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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와 마르스를 놀라게 하는 불카누스> 야코포 틴토레토 1550~1555 135×198㎝ 뮌헨 피나코텍미술관 소장 |
아무리 해도 싫증나지 않는 일이 있다면 첫 번째가 사랑하는 일이다. 하지만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어지면서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회가 일부일처제라는 제도로 마음을 묶어 놓았기 때문에 사랑은 정지돼 있다. 뜨겁게 사랑했던 기억조차 없애게 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말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 결혼만큼은 파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결혼을 파괴하는 순간 사회적 책임이 곧바로 자신의 등을 후려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인 공식적 사랑도 바람처럼 다가오는 사랑을 막지는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불륜이라고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보다 불륜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기를 더 원하는 듯하다. 대개 불륜은 헤어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상처에 노출될 우려가 그만큼 낮기 때문이다.
마음 한켠으로 사랑이라는 허울을 쓰고 앉아 가슴을 앓기보다 불륜이라는 가면을 쓰면 그래서 편해지는 것이다. 사랑이 깨지면 의사의 심리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상처가 깊지만, 불륜은 깨져도 반창고만 필요할 정도의 상처만 남는다고 단언하면 사랑과 불륜을 너무 도식적으로 구분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대개 젊은 날 수없이 사랑하면서 상처받고 그 상처로 인해 성숙해진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랑에 상처받는 것이 두렵다. 치유할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불륜을 기웃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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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앞에 나타난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와 파올로의 유령> 애리 셰퍼 1855 캔버스에 유채 171×239㎝ 루브르박물관 소장 |
불륜이 습관화하면 제자리에 돌아와 상처를 치유한 다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결혼은 충만감을 선사하지만, 가슴 밑바닥에 흐르는 소중한 부분을 잃어버렸을 것 같다는 상실감도 함께 부여한다고 한다. 그 상실감이란 과연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항상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결혼은 토지 등기부등본처럼 확실하게 도장을 찍었기에 상대방에게 무관심해지기 일쑤다. 심지어 사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결혼을 영위하려는 태도마저 생겨난다. 그래서 사는 재미가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은 하지 말라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파괴하지 않고 사는 즐거움을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다.
불륜이 그러하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일탈의 사랑을 꿈꾸는 것이다. 특히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조금만 비켜설 때 쾌락을 느끼게 되는 것 아닌가?
일탈을 꿈꾸는 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같다. 바람처럼 흐르는 사랑의 마음은 어느 시대나 같기 때문이다. 일탈이 주는 흥미와 서스펜스는 사는 재미를 더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도 불륜의 현장을 들키는 장면이 있을 정도로 불륜은 어느 누구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욕망이다. 호로메스의 <오디세이아>와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비너스와 마르스가 불륜을 저지르다 비너스의 남편에게 현장을 들키는 이야기가 있다.
신화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신 비너스에게는 못생긴 남편 불카누스가 있다. 불카누스는 아버지 주피터 신의 장난으로 비너스와 결혼하게 된다. 바람둥이의 천성을 버리지 못한 비너스는 남편 불카누스를 속이고 유명한 바람둥이 마르스와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다.
신화에 표현된 에로틱한 꿈의 세계어머니 주노마저 아들의 모습을 싫어할 정도로 못생긴 불카누스는 비너스와 마르스의 정사를 알고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불카누스는 유독 질투심이 강했다. 태양으로부터 아내의 불륜 사실을 전해 들은 불카누스는 아내의 불륜 장면을 덮치기로 마음먹고 두 사람이 정사를 할 침대에 청동 그물을 설치한다.
야코포 틴토레토(1519~1594)의 <비너스와 마르스를 놀라게 하는 불카누스>. 이 작품은 불카누스가 불륜의 현장을 찾아온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불카누스는 의혹의 눈초리로 비너스의 허리에 걸쳐 있는 침대 시트를 들춘다. 비너스는 남편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스스럼없이 시트를 들어올리고 있다. 비너스가 누워 있는 침대는 당시 베네치아 매춘부들이 사용하던 침대의 디자인으로, 비너스의 바람기를 상징한다.
그런데 마르스는 갑옷을 입은 채 탁자 아래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것 아닌가? 아직 불카누스에게 불륜의 현장을 들킨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너스 침대 밑에 있는 개가 마르스를 보고 짖고 있어 들키기 직전임을 암시한다. 화면 뒤쪽에 보이는 마르스의 방패에 침대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다시 한번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야코포 틴토레토는 색채와 빛에서 베네치아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는 이 작품에서 불륜을 은폐하기 위한 비너스의 뻔뻔함과 폭로 직전의 불카누스의 긴장감을 한 화면에 담아냈다.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화가들에게 좋은 소재였다.
헨드리크 드 클레르크(1570~1629)는 <불카누스의 함정에 빠진 마르스와 비너스>에서 불카누스의 함정에 빠져 마르스와 비너스가 다른 신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장면을 묘사해 눈길을 끈다.
불카누스의 계략을 알지 못하는 연인들은 위험에 빠진 것도 모른 채 달콤한 사랑에 빠져 막 정사를 하려고 한다. 그 순간 청동 그물이 두 사람을 덮쳐 꼼짝 못하게 한다. 이때 불카누스는 올림푸스에 있는 신들을 불러 모아 두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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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카누스의 함정에 빠진 마르스와 비너스> 헨드리크 드 클레르크 런던 휘트필드갤러리 소장 | |
헨드리크 드 클레르크는 신화의 내용에 충실하게 표현한 화가다. 당시 전 유럽의 미술가들은 후원자를 위해 에로틱한 꿈의 세계를 창출했고, 클레르크도 신화의 내용을 빌려 에로틱한 세계를 묘사했다.
신들도 사랑의 바람에는 속수무책인 것처럼 바람결에 불어오는 사람에 사람들의 마음은 저절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항상 사랑은 자신의 존재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어 조금만 움직여도 바람을 타고 흐른다. 멀리 있는 존재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거리는 좁다. 자주 보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이지, 멀리 있는 사람에게 사랑이 찾아가지는 않는다. 공감대가 없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자와 남자가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다. 그 흔하지 않은 기회 중 하나가 상사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는 불운을 겪는 일이다. 불운인지 알지만 사랑에 빠진 영혼은 미친 듯 질주하기 시작한다. 불운에 노출되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세상이 침묵하기만 바란다. 불운한 여인들은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를 기도하지만 기도는 항상 침묵하고 파도는 요란하게 밀려온다.
상사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다상사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 가장 대표적 이야기가 500년께 영국의 위대한 아더 왕의 아내 귀네비에와 그의 기사 랜슬럿이다. 아더 왕의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 랜슬럿은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가 궁정에 나타나면 여인들은 사랑에 몸살을 앓았지만, 그는 어느 여자에게도 마음이 주지 않았다. 아더 왕과 왕비 귀네비에도 외모뿐만 아니라 탁월한 전공을 자랑하는 그를 신뢰한다.
기사로서 완벽한 랜슬럿은 아름다운 왕비의 기사가 된다. 서로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던 두 사람은 관심을 넘어 애정을 키우게 되었고, 남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속삭이는 사이가 됐다. 두 사람의 사랑은 결국 아더 왕에게 들키고, 랜슬럿은 부정한 여인으로 화형에 처해지기 직전의 귀네비에를 구해낸다. 왕에 대한 충성심보다 사랑에 자신을 몰아넣으면서 두 사람은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두 사람의 불륜을 넘어선 지독한 사랑은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게 되었고, 책으로 출판되기에 이른다.
<침대에 있는 랜슬럿과 귀네비에>. 이 작품은 아더 왕의 이야기를 다룬 <랜슬럿 성배>라는 책에 나오는 삽화 중 하나다. 14세기 프랑스 귀족들에게 사랑받았던 소설이 <랜슬럿 성배> 중에 나오는 이야기다. 5부작 소설에 삽화를 그려 넣음으로써 책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볼 거리를 제공했다. 이 삽화는 랜슬럿과 귀네비에가 침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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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군도 공작에게 자기 정부의 나신을 보여주는 오를레앙 공작> 외젠 들라크루아 1825~1826 32×25㎝ 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싸미술관 소장 | |
화면 왼쪽 문이 열려 있는 것은 귀네비에가 사랑을 허락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검은 색으로 표현한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여자의 은밀한 부위를 상징한다. 두 사람은 침대 시트에 몸이 감겨 있지만, 방금 사랑을 하고 난 듯 사랑의 황홀함으로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 정사 장면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이 삽화는 두 사람의 사랑의 행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상사의 아내를 사랑하는 일처럼 자신의 운명을 주사위처럼 던져놓는 일도 없다. 어둠의 파도가 조용히 물러나 주기만 바라지만 사랑만큼은 속이지 못한다. 사랑할 때는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태양은 떠오르게 마련이다. 피하고 싶어도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면 연인들의 삶은 송두리째 파괴된다.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해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피할 수 없는 위기상황에 부닥쳤을 때 불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부르군도 공작에게 자기 정부의 나신을 보여주는 오를레앙 공작> 작품에서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는 그런 위기의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했다.
이 작품은 치명적 사랑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불륜의 현장에서 있을 수 있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벌거벗은 상황에서 위기가 닥치면 여자들은 제일 먼저 얼굴을 가린다. 벌거벗은 육체만으로는 누구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얼굴만 가리면 자신이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달콤한 즐거움을 포기할 줄 모르는 오를레앙 공작은 주군의 아내를 유혹한다. 공작 부인과 정사를 나누던 중 부인의 남편 부르군도 공작의 기습적인 방문을 받는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를레앙 공작은 직접 부닥치는 전략을 선택한다.
이 작품에서 정사를 벌이던 오를레앙 공작은 여자의 심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오를레앙 공작은 부르군도 공작을 자신의 침실로 안내하고는 침대 시트를 높게 들어올려 정부의 벌거벗은 육체만 노출하고 얼굴은 가려버린다. 여인은 침대 시트 속에서도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두 팔을 모으고 고개를 돌리고 있다.
차라리 사랑하지 말 것을…하반신을 그대로 노출한 채 누워 있는 여인을 보고 부르군도 공작은 아내인 것 같다고 의심하지만 얼굴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느낌만으로 오를레앙 공작에게 이 여인이 자신의 아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아내의 벌거벗은 몸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이 알려질까 두려웠다. 마침내 그는 “저 여인은 내 아내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선다.
낭만파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간부의 지혜를 표현하기 위해 이 작품에서 부르군도 공작의 시선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부르군도 공작은 자신의 아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지만 하반신을 드러낸 채 누워 있는 아름다운 육체를 보고 매력을 느낀다. 그러고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서 진실을 보지 못하고 남자로서의 호기심을 먼저 드러낸다. 침대 시트를 걷어올려 정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오를레앙 공작의 행위는 노출과 은폐를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위기 상황을 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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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있는 랜슬럿과 귀네비에> <랜슬럿 성배> 삽화 1320년경 런던 브리티시라이브러리 소장 | |
출구 없는 상황에 몰렸을 때도 살아남는 자가 있지만, 사랑은 그리 만만치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제도권의 보호를 받으면 좋겠지만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할 때 현실은 잔인하다. 사랑은 소리없이 다가와 운명을 흔들어 놓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다.
부질없는 사랑에 매달린 불행한 연인들은 가지 말아야 할 길인 줄 뻔히 알지만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친다. 파국으로 치달아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마음을 배반할 수 없어 천륜까지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천륜까지 저버린 비극적 사랑은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단테가 <신곡> 지옥 편에 쓰면서 유명해졌다.
이탈리아 라벤다의 군주 말라테스타 가문과 라미니의 영주 다 폴렌타 가문은 상권에 대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자녀들을 정략결혼시키기로 합의한다. 말라테스타 가문에서는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계략을 꾸민다. 가문의 상속자이자 결혼할 당사자인 조반니가 절름발이에 못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잘생긴 조반니의 동생 파올로를 내세워 다 폴렌타 가문의 딸 프란체스카와 맞선을 보게 한다.
정략결혼에 반대하던 프란체스카는 잘생긴 파올로의 모습에 반해 결혼을 허락한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는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에게 마음이 끌렸다. 프란체스카는 첫눈에 반한 남자 파올로가 남편인 줄 알고 결혼하지만 첫날밤에 남편이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행복하다고 생각한 결혼은 순식간에 불행을 잉태하고 말았다.
불행한 결혼생활 속에서 두 사람은 마음을 숨길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의 운명은 실타래처럼 얽혀 버렸다. 그들은 성격이 난폭한 조반니의 눈을 피해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고, 두 사람의 위험한 사랑은 그렇게 파멸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마침내 그들의 사랑은 발각되고 만다. 조반니의 염탐꾼이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곳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남편은 질투에 눈이 멀어 두 사람의 목을 칼로 베어 버린다.
저승에서도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천륜까지 저버린 불행한 연인들은 중세의 법에 따라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 <신곡>은 단테가 지옥을 여행하던 중 두 연인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리 셰퍼(1795~1858)의 작품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앞에 나타난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와 파올로의 유령>은 연인들이 저승에서도 사랑을 잊지 못해 포옹하고 있는 장면을 표현했다. 지옥을 찾은 단테 앞에 두 사람은 홀연히 나타나 결코 헤어질 수 없었음을 알려준다.
단테의 <신곡>을 충실하게 표현한 셰퍼의 이 작품은 비극적인 그들의 사랑이 어떤 경우에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묘사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다른 작품은 사람들에게 외면받는다. 결국 셰퍼는 이 작품의 아류만 그린 불행한 화가가 된다.
“뭇 남성 파멸로 이끈 팜므 파탈…화가들 그림 소재로도 매력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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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 프란츠 폰 슈툭 1906 캔버스에 유채 115X62 뮌헨 시립 렌바흐미술관 소장 | | 많은 남자 가운데 특별한 존재로 영웅이 있는 것처럼 여자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권력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자신의 무기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던 여자들이 바로 그들. 우리는 그들을 ‘팜므 파탈(요부)’이라고 부른다.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여인들이다.
그렇지만 그녀들은 뛰어난 전략가다. 남자의 가장 치명적 약점인 사랑을 쥐고 흔들어 권력화하고, 인생을 재창조하기까지 했다. 이를 통해 그녀들은 단지 신분 상승의 유일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힘만으로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없는 것은 여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다양하고 화려한 유혹의 테크닉을 펼쳐야만 남자의 전리품에서 벗어나 남자의 영토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1. 미모로 유혹한 여인 클레오파트라
여자로서는 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남다른 유혹의 기술이 필요하다. 팜므 파탈들은 남자의 허영심을 자극해야만 사랑을 쟁취할 수 있었기에 다양한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은 너무 많은 보상을 원하고, 욕망은 번개처럼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사람에게 그보다 강한 유혹은 없다. 따라서 그 권력을 잃고 나면 스스로 권력을 만들어 내야 하는 법이다. 그 상징적 인물이 바로 기원전 50년께 권력을 향해 집념의 드라마를 펼친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다. 그녀가 오랫동안 권력을 향유할 수 있었던 기반은 자신의 미모였음은 물론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권력 중심부에서 태어났으나 절대권력을 쥘 수 있는 운명은 아니었다. 파라오의 율법에 따라 남동생과 결혼해 왕좌에 올랐으나 권력을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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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에 물린 클레오파트라> 구이도 레니 캔버스에 유채 113X94 영국 왕실 소장 | | 꿈꾸던 미래의 초상을 잃어버릴 처지에 있던 그녀는 카이사르를 유혹해 그의 애첩이 되면서 비로소 권력의 중심부에 서게 된다. 권력을 남용하기 좋아하는 남자의 심리를 꿰뚫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만들었던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치밀한 계산 아래 사랑을 미끼로 항상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만 유혹했다. 그녀에게 사랑은 순수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정치적 수단일 뿐이었다. 그 결과 정치는 그녀에게 최상의 오르가슴을 선사하는 수단으로 통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존재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는 그녀의 유혹이 통하지 않았다. 세월의 흔적을 무시하고 유혹의 기술을 펼쳤으나 운명에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16세기 화가들에게 클레오파트라의 자살은 흥미로운 주제였다.
권력지향적인 그녀는 화가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되지 못하고 남자를 유혹하는 악녀로 인식되기 일쑤였다. 그중에서 구이도 레니(1575~1642)의 작품 <독사에 물린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구이도 레니는 클레오파트라의 관능성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진 화가다. 이 작품은 그녀의 자살에 관심을 갖기보다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독사는 클레오파트라의 젖가슴을 빨기 위해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뱀의 유혹에 빠진 그녀는 죽음의 두려움도 잊은 채 황홀경에 빠져 얼굴이 붉어졌다. 독은 그녀의 온몸에 퍼져 살갗은 창백해졌다.
구이도 레니는 젖가슴을 강조하기 위해 배경을 어둡게 처리했다. 그가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죽음에 이르는 성적 황홀경이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관능미를 최대한 부각시킨 다른 작품도 제작한다.
2. 몸매로 유혹한 여인 밧세바
미모는 신의 은총이지만, 아름다운 여자는 세상에 엄청 많다. 신은 공평하기 때문에 경쟁자를 곳곳에 만들어 놓는 여유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미모 하나만으로 승부수를 펼치기에는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다. 남다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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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세바> 한스 메믈링 1482 패널에 유채 191X84 슈트투가르트 주립미술관 소장 | | 남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벗은 몸을 살짝 드러내는 유혹의 기술을 구사한 여자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밧세바다. 밧세바는 다윗과 함께 많은 화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구약성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고대 이스라엘의 다윗 왕은 피할 수 없는 책임감으로 봄날 잠을 이루지 못하고 궁전 옥상을 산책한다. 그때 목욕하던 아름다운 여인 밧세바를 보게 되는데, 그녀의 눈부신 몸매는 그를 자극하고도 남았다. 다윗 왕은 욕망의 불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밧세바를 불러들인다.
다윗 왕은 용맹한 군인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정사를 나누며 기쁨을 만끽한다. 그러나 끝내 감췄어야 할 유부녀와의 간통은 임신으로 들통나게 된다. 다윗 왕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권력을 이용해 우리야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그 죄로 인해 다윗 왕은 신의 분노를 사 아들을 잃게 된다. 아들을 잃은 다윗 왕은 죄를 뉘우치고 신의 용서를 받는다.”
하지만 밧세바의 목욕은 권력을 향한 의지였다. 여자를 좋아하는 다윗 왕이 옥상에서 산책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밧세바는 자신의 집 옥상에서 1시간 전부터 목욕을 하고 있었던 것. 그녀는 우연을 가장해 유혹의 미끼를 던진 셈이다.
한스 메믈링(1435~94)의 <밧세바>는 성서의 내용보다 유혹하는 요부 밧세바를 더 부각시킨 작품이다. 이 그림 속의 밧세바는 욕조에서 나와 샌들을 신고 있다. 그녀는 시녀가 들고 있는 목욕가운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고 있고, 다윗 왕은 화면 왼쪽 위 옥상에서 붉은 옷을 입고 훔쳐보는 중이다.
하지만 화면에서 다윗 왕이 그녀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다. 그것은 다윗 왕이 신에게 용서받았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한스 메믈링은 이 작품에서 작은 가슴에 가녀리게 보이는 여인의 몸매를 표현했다. 그러나 살짝 나온 복부가 무척 매혹적이다.
3. 춤으로 유혹한 여인 살로메
남자를 유혹하는 데 춤처럼 결정적인 것은 없다. 이성을 유혹하는 데 춤이 빠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춤은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이다. 빠르면서도 때로는 조용하게 움직이는 무용수의 몸짓은 잠자던 욕망을 깨운다.
하지만 무용수의 계산된 동작이든 아니든 춤은 욕망을 부추기고 비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보이지 않는 유혹이 스며 있는 무용수의 춤은 욕망의 배출구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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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에드워드 번 존스 1886 캔버스에 유채 197X75 개인 소장 | | 역사적으로 초창기의 춤은 언어를 대신하고, 신과의 소통을 보여 주는 문화였다. 춤은 공동체의 메시지 전달에 충실했으며, 그 사회를 묶어 주는 매개체였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춤은 유흥의 볼거리 역할도 함께 했다. 음악에 맞춰 어우러지는 춤은 사람들에게 흥미와 재미를 선사하는 유흥의 필수 요소 중 하나로 통했다.
특히 하늘하늘한 날개옷을 입고 밸리댄스를 추는 여인은 몹시 아름답다. 엉덩이를 흔들 때마다 무용복에 달려 있는 장식이 흔들리는 소리 또한 자극적이어서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배꼽춤을 추면서 이성을 유혹한 여인이 바로 살로메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살로메는 헤롯 왕과 내연의 관계에 있던 헤로디아의 딸이다. 헤로디아는 헤롯 왕의 동생의 아내였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의 불륜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에 헤롯 왕은 요한을 죽이고 싶었으나 사람들이 존경하는 그를 제거할 용기는 내지 못했다. 대신 그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세인의 비난을 두려워한 헤로디아는 계략을 세운다. 춤을 잘 추는 딸 살로메를 꼬드겨 헤롯 왕의 생일 연회에서 왕을 유혹할 것을 당부했던 것이다. 헤로디아는 유혹에 약한 헤롯 왕이 살로메의 춤에 빠져 선물을 하사할 것으로 믿었다.
살로메는 격정적이면서도 달콤한 춤으로 헤롯 왕을 유혹했다. 헤롯 왕은 매혹적인 살로메의 춤에 빠져 원하는 선물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연회장 공개석상에서였다. 이에 살로메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에게 약속했기 때문에 헤롯 왕은 어쩔 수 없이 요한을 참수한다는 내용이다.
요한의 참수 장면은 극적인 요소 때문에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많은 화가가 그 장면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했다. 하지만 19세기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에서 살로메는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오스카 와일드는 살로메를 성서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표현했던 것이다. 이 영향으로 19세기 이후 많은 화가는 살로메를 팜므 파탈의 대표적 여인으로 그렸다.
프란츠 폰 슈툭(1863~1928)의 <살로메>도 요부상을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녀는 전형적인 요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벌거벗은 상반신을 강조하기 위해 배경을 어둡게 처리했으며, 배꼽춤을 추기 위해 입은 스커트는 금방 벗겨질 것같이 고혹적이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춤을 추는 살로메의 잘록한 허리는 더욱 육감적이다.
이 작품에서 살로메는 몸으로 유혹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 하단의 살로메 뒤로 한 못생긴 남자가 그녀를 흠모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세례 요한의 목이 담긴 쟁반을 든 모습이다. 그의 못생긴 외모는 살로메의 미모와 대비돼 더욱 강조되는 듯하다. 프란츠 폰 슈툭이 작품의 배경을 어두운 밤하늘로 선택한 것은 죽음과 파멸을 상징하기 위해서다.
4. 목소리로 유혹한 세이렌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목소리의 여자 주인공이 있다면 어떨까? 그녀의 달콤하면서도 끈적거리는 목청에서 사랑의 찬가가 흘러나온다면 금상첨화일 것.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남자는 드물 것이다.
목소리는 듣는 사람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어 유혹의 마법을 발휘하고도 남음이 있다. 좋은 목소리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부는 바람과 같이 신선하면서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해도 목소리가 유리창 깨지는 소리 같다면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다.
고대 여성들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는 유혹의 최고 기술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세이렌은 감미로우면서도 사람을 끄는 목소리를 가진 여인이다.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에 나오는 세이렌은 상반신은 아름다운 여자, 하반신은 물고기이지만 아름다운 노래로 남자를 유혹해 바다에 빠지게 한다. 세이렌은 사랑에 속박당하지 않고 유혹을 즐겼을 뿐이다.
에드워드 번 존스(1833~98)의 작품 <심연>은 <오디세이>의 사연을 충실하게 담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세이렌은 새의 이미지로 나오는데, 새는 지상과 천상의 전령사 역할을 하는 천사의 이미지였다. 중세 이후 세이렌은 새의 이미지 대신 인어의 모습을 띠게 된다.
남자는 죽음에 이르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노래에 빠져 자신의 죽음조차 깨닫지 못한다. 세이렌은 그 남자를 꼼짝 못하게 포옹한 채 미소 지으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에드워드 번 존스는 세이렌의 존재를 죽음의 그림자를 지닌 여인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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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와 옴팔레> 프랑수아 부셰 1730년경 캔버스에 유채 90X74 모스크바 푸슈킨미술관 소장 | | 5. 섹스로 유혹한 여인 옴팔레
섹스는 유혹의 결정체다. 여자가 미모·몸매·목소리·춤 등 다양한 볼거리와 각양각색의 즐거움으로 남자를 유혹해도 마지막에 섹스가 빠진다면 사랑은 어쩐지 허망하게 여겨진다. 섹스는 서로 탐색해야 하는 불편한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서로 묶어 주는 지름길을 선사한다지 않는가? 이처럼 섹스는 안락한 집과 같은 편안함을 제공하고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정부 중 한 사람인 루이 15세의 정부 마담 드 퐁파두르는 불감증 환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불감증 때문에 평생 사랑을 잃을 것을 두려워했다. 사랑은 변하지만 섹스의 즐거움은 결코 변하지 않기에 그녀는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리디아의 여왕 옴팔레는 그리스 신화 중에서도 남성을 유혹하는 기술이 뛰어난 여자였다. 신들의 노여움을 산 헤라클레스가 옴팔레의 궁전에서 노예로 살게 되었다. 당시 경제부국으로서 쾌락의 도시였던 리디아의 여성들은 결혼 후의 만족한 생활을 위해 혼전관계를 통해 섹스를 배우는 풍조가 있었다.
여왕 옴팔레의 남성편력은 리디아에서도 최고였다. 그녀는 탁월한 재주로 남자를 우리에 갇힌 동물 다루듯 했다. 옴팔레의 성적 매력에 빠져든 헤라클레스는 더 이상 강한 남자가 아니었다. 3명의 자식을 낳은 옴팔레가 헤라클레스를 놓아준 것은 성적 매력이 감소해서가 아니라 그의 신분을 알고 해방시켜 준 것이었다.
강한 남성 헤라클레스를 손아귀에 넣고 길들인 여인 옴팔레의 성적 매력에 화가들은 주목했다. <헤라클레스와 옴팔레>는 프랑수아 부셰(1703~70)가 신화를 빌려 육체의 탐닉을 표현한 작품이다.
옴팔레의 다리가 헤라클레스의 구릿빛 허벅지에 얹혀 있는 도발적인 모습은 사랑의 절정을 상징하는 듯하다. 완벽한 근육질의 헤라클레스는 정욕을 못 이겨 우윳빛의 탐스러운 가슴을 움켜쥐고 있다. 두 눈을 감고 황홀경에 빠져 있는 두 남녀의 관능적 모습에서 남녀간의 농익은 정염이 잘 드러난다.
프랑수아 부셰는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마담 퐁파두르의 눈에 띄어 궁정화가로 임명된다. 쾌락에 빠져 있던 귀족들의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부셰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은 당시 분위기가 음화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일 터다. 신화를 끌어들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글=화가 박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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