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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지금여기

망상, 잡념에서 벗어나는 길

by 현상아 2011. 3. 11.

지금여기 나를 돌아 보기 위해 가끔씩

다음 아래 EO 책속의 내용을 읽으며 ...발췌하여 올림다-

 

 


 

 

 

당신 스스로 <무언가에 사로잡혀있거나> <무언가가 개운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우선 도대체<무엇에 사로잡혀있는지>를 직시해보라.

그리고 그 사로잡혀잇는 것을 글로 옮겨보라.

 

<자신은 특별히 크게 구속받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기 기만에 절대 빠지지 말고,

우선 몇 가지라도 자신이 구속받는 것을 찾아본다.

여기서 구속이란, 모든 정신적 구속만을 말하는것이 아니고

또 세간의 이런저런 구속을 지칭하는 것만도 아니다.

어떤 구속이나 속박이든 본질상 다 똑 같으니까.

 

<자신이 구애받는 것은 없다>라고 큰소리치는

선방의 스님이 종종 있는데, 사실

그들은 세간적인 것에 대해선 별 구속을 안 받더라도

정작 불도니 무심이니 하는 것에는 엄청 구애받는 이들이다.

 

정신없이 놀고 있는 아이들 손에서 장난감을 빼앗아보듯

그들에게서 좌선이니 불법이니 만트라니 수행이니

교의 같은 것을 뺏으려 들면,

마치 아이들처럼 <정색>을 하곤 <자신이 하는 것이 옳다>고

온갖 추한 변명을 시작한다. 여기서 빼앗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즉, 조금만 <헐뜯어>보라.

 

물론 이것은 세간의 문제와 다를 바 없다.

그 인간이 소중하게 여기는 관념이나 상식, 혹은 가치관이나

취향 같은 것을 약간 비아냥거리거나 들쑤셔보면

그들로부터 아이들과 똑같은 반응이 되돌아올 것이다.

 

여담은 이 정도로 하자.

물론 그러한 구애나 속박은 당신 내면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종교 따위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인간도

자신의 생명, 취직, 자식의 진학 문제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반대로 자신의 생명을 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저 무의미하게 버릴 수는 없다.

<누군가>를 위해서, <세계나 불법을 위해서>, 혹은

누군가에 대한 <보복>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법이다.

그러니 자신이 구애되어 있는 바로 그 대상을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는 것이다.

거기서 우선 당신은 자신을 구속한는 것을 발견하라.

그것은 결코 많진 않을 것이다.

자신을 구속하는 사고를 발련하는 방법은,

 

하루 중 <자신이 멍청하게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

<무엇에 대한 생각>이 가장 많은가를 몇 일, 혹은 몇 시간에 걸쳐 스스로 체크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걱정하는 일, 구속받는 것들이 어김없이

같은 테마 부근을 빙빙 돌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몇 번씩 꼭 생각하는 사고의 종류>는 있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명상의 대상이다.

도대체 그 사고가 <하루에 몇 번 머리를 스치는지>를

직접 메모해가며 헤아려보라.

 

그러면 사고 내용이야 개인에 따라 여러 가지겠지만,

정신세계든 세간이든 일절 구별하지 않고 메모해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들일 것이다.

 

머고 살 걱정, 금전이나 업무에 관한 걱정, 이성 문제나 결혼 문제, 혹은 섹스,

자신의 이상(理想)이나 세계의 이상에 대하여,

무심에 대하여, 깨달음에 대하여,

사고를 관찰해야 한다든지, 주의 깊게 자각해야한다는 사고,

혹은 왜 자신이 살고 있는지, 왜 죽는지,

왜 우주 세계가 있는지와 같은 의문들이다.

 

단, 이런 것들에는 <윤리적인 순위>를 앞세워서는 안 된다.

어느 것이 정신적인 테마이고 어느 것이 물질적인 것인가를 생각해선 안 된다.

여기서는 사고의 종류나 내용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하루 중에 일어나는 <빈도 수>가 문제이다.

 

명상에서의 사고는,

당신 자신이 자신의 머리 속을 <제 정신으로 보고>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고를 대상으로 정한다.

명상의 대상이 되는 사고를

결정하는 기준은 <빈도 수>에 있지,

어느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가를 기준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만약 똑같은 음악 구젉이 몇 번씩 머리에

떠올라 지워지지 않는다면

깨달음의 문제보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구속받고 있다고 판단한 사고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결정해본다.

실제로 노트에 몇 가지를 쓰기 시작해보라. 그 다음에

그 중에서 가장 구애가 강한 사고를 하나 선택하여

그 사고가 나오는 것을 기다려보라.

 

그러나 그것은 당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고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당신은 한 걸음 물러서서 그 사고를 관찰해보라.

과연 바로 그 사고가 <자력으로>

망상이나 연상을 계속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실험해보라.

 

이는 <부디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말로만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 사고를 떼어내어

사고 자체에 주도권을 건네주라는 것이다.

당신이 망상이라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짓을 하지

않아도 과연 사고의 불길 그 자체가

계속해서 탈 수 있는지 아닌지를 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어떤 사고에 대해서든 행해도 괜찮다.

단, 거듭 말했듯이

당신이 구속받는 비율이 높은 사고일 경우에 한한다.

당신은 무엇이라도 <무심코> 생각한다.

가령, 무심(無心)이 소중하다고 <무심코> 생각하는 자가 있다.

자신은 구애되어 있지 않다고 <무심코> 생각하는 자가 있다.

불도(佛道)는 소중하다고 <무심코> 생각하는 자가 있다.

사고나 감정에 대해 관조자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무심코> 생각한다.

 

항상 당신은 무심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습관>으로 굳어진다.

습관적이 되어 전혀 생각할 필요조차 없을 때까지

당신은 그것에 관해 생각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난다.

 

그러니 사고에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생각하는 것은 괜찮겠지>

라고 하지 말고, 자신이 <자주 생각하는 것>을

명확하게 발견하여 여하튼 그것을 명상하는 것이다.

 

명상의 방법은 당신이 자주적으로 <다음의 연상>을

덮어씌우지 않는 경우,

사고가 과연 <자체의 힘으로 폭발해갈지 어떨지>, 당신이

사고에 일절 협력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것이 당신 사고

속에 길게 머무를 수 있을지 없을지가 관건이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서 만약 하나의 사고에 대하여 구애됨이

없어진다면 노트에 남아 있는

다른 사고 -  여전히 구애받고 있는 - 에 대해서도

똑같이 시도해보라.

 

제아무리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문제의식이나 가치관이

있더라도, 일상의 문제, 극히 당연한 인간적 문제나

잡다한 생활 문제 등등에서 막히는 것은 결국

<그저 사고였다> 라는 것을 이치나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실감하고 이해될  때까지 이렇게 명상해보라.

 

- 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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