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를 차지한 광개토대왕의 위용
5천년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00인의 한국인
출처 : <월간 중앙> 2007년 4월호에 창립기념으로 “푸른 역사 연구소”에서 선정 발표한 것을 요약 발췌한 것임
<종합> 1위~10위
1위 광개토대왕(375~413)-군사적 영웅으로 국토 정복 활동이 한국인의 자긍심을 심어준 한국인. 395년에 시나무첸강 방면 거란 정복. 396년 한강일대에서 백제 파사왕에게 항복받아냄. 400년~404년 예성강에서 왜구 격퇴. 410년 동부여 토벌하는 등 국토를 최대로 넓힐 터전을 마련한 왕인 점.
2위 세종대왕(1397~1450)-조선 제4대왕으로 신민을 사로잡는 통치와 1446년 한글창제 반포로 문명국가의 터전을 마련한 한국인인 점.
3위 정약용(1762~1836)-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방대한 유교의 경전을 해석 집필한 경학가다. 어문, 역사, 지리, 과학, 의학, 예술 등에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실천 양심가인 점.
4위 박정희(1917~1979)-“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세계 경제 11위 국가의 초석을 다진 CEO형의 대통령인 점.
5위 김옥균(1851~1894)-쇄국의 빗장을 풀고 개혁 개방을 선도한 풍운아인 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고 근대국가를 세우려했던 점.
6위 서 희(942~988)-고려초 거란의 침략을 받아 국가 존망이 불확실할 때에 적장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적군을 물리친 외교적 수완이 뛰어난 장군이었던 점.
7위 이건희(1942년 출생)-반도체 메모리칩 분야에서 15년째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는 반도체 왕국의 주인공인 점. 위기의 때에 빛을 발하는 예지력을 가진 점.
8위 장영실(생몰연대불확실)-세종때 동래헌의 관노 출생으로 태어나 당대 최고의 발명가가 된 점. 1432년에 천문의 제작, 1437년 금속활자 주조, 자격루 제조, 1441년 측우기 발명한 점.
9위 이승만(1875~ 1965)-한국에 전래해 온 대륙풍을 차단하고 1953년 한미동맹을 결성하므로 미국 중심의 해양 문명권 편입을 시도한 현대판 문명 개화파의 역할을 다한 초대 대통령인 점.
10위 백남준(1932~2006)-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이며 전위 음악가로 “전 세계에 통하는 브랜드”를 구축한 한국 출신의 예술가인 점.
10위 밖의 90인
<통치부분>
근초고왕(?~375)-백제 제13대 왕. 고구려 군사를 대동강에서 무찌르고 평양성을 점령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근초고왕 때 백제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요서지방과 산둥지방, 일본의 규슈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진흥왕(534~576)-신라 24대 왕으로 백제의 한강 유역을 획득, 백제의 성왕을 죽이고 대가야를 평정하고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우고 화랑을 창시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대조영(?~719)-고구려 유민출신으로 장령치 부근 천문령에서 당나라대군을 격파하고 발해를 건국하였다. 699년 동모산을 도읍으로 국호를 진, 연호를 천통이라 했다. 713년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궁예(?~918)-후고구려 태봉국을 건국한 왕(재위 901∼918). 관제를 정비하고, 강원·경기·황해를 점령, 남서해 해상권도 장악했다.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신숭겸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도망가다 피살되었다.
왕건(877~943)-고려 제1대 왕(재위 918∼943). 궁예의 휘하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였고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고려를 세운 후,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았으며 신라와 후백제를 합병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건국하여 북진정책과 숭불정책을 확립한 왕.
광종(925~975)-고려 4대왕으로 956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제정했으며, 958년에는 과거제도를 도입한 인물.
성종(960~997)-고려 6대왕으로 유교사회로 전환하기 위해 체제를 정비하였다.
광해군(1575~1641)-조선 15대 왕. 명과 후금 두 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양면 외교정책을 실시하였다.
인조(1595~1649)-조선 16대왕.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의 난국 속에서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과 수어청을 실시하였다. 송시열, 송준길 등의 대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하였다.
정조(1752~1800)-조선 22대왕. 왕정체제를 강화하고 위민정치를 실현, 적서구분을 혁파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고종(1852~1919)-조선 26대 왕.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으로 1910년 일본에 강압적인 한일합방으로 나라의 주권을 잃고 일제로부터 국권회복을 위해 애쓰다 독살되어 죽은 임금.
<정치부분>
최승로(927~987)-고려때 재상. 토호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상주시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게 한 재상.
이자겸(?~1126)-고려 때 문신으로 딸 3명을 인종에게 비로 삼게하여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한 재상.
김부식(1075~1151)-고려 때 문신.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을 직접 썼으며, 1145년에 완성하였다.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지냈고 묘청 등의 서경천도세력이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을 지휘하며 난을 제압하였다.
정중부(1106~1179)-고려 때 무신. 문신 편애에 항거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무신정권의 기틀을 마련한 무인.
최충헌(1149~1219)-고려 때 장군. 최씨 무신정권의 1대 독재자.
이규보(1168~1241)-고려 때 문신. <동국이상국집>과 <백운소설> <국선생전>을 저술한 학자.
정몽주(1337~1392)-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정도전(1337~1392)-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문신. 조선개국의 정치, 경제의 토대를 마련한 재상.
권근(1352~1409)-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문신. 조선 개국 후, 사병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호전시킨 신하.문장에 뛰어났고, 경학에 밝아 사서오경의 구결을 정하였다.
조광조(1482~1519)-조선 중기의 문신. 도학정치로 훈구정치를 개혁. 기묘사화를 일으킨 학자.
이황(1501~1570)-조선 중기의 문신. 이기이원설을 주장한 학자. 도산서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한 학자.
조식(1501~1572)-조선 중기의 학자.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을 토대위에 실천궁행을 강조한 산림처사.
이이(1536~1584)-조선 중기의 학자. 어머니 신사임당. 선조 때 10만 양병설을 주장.
최명길(1586~1647)-조선 중기의 문신.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공사.
송시열(1607~1689)-조선 후기 문신. 성리학자. 서인 중 노론의 영수.
흥선대원군(1820~1898)-조선 후기 고종의 아버지로 섭정하여 쇄국정치 실시.
명성왕후(1851~1895)-조선 26대 고종의 왕비. 민씨일가의 세도정치 시대를 열게 함. 1895년 일본낭인에 의해 시해된 비극의 왕비.
이동인(1849~1881)-개화기의 개화승. 동래 범어사의 승려로 일본어에 능통. 1882년에 체결된 한일수교조약의 조문을 초안한 사람.
유길준(1856~1914)-개화기의 개화운동가. 서유견문을 집필. 최초의 언문일치를 쓴 사람.
윤치호(1865~1945)-개화기의 정치인. 개화운동가. 독립협회를 조직. 독립신문 제2대 사장.
김구(1876~1949)-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자. 임시정부 주석. 항일운동가.
김일성(1912~1994)-북한의 주석. 본명은 김성주. 소련군의 힘으로 북한의 최고위직을 지내며, 남조선노동당 등의 국내파와 소련파 중 반대파인 옌안파 등을 숙청하여 권력체제를 구축하였다.
김대중(1926~ )-정치가.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지냄.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군사부분>
을지문덕(?~?)-고구려 명장. 수(隋)나라의 우중문·우문술이 수륙양군으로 고구려를 침범하자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해 살수에서 수나라의 후군을 무찔러 살수대첩을 이끈 장수. <여수장우중문>으로 유명함.
김유신(595~673)-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 소정방이 이끈 당나라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서 여러 번 실패했으나 결국 성공하였다. 이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계백(?~660)-백제 말기의 장군.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자 장군으로 황산벌에 세 진영을 설치하고 싸워 전사한 무사.
연개소문(?~665)-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장군. 보장왕을 옹립하고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김춘추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을 점령했다. 당 태종이 침입한 것을 격퇴하는 등 4차례 당의 침입을 모두 막아냈다.
강감찬(948~1031)-고려시대의 명장.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달아나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최영(1316~1388)-고려의 명장, 충신. 1359년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쳤다. 1361년에도 홍건적이 창궐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를 격퇴하여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후에도 흥왕상의 변, 제주 호목의 난을 진압했으며 1376년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자 홍산에서 적을 대파했다. 1388년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로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출정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다.
박자청(1357~1423)- 조선 전기의 무신. 내시로 장군이 된 사람. 중랑장, 선공소감, 호익사 대장군 겸 동북면선위사, 공조·예조의 전서, 중군총제 겸 선공감사, 공조판서, 참찬, 우군도총제부판사 등을 지냈다.
이순신(1545~1598)-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 옥포대,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했다.
강홍립(1560~1627)-조선 중기 무신. 명나라의 원병으로 5도 도원수가 되어 후금을 공격한 무인.
임경업(1594~1646)-조선 중기의 명장.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공유덕 등 명나라의 반도를 토벌, 명나라로부터 총병 벼슬을 받기도 했다.
<사회부분>
장보고(?~846)-신라의 무장.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려고 해로의 요충지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40년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실시한 사람.
만적(?~1198)-고려 신종 때 최충헌의 사비. 노비 해방 운동인 <만적의 난>을 이끌어 계급타파를 주장한 사람. 만적이 공사의 노비를 모아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난을 일으키려다가 밀고로 거사 전에 발각되어 많은 노비들과 함께 붙잡혀 죽었다.
홍경래(1771~1821)-조선 후기 평안도 지방에서 정진인설로 난을 일으켜 민중봉기를 이끈 사람. <홍경래난>의 장본인. 유학과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이었다.
전봉준(1854~1895)-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가로 세칭 ‘녹두장군’. 조병갑의 부정부패에 항거하여 동학난을 일으킨 사람.
신돌석(1878~1908)-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에 100명의 의병으로 의혈단을 조직하여 울진에서 일본인 선박과 일본인 거주지를 공격한 의병장.
안창호(1878~1938)-민족개조론을 주장한 사회운동가. 점진학교와 대성학교 설립자. 독립신문 창간함. 독립협회에 들어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신채호(1880~1936)-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사학자· 언론인. 을사조약 체결 후 황성신문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글을 기고한 역사가.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조선상고사> <을지문덕> <이순진전>등을 저술.
안중근(1879~1936)-조선초대총독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사살한 한말의 독립운동가. 삼흥(三興)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장준하(1918~1975)-김구의 비서 역임. 1953년 잡지 <사상계>를 창건하여 민주화운동에 앞장을 선 사람.
전태일(1948~1970)-가난한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미싱사 직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을 하다가 1970년 상동친목회 시위 때 분신자살한 사람.
<종교부분>
이차돈(506~527)-신라의 승려로 최초의 불교 순교자. 그가 죽은 후 그의 예언대로 잘린 목에서 흰 피가 나오고 꽃비가 나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효(617~ 686)-설총의 아버지로 해동종의 시조이며 민중불교의 창시자. 인도로 유학중 해골물을 마시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대오각성하여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불교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한 중.
의천(1055~1101)-고려시대의 승려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역설하며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사람. 문종의 넷째 아들임.
묘청(?~1135)-고려시대의 승려로 서경천도(遷都)를 주장하였으나 사대주의자의 반대로 좌절되자 이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에게 섬멸되고 자신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묘청의 난>의 장본인.
지눌(1158~1210)-고려 때 승려. 교종과 선종, 정과 혜로 나뉘어져 있던 불교를 통합하고자 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해서 조계종을 개조한 중.
신돈(?~1370)-고려말의 승려. 노비의 아들로 천민출신으로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그의 사부로 국정을 보살피었다. 토지개혁 관청을 두어 권세가와 부호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각 소유자에게 되돌려 준 사람으로 뒤에 난을 일으킴. <신돈의 난>의 장본인.
최제우(1824~1864)-조선 후기 울산 천성산에서 수도하여 그리스도교와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과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담은 동학을 창시한 사람.
<경제부분>
김육(1580~1658)-조선 중기의 문신. 조선 후기 실학융성에 영향을 준 실학의 선구자. 대동법을 실시하고 화폐 통용, 역법의 개선 등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려했던 관리.
임상옥(1779~1855)-조선 후기의 대표적 무역 상인. 인삼무역권을 독점하여 천재적인 상업수완을 발휘하여 베이징[北京] 상인의 불매동맹(不買同盟)을 교묘하게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에 팔아 막대한 재화를 벌어 굶주리는 백성 및 수재민을 구제한 상인.
박승직(1864~1950)-1885년 행상을 시작하여 1896년에 동대문시장 자리에 한국 최초의 개인기업 <박승직상점>을 개업한 상인. 1925년 전국을 휩쓴 ‘박가분“은 그의 아내 정정숙이 만든 화장품이었다. 두산그룹의 모체인 <동양맥주>를 설립한 기업가.
전형필(1906~2001)-거부의 아들로 젊어서 많은 재산을 상속받아 민족문화재를 수집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관인 <보화각(현재의 ‘간송미술관’)>을 건립한 문화재 수집가. 1920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을 거금 2000원을 주고 구입하여 일본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은 수집가.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여 교장도 지냄.
정주영(1915~2001)-강원도 통천군의 농군의 아들로 가출하여 1937년에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을 시작하여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세우고 현대건설을 건설하여 대기업을 창업하고 1998년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98년 남북 민간교류의 획기적 사건인 '금강산관광'을 성사시킨 현대그룹의 창시자.
<학문부분>
최치원(857~?)-신라시대 학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당나라에서 관리가 됨. 토황소격문으로 황소의 난을 평정한 한 학자.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로 지내었다. 저서에 《계원필경》《중산복궤집》《석순응전》《법장화상전》 등이 있다
김대문(?~?)-통일신라시대의 유하자. 저술가. 진골귀족 가문 출신. 704년(성덕왕 3)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을 지냈다. 저서로《계림잡전》고승전》《화랑세기》《한산기》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이는 신라 중대 문화 수준이 중국 모방을 넘어, 신라의 독특한 문화전통과 생활경험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통일신라 문화의 토대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신숙주(1417~1475)-조선 전기의 학자. 문신. 뛰어난 학식과 문재로서 6대 왕을 섬겼고, 세종 때는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학자였으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가담한 점에서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 집현전 학사로 춘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다.
김시습(1435~1493)-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 전기의 학자.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고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등을 정리했으며 《산거백영》을 썼다.
성헌(1439~1504)-조선 전기의 명신·학자. 대사간, 형조참판, 평안도관찰사, 예조판서, 공조판서 겸 대제학 등을 지냈다. 《악학궤범》을 편찬했고 “쌍화점” 등의 고려가사를 바로 잡았으며, 관상감 등의 중요성을 역설, 격상시켰다. 문집 《용재총화》는 조선 전기의 정치 ·사회 ·제도 ·문화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다.
김종직(1431~1492)-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문신. 영남학파의 종조이며,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이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최한기(1803~1875)-조선 후기의 실학자 ·과학사상가. 1825년(순조 25) 사마시(司馬試) 급제 후 학문에 전념하다가 1872년(고종 9)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지냈다.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확립하여 근대적 합리주의와 개화사상을 싹트게 했다.
최익현(1833~1906)-조선 후기의 지사.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았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여성부분>
평강공주(?~?)-고구려 제25대 평원왕(平原王)의 딸. 온달(溫達)의 아내. 어릴 때 자주 울어 아버지로부터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는 농담을 듣고 자라, 아버지가 상부(上部)의 고씨(高氏) 집안에 출가시키려 하자 이를 거역, 궁궐을 뛰쳐나와 온달을 찾아 부부가 되었다. 그후 온달에게 학문과 무예를 가르쳐 고구려에서 가장 훌륭한 장군이 되게 하였다.
소서노(?~?)-부여 졸본지역의 토착세력으로 동명성왕과 함께 고구려를 건국했고, 아들인 온조. 비류와 함께 백제를 건국한 여자. 북부여에서 동명성왕의 전처 소생인 유리가 북부여로 와서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세웠다.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뒤 동명성왕릉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온조왕 14년(BC5년)에 남한산으로 천도하고 9년에는 마한을 멸망시켰다.
선덕여왕(?~647)-신라 제27대 왕(재위 632∼647). 진평왕(眞平王)의 맏딸. 내정에서는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불법 등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했다. 첨성대·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소혜왕후(1437~1504)-조선 덕종의 비. 성종의 어머니. 불교를 독실히 믿었으며, 불경에 조예가 깊어 불경과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여훈(女訓)》을 남겨 후세에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었다.
윤지당임씨(1721~1793)-조선 후기의 여류성리학자. 호 윤지당. 신광유(申光裕)의 부인.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성리학(性理學)에 통달하였다. 1796년(정조 20) 동생 정주(靖周)와 시동생 신광우(申光祐)가 유고(遺稿)를 정리 《윤지당유고》 2권을 간행하였다.
권기옥(1901~1988)-독립운동가 이상정의 부인으로, 평양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등으로 활약했다. 1920년 이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자비행사로 중국군에서 10여 년간 복무하면서 항일활동을 계속했다
<문화 예술 부분>
아비지(?~?)- 백제의 공장(工匠). 자장(慈藏)이 황룡사(皇龍寺) 9층탑을 세울 때 선덕여왕의 초청으로 신라에 가서 탑을 완성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탑을 세울 때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 중단하려다가, 뇌성을 울리면서 노승과 장사가 나타나 절의 기둥을 세우는 것을 보고 백제의 시운이 다하였음을 알고 탑 건립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우륵(?~?)-신라시대의 음악가로 대가야국(大伽倻國) 가실왕(嘉實王)의 뜻을 받들어 12현금(絃琴:가야금)을 만들고 이 악기의 연주곡으로 12곡을 지었다. 국원(國原:忠州)에 살며 대내마(大奈麻) 계고(階古)와 법지(法知) 등에게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쳤다.
솔거(?~?)-신라 진흥왕 때의 화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老松圖)》에 새들이 앉으려다가 부딪쳐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그 밖에도 분황사의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의 <유마거사상> 등이 있어 신화(神畵)라고 했다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박연(1595~?)- 조선 인조 때에 귀화한 네덜란드인. 일본을 향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했고, 병자호란 때 출전했다. 포로 왜인의 감시·통솔, 홍이포의 제조법·조작법을 지도했다. 1653년 H.하멜을 호송하고, 조선의 풍속을 가르쳤다.
최북(1712~1786?)- 조선 후기의 화가. 산수화·메추라기를 잘 그렸고 시에도 뛰어났다. 심한 술버릇과 기인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 《수각산수도(水閣山水圖)》, 《한강조어도(寒江釣漁圖)》등이 있다.
이광수(1892~1950)-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쓴 소설가.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무정> <유정> <사랑> <흙> 등을 비롯하여 수 많은 논문과 시편이 있다.
나운규(1902~1937)-한국의 영화인.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이며 항일독립투사로 30년 남짓한 짧은 생애를 조국과 영화에 바쳤다.<아리랑> <벙어리 삼룡> <오몽녀> 등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항일영화를 만들어 민족혼을 고취시킨 공로로 사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조정래(1943~)- 소설가. 어린 시절 여수·순천사건과 6·25전쟁의 경험으로 《태백산맥》, 《아리랑》 등의 작품을 썼으며 현대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조용필(1950~)- 한국의 대중가수. '20세기 최고의 가수' 등의 수식어가 따르며 수많은 명곡으로 한국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한국 최고의 대중가수이다. 대표곡으로는《돌아와요 부산항에》, 《친구여》 등 많은 유명곡들이 있고 한국 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했다.
<기타 부분>
문익점(1329~1398)-고려시대의 학자·문신. 공민 왕 때 좌정언으로 서장관이 되어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 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왔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 재배에 성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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