭하게 하는 완벽에 가까운 첩보술을 구사하고 있다. 백제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무너진 것은 신라의 첩보망이 백제 지배층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치정을 역이용한 모척
 
김춘추로 하여금 목숨을 건 고구려행을 감행하게 만든 642년 백제와 신라의 대야성 전투도 그 실상을 파고들면 치정과 그것을 이용한 첩보전이 핵심이다. 대야성 성주였던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막료 검일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다. 이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백제의 첩자 모척은 김품석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검일을 포섭?매수하여 내통함으로써 대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김품석과 그 가족을 몰살했다. 대야성 전투로 야기된 김춘추의 고구려행은 궁극적으로 나? 연합을 이끌어냈고, 나아가서는 신라가 삼국통합에 박차를 가하게 됨으로써 삼국은 물론 당시 국제정세의 판도 변화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렇듯 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첩자들이 가장 왕성하고 눈부시게 활약하던 시기였다. 승려들까지 첩자로 활용할 정도로 첩자전이 치열하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삼국은 모두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총력전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상대에 대한 첩보와 그를 통한 정보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삼국은 첩자 침투와 첩보를 쉴새없이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첩자들의 무대는 삼국에만 한정되지 않고 수.당을 축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활약상 여부에 따라 한 개인의 운명은 말할 것도 없고 한 국가의 흥망이 좌우되었으며, 나아가서는 국제정세의 판도까지 변화시켰던 것이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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