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5-1598. 한반도가 낳은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전설의 해군 제독. 그는 영국의 넬슨이나 일본의 도고처럼 전통적으로 발달한 해군력도 없이, 서양으로부터 전수 받은 기술력도 없이, 오직 혼자만의 천재적인 지략과 의지로 동양 최강이라던 일본 수군을 섬멸했고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했다. 조정의 지원이나 독려는커녕 가혹한 대접과 방해를 받으면서도 23번의 해전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기적의 불굴의 용사. |
21세 때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으나, 30세까지 무과에 계속 낙방해 적절한 직업을 갖지 못함.
1576년 식년 무과에서 병과에 합격, 함경도에서 국경수비대의 임무를 맡음.
1579년 한성의 훈련원에 인사직을 맡음. 당시 35세였으나 여전히 최하위직 공무원이었음. 이후, 10년 이상의 세월을 별볼일 없는 무과 공무원 직을 전전하며 좀처럼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는 좀처럼 운이 없었다. 1580년 전라좌수영 관내 부대장격인 수군만호가 됐으나, 1582년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해 38세의 나이에 함경도 훈련원 봉사로 공직 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했다. 1587년엔 관리직을 맡았다가 무고하게 고발 당해 백의종군을 하는 수모까지 겪는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1583년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군관이 돼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우며 전쟁에 대한 감각을 익히기 시작했음.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하고 얼마 후 전라 좌수영에 부임함. 곧 이어 1592년 4월 13일 48세 때 임진왜란 발발. 이때부터 이순신은 군사적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모든 해전을 승리로 장식한다.
1592년 5월 7일 옥포 해전 승리, 5월 8일 적진포 해전 승리, 5월 29일 처음으로 거북선을 이용해 사천해전에서 승리를 거둠.
이순신은 전투에 이기기 위해 모든 지략과 기술을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직접 개발에 참여한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량한 군선으로 적병의 침입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갑판에 쇠못을 박았고, 후미의 방향타도 수직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적 함대의 중앙을 돌파해 진영을 흐트러뜨리고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육상 전투에서의) 전차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 수군이 제작한 거북선의 수는 3척에서 5척 정도에 불과해 전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 아니었다. 선박에 철을 씌우거나 선체 일부를 철로 제작한 것은 1564년 명나라에서 처음 시도한 바 있고, 일본의 전국시대, 도요토미의 스승이었던 오다 노부나가 역시 유럽으로부터 전수 받은 건조 기술로 철갑선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철갑선은 연안이나 강가에 띄워 놓고 적을 위협하는 용도에 그쳤다.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함선은 판옥선이었다. 왜군은 작고 기동성 뛰어난 선박을 이용해 적의 배를 따라잡은 뒤 승선해 백병전을 펼치는 전략을 주로 구사했는데, 이들의 이런 전술을 무력화 시키기 위해 이순신은 판옥선의 선체를 높게 만들었다.
이어 6월 2일 당포해전 승리, 6월 5일 당항포해전 승리, 6월 7일 율포해전 승리
1592년 7월 8일 역사적인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의 주력 함대를 모두 격파하고 한반도의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어 버린다. 이후 안골포 해전과 부산포 해전에서 일본의 수군 진지까지 박살 내며 일본 해군력을 무력화 시킨다. 역사학자들은 한산도 대첩으로 사실상 히데요시의 대륙 정벌의 꿈은 좌절됐다고 말한다. 이순신은 개전 후 6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모든 불리한 상황을 극복해 8번의 해전을 모두 압도적으로 승리하며 세계 역사에 깨어지지 않을 해전 연승 기록을 달성한다.
한산도 대첩 기록화.
1593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 1594년 당항포 해전에서 적선 31척을 격파, 장문포 해전에서 적선 2척을 격파하며 1차 임진왜란을 마무리 짓는다.
1597년 1월 정유재란 발발. 왜군이 거짓으로 꾸민 밀서를 그대로 믿은 조정에서 출동 명령을 내리나 이를 어기고 출동하지 않음. 이 일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 한성으로 압송됨. 명령 불복종으로 모진 고문을 받고 투옥. 28일 만에 출옥하여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함.
그 해 4월 백의종군 중 어머니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는다. 7월엔 원균이 이끈 삼도수군이 칠전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원균은 전사한다. (7년간의 임진왜란 가운데 조선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됐고, 군사 120명과 전선 12척으로 전열을 정비한다
당시 조선 조정은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니 이순신에게 바다를 포기하고 육상 전투에 합류하라 종용한다. 조정의 이른바 "수군 철폐령"에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반론을 올린다.
"임진년 이래 5~6년이 지나는 사이에 왜적이 감히 전라도와 충청도를 바로 점령하지 못한 것은 오직 우리 수군이 바닷목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잘 것 없는 신에게는 아직 전선이 12척이나 있습니다. 전선의 수가 비록 적기는 하나 신이 죽지 않는 한, 왜적이 감히 우리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9월 16일, 이순신은 좁은 수로를 이용해 적군을 칠 요량으로 명량 해협을 전투 장소로 택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본 함선 330척과 대적해 싸운다. 이순신은 싸우다 죽을 각오로, 함대를 일자로 정렬시키고 300척이 넘는 함대에 맞선다.
명량해전. 일자로 진을 치고 있는 함대가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다.
수 겹이 넘는 압도적인 왜군 함대의 포위망에 조선 수군은 용감히 뛰어들어 사력을 다해 싸웠고, 이순신은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적장 구루시마를 발견한다. 이순신 휘하의 전함은 적장의 함대로 돌진해 그의 목을 벤 다음 돛대 꼭대기에 걸었다. 이때부터 전세는 역전된다. 적장의 죽음에, 그리고 이순신의 명성에 기가 질린 왜군 함대의 전열은 붕괴됐고, 조선 수군은 총돌격해 도망가는 적선을 닥치는 대로 침몰 시켰다. 전투 결과 일본 전함 31척을 격침시키고 90척을 파손시켰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 가장 드라마틱한 승리였던 명량 해전은 이순신 스스로 "하늘이 도왔다"라고 말할 정도로 기적적인 대승이었다. (그러나 이 승리 후 셋째 아들 면이 충청도 아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1598년 11월 19일 명나라의 수군 제독 진린이 이끄는 수군 5천명과 합세해 본토로 퇴각하는 왜군의 마지막 수군을 섬멸하려 노량 앞바다로 진격한다. 막다른 곳에 몰려 죽음을 맞게 된 왜군은 필사적이었다. 이들은 이순신과 진린의 배를 노려 한꺼번에 덤벼들었고,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구해주며 죽음의 위기를 한 차례씩 넘긴다. 그러나, 지나치게 적진 깊숙이 들어간 이순신은 왜군이 쏜 불의의 총탄에 왼쪽 가슴을 관통 당한다. 이순신은 급히 자신을 방패로 가리라고 명령하고 숨을 거두며 마지막 말을 남긴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선상에서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성웅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이들은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이순신을 대신해 북을 치며 독전했다. 이 싸움에서 맏아들 회도 전사한다.
임진왜란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량 해전에서 왜적선 500여 척 중 무사히 돌아간 것은 50여 척. 11월 26일 일본군 부산포에서 완전 철수하고, 길었던 7년간의 전쟁은 종결된다.
1604년 이순신은 선무공신 좌의정에 추증됨. 1643년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고, 1706년 충청남도 아산에 현충사가 건립됨. 그리고 1793년 영의정에 추증됨.
이순신에 대한 외국의 평가
"한민족은 항해술에 능했고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 2차 대전 연합군 사령관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A History of Warfare]
"영국인들에게 그 공적에 있어 넬슨과 필적할 만한 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항상 힘들다. 하지만 만약 그런 영예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고 적군 속에서 싸우다 죽은 이 동방의 해군 사령관일 것이다."
- 영국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 중장 G. A. Ballad, [Influence of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이순신은 불행히도 생을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용명도 지명도 서양에 전하지 않고 있지만, 실로 훌륭한 해군 장군이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장갑함을 창조한 사람이며, 300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써 싸운 전쟁 지휘관이었다.
- 일본해군준장 사토 데쓰타로오, [제국 국방사론]
"이순신은 그 지휘 통솔력에서나 전술 능력에 있어서, 충성심과 용기에 있어서도, 실제로 기적과도 같은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세계 역사상 이순신만한 사람이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는데 도리어 일본사람의 편에서 그에 대한 존경심이 계승되었다…"
- 일본작가 시바 료타로오, [언덕 위의 구름]
"사실 넬슨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은 아니다. 정말로 군신(軍神)의 이름에 어울리는 제독이 있다면 그것은 이순신이다. 이순신에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만큼도 못한 존재이다."
- 러시아 발틱 함대를 무찌른 도오고 헤이하치로오 제독, [일조중 삼국인민연대의 역사와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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