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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생활리듬 및

자식에게 베풀기만 해서는 안 돼

by 현상아 2007. 5. 21.


요즘 아버지들, 집에서의 역할은 갈수록 줄어들고, 져야 할 짐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발언권도 잃었습니다.

이제 아이들에게 아버지는술 냄새 풍기며 늦게 들어와 가끔 용돈이나 주는 용병에 불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돈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해 허리가 휘지만 가족들은 모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자녀는 ‘아빠가 특별히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냐’며 섭섭한 말을 하기도 합니다. ‘나는 내 인생을 살 테니 간섭하지 말라’며 가슴에 대못을 박기도 합니다.

이렇듯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점점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아들의 존경을 받으며, 인생의 본이 되어주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아버지, 아들과 친구가 되어준 아버지, 아들과 자전거 여행을 자주하며 일본일주까지 계획하고 있는 아버지…오동명 전 중앙일보 사진기자를 5월 19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아들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동행
▶ 더 젊어지신 것 같고 얼굴이 좀 타신 것 같아요?
아이와 10일간 자전거를 타고 다녔더니 얼굴이 좀 탔습니다.

▶ 춘천으로 이사를 가셨어요?
중앙일보를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거의 백수처럼 살아왔는데 이번에 용기를 내서 춘천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지방에서 살고 싶었는데 50년을 서울에서 살다 보니 쉽게 떠나지지가 않더라고요. 이사한지는 한 3개월 정도 됐어요.

▶ 본인이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가족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사실 힘들잖아요.

제가 중앙일보 근무할 때 아이가 여행을 많이 다닌 편이었어요. 비록 휴가 때뿐이었지만 외국여행과 국내여행을 많이 시켜주었어요. 그러다 괌에 다녀오더니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제 주머니에선 돈이 안 나온다는 것을 알고는 혼자서 영어공부며 준비를 하더니 할머니에게 필리핀 어학연수비용을 받아내서 다녀오고 자신감이 생겼는지 열심히 자발적으로 노력하고 준비해서 보내줘야 하는 상황을 만들더군요. (웃음) 저는 비행기 표 값만 도와줬어요.그런데 오히려 국내에서 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것 같아요. 보통 종합반의 과외 하나 시키는 정도로 보내놓고 있어서 유학이라는 표현보다는 아이에게 ‘세상 넓게 보기’의 기회를 마련해 준 것 같아요. 아들과 집사람을 괌에 보내고 저 혼자 떠나 온 꼴인데 춘천이 목돈이 들어가는 일도 없고 경제적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덤으로 주는 기쁨이 있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와요.

▶ 부인도 괌에 가셨으면 기러기 아빠가 된 거네요? 나중에 원망 들으실 일은 없으세요?
저는 아이를 강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간 것이니까요. 지금 2개월밖에 안 됐지만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까 너무나 좋다고 하고 공부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던 아이였는데 자기가 목표한 것을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자기고양을 시키고 있더라고요. 한국 나이로는 16살인데 그곳에서는 중학교 2학년으로 다니고 있어요.

▶ 외아들인가요?
네, 요즘은 엄마들의 입김이 강하다 보니 사실 하나만 낳았다고 해서 잘 기르는 것은 아닌데 지금은 하나인 것이 안돼 보이고 안쓰럽기는 해요.

▶ 앞에도 언급했듯이 아버지가 가끔 용돈이나 주는 용병에 불과한 것처럼 위신도 추락하고 대접도 못 받는 시대잖아요. 그런데 오동명 씨는 ‘부모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내셨어요. 구체적으로 오동명 씨가 살고 있는 아빠의 삶이란 어떤 삶이세요?
용병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고 혹자는 ‘부모는 엑스트라로 산다.’고 하더라고요. 한 친구는 제목인 ‘부모로 산다는 것’을 보더니 “야, 부모로 사는 게 어딨냐? 살아지는 것이지” 라고 하더군요. 부모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상당히 따뜻하고 거룩하고 그래야 하는데 우리에게 무겁고 짓눌린 듯이 다가오는 것은 돈 문제가 큰 것 같아요. 사교육비니 뭐니 해서 그런 상황들이 너무나 안타깝죠.

◇ 부모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
▶ 오동명 씨 가정은 어떠세요? 부모로 산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아버지로서 몇 점이냐고 물어보면 대게 부모들은 아무리 잘해 주어도 마이너스라고 하지요. 그러나 제 입장에서는 그러지 말자는 거죠. 부모의 삶도 있는 것이고 같이 주고 받고 하면서 얻을 수가 있는 것인데 저는 다행히 중앙일보를 그만두고 나서 시간이 많이 남잖아요. 모든 아버지 어머니가 마찬가지겠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지 못했을 때의 미안함이 컸어요. 자기 자신은 뭘 어떻게 해서도 살 수 있는데 자식에게 해주지 못하는 미안함은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을 메워 줄 수 있는 것이 같이 어울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것을 ‘동행’이라고 표현하는데 저는 동행을 많이 해주었죠. 동행의 처음은 대화였고 그다음은 단순함을 넘어서 힘든 여행 같은 것을 같이 계획해서 걷기라든가 자전거여행을 했어요. 보통 아이들이 귀찮은 것은 피하는데 3,4년 몸에 배고 나니 자기가 더 열심이고 내년에 일본 자전거 역사기행을 준비하는데도 아빠는 어학에 약하니까 자기가 일본어를 준비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것이 바로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주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식사랑이 지나쳐서 문제가 되는 일이 많잖아요. 그러다 보니 저는 받는 것이 많아요. 오히려 제가 부족한 것을 아들이 메워주는 것이 많더라고요.

▶ 제 생각으로는 오동명 씨는 직장을 그만둠으로써 경제적으로는 아이에게 미안했지만 대신에 더 많은 다른 것을 준 것 같아요. 동행이라는 것이 참 쉽지 않잖아요.사실 살면서 경제적인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거든요. 그것만 생각하다 보니까 용병처럼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한 달에 한번 특별한 날이 있다면서요?
휴대폰 없는 날, 인터넷 없는 날을 가지는 것인데요, 어쩌면 제가 딴 사람들에게 못된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백수라 시간이 많이 나기 때문에 아이에게 그럴 수가 있지만 다른 분들에게 직장 그만두고 애랑 놀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그만큼 저는 책임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하는 노력인데 직장이 있으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 달에 한번 휴대폰 없는 날 같은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거죠. 우리들은 전자제품에 엄마와 자식 간에, 아빠와 자식 간에 대화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요.저도 아이에게 강제로 할 수는 없어서 한 달에 한번은 휴대폰 없고 인터넷 없는 날을 만들어본 것이에요.

▶ 휴대폰이 없으면 요즘 애들은 공항상태에 빠진다고 그러더라고요.

처음에는 애가 안 따르죠.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그랬어요.부모라는 것, 아버지의 역할이라는 것이 지난번에 신문에도 나왔던데 공자님 말씀에 ‘어린아이들은 다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것을 바꿔서 일깨워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냥 해주다 보니까 일깨워주는 역할을 못하는 것 같아요. 학원 같은데 그냥 맡겨버리는데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저는 일주일로 하고 싶은데 아이와 타협을 한 것이 한 달에 한 번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예상 못 했던 일이 생기더라고요. 휴대폰과 인터넷을 못하니까 심심해서 괜히 엄마와 아빠에게 와서 장난을 노는 거예요. 그냥 장난만 놀 수는 없다 보니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고, 책도 같이 읽을 수 있고, 서너 달 지나서는 엄마에게 얻어먹지만 말고 직접 요리를 한 번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라면 끓이기부터 시작해서 다음 달에는 된장찌개를 끓여보더라고요. 엄마에게 물어봐서 이것저것 짬뽕해 한식이 아닌 중국식을 해 놓았지만 얼마나 기특해요.

애들한테 그렇게 하면 공부시간도 빼앗기고 그럴 것 같지만 요즘 애들이 얼마나 똑똑한데요. 애들이 그것을 다 채워 넣을 수 있는 능력을 우리들보다 더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 가두리 양식처럼 가둬두어서 키우지 말고 방목하면서 키우면 더 큰 것을 아이에게 줄 수가 있고 그것으로 인해 부모가 든든해지죠. 어디를 내놔도 다 컸다 싶고요.

▶ 엄마 아빠도 다 휴대폰과 인터넷을 못 하는 거죠? 그것을 시작하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저도 하고 싶어도 못하지요. 제가 제안했으니까요. (웃음) 시작한지 4년쯤 됐는데 지금은 아예 휴대폰은 없앴고 인터넷도 안 하는 날이 조금씩 늘어나더라고요. 예를 들어 라면을 끓이면 하고 싶은 것을 해주는데 아이가 운동화가 필요하면 제가 비싼 메이커는 안 사주니까 자기용돈 석 달 치를 모으고 2달치만 보태달라는 식으로 제안을 하더라고요. 아버지나 엄마가 제안을 하면 아이도 제안을 하고... 이게 바로 대화잖아요. 그렇게 이끌어가면서 제일 중요한 이해를 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신문사에 있었을 때는 사진기자이기 때문에 양복을 안 입고 다니잖아요. 아이가 아빠의 양복 입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러면서 아빠가 말쑥하게 입고 다니는 사람이길 바라는데 그런 것에서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같이 어울리다 보면 제가 편한 옷을 입고 다니는 직업을 가졌고 그러다 보니 브랜드니 메이커를 안 따지는 이유를 알게 되고 ‘나도 아무거나 입어도 되는구나, 속이 꽉 차야 되는 거니까...’ 이런 생각을 하더라고요.



◇ 한 달에 한번은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는 날
▶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거죠?
그것이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죠.

▶ 저는 이번에 버지니아 공대 사건을 보고 요즘 애들을 ‘접속’시키지 말고 ‘접촉’시키라는 법정스님의 말씀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았어요.

좋은 말이네요. ‘접속’이란 것은 남이 해주는 것에 그냥 따라가는 거고 ‘접촉’이라는 것은 닿아야 하는 거니까 함께 어울리는 거잖아요. 그러려면 자기가 한 발을 앞서서 가까이 가야하고 다가가야 하니까 참 좋은 말이네요.

▶ 어떤 집은 TV를 안 보는 날이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불편했는데 나중에는 아이와 눈을 맞추게 되더라는 거예요. TV를 보면 나란히 앉게 되잖아요. 마주앉게 되니까 눈을 마주치게 되고 평소에 하지 않던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는 거죠.

그리고 모습이 자세하게 보여요. 애가 어둡다던가 말투가 달라졌다든가 하는 것을요. 그런 것이 TV, 인터넷, 휴대폰, 기계들로 인해 단절이 되잖아요. 그런데 애들이 좋아하는 것이라 뺏을 수는 없는 거니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괜찮지요.그리고 저는 촛불을 켜놓고 촛불에서의 대화를 합니다. 처음에는 집사람과 분위기를 잡으려고 시작을 했었는데 형광등이나 햇볕, 뜨거운 불빛 아래보다 촛불은 은은하고 집중을 시켜주더라고요. 화를 내고 그럴 것을 유연하게 만들어주고 포용하게 되고요. 만약 아이들을 혼낼 경우에 엄마나 아빠가 자제가 안 될 때 촛불 밑에서 화를 내거나 혼내주면 손이 갈 것이 손이 안가고 말로 하게 되고 그렇습니다.촛불 아래에서는 다 예뻐 보이거든요. 초를 사셨다가 화를 낼 일이 생기거나 그랬을 때 촛불을 얼른 켜보시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 아들하고 ‘바꿔치기 놀이’라는 건 뭔가요?
‘Box and Cox’라고 영국의 극작가가 장기 공연 때 계속 한 배우를 무대에 계속 세울 수가 없으니까 역할을 바꿔가며 하는 것에서 유래된 용어인데 마치 중고등학교 때 ‘야자타임’처럼 아들과 아빠가 서로 역할을 바꿔서 그들의 말과 표현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요. 혼낼 일이 있으면 아들이 제 말투대로 혼내고 저는 아들에 입장에서 변명을 하게 되는데 재미도 있으면서 느껴지는 것이 많더라고요.어떨 때는 무심코 내뱉었던 제 말을 아들이 그대로 흉내 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그런 말을 내가 했단 말인가 반성하면서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하죠. 바꿔치기 놀이는 거울을 보는 겁니다. 제가 아이에게 아버지라는 이유로 소홀하게 했던 부분이나 함부로 했던 부분을 여과 없이 보게 되는 거죠. 정말 사랑스럽고 가장 가까워야할 부모 자식 간인데 부모가 무겁고 자식이 어려워서는 안 되잖아요.

▶ 아들과 아빠만 친하게 되면 혹시나 부인이 소외당하거나 하는 부분은 없나요?
유별나고 지나쳐서 엄마의 몫을 빼앗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웃음) 엄마의 자리를 위해 양보도 하게 되는데 그래도 각각의 몫이 있잖아요.

◇ 아이들을 ‘접속’시키지 말고 ‘접촉’시키라
▶ 과외는 시켜보셨나요?
어렸을 때 제가 과외를 많이 해서 아이만큼은 과외를 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아무래도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과 성적차이가 난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스스로 과외를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반대하다가 결국 시켜줬는데 두 달 만에 스스로 그만두더라고요. 성적은 별 차이가 안 나는데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싫다고 하더라고요. 대신 새벽에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는데 제가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을 읽고 있으니까 우리가 아침형 인간이라며 좋아하고 자기가 실천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뿌듯해하더라고요. 우리 아이는 똑똑한 아이는 아니에요. (웃음) 중간 정도밖에 안 되는데 요즘 아이들은 다 똑똑하니까 성적으로만 등수가 높지 않은 것이지 다 똑똑하잖아요. 그런 아이들을 가둬놓아서 뜻을 펴보지 못하게 묶어놓는 게 부모들의 자식 사랑이 너무 지나쳐서거든요. 그것이 엇나가게 하거나 빗나가게 하면... 버지니아 공대사건도 다 그런 거잖아요. 부모들도 즐기면서 아이들도 따라올 수 있게 하고 호연지기와 대화를 통해 더 큰 사회인이 되게 해주어야지요.지금은 IQ보다는 감성지수와 사회지수가 더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자신감과 자발성을 통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저는 자신하거든요.

▶ 초등학교 때 과외를 하셨으면 집안 형편이 넉넉하셨나 봐요? (웃음)
부모님은 초등학교 중퇴시고 시골에서 올라오셨기 때문에 스스로 가르치실 능력이 안 되어 과외를 시켜주셨던 것 같아요. 그것도 자식사랑인데 그것을 통해 제가 배운 것은 저는 부모님 덕분에 대학교라도 나왔지만 제가 줄 수 있는 것은 부모님과 똑같은 방법이 아닌 과외를 안 해도 더 중요한 것이 뭔가 전수를 시키는 거죠.

▶ 본인은 과외 다하고 자식은 왜 과외를 안 시키려고 하세요? (웃음)
아들에게 솔직하게 얘기를 했어요. 그렇게 해보니까 문제를 자꾸 찍기만 하고 그랬는데 과외를 안 하고 나서는 다른 책들도 많이 보게 되고 내가 사진기자를 하면서 글도 쓰고 책도 쓸 수 있었던 어떤 준비할 수 있는 시간들을 제공해주었다고요.

▶ 대학에서는 사진을 전공하셨나요?
저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원하는 대학을 못 들어가고 경제학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경제학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미대에 가서 ‘색채학’을 듣거나 국문과 황순원 교수님의 ‘수필작법’을 듣고 그랬어요. 혼자서 사진 찍으러 다니다가 결국 사진기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미대수업과 국문과 수업이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때 황순원 선생님이 제게 글을 써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20여 년이 지나고 살면서 시간이 나니까 글을 쓰게 하는 힘이 되더라고요. 잘 쓰고 못 쓰는 것을 떠나서 용기를 준거죠.

▶ 소위 날리는 사진기자를 하시다가 왜 갑자기 그만두시게 된 건가요?
8년 전의 일이고 제 자랑이 될까 봐 이야기하기가 싫은데 보통 사람들이 신문사 사주의 탈세사건으로 인한 소환 때 기자들의 사주비호 행태를 보고 제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만두면서 하나의 액션을 취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지요.


◇ 새벽 4시... 양심을 깨우는 아이의 숨소리
▶ 그 액션을 취한 것이 결국 그만두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게 참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가정도 있고 가장인데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될 일을 왜 꼭 그렇게 하셨는지...

저는 대학 때 데모 한 번을 안 하고 사회문제에 대해서 피동적으로 살았던 사람인데 기자라는 것을 그만 두어야겠구나 해서 대자보를 쓰고... 그 용기를 줄 수 있었던 것은 아이였어요. 새벽 4시에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이 아이가 별안간 십 년 후인 스무 살에 ‘언론이 이렇게 잘못되고 있는데 아빠는 왜 침묵하고 있었어?’하고 묻는 상상을 해보았어요. 그때 용기를 얻은 거예요. 기자에게 주어지는 사회적인 혜택만큼 해주어야할 역할이 있는 거잖아요.그만두고 사람들이 저더러 편안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전에는 취미가 도장 파는 일일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나오고 나니까 자유로웠어요.

▶ 아이도 아이지만 부인의 반응도 이해만 하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너무 미안했죠. 당신은 밖에 나가서 이런 일을 해서 칭찬이라도 듣지만 집에 있는 사람은 뭐냐는 얘기를 깊이 새기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아이하고의 시간도 돌아보게 되고 20여년 기자생활을 하면서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것을 아이들을 상대로 풀어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보니 책도 출판할 수 있게 되고 그랬지요.

▶ 그 당시 동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외롭지는 않았나요?
격려를 해줄 수 있는 동료들에게는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지만 오히려 전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전화며 편지로 격려를 해주었어요. 지금도 다 가지고 있는데 큰 힘이 되었죠. 부산에 사는 고등학교 3학년의 한 학생은 꿈이 그냥 의사였는데 제 책을 읽고 재활의학을 꿈꾸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부족하고 모자라는 데서 오는, 반드시 주는 것이 꼭 있더라고요.

▶ 안으로부터 오는 부정직이라든가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으신 건가요?
언론을 공기라고 하고 공정하게 나아가야 하는데 사진기자는 현장의 최전선에 있으면서도 글 쓸 기회가 주어지지 않잖아요. 오보를 지적하면 사진기자니까 사진만 찍으라고 하는데 어떤 때는 제 사진을 빼달라고 할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항의가 되니까 그런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막지 못하고 제 사진이 나가면 저 역시도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공범이 되는 것이니까 독자들에게 창피하죠.

▶ 촌지를 받기도 하셨나요?
제 의지가 아닌 것으로 카탈로그나 그런데 달려와서 받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유혹에 빠져서 받은 적도 있어서 참 부끄럽죠. 한때는 6개월치를 받아놓고 서랍 사물함에 둔 적이 있었어요. 양심상 쓰지는 못하겠고 자꾸 시선은 가고 후배들 사주는 것으로 타협하려고 하면서 6개월을 잡아두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우체통에다 넣은 적이 있어요. 법정스님이 무소유에서 난을 가지고 있다가 옥죄는 것이 생겨서 다른 사람에게 줬다고 하잖아요. 그러고 나니까 얼마나 편해지는지 몰라요. 그다음부터는 돈에 대해서도 자유로워지고 아이를 보기도 편해지더라고요.

▶ 앞으로의 꿈이나 계획이 있다면요?
제가 지구력이 약해서 책상에 한 시간 이상을 앉아있지를 못하는 편인데 아들하고의 약속은 꼭 지켜요. 그래서 처음으로 ‘다빈치 코드’ 원서를 3개월 만에 다 읽었어요. 아이 때문에 지구력도 키워지고 원서도 다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내년에 아이하고 약속한 것이 방학을 이용해서 일본 나가사키에서부터 동경까지 자전거 역사기행을 하려고 해요. 15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우리나라 역사와 일본 역사를 비교하면서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을 거치면서 결국 경술국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비교하면서 자전거로 다닐 계획입니다.

(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정리(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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