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랜드·대교 등 40곳 무차입… 현금 매출 많고 내수업종 많아
기업 안정만 추구하다 보면 대규모 투자기회 놓칠 수도
IMF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1월 남양유업 홍원식 사장(현 회장)은 ‘채무 제로(0)’인 회사를 만들겠다는 선언을 했다. 과다한 채무로 대기업들이 연이어 쓰러져 가는 상황에서 이 회사의 ‘무차입(無借入) 경영 선언’은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이 회사는 약속대로 그해 10월까지 주거래은행에서 가져다 쓴 180억원 차입금을 몽땅 갚아 버렸고, 무차입 경영 회사의 원조(元祖)가 되었다.
이 회사는 지방에 생산 공장은 있지만 서울에는 본사(本社) 빌딩도 없이 남의 건물에 세 들어 살 정도로 짠돌이 경영을 한 덕에 1964년 창업 이후 적자를 한 번도 낸 적이 없다.
26일 한국선물거래소 집계에 따르면 남양유업처럼 빚이 없어 이자비용을 올 들어 한푼도 물지 않은 상장 기업(유가증권시장)이 40개로 나타났다. 534개 상장 기업(12월말 결산기준)의 7%를 조금 넘지만 작년 같은 기간 35개사보다 5개 늘어난 것이다.
강원랜드, 광주신세계, 태광산업, 현대미포조선, 에스원, 제일기획, 삼성에스디아이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럼 어떤 회사들이 무차입 경영을 하는 것일까? 현금 매출비중이 높고 투자 지출은 크지 않은 내수·소비재 기업들이 대종을 이룬다.
예컨대 내국인이 출입하는 카지노 강원랜드는 매년 수입으로 4000억원 정도 현금이 들어오지만 투자 지출은 1500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주주 배당을 제외하면 매년 1500억~2000억원 정도 현금이 사내유보금으로 적립되어 간다. 은행 빚을 질 필요가 전혀 없는 재무구조를 가진 셈이다. (삼성증권 구창근 애널리스트)
학습지시장의 선두 기업인 대교도 각 가정으로부터 매월 현금으로 받는 학습지 요금이 차곡차곡 쌓여 현재 사내에 4500억원 정도 현금이 적립되어 있는 상태다. (현대증권 김혜림 애널리스트)
보안업체인 에스원은 매년 가입자가 늘어나는 것에 비하면 경보기나 관제센터 등 고정비가 그리 크지 않은 사업구조 덕에 현금 보유액이 2000억원을 넘고 있다. (삼성증권 전상필 애널리스트), 삼성그룹 계열사인 제일기획 역시 안정적인 광고 수주로 현금 흐름은 좋으면서도 투자는 인건비 외에 거의 없는 안정적인 현금 축적형이다. (신영증권 한승호 애널리스트)
흔한 것은 아니지만 수출 관련 기업 중에서도 무차입 경영 회사가 있다. 미래에셋증권 이재규 애널리스트는 “최근 조선업이 호황을 맞은 가운데 현대미포조선이 수년째 빚 없이 지내고 있고, 현대중공업이나 대우조선해양도 언제든지 보유 현금으로 빚을 갚을 수 있을 만큼 차입금이 적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빚을 지지 않고 기업 경영을 하는 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고 경제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자기 자본만으로 보수적 경영을 하다 보면 큰 투자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차입 경영 상장 기업인 A사의 임원은 “일부 기업 오너나 최고경영자(CEO)가 부채를 늘리는 게 죄악(罪惡)이라는 IMF 위기 당시의 마인드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투자를 위해 적당히 부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일선 실무자들과 때로는 의견이 엇갈린다”고 전했다.
굿모닝신한증권의 김동준 부장은 “충분한 투자수익률(ROI)을 기대할 수 있는 투자 기회가 있다면 차입을 통해서라도 투자를 추진하는 게 주주들의 이익에 맞는 것”이라며 “무차입 경영이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베스트 프랙티스’(최고의 실천)는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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