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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사랑과 진실

'어우동' 의 음탕함.

by 현상아 2008. 1. 5.

시즌 2 격으로 접어들며 본격적인 '연산군' 시대의 서막이 오르고 있는 <왕과 나> 에 최근 어우동이 출연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김사랑이 열연하고 있는 어우동은 여성으로서 이례적으로 조선 왕조 실록에 꽤 많이 오르락 내리락 거리고 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음탕하고 낯 간지러워 <왕과 나> 속 어우동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감까지 느껴진다.


과연 '조선왕조실록' 은 어우동에 대해 어떤 내용을 적었을까.


 


근친상간도 서슴지 않았던 희대의 색녀


태평성대에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사건이 터지기 마련인데 성종 11년, 어우동의 섹스 스캔들이 바로 그러했다. 성종의 모후였던 인수대비가 친히 <내훈> 을 기록하여 조선 여성의 행동거지를 바로잡고자 한지 겨우 10년밖에 되지 않았던 때였으니 어우동의 섹스 스캔들이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우동을 어을우동이라고 적고 있으나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을자를 빼고 어우동이라고 해도 틀린 소리는 아니다. 어우동은 승문원지사 박윤창의 딸로 태어나 종실의 거문이었던 태강수 동에게 출가를 하여 혜인의 예우를 받았던 명문 여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위치에 걸맞지 않은 과한 성욕에 있었으니, 결국 그녀는 성욕을 참지 못하고 음탕한 행실을 일삼고 다닌다.


집안에 출입을 하던 은장이와 간통을 한 뒤, 태강수 동에게 적발 된 뒤 소박을 맞은 뒤에 친정으로 돌아 온 어우동은 그 때부터 본격적인 '섹스 스캔들' 작업에 착수한다. 소박을 맞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오종년이라는 사내와 관계를 맺은 그녀는 더 나아가 전 남편인 태강수의 아우뻘 되는 방산수 난의 집을 찾아가 그와 근친상간을 서슴 없이 저지른다. 더 놀라운 것은 방산수 난과의 관계가 얼마 되지도 않아 방산수의 형님 뻘인 수산수 기와도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근친상간까지 저지르며 파국으로 치달았던 그녀에게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녀는 전의감 생도에 박강창이라는 사내를 유인하여 간통을 했을 뿐 아니라 이근지라는 사람과도 관계를 맺었다. 재밌게도 어우동은 자신과 간통한 사람 중 마음에 드는 이를 골라 팔뚝에 먹물로 자신의 이름을 새기게 했는데 사내들은 그 치욕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어우동의 뜻을 따르며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근지 다음에 만난 이는 생원 이승언이라는 사내였다. 자신을 기생이라고 속인 뒤 이승언과 관계를 맺은 어우동의 음탕함이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이승언 역시 제 정신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그는 태종의 손자였던 춘양군의 사위였으니 종친이며 왕실 전체가 어우동의 치맛폭에 놀아났던 셈이다. 삼강오륜과 지조라는 이념 아래 자신을 가둬두려 했던 조선 사회를 어우동은 왕실과 종친을 희롱함으로써 조소하고 짓 밟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어우동이 아니었다. 학록 홍찬과 서리 감의향이라는 사내 역시 길에서 어우동을 만나 바로 잠자리에 골인했고 밀성군의 종이었던 지거비라는 노비 역시 어우동을 협박해 관계를 맺는데 성공했으니 어우동의 상대에 있어 왕실 종친이나 노비나 생원이나 그 무엇도 상관이 없었던 듯 싶다. 이 뿐 아니라 어우동은 명망이 높던 어유소와 제사를 지내는 사당에서 간통을 저질렀고, 김휘와는 인가를 빌려 관계를 맺었다.


어우동에게 있어 근친상간, 신분, 명망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녀는 오직 본능적으로 사내를 끌어들일 뿐이었고 조선의 선비라는 작자들은 어우동의 치맛폭에 놀아나며 위선과 가식으로 점철되어 있는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그 음탕함과 방탕함이 얼마나 낯 뜨거웠는지 어우동의 죄를 치죄하는데 조정 신료들이 얼굴을 붉힐 정도였고, 성종의 진노 역시 극에 달했다 전해진다.


야사에서는 미행을 나간 성종이 어우동과 관계를 맺었다고도 전해지는데 드라마 <왕과 나> 에서는 이 이야기를 스토리 라인으로 끌고 나간 경우다. 그러나 드라마와는 달리 역사 속에서 어우동의 섹스 스캔들이 터졌던 시기는 윤비가 폐비 되고 1년이 지난 후이니 드라마와 실제는 약간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성종과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정사가 아니니 야사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이 부분을 조선왕조 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성종 11년 6월 13일, (전략) 의금부에서 전지하기를,
"방산수 난이 태강수 동이 버린 아내 박씨를 간통하였으니, 국문하라." 하였다.


이틀 뒤인 6월 15일.
좌승지 김계창이 들어와 고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으니 태강수 동의 아내 박씨(어우동)가 죄가 중한 것을 스스로 알고 도망하였다 하니, 끝까지 추포하라." 하였다. 김계창이 말하기를,


"박씨가 처음에 은장이와 간통하여 남편의 버림을 받았고, 또 방산수와 간통하여 추한 소문이 일국에 들리었으며, 또 그 어미는 노복과 간통하여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한 집안의 음풍이 이와 같으니 마탕히 끝까지 추포하여 법에 따라 처치해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어우동은 어떻게 죽었나.


강상과 윤기를 치도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에 있어 어우동의 존재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정숙하지 못하였다' 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여기에 얽혀 수 많은 야사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어우동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한 남성들의 '음모론' 이 대두되기도 했다. 마치 마릴린 먼로의 죽음 뒤에 케네디 형제가 있다는 이야기처럼 어우동의 죽음 뒤에는 그녀를 기필코 죽여야 했던 성종의 정치적 선택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미행을 나간 뒤 어우동과 관계를 맺은 성종이 어우동이 자신과의 관계를 천하에 떠벌릴까 두려워 해 오히려 옥사를 크게 만들어 죽음으로 몰았다는 '음모론' 인데 이는 후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떠도는 소문일 뿐 신뢰할만한 것은 못 된다. 1년 전에 윤비를 폐비하는 등 정치적 시련을 겪었던 성종이 어우동 사건까지 크게 만들 필요는 없었으리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재밌는 기록이 나오기는 한다.


당시 영상의 자리에 있던 정창손은 어우동을 벌하는데 있어 "어우동의 죄가 비록 크다 하오나 전하께오서는 중죄인도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터이라 덕으로 다스림이 옳은 줄 아옵니다." 라고 했고, 더불어 "사형수에 대하여 복심의 제도를 두는 것은 죄수를 개과천선케 하는 아름다운 제도인 줄로 아옵니다. 한순간의 노여움으로 경솔히 율 밖의 중형을 써서는 옳지 못한 것이옵니다. 풍속이란 형벌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옵니다." 라며 어우동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성종은 단호히 정창손의 말을 뿌리치고 "형벌을 가하는 것은 교화하고자 함이니 어우동을 중형으로 다스리지 아니한다면, 고려가 망할 무렵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우동을 지체하지 말고 교형에 처하도록 하라." 라며 어우동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당대 최고의 권신이자 영향력을 잃지 않은 훈구대신인 정창손의 말을 묵살할 정도였다면 성종이 어떠한 '정치적 선택' 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는 지금에 이르러 야사에 대비해 추측하는 것일 뿐 전적으로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건 희대의 미모와 재주로 남자들을 희롱하고, 가식으로 둘러싸인 조선 왕조를 온 몸으로 비웃었던 어우동은 결국 그녀를 그토록 은혜했던 '조선 왕실' 의 남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녀는 의금부에 압송되어 죄를 자백하는 순간에도 아녀자만을 속박하는 조선의 법도가 잘못 되었다며 통렬히 비판했다 하니 어쩌면 그 수 많은 '간통' 까지도 어우동에게는 조선 여인의 속박을 깨부수려 했던 하나의 수단이었을지 모르겠다.


우스운 것은 조선의 극단적 '남성 중심' 의 체제 속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음탕녀' 어우동과는 달리 '음탕녀' 와 간통한 '음탕난' 들은 지금으로 따지자면 가벼운 형벌로 마무리 되거나 훈방 조치 되었다는 사실이다. 위선과 가식이 난무했던 조선의 양반 사회 속에서 어우동이라는 이름 세 글자는 혹 그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작 된 또 하나의 '이미지' 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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