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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동료에서 연인으로, 그리고 비극적인 생애로 끝난 커플도 있다. 로뎅과 클로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 안도현의 역작 ‘너에게 묻는다’의 뒷부분.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묻는 대목을 접할 때마다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일상에 지쳐 자신도 모르게 굳어져 가는 얼굴 표정, 한쪽으로 쏠린 생각으로 깊어가는 아집,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가지만 시를 읽는 동안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맺히는 걸 보면 ‘뜨거운 사람’, 즉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말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인간이 지구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예술의 세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주제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랑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소재로 한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화가도 역시 뜨거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논리로 미술을 저울질하는 요즈음 작품 속에 얽힌 수많은 사랑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사랑, 특히 남녀 사이에 벌어지는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부부의 편안하면서도 안정된 사랑, 연인의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사랑, 뜨겁지만 한쪽 마음이 켕기는 불륜적 사랑….
사랑을 담고 있는 그림에 대한 연구는 미술사학자들의 즐거운 주제 중 하나다. 피카소는 7명의 여인과 나눈 사랑으로 예술세계가 구분될 정도며, 구스타프 클림트는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구분하는 여성 편력으로 유명하다.
첫 사랑이여, 영원하라
유태계 이탈리아인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바로 목이 긴 여인의 초상화다.
그가 남긴 초상화 26점에 등장하는 여인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다름 아닌 그의 첫 사랑이자 아내였던 잔 에뷔테른.
항상 차분하고 여성스러웠던 잔은 당시 많은 남자들에게 매력적인 존재였지만 인연은 따로 있었다. 코코넛 속살처럼 하얀 피부에 푸른 눈동자, 그리고 붉은 머리는 모딜리아니에게 고딕성당에 등장하는 순결하고 신비로운 여인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양가의 축복받은 결혼식은 없었다. 백화점 회계담당자로 가톨릭 신앙이 깊었던 잔의 아버지가 워낙 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정뱅이 무명 화가에다 결핵으로 몸이 엉망진창이 된 것도 모자라 마약까지 하고 있던 모딜리아니에게 딸을 줄 부모는 세상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애틋하고 깊었다. 모딜리아니는 그녀와 만나면서 마약을 끊고 작품에 몰입했다. 비록 춥고 배고팠지만 둘은 새로운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1918년 만난 이후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보내면서 모딜리아니는 그녀의 초상화에 매달렸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 모딜리아니는 잔에게서 일찍 떠나야 한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는 그녀와 결코 헤어지고 싶지 않은 간절한 소망을 그림에 담아내느라 오직 잔의 초상화에 전력한 것이라고 평했다. 결핵으로 고생하던 모딜리아니는 결국 1920년 11월 25일 뇌막염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주검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던 잔은 모딜리아니가 죽은 이튿날 친정 부모의 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뱃속에 있던 둘째 아이와 함께 저승으로 갔다. 두 사람의 사랑은 후대에 전해지면서 숭고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남았다.
잔은 세상 막다른 곳에 버려지고 소외된 모딜리아니에게 빛이자 구원의 여인이었다고 평론가들은 이야기한다.
플라토닉과 에로틱 러브 사이
몽환적이면서도 관능적인, 그러면서도 처연한 느낌의 화풍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플라토닉 러브와 에로틱 러브로 여인을 구분해 상대했다.
독신이면서도 14명의 아이들에 대한 친자소송에 휘말려 그 중 4명이 친자식으로 확인되는 등 그는 수많은 모델과의 육체적 관계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과는 단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눴을 뿐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을 한 상대는 따로 있었다.
그는 사교계의 여성들에게서 특별한 무엇인가를 느꼈다. 그는 작품에서 그들을 구원의 여인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대신 클림트는 이들과는 대부분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이같이 여성을 구분했던 클림트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플라토닉 러브와 에로틱 러브를 넘나들었다고 하면 될까.
그의 예술에 큰 영향을 준 여인은 두 명이다. 한 명은 그의 첫 플라토닉 사랑이었던 에밀 리 클뢰게.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상류층 출신이면서도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눴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클림트보다 17살이 어렸던 에멜리는 1891년 그의 첫 모델이 된다. 클림트는 17살 꽃다운 나이의 에밀리의 화사하면서도 기품 있는 외모에 반해 그를 모델로 한 작품을 4점이나 남겼다.
클림트의 곁에서 아내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클림트는 에밀리에게 정신적으로 기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클림트가 에밀리에게 보낸 400여 통의 편지에 연인간의 애틋한 마음은 물론 부부간의 무덤덤하면서도 온화한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클림트가 임종 직전에 애타게 찾았던 유일한 여성 역시 에밀리다. 이 같은 점을 보면 클림트는 복잡한 여성 관계에도 불구하고 에밀리에게서 정신적인 구원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에밀리가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클림트에게 남아있다면 과감하면서도 에로틱한 사랑을 나눴던 주인공은 오스트리아 유대인 금융업자의 딸 아델레다.
아델레가 클림트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설탕 제조업자이자 금융업자인 페르디난트 블로흐의 아내였다. 그녀와 클림트는 컬렉터와 화가의 인연으로 처음 만난다.
두 사람 사이에 연정이 싹튼 것은 아델레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던 1899년부터. 18살의 젊은 귀부인 아델레와 37살의 대머리, 더구나 볼품없는 화가 사이에 어떻게 정념의 불꽃이 타올랐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지만 남녀 사이의 사랑은 둘 만이 아는 법.
클림트에게 아델레는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또한 독학으로 교양을 쌓아왔던 아델레에게 기존의 화풍을 거부하며 새로운 예술운동을 전개해 왔던 클림트의 창의성은 깊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아델레는 에밀리와 달리 클림트의 작품에 농염한 자세로 자주 등장한다. 몽롱한 눈동자로 관객을 바라보는 ‘유딧 I’과 ‘유딧 II’ 모두 아델레를 모델로 그린 작품.
당대 빈 사교계 인사들 사이에서 이 작품의 모델이 상류층 여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클림트의 예술세계에서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은 7년 이상이나 걸려 완성된 작품으로 제작의 어려움 때문이라기보다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두 사람의 필요에 따른 것 아니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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