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창가에 앉은 소녀
YOUNG GIRL LEANING on A WINDOWSILL
1645년 캔버스 油彩 77.5×62.5Cm
런던 덜리치 대학 미술관 소장
한 마디로 렘브란트의 작품치고는 예외적으로 청순 담백한 그림이다. 두 팔 굽을 창가에 기댄 채 약간 경계하는 듯 수줍어하는 눈매로 이쪽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 이 그림의 테마로 보아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비상하게 성행한 풍속화(風俗畵), 즉 일상적인 생활 정경을 화폭 속에 담는 풍속화의 카테고리에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그림은 정경 설정의 일상성보다는 모델(모델을 헨드리키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성립되지 않는다)을 바라보는 화가의 날카롭고도 정감어린 눈이며,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하나의 초상화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그림은 기묘하게도 18세기의 화사한 로코코풍의 화가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되었으며, 이 또한 렘브란트의 작품 가운데서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20. 에마오의 그리스도
THE RISEN CHRIST AT EMMAUS
1648년 판(板) 유채(油彩) 68×65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같은 주제의 작품으로서, 1630년경의 라이덴 시대의 작품과 이 작품 2점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의 차이가 바로 그간의 렘브란트 예술의 변화를 일목 요연하게 보여준다. 라이덴 시대의 극적인 구도(構圖)와 자세 및 명암법은 사라지고 차분히 가라 앉은 색채와 안정된 구도로 변했는데, 은밀하면서도 위엄에 찬 이 작품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스도는 화면 약간 왼쪽에 정면으로 앉아 바야흐로 빵을 쪼개려 하고 있다. 그 그리스도의 모습은 탁자 위의 흰 식탁보, 자신의 후광(後光), 그리고 뒤의 벽면의 어두움으로 한층 부각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보여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라이덴 시대의 작품에서와는 달리 숭고하고 자애에 찬 그리스도이다. 렘브란트의 종교화(宗敎畵)의 일대 전환을 가져온 한 작품이 아닐는지...
21. 폐허가 있는 강 풍경
RIVER LANDSCAPE WITH RUINS
1650년경 판(板) 유채(油彩) 67×87.5Cm
카셀 국립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풍경화 중에서도 후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의 풍경화가 상상적 풍경화이자 바로크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면 보다 실경(實景)에 접한 보다 현실감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이 후기의 풍경화이다. 렘브란트는 40년대 초기부터 소묘, 에칭을 통해 자연 실사(實寫)를 매우 활발하게 시도하였다. 따라서 후기의 유채 풍경화는 그와 같은 실경사생(實景寫生)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에서도 아직까지 상상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고는 하나, 풍경 구석구석에서 자연에 밀착(密着)된 보다 높은 현실감이 감지된다. 이 그림은 초기의 극적이고 바로크적인 풍경화에서 차츰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조(觀照)하고, 나아가서 인간 생활을 포함한 보다 보편적인 자연 표현의 전환을 보여주는 풍경화이다.
22. 목욕하는 여인
A YOUNG WOMAN BATHING
1655년 板 油彩 61.8×47Cm
런던 국립 미술관 소장
23. 헨드리키에 스토펠스
HENDRICKJE STOFFELS
1654년경 캔버스 油彩 72×60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는 아들 티투스를 낳은 후 1642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그 후 두 여성이 티투스의 보모이자 가정부로 렘브란트의 생활에 등장하며 헨드리키에는 그 두 번째의 여성이다. 그녀가 언제부터 렘브란트 가정에 들어섰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1654년 그녀는 렘브란트와의 사이에 생긴 딸 코르넬리아를 낳는다. 그 후 그녀는 티투스를 키우고 경제적인 곤경에 빠진 렘브란트를 도우며 때로는 모델이 되기도 하면서 50년대 이후의 렘브란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여성이 되었다. 헨드리키에의 초상화로 확인된 작품은 한 점도 없으나 50년대의 작품 중 적어도 10여 점이 헨드리키에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초상화는 사스키아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24.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
THE ANATOMY LESSON OF DOCTOR JOAN DEYMAN
1656년 캔버스 油彩 100×134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의 출세작이랄 수도 있는 <툴프박사의 해부학 강의> 이후 거의 25년만에 그는 다시 같은 주제의 작품을 다루고 있다. 25년이라면 4반세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아마도 그 동안의 렘브란트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안성 마춤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작품 역시 원화의 3분의 1 밖에 남아 있지 않은 화를 입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위한 여러 가지 소묘로 미루어 보건대,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좌우대칭 구도이고 또, 특히 해부되는 시체의 대담한 단축법(短縮法) 처리이다. <툴프 박사> 의 경우, 시체는 대각선으로 다시 말해서 모로 누워 있는데 반해 이 그림에서는 시체의 머리와 발이 한 시각(視覺) 속에 단축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투시법 기법의 의식적 도입이라고 할까.
25. 도살된 소
THE SLAUGHTERED OX
1655년 板 油彩 94×67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가 이 그림을 통해서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어쨌든 이 작품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아름다운 그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들라크로아가 이 그림을 모사(模寫)했고, 도미에는 이에 자극받아 <푸줏간> 연작을 제작했다. 그들은 이 작품을 낭만주의적 사실주의의 핵(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 수틴도 이 작례(作例)에 자극받아 <도살 된 소>의 연작을 제작했으며, 그에게 있어 그것은 표현주의적 작품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이 작품은 그 추한 테마에도 불구하고 그 힘찬 필촉에 의한 색채와 리얼한 표현이 후대의 몇몇 화가를 사로잡은 것이다. 한 마디로 이그림은 렘브란트의 리얼리티의 탐구와 회화적 및 색채적 표현에 있어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26. 자화상
SELF PORTRAIT
1640년 캔버스 油彩 102×80Cm
런던 국립 갤러리 소장
렘브란트 34세 때의 초상화이다. 이탈리아 풍의 호화로운 옷을 걸치고 베레모를 쓰고 의연히 앉아 있는 모습은 세속적인 성공을 거둔 화가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화풍으로 보아 이 작품의 중요성은 그것이 렘브란트의 이탈리아 회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있다. 렘브란트는 평생 동안 이탈리아 땅을 밟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에서도 이탈리아 회화에 접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리고 이 자화상이 바로 네덜란드에서 본 이탈리아의 두 거장, 라파엘로와 티지아노의 작품에서 촉발되어 그려진 작품이다. 사실 렘브란트는 40년대에 들어서면서 바로크에서 탈피하여 고전적 세계의 전환의 징후를 보이며 그 경향이 이작품에서도 눈에 뜨인다. 그러나 그는 고전을 본뜨면서도 자기 자신의 표현에 귀착하고 있다.
27. 안슬로 부처(夫妻)
THE MENNONITE MINISTER CORNELIS CLAESZ ANSLO IN CONVERSATION WITH HIS WIFE
1641년 캔버스 油彩 176×210Cm
西베를린 국립 미술관 회화관 소장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그 후 연이어 수많은 초상화의 주문이 뒤따른다. 그 주문자 중에는 학자, 성직자, 의사, 거상(巨商) 등이 끼어 있었다. 성직자 안슬로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에서도 비록 집단(集團)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부부를 같이 다룬 2 인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 2인상은 이미 <토론하는 두 철학자>, <철학자와 그의 아내>(1633) 등에 서도 다루어진 것이기는 하나 화풍과 양식(樣式)에 있어서의 커다란 차이가 보여진다. 여기에서는 극적인 제스처는 자취를 감추고 있으며 당당한 품격의 안슬로와 고즈넉한 아내의 자태는 오히려 렘브란트의 시대, 즉 17세기 네덜란드의 풍성하고 아늑한 부르조아적 실내화(室內畵)를 연상케 한다.
28. 유태인의 신부
THE JEWISH BRIDE
1655년경 캔버스 油彩 121.5×166.5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후기 작품 중에서도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그림의 제목이 <유태인의 신부>였느냐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이 일반화된 제목의 유래는 '유태인의 신부이다. 그녀의 부친이 딸에게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다.' 라는 해석에 의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 성서(聖書)의 이야기가 깔려 있을 수는 있으나, 언제나 처럼 그 이야기가 서술적으로 그려지고 있지는 않다. 여러모로 보아 이작품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야 어떻든 화면 전체에 풍기는 엄숙함, 즉 인간 본연의 사랑의 엄숙함이 배어 있으며, 이를테면 성서 속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실제의 인물과의 통합이라는 문제를 이 작품은 어떻게 생각하면 종교적인 차원에서 해결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9. 十戒의 석판을 깨는 모세
MOSES WITH THE TABLE OF THE LAW
1659년 캔버스 油彩 168.5×136.5Cm
西베를린 국립 미술관 소장
30. 어느 가족
A FAMILY GROUP
1688-9년경 캔버스 油彩 126×167Cm
브라운 쉬바이크 안톤 울리히侯 미술관 소장
여기에 그려진 가족이 어느 가족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렘브란트의 최만년 (最晩年)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면모에도 해석이 구구할 수밖에 없다. 굳이 인물을 식별하자면 오른쪽의 모친은 티투스의 미망인과 그와의 사이에 태어난 딸, 왼쪽의 꽃바구니를 든 어린 소녀는 코르넬리아, 기타 인물들은 렘브란트 일가(一 家)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그 테마보다도 여기에서 돋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색채가로서의 렘브란트의 진면목(眞面目)이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다. 큼직한 터치로 겹쳐지는 색조의 층은 그 층을 겹할수록 광휘를 발하며 그것이 엮어내는 미묘한 음영의 대비는 렘브란트가 명암의 대비에서, 그것이 주는 정신적 또는 회화적 드라마를 거쳐 이제 색채의 조화라는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31. 호메로스
HOMER DICTATING TO A SCORIBE
1663년 캔버스 油彩 108×82.4Cm
덴 하그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는 1650년대와 60년대 초에 걸쳐 고대의 인물을 다룬 3점의 작품을 그리고 있다. 호메로스, 알렉산더 대왕,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인물을 다룬 것이다. 그 중의하나인 이 작품은 원래 <두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 호메로스>를 테마로 한 것이나 화재로 인한 작품의 파손으로 나머지 부분이 잘라져 나가 오늘의 단 신상(單身像)으로 남았다. 여기에 그려진 호메로스는 장님의 호메로스이다. 렘브란트는 이 장님의 테마를 즐겨 다룬 화가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은 외적 세계보다도 내면적 세계의 광휘를 바라보는, 보다 깊이 있는 정신세계의 눈뜸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볼 때 이 호메로스는 바로 렘브란트 자신의, 모습을 바꾼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2. 자화상
SELF PORTRAIT
1657년경 板 油彩 49.2×41Cm
비인 미술사 발물관 소장
작품에는 제작 연도가 적혀 있지 않으나, 1657년 작 이라는 연대 추정이 확실하다면 이 초상화는 렘브란트의 나이 51세의 것이다. 이미 여기에서는 젊은 날의 패기는 없으나 대신 당당한 원숙기의 한 화가의 모습이 유감없이 묘출(描出)되고 있다. 얼굴이며 어깨 부분이며 다같이 불굴의 의지에 넘쳐 있고 인간적인 시련을 겪은 한 인간의 의지가 넘치는 작품이다. 사실 1656년은 렘브란트가 파산 선고를 받은 해이다. 그러한 경제적인 역경과 이에 따르는 갖가지 어려움을 렘브란트는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이 초상화는 극복의 의지가 정력적으로 보이는 마지막 초상화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후의 초상화에서는 노경(老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어느 전문가에 의하면 이 초상화가 그려진 이후의 렘브란트는 급속하게 늙어갔다.
33.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키에
HENDRICKJE AS FLORA
1656-7년경 캔버스 油彩 104×96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는 사스키아를 모델로 한 플로라상(像)을 3점 남기고 있다. 헨드리키에를 모델로 한 플로라상은 이들 전작(前作)과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비교가 되며 때로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대조는 한 마디로 <사스키아像>은 화려하게 치장된 이상화된 아내의 모습이요, 오히려 화려해야 할 이 그림의 플로라상은 검소하다는 데 있다. 이 대조는 비단 이 두 여성의 개성과 취향의 차이에서 왔다기보다는 그 동안에 보다 심화된 렘브란트 자신의 여성에 대한 비전의 변화에서 결과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양식적인 면에 있어서도 어두운 바탕에서 선명하게 부각되는 정밀 묘사의 효과 대신 여기에서는 인물의 그늘이 배경에 희미하게 투영(投影) 되고, 또 의상의 처리 역시 덤덤한 터치로 다루어지고 있다.
34. 책상에 앉은 티투스
TITUS AT HIS DESK
1655년 캔버스 油彩 77×63Cm
로테르담 보이만스 반 뷰닝겐 미술관 소장
14세 때의 티투스의 모습. 사스키아와의 사이에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먼저의 세 자녀는 모두 어려서 사망), 그 역시 렘브란트가 죽기 바로 1년 전인 1668 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이 작품은 아들 티투스의 첫 초상화이다. 큼직한 검은 눈의 이 소년의 모습은 자주 렘브란트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이 그림에서 어린 티투스는 책상 위에 종이를 펴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펜을 든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볼에 짚고 무엇을 그려야 할까 하고 궁리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티투스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공부를 해 왔다. 그림 공부에 한창인 아들의 모습을 렘브란트는 애정어린 눈으로 포착한 것이리라. 어린 소년의 생생한 표정의 묘출(描出)과 함께 대담한 구도와 역시 덤덤한 터치에 의한 정확한 질감(質 感) 처리는 유니크하다.
35. 환자를 고치는 그리스도
CHRIST WITH THE SICK AROUND HIM
1642-5년 에칭 드라이포인트 뷰랑 27.8×38.9Cm
런던 대영 박물관 소장
렘브란트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소묘와 동판화이다. 소묘는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의 초벌 그림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렘브란트의 그것도 그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못 되었으나 그 독특한 필치는 일단 인정하더라도 그의 동판화는 고금을 통해서 알브렉트 뒤러, 고야와 함께 동판화의 3대 거장의 한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동판화가 필요로 하는 정교한 기법적 훈련이 렘브란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특히 그 흑백의 대비의 미묘한 효과는 렘브란트의 독특한 명암법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동판화 기법을 단순한 복사(複寫)의 방법으로서 만이 아니라 그것을 독자적인 한 예술 형태로 정립시킨 판화영역에 있어서의 한 혁신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36. 두 흑인
TWO NEGROES
1661년 캔버스 油彩 77.8×64.4Cm
덴 하그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소장
흑인이 렘브란트의 회화 속에 독립된 테마로서 다루어 졌다는 사실은 일단 기이하게 보이기도 하겠으나 흑인, 특히 북아프리카의 무어 족(族)의 모습은 이미 르네상스 회화에도 등장하고 있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해외 무역의 중심지였고 보니 그 중심지인 암스테르 담은 가히 인종의 견본시장(見本市場) 같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렘브란트가 이에 무관심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는 흑인을 단순한 호기심의 눈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려내고 있으며 이들 인종 특유의 의지적인 용모와 눈동자를 똑같은 인간이라는 공감에서 포착하고 있다. 또 그 때문에 이 작품은 인간 관찰자로서의 초상화가 렘브란트를 과시해주는 작품이거니와 또 한편으로는 차분히 가라앉은 그러면서도 정묘한 색조 변화에 의한 화면 통일은 렘브란트의 회화적 표현의 원숙함을 보여주고 있다.
37. 사도 바울로 분장한 렘브란(자화상)
SELF PORTRAIT AS THE APOSTLE PAUL
1661년 캔버스 油彩 91×77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이 자화상이 그려진 1661년은 노년에 들어선 렘브란트 로서는 매우 풍성한 다작의 해이다. 이 해에 그는 다시 성서 시리즈를 그렸으며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다. 작품의 제목은 제쳐 놓고 이 그림의 주인공이 렘브란트 자신임은 틀림이 없다. 그는 한손에는 책을 들고 있고, 망토 깃 밑으로 단검의 손잡이가 비쳐지고 있다. 그는 무엇인가를 묻는 듯 또는 물으면서도 그 대답을 넘겨짚은 듯한 눈초리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눈초리는 노경에도 날카로움을 잃지 않고 있으며 '아직도 나에게 예언하는 힘이 있고 산을 움직일 수 있는 신앙심이 있더라도,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있은 것만 못하다.' 라고한 성 베드로의 말씀을 스스로 터득한 것인지... 그가 남긴 마지막 자화상은 그의 죽음의 해인 1669년의 것이다.
38. 겨울 풍경
WINTER LANDSCAPE
1646년 板 油彩 17×23Cm
카젤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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