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0년대에 한국에서 비행기가 떴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기 어렵겠지만 비거(飛車)는 분명히 조선조 때 하늘을 날았던 우리 비행기다. 비거라고도 하고 비차라고도 불렀다. 다만 그때는 비행기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백과사전에는
“임진왜란 때 전북 김제(金堤)의 정평구(鄭平九)가 만든 비행기와 같이 나는 기계로 영남의 진주성(晉州城)이 왜군에 포위되었을 때 성주와 평소부터 친하던 정평구가 이를 만들어 타고 성으로 들어가 성주를 태우고 약 10m 높이로 날아가 30리 밖에 이르러 내렸다는 설도 있고, 포위된 진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것을 타고 가서 구원병을 요청했다는 설도 있다. 형태와 구조는 전하지 않고 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1592년 10월 처음으로 비거가 날았다는 진주성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인 박재광씨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592년(선조 25년) 10월, 왜장 가등광태(加藤光泰)·등원랑(藤元郞) 등이 이끄는 2만여 명의 왜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서 그 길목인 진주로 몰려왔다. 왜군의 공격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3,800명의 군사로 결사항전하여 격퇴하였다. 당시 조선군은 조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장비를 이용하였는데, 그 중 특이한 장비의 하나가 비거(飛車)였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소설을 쓴 고원태씨는 자신의 저서 비거(飛車, 중앙생활사 발행)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세계최초의 비행기는 우리나라 비거였다. 조선조 정평구라는 발명가가 만들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보다 300년이나 이전에 만들었는데도 고증이 안됐을 뿐이다. 임진왜란 때 어느 고립된 성에 포위된 성주가 이 비거로 구원되어 30리 밖으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비거란 날틀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기 역사인 셈이다. 고니나 따오기 모양의 날개와 가죽으로 만든 비거에 사람을 태우고 공중으로 떠올라 날수 있었다고 하는데, 고씨는 비거를 고증하고 연구하여 선조들의 창조적인 사고력을 보여줌으로써 소중한 우리문화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싶다. 하지만 그 사실을 완벽하게 고증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소설의 형태를 빌려 가능성의 방향 제시를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월간항공에 1991년 7월부터 11개월 동안 “잊혀진 우리나래“ 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비행기가 날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믿기 어려웠다. 비행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비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러나 비거가 세계최초의 비행기라는 기록은 모두 사실이었다“ 고 밝히고 있다.
비거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19세기 중엽, 조선 철종(1831~1863)시대에 편집된 실학자 오주 이규경(五洲 李圭景:1788~?)이 백과사전류의 책으로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60권 60책으로 현재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에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 모두(冒頭)에서 소개한 백과사전의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고 비차의 원리가 소개돼 있는데 “4인승으로 규모가 컸으며, 생김새는 따오기의 모습과 비슷하다.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두드려서 이 안에 들어 있는 바람을 일으켜 떠오르게 한다”라고 했다. 이 저서에 보면 정평구뿐 아니라 윤달규란 사람도 비차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었다고 하고, 그가 전해들은 비거의 모양과 구조에 대해 기록해두었다.
“강원도 원주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비거에 관한 책을 소장하고 있거니와 이 비거는 4명을 태울 수 있으며 모양은 따오기(혹은 고니)와 같은 형으로서 배를 두드리면 바람이 일어서 공중에 떠올라 능히 백장(百丈)을 날 수 있되 양각풍(羊角風)이 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광풍이 불면 추락한다 하더라” 라는 구절도 볼 수 있다. 이규경은 또 “호서(湖西) 노성(魯城) 지방에 사는 윤달규(尹達圭)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명제의 후손이다. 이 사람이 정밀하고 교묘한 기구를 만드는 재간이 있어 비거를 창안하여 기록하여 두었다.....
이러한 비거는 날개를 떨치고 먼지를 내면서 하늘로 올라가 뜰 안에서 산보하듯이 상하 사방을 여기저기 마음대로 거침없이 날아다니니 상쾌한 감은 비길 바 없다. 비거는 우선 수리개와 같이 만들고 거기에 날개를 붙이고 그 안에 틀을 설치하여 사람이 앉게 하였다. 물에서 목욕하는 사람이 헤엄치는 것처럼 또한 자벌레나비처럼 굽혔다 폈다 하는 것처럼 하여 바람을 내면서 날개가 저절로 떠올라가니 잠깐 동안에 천리를 날아다니는 기세를 발휘하여 십여 일의 시간을 단축하게 된다. 이것은 큰 붕새가 단숨에 삼천리를 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또한 실학자 신경준(申景濬) 도 여암전서(旅菴全書)중에 책차제(策車制)라는 대목에서, "임진 연간에 영남의 읍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성의 우두머리에게 비거의 법을 가르쳐 이것으로 30리 밖으로 날아가게 하였다." 라고 비거를 언급하고 있다.
고원태씨는 비거 자체의 무게는 150kg 정도, 사람이 탔을 경우에는 300kg. 비행거리는 최대 12km로 추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거북선을 만들어 실전에 사용할 정도로 선박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유체역학개념 또한 잘 정립되어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선조들이 하늘을 나는 방법으로 두루미 따오기 등 몸집이 크고 무거운 새들의 활공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비행기의 원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라는 것이다.
비거에 있어서 자체 동력의 유무는 비행기와 활공기를 구분 짓는 가장 기본적인 잣대. 이는 라이트형제의 비행기가 세계최초라는 기준이 되어 그동안 글라이더로 무수한 실험을 해왔던 릴리엔탈이나 케이레이 등의 노력과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든 역사적 사건이다. 비거는 날개만 가지고 있는 활공기 즉 글라이더와는 달리 자체 동력장치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거야말로 연이나 글라이더 정도겠지 하는 우리의 상상을 완전히 뒤엎는 살아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규경은 자신이 전해 들은 비거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 정리해두었다.
① 비거를 만들어 네 사람을 태우고, 곡형 비슷하게 풀무를 만들어 배를 두들겨 바람을 일으켜 떠서 공중에 올라가 백길 쯤 다닐 수 있게 했지만 겨우 각풍을 만나도 전진하지 못하고 떨어지며, 광풍을 만나면 갈 수가 없다
② 그 기술을 모방하려면 먼저 하나의 수레를 만들어 나는 연처럼 깃과 날개를 달고 그 속에 기구를 설치하고 사람이 타고선, 사람이 헤엄치는 것처럼, 또는 자벌레가 굽혔다 폈다하는 것처럼 하여 바람과 기운을 내게 한다면, 두 날개가 자연히 날아서 한 순간에 천리를 가는 형세를 짓는데 그것을 줄로 가로 세로 엮어 매어 신축성이 있게 하고, 비차 속에서 풀무질하여 규칙적으로 센 바람을 일으켜 대기위에 뜨게 한다면 그 형세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복원된 비거와 시험비행 모습
2000년 4월 8일, KBS 역사스페셜에서 “조선시대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라는 프로가 방영된 적이 있다. 여기서 1903년 라이트형제가 만든 인류최초로 동력장치가 부착된 비행기에서 시작하여 조선말 1913년 일본군 나라하라 중위가 몰고 우리나라에 나타난 비행기를 보여준 후,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저서에 “임진왜란 때 정평구란 사람이 비거를 만들어 진주성에 갇힌 사람들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그 비거는 30리를 날았다” 라는 이야기로 이어나가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차. 그렇다면 이건 비행기가 아닌가”로 이 프로는 시작된다.
도대체 그 시기에 비거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만든 비행기는 어떤 형태였을까. 이제까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조선의 비행기, 비거가 과연 실제 존재했던 것인가에 대해 역사스페셜팀이 추적에 나섰다. 우선은 정평구(鄭平九)라는 사람이 실제인물인지의 여부부터 캐나갔는데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일대의 전해지는 각종 문헌들과 읍지, 야사까지 모두 점검했지만 헛수고였다. 다음단계로 성씨 전문가를 통해 정씨 가문을 수소문하던 중 김제문화원에서 정평구를 찾아냈다. 1917년대에 정리된 김제군지속에서 정평구가 그의 재간을 이용해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왜군을 농락했다는 기록이 확인됐다. 비거를 만들어 포위된 것을 실어냈고, 군량도 운반했다는 기록도 있다. 진주성이 무너진 뒤에도 벌통을 만들어 왜적 혼내준 것이나 화약을 만들어 혼 낸 야사가 많다는 것도 확인됐다.
그러면 정평구는 정말 비거를 만든 것일까. 족보에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 비거를 만들어 임진왜란 때 활약했다는 내용이 남아있는데 화약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비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재 남아있는 자료에는 그가 비거라는, 하늘을 나는 기구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질뿐이다. 비거 발명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왜 가문의 족보 외에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것일까. 후손들에 따르면 정평구의 비거를 본 당시 진주 사람들이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그 업적을 보고했으나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기구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헛소문으로 취급해버린 것이라고 후손들은 전한다.
비거를 만들었다는 두 번째 인물 윤달규는 성리학의 대가인 윤증의 후손으로 족보에서 그 존재가 확인됐으나 그가 비거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정평구가 살았던 시기와 윤달규 사이엔 200여년의 간격이 있다. 비록 비거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분명 이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었다. 그것은 조선시대 한 켠에서 끊임없이 비차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이야기가 100여년이 흐른 뒤 이규경의 기록에 나타난 것이다. 이후 실학자인 신경준 또한 “여암전서”중에 책차제란 대목에서 비거를 언급하고 있다.
KBS제작팀은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비거를 복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앞서 나온 두 가지 기록 외에 조선의 비거는 설계도는 물론 제작과정을 알리는 아무런 자료도 남아 있지 않았고 더욱이 30리를 날았다거나, 네 사람을 태웠다는 기록들은 비거의 존재가능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으로 지적받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비거를 만들었다는 사람들이 실제 한 시대를 살았던 실존인물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기록들이 단순히 세간의 소문을 정리한 수준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이제껏 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비거 복원을 위해 건국대 기계항공학부 교수들을 비롯, 그 부문의 전문가들로 복원팀이 구성되었다. 설계도가 없는 상황에서 당시 기술수준을 고려해가며 복원작업에 들어갔는데 설계작업에 2개월 제작에 1개월이 소요됐다.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는 문제는 돛배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전통매듭 기법을 사용했다. 돛배는 이미 조선 초기부터 만들어 사용하던 것이어서 이 방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았다.
먼저 비거 날개를 이루는 천을 조선시대 가장 많이 사용된 천중에서 광목을 선택했다. 돛배의 재료가 광목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을 모아주는 역할을 하는 돛에 사용했다면 여기서도 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다음에 비거의 골격을 이루는 재료로서 강한 바람에도 부러지지 않고, 조종사의 무게를 견뎌낼 탄력성 있는 재료로 대나무를 꼽았다. 문헌에 날개쳐서 비행했다고 하기 때문에 날개치려면 유연성 있어야하고 진주지방에 대나무 많이 자란다는 것도 고려가 됐다. 그러나 대나무와 광목천으로 구성하는 날개의 지지대가 무게를 견디지 못해 수차례 부러지는 과정을 거치며 조종석 날틀의 크기와 형태를 조정해나갔다. 마지막으로 비거의 추진장치인데 원주에서 만든 비거에 풀무같은 장치가 있다는 기록에 따라 이것이 공기를 일으켜 날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풍속화가 김홍도의 대장간 그림을 보면 대장간에서 펌프질을 하듯이 피스톤을 움직여서 바람이 나오게 하는 풀무는 손이 아니라 발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더욱이 이규경의 기록에는 비거는 단지 풀무장치로만 날았던 것이 아니라 양 날개를 움직여 얻어지는 풍력에다, 자연 바람을 이용하는 방법까지 모두 동원했다고 적혀있지 않은가. 원래 인류가 비행을 하고자할 때 새를 모방.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남겨 논 스케치도 새가 날개치는 모습. 비거도 역시 새를 모방해 만들었으리라.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시제품으로 비행실험 장소를 물색하던 중 정평구가 진주성에서 비거를 날려 30리나 날았다는 대목에 주목했다. 진주성 앞에는 남강이 흐르고 있어, 강바람이 진주성 성벽과 만나 강한 상승풍을 일으키는 곳이다. 게다가 진주성 주변에는 낮은 구릉들이 둘러싸여 있어서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비행에 있어 최적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진주성과 비슷한 조건을 가진 지역을 고르는 과정에서 몽촌토성을 비행실험 장소로 선택했다. 낮은 구릉지대가 있는데다가 한강의 바람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비행실험도 마쳤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완성한 비거를 보면 특별한 추진장치 없이, 연(鳶)이 하늘을 나는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고전적인 형태의 행글라이더 정도가 됐으며 비행실험 결과, 이 비거는 20미터 높이에서 70미터를 날았다고 한다. 현대의 활공거리 계산법에 따르면 이 정도라면 진주성과 같은 60미터 높이에선 200여 미터를 날아 남강을 건널 수도 있는 수준이라고 한다. 만약 여기에 어떤 형태로든 추진장치까지 가미됐다고 한다면 비거는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기록만으론 그것을 완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추진장치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비거의 형태나 크기는 지금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비거는 존재했고, 그 비거가 하늘을 날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이라고 한다.
그런데 비거를 계속 발전시키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나마 비거가 영원히 전설 속에 묻히지 않고, 기록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조선시대에 실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실학자들은 비거에 대해 폭넓고, 다양한 관심을 보였다. 과학의 힘으로 백성을 구하고자 했던 정평구의 비거에 대한 꿈은 윤달규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이 내용이 실학시대 이규경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배타적인 성리학이 판을 치던 그 무렵, 실학이 추구한 그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과학정신이 사라지면서 비거는 우리에게서 잊혀져갔다.
그러나 저러나 왜 많은 사람들은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았을까, 그래서 계승되지 못했을까? 문화유산해설사 박원호씨는 역사 속 과학읽기 '제1화 하늘을 나는 수레, 비거(飛車)'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비거에 관한 모든 기록은 하나같이 남에게 전해들은 내용이라는 점이다. 즉, 비거(飛車)를 발명한 장본인이 기록으로 남긴 게 아니라 ”누구누구가 비거를 봤다 카더라“ 식이다. 직접 실행한 사람의 기록이 아닌 경우, 상상이나 과장이 자연스레 끼어드는 법, 설계도면과 같은 그림이라면 몰라도, 순전히 구전(口傳)일 때는 왜곡이 더 심한 편이다. 하지만 이름까지 언급한 것을 보면 분명 존재했을 거라는 추측이 든다.
그러면 왜 장본인은 자신의 발명품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을까? 비거를 만든 장인(匠人)은 글을 모르고, 글을 아는 선비는 비거를 몰랐던 것은 아닐까. 또한 한문은 손재주 많은 장인에겐 배울 기회도 없었을 뿐 아니라, 배우기에도 너무 어려웠다. 고려청자의 비색(翡色)이 계승되지 못한 이유도 그렇게 추측한다. 자식에게조차 알리고 싶지 않은 장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장인의 문맹(文盲)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비거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 학자들은 라이트 형제에 뒤지지 않는 조상의 지혜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결코 장본인의 정확한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역사스페셜은 마지막 신에서 유인촌씨가 라이트 형제가 만든 비행기 모형과 복원시킨 비거 중간에 서서 다음과 같은 멘트로 끝을 맺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면 독일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비행실험들이 이어졌다. 그 노력들이 20세기 초 라이트형제의 비행기를 탄생시킨 밑거름이 되었는데, 그때 조선에 살던 학자 이규경과 신경준 역시 비거에 관심을 갖고 그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이 기록 덕분에 우리는 비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에 살았던 정평구, 18세기의 윤달규, 그리고 19세기 이규경과 신경준까지 300년 동안 이어져온 조선의 비행기- 비거, 이것은 과학기술로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조선시대 과학자들의 꿈과 정신을 말해주고 있다.”
2006년 4월, 보잉사는 산학협동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서울과학고등학교에 미화 7만 5천 달러를 들여 항공과학교실을 설치했다고 한다. 좀 더 체계적인 항공과학 연구 및 실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개관에 맞춰 서울과학고등학교는 교내에 항공멤버쉽 학생을 선발했는데 이 학생들은 이미 비거(飛車)를 제작하고 비행기의 기초를 공부하기 위해 RFF (Robot Free Flight)를 제작했다. 학생들은 모형항공기 자동비행을 위한 전자실습 및 프로그래밍을 통해 비행기의 기초, 전기전자기초 및 실습, 프로그래밍학습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듣기에 파릇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참고>
http://www.parco.pe.kr/essdb/essay74.htm
http://qna.scienceall.com/knowall/svc/qna/question_detail.php?queId=53614
http://www.kbs.co.kr/history/vod.shtml 제6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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