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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구)세상사 이모저모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초상화

by 현상아 2008. 10. 21.

젊은 시절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초상화가 한 시골집 다락방서 발견  되었다 합니다.

소유햇던 자들은 여러 세대 동안 가족에 의하여 물려 왓던 것이라 그다지 그림의 중요성에 이해를 못했다는 군여

100년넘게 방치 되었다지만 보관이 아주 잘된거 같습니다요

하지만 그림 판독 검증 결과에 따르면 원래 성경책 없이 화려한 주름칼라 옷차림을 한 초상화 였는데...

그위에 덮어 다시 그려진 것이라 하네요...

 

 

엘리자베스 1세 영왕님이 도대체 어떤 인물이신가? 하고

daum지식통을 통해 둘러보았습니다요^ - ^

 

 

별칭은 The Virgin Queen, Queen Bess.
1533. 9. 7 잉글랜드 런던 근처 그리니치~1603. 3. 24 서리 리치먼드.
잉글랜드의 여왕(1558~1603 재위).
개요

이른바 엘리자베스 시대라고 불리는 그의 통치기에 잉글랜드는 정치와 상업 및 예술 분야에서 유럽 열강의 지위로 발돋음했다. 그의 작은 왕국은 심각한 내분에 시달렸지만, 현명하고 용감하며 당당한 엘리자베스는 국민들의 충성심을 북돋워서 외적과 맞서 나라를 통합하는 데 이바지했다.


어린시절
엘리자베스의 어린시절은 불우했다. 그는 튜더 왕가의 헨리 8세와 그의 2번째 아내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의 첫 아내인 아라곤의 캐서린은 스페인 왕의 딸로, 메리라는 딸 하나밖에 낳지 못했기 때문에 헨리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이때 헨리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강행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과도 결별했다. 새왕비 앤 불린이 아들을 낳아주기를 바라는 헨리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왕비가 딸 엘리자베스를 낳자, 크게 실망한 헨리는 엘리자베스가 3번째 생일을 맞기 전에 왕비에게 간통과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참수했다. 뿐만 아니라 헨리의 부추김을 받은 의회는 헨리와 앤 불린의 결혼이 처음부터 무효였으며, 따라서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라고 선언했다. 젖먹이 때부터 햇필드의 별궁에서 외롭게 자란 어린 소녀에게 이런 사건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6세 때 이미 40세가 된 사람처럼 의젓했다고 한다.

1537년에 헨리의 3번째 아내인 제인 시모어가 아들을 낳음에 따라 엘리자베스의 존재는 더욱 약해졌지만, 홀대받지는 않았다. 왕위계승서열 3번째인 엘리자베스는 로저 애스컴을 비롯한 훌륭한 가정교사들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고전과 역사, 수사학 및 윤리 철학을 배웠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 이외에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는데, 이런 외국어 능력은 나중에 그의 외교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영리하고 진지한 그녀는 신학도 공부하여 형성기에 있던 성공회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여왕 시대의 지위
1547년에 아버지 헨리가 죽고 10세밖에 안 된 이복동생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자, 엘리자베스의 지위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헨리의 6번째이자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는 헨리가 죽자마자 해군 사령관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했는데, 야심만만한 그는 자신의 형이자 에드워드 6세의 섭정인 에드워드 시모어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캐서린 파가 죽은 직후인 1549년 1월에 토머스 시모어는 반역죄로 체포되었고,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여 혐의를 잡으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여러 번 심문을 받았는데, 굴욕적이고 위험한 박해 속에서도 놀랄 만큼 신중하고 냉정한 자세를 보였다. 시모어가 참수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1553년에 프로테스탄트인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열렬한 가톨릭교도인 메리가 즉위했다. 메리 여왕은 강제로라도 잉글랜드를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려고 했다. 여왕이 가톨릭교도인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한 것도 프로테스탄트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란과 탄압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목숨은 매우 위태로워졌다. 표면상 가톨릭 계율에 순종하는 척했지만, 어차피 정부를 뒤엎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회복하려는 음모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1554년 1월에 토머스 와이엇 경이 반란을 일으킨 뒤, 엘리자베스는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갇혔지만, 어머니와 같은 운명은 간신히 모면했다. 온갖 심문으로도 엘리자베스의 반역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자, 2개월 뒤 그녀는 런던 탑에서 풀려나 1년 동안 우드스톡에 연금되었다. 메리의 통치기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줄곧 온갖 박해를 받으며, 자신의 결백과 언니에 대한 충성 및 가톨릭 신앙을 다짐해야만 했다.


즉위
1558년 11월 17일에 메리가 죽자, 엘리자베스는 거국적인 환영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그녀의 런던 입성과 화려한 대관식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다지는 데 더없이 좋은 행사였다. 예컨대 군중 속에서 한 소녀가 메리 시대에는 금지되었던 영역판 성서를 바치자, 여왕은 그 책에 입맞추고 높이 들어올린 다음 가슴에 끌어안았다.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의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이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대낮에 촛불을 들고 나오자, 여왕은 "그 횃불을 치워라! 그것 없이도 우리는 잘 볼 수 있으니까"라는 말로 그들을 가볍게 물리쳤다. 이리하여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를 단호하게 종교 개혁 쪽으로 돌려세웠다는 것을 천하에 알렸다.

여왕은 즉위하자마자 정부를 구성하고 포고문을 공포하기 시작했다. 추밀원의 규모를 줄인 것은 추밀원에 있는 일부 가톨릭교도를 숙청하고 추밀원을 좀더 효율적인 자문기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충실한 행정 및 사법의 연속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과 변화에 대한 욕구 사이에서 신중하게 균형을 유지했다. 그녀는 또한 윌리엄 세실과 니콜라스 베이컨, 프랜시스 월싱엄 및 니콜라스 스록모턴을 비롯하여 경험이 풍부하고 믿을 만한 조언자들을 주위에 모았다. 엘리자베스는 즉위한 날 아침에 윌리엄 세실을 수석국무장관으로 임명했고, 세실은 그후 40년 동안 현명하고 노련하게 여왕을 보필했다.


가부장적 세계의 여성 통치자
여자는 기질적으로나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나라를 다스리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믿음은 관습과 교육으로 더욱 굳어졌다. 남자는 이성적 존재인 반면, 여자는 충동과 열정에 지배되기 쉬운 동물이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다. 신사는 유창한 언변과 전쟁 기술을 배웠지만, 숙녀에게는 입 다물고 바느질이나 하라고 강요했다. 상류계층의 남자들이 남을 지배하려는 의지를 갖는 것은 훌륭하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여자의 경우에는 위험하거나 기괴하게 보였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왕실 법률가들은 '왕의 두 육체'라는 신비주의적인 법 이론을 만들어냈다. 여왕이 즉위한 순간,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여왕의 '타고난 육체'는 영원히 죽지 않는 '정치적 육체'와 결혼한 셈이라는 것이 이 이론의 요점이다. 따라서 이 이론에 따르면, 군주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나라의 안정과 영광을 조금도 위태롭게 하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명목만이 아닌 실질적인 군주로서 나라를 다스릴 작정이며, 어느 개인이나 파벌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우선하겠다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이복 언니가 여성 통치의 모범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여성의 문화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 게다가 잉글랜드 통치자의 권한에는 한계가 있었다. 군주는 국가의 수반이었지만, 잉글랜드는 상비군도 없고 효율적인 경찰력도 없으며 고도로 발달한 관료제도도 없는 가난하고 허약한 나라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재원을 얻기 위해, 여왕은 까다로운 의회를 상대로 협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여왕은 왕의 지배권과 애정문제를 융합시킨 통치 전략을 개발했다.

엘리자베스를 잉글랜드 왕국과 결혼한 '처녀 여왕'(Virgin Queen)으로 예찬하는 분위기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형성되었지만, 그 뿌리는 1555년에 이미 엿볼 수 있다. 당시 메리 여왕은 여동생을 확고한 가톨릭교도인 사보이 공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매사에 조심스럽고 냉정한 엘리자베스는 눈물을 쏟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엘리자베스는 다른 신랑감도 모두 거부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자 적당한 남편을 구하는 문제가 당장 심각한 고려 대상이 되었고, 여왕의 신랑감은 중대한 국가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여왕의 결혼에는 왕조의 이해 관계가 걸려 있었다. 여왕이 자녀를 낳지 않고 죽으면, 튜더 왕조는 단절될 터였다. 여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였다. 메리는 헨리 8세의 누이인 마거릿의 손녀이며 가톨릭교도로서, 프랑스를 비롯한 강력한 가톨릭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메리가 잉글랜드 여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악몽 같은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엘리자베스가 프로테스탄트 후계자를 낳아 주기를 원했다.

여왕의 결혼은 후계 문제만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대외문제에서도 중요했다. 고립되고 군사적으로 허약한 잉글랜드는 유리한 결혼으로 강력한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 스웨덴의 에리크 14세, 나중에 프랑스 왕이 된 앙주 공작 앙리,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를 비롯한 여러 후보자들이 구혼자로 나섰다. 엘리자베스로서는 이들 가운데 1명을 골라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결혼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는 위험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구혼자들을 서로 경쟁시켜 교묘히 실속을 차리면서 몇 개월씩, 때로는 몇 년씩 결혼 협상을 계속했다. 한때는 거의 청혼을 받아들일 것 같은 태도를 보이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영원히 처녀성을 지키겠다는 맹세 쪽으로 돌아서곤 했다.

구혼자로 나선 인물은 잉글랜드 안에도 있었다. 가장 끈질긴 구혼자는 여왕의 총애를 받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였다. 1560년 9월에 레스터의 아내가 의심쩍은 상황에서 죽자, 레스터는 당장이라도 여왕과 결혼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왕은 계속 그에게 다정한 태도를 보여 사람들의 입담에 오르내리면서도, 끝내 결정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레스터와 결혼하기를 망설인 것은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레스터는 궁정에 적이 많았고,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결혼하지 않기로 작정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권력을 남편과 나누어 갖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왕은 장관들의 솔직한 조언과 충고를 장려하고 존중했지만, 자신의 궁극적인 권한은 가장 신뢰하는 장관한테도 양보하지 않았다. 여왕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주제넘게 조언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1579년에 존 스터브스가 가톨릭교도인 알랑송 공작과 여왕의 결혼설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책자를 발표하자, 여왕은 그 소책자의 저자와 출판인을 체포하여 오른손을 잘라버렸다.

여왕은 측근조차도 속아넘어갈 만큼 연기를 잘했기 때문에, 궁정의 음모와 불안이 병적으로 고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여왕은 그런 불안을 진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고 이용함으로써 파벌을 조종하는 데 능숙한 솜씨를 보였다. 이러한 솜씨는 결혼 협상에서도 발휘되었고, 그의 통치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초기에는 의회와 여왕의 사이가 지극히 원만했으나, 이윽고 결혼과 후계문제로 조성된 긴장 속에서 차츰 서로 사이가 벌어졌으며 의회가 열릴 때마다 하원과 여왕 사이에는 복잡하고 신랄한 협상이 벌어졌다. 급진적인 의원들은 광범위한 공공 정책 분야를 토론 범주에 포함시키고 싶어했지만, 여왕의 대변인들은 정부 법안에 대한 자유 토론을 제한하려고 애썼다. 엘리자베스는 완고함과 상냥함을 겸비한 보기드문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이 2가지는 모두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연기였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정치 언어를 사랑의 언어로 바꾸고, 자신을 왕국의 부인이나 어머니로 비유하곤 했다. 여왕은 의회 대표들을 다룰 때에도 구혼자나 궁정 신하들을 다룰 때처럼, 여성이라는 사실을 중대한 장애가 아니라 뚜렷한 이점으로 바꾸곤 했다.


종교문제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운명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를 프로테스탄트 쪽으로 돌려놓았다. 1559년에 의회에서 통과된 수장령(首長令)은 헨리 8세의 반교황적 법령을 되살렸으며, 여왕을 성공회의 수장으로 선언했다. 엘리자베스 정부는 이런 구조적 개혁과 교회 예배에 대한 개혁을 신중하고도 꾸준하게 추진했다. 많은 귀족과 젠트리들은 대다수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지켰지만 정부와 교회의 중요한 자리는 모두 프로테스탄트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과격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런 조치조차 지나치게 소심하고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교회의 성직체계와 교회 재판소를 철저히 개혁하고, 기도서와 교회 의식에 남아 있는 가톨릭의 요소를 말끔히 씻어내며, 성공회 기피자를 적극적으로 색출하여 탄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여왕은 이런 요구를 모두 거부했다. 개혁은 충분히 이루어졌고, 더이상 소동을 일으키면 사회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귀족을 자극하며 기존 권력에 대한 충성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백성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신념을 꼬치꼬치 캐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영국국교회).

엘리자베스의 종교적 타협은 프로테스탄트의 불만 때문만이 아니라 가톨릭교도의 저항과 반대에 의해서도 위협을 받았다. 이 반대는 처음에는 비교적 수동적으로 보였지만, 1560년대말과 1570년대초에 일어난 일련의 위기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1569년에 완강하게 가톨릭 신앙을 고수한 잉글랜드 북부지역에서 봉건 귀족과 그 추종자들이 일으킨 반란은 무력으로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1571년에 여왕의 첩자들은 '리돌피 음모'라는 국제적인 여왕 암살 음모를 적발했다. 이 2가지 위협은 모두 1568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나 잉글랜드로 망명한 메리 여왕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톨릭 교회가 진정한 잉글랜드 여왕으로 간주한 메리는 손님이라기보다 볼모 같은 존재였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중대한 정치적·외교적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 문제는 메리의 끊임없는 야망과 모사적 성향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잉글랜드에서 내보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지만, 메리를 처형하라는 의회와 조언자들의 충고도 완강히 거부했다. 그래서 메리는 불길하고 사악하면서도 불쌍한 볼모로 남아 있었다.

종교적 긴장과 정치적 음모 및 폭력의 증가는 잉글랜드 내부의 관심사만이 아니었다. 1570년에 로마 교황 피우스 5세는 엘리자베스를 파문하고, 여왕의 백성은 여왕에 대한 충성서약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결과 잉글랜드 가톨릭교도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1572년에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 대학살 사건이 일어나자, 잉글랜드 가톨릭교도에 대한 의혹은 더욱 강해졌다. 유럽 대륙에서 훈련받고 잉글랜드로 다시 잠입한 잉글랜드 예수회의 대담하고 은밀한 선교활동은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고, 성공회 기피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강력해졌다. 엘리자베스는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구 교도들 사이의 분쟁에 개입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반란군을 지원하라는 압력이 거셌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개입을 망설였다. 설령 프로테스탄트의 이름으로 일어난 반란일지라도 반란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고, 게다가 여왕은 돈 쓰기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한참 동안을 망설이다가 약간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1585년에는 소규모 원정군을 네덜란드에 파견하는 데 동의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1580년에 포고령을 발표하여 비열한 이단자를 제거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라고 선언한 뒤, 엘리자베스 암살 기도가 더욱 우려되었다. 1584년에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오라녜 공 빌렘이 암살당했다. 엘리자베스는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지배계층은 강한 불안을 느꼈다. 잇따르는 음모, 예수회에 대한 박해, 외국이 잉글랜드를 침략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도는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추밀원은 엘리자베스가 암살당할 경우 암살자들만이 아니라 그 암살로 이익을 얻는 왕위요구자도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이것은 분명 메리를 겨냥한 맹세였다. 프랜시스 월싱엄 경이 이끄는 정부 첩자들은 그때쯤 이미 메리가 여왕 암살음모에 깊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월싱엄의 부하들이 1586년에 또다른 엘리자베스 암살음모인 배빙턴 음모를 적발했을 때, 메리 여왕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메리의 밀서가 당국에 넘어가, 메리가 배빙턴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메리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의회는 즉시 처형을 요구했다. 엘리자베스는 3개월 동안 망설인 끝에야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1587년 2월 8일, 메리가 참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자베스는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여왕은 메리의 아들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은 메리를 처형할 의도가 조금도 없었으며 사형 집행 영장을 전달한 사람을 투옥했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이 말을 믿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유럽 대륙의 가톨릭교도들은 여왕을 맹렬히 비난했고, 프로테스탄트들은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한 여인의 죽음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오랫동안 엘리자베스는 프랑스 및 스페인과 복잡한 외교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1580년대 중엽에 이르자, 스페인과의 무력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이 차츰 분명해졌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함대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런던에 전해졌다. 펠리페 2세는 이 함대를 이끌고 네덜란드로 가서 파르마 공작이 이끄는 스페인군과 합류한 다음, 잉글랜드를 침공할 작정이라는 소식이었다. 늘 인색하기만 했던 여왕도 이번에는 충분한 자금을 들여 기동력이 뛰어나고 충분한 무장을 갖춘 함대를 갖추는 데 동의했다. 1588년 7월에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해역에 도착하자, 여왕의 배들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전의 하나에서 적군을 무찔렀다(→ 드레이크). 패퇴한 스페인 함대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심한 폭풍우에 휘말려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여왕의 이미지
엘리자베스는 인색했지만, 몸치장에는 아낌없이 돈을 썼다. 공들여 만든 아름다운 옷과 값비싼 보석에 대한 정열에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여왕은 자신의 이미지에 지나치게 민감했다. 그래서 잉글랜드 안팎에 나도는 초상화를 통제하려고 애썼고, 대중 앞에는 항상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에드먼드 스펜서 같은 시인들과 니콜라스 힐리어드 같은 화가들은 다양한 신화적 모습(순결한 달의 여신 디아나,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 요정 나라의 여왕 글로리아나)으로 여왕을 찬양했다. 엘리자베스의 통치 말년에는 흉년과 지속적인 물가 폭등 및 실업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국민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여왕의 총신들은 대중의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일랜드를 정벌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 시도는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총신인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의 항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로버트 데버루는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지만, 왕명을 어기고 런던으로 돌아와 반역을 기도했다. 그는 1601년 2월 25일에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오랜 통치도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왕은 우울증과 질병에 시달렸고, 점점 쇠약해지는 조짐을 보였다. 1603년 3월 24일 엘리자베스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잉글랜드는 새 국왕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몇 년도 지나기 전에 잉글랜드인들은 '훌륭한 베스 여왕'시대에 향수를 느끼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죽기 오래 전부터 여성의 권위와 왕의 위엄 및 국가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강력한 이미지를 심어 놓았고, 그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있다.

-E. Jenkins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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