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몽골을 통합하고 세계 최대의 영토인 유라시아 대륙을 경영하며 동-서 문명교류에 크게 기여한 징기즈 칸은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이 징기즈 칸은 고리(KOREA)족의 군장으로 [몽골비사]에 기록되어 있다. 징기즈칸은 고리족이라는 의미다. 단군조선사 연구의 권위자 단국대 윤내현 교수도 징기즈칸의 조상은 북만주 지역에서 몽골초원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 하였다.
그런 만주 어디에서 몽골초원으로 이주한 것일까? 그것은 '고리'에서 맥을 찾아야 한다. 만주에 고리국이 있었는가? 있었다. 북만주 흑룡강 지역이다. 흑룡강성 역사의 제1의 인물이 동명왕이다. 동명왕은 온조가 나라를 세우고 국가시조로 삼았던 인물이다. 한국인들과 생김새와 말도 유사한 몽골사람들은 한국을 무지개 뜨는 나라(솔롱고스)라고 부르며 형제국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당나라의 정벌로 초원에서 소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하여 이슬람 제국을 건설한 후에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을 지배하여 터키(돌궐)제국을 건설한 터키도 한국을 형제나라라고 역사교육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초원에서 터키가 이주할 때 고구려유민들도 20여만도 함께 이주하였다.
징기즈칸의 선조들이 떠나 온 고리(KOREA)국과 부여5대 단군에 오른 동명성왕 고두막
4세기에 초원세력으로 한반도로 들어 온 모용선비족이 세운 신라의 마의태자 아들 김행과 신라유민들이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여 세운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만주원류고]에서는 “고려(高麗=고구려)는 부여(夫餘)로부터 나오고, 부여는 색리(索離)로부터 나왔다. 索(색)은 ?(탁)처럼 읽히므로 [?(탁)으로도 적었고 ?(탁)의 글자모양이 ?(고)와 비슷하므로] 또한 ?(고)로도 바꾸어 적었으며 [?(고)와 ?(고)는 음이 같으므로「위략」및「요사」지리지에서 또한 ?(고)로 적었는데, 색리국 또는 탁리국,고리국은 실제로는 고려와는 서로 다른 벌개의 두 나라다. 부여(夫餘)는 고려(高麗) 북쪽에 있었고 고리(?離) 또한 부여(夫餘) 북쪽에 있었으니 이 때문에 동명(東明=고두막)이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에 이르렀고 주몽(朱蒙)이 또한 남쪽으로 달아나 고려에 이르렀다. 그 일들이 비슷하며 서로 같으니 혹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어떤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고구려 위쪽에 부여가 있고 부여 위쪽에 고리(탁리)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동명왕 고두막이 고리국에서 부여로 망명해 왔다는 것이다.
동명왕 고두막의 출생과 망명에 대하여 [후한서]에서는 "... 范書東夷傳, 初, 北夷索離國王出行, 其侍兒, 於後姙身, 王還, 欲殺之. 侍兒曰, 前見天上有氣, 大如?子, 來降我, 因以有身. 王囚之, 後遂生男. 王令置於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復?於馬蘭, 馬亦如之. 王以爲神, 乃聽母收養, 名曰東明. 東明, 長而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奔走, 南至掩?水, 以弓擊水, 魚鼈皆聚, 浮水上. 東明乘之得度, 因至夫餘, 而王之焉. (해석:당초 북이(北夷) 색리국(索離國고리국)의 왕이 출행하였다가 그의 시아(侍兒,시녀)가 뒤에 임신하게 되었다. 왕이 돌아와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아(侍兒)가 말했다, "전에 하늘 위에 기(氣)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크기가 달걀과 같았으니 (이것이) 제게로 내려와 이로 인해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그녀를 가두니 뒤에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두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고 다시 마구간으로 옮기자 말 또한 그처럼 하였다. 왕이 그 아이를 신령스럽게 여기니 이에 모친이 거두어 기르는 것을 허락하고 동명(東明)이라 이름했다. 동명(東明)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이 그의 용맹함을 꺼리어 다시 죽이려 했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엄시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모여 물위로 떠올랐다. 동명이 이를 타고(밟고) 강을 건널 수 있었고 이로써 부여(夫餘)에 도착해 왕이 되었다.)
서기 60년경 쓰여진 후한 시대 왕충의 『논형』< 길험편>에서도 다음과 같이 유사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북쪽 이민족의 탁리국에 왕을 모시는 여자 시종이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여자 시종은 계란 같은 큰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답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 놓고는 말에 밟혀 죽도록 했으나 말들 역시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아마 하늘 신의 자식일 것이라 생각하여 그의 모친에게 노비로 거두어 기르게 했으며, 동명(東明)이라 부르며 소나 말을 치게 하였다. 동명의 활솜씨가 뛰어나자 왕은 그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 그를 죽이려고 했다.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고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적하던 병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그는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에 부여국이 생기게 된 유래이다"
따라서 부여로 망명하여 부여 단군에 오른 고두막은 흑룡강성 지역 고리국(위 왼쪽 지도 노란색 지역)에서 태어난 왕의 아들인데, 시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라 왕으로부터 멸시천대를 받자 송화강을 건너서 해모수의 부여로 망명하여 부여 단군에 올랐다는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의미가 된다.
부여로 망명한 고두막은 어떻게 부여의 단군에 오르게 되나?
[환단고기 북부여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계유 13년 한나라 유철(무제)이 평나를 노략질한 (위만조선의 왕)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高豆幕汗칸)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니 그 지방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호응하면서 싸우는 군사를 도와 크게 떨쳤다.
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이 사람을 시켜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 곳에 도읍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라고 하니 단제(고우루)는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고두막한)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君臣)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에 국상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오곡은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라 하며 또는 동부여라고도 한다. "
위 기록은 동명(고두막한)이 한나라 군대를 쳐부수어, 군을 장악하자, 당시 부여의 임금이었던 고우루를 핍박하여 해부루를 동쪽으로 내쫓고 자신이 부여의 임금이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해모수의 손자 고우루 단제의 동생 해부루는 왕위를 고두막에게 물려 주고 가섭원(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니 가섭원부여이고 부여가 2개다 보니 구분하기 위해 동부여라 불렀다는 것이다.
[환단고기-북부여기]를 보면 동명왕 고두막이 부여 단군에 오르게 된 내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유 원년(기원전 108) 이 해는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제(帝:동명=고두막한)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고조선 마지막 단군)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중략) 을미 23년(기원전 86) 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동명)가 이를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북부여기에 의하면 동명왕 고두막은 바로 부여 5대 단군이자, 북부여의 시조인 고두막한이다. 현재 [환단고기]는 위서 취급을 받지만, 사실은 [환단고기]기록이 해민족 고대사에 대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으로 진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 고대 사서가 부족한 우리에게 있어 [환단고기]는 베일에 가려진 한국 고대사를 복원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하겠다. 기존 사학계는 아직도 북부여와 동부여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환단고기]기록을 보면 부여에서 갈라져 나간 나라가 가섭원 부여로 동부여임을 알 수 있고, 동부여는 고구려 대무신왕 때 고구려에 항복하고 제후국이 되었으나, 부여는 고구려 문자명왕 때 읍루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부여왕족이 투항함으로써 망한 것이다. 그러니까 문자명왕 이전까지는 부여가 존속했으며 이 부여의 왕 구태가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지역에서 백제를 세운 것이고 성왕 때는 남부여로 국호를 바꾼 것이다.
[환단고기-북부여기]를 통하여 해모수 손자 해부루가 한나라를 물리치고 부여민심을 얻은 고두막에게 단군자리를 물러 주고 가섭원에서 나라를 세우니 동부여다.당시 해모수 부여왕조가 한나라의 잦은 침략을 당할 정도로 매우 허약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때 나타난 영웅이 바로 흑룡강지역 고리국에서 부여로 망명해 온 고두막 칸인 것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국모로 추앙받는 소서노의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두막한(칸)이라는 기록에서 우리는 몽골을 통합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경영한 대제국을 건설한 징즈 칸의 조상이 흑룡강성 고리국에서 몽골초원으로 이주해 온 고리(코리)족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징지즈 칸은 바로 고리(코리)족의 군장이기 때문이다.
초원세력이 자신들의 부족장을 '칸'이라고 부른 배경에는 왕을 '한(칸)'이라고 불렀던 만주지역 수렵족이 초원지역으로 이주한데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나문헌에서 '한'은 한반도지역을 의미하는데, 만주지역 사람들이 왕을 '한'이라고 부른 배경에는 만주지역 사람들도 조상들이 수렵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지역에서 만주지역으로 이주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을 의미하는 '한'이 해머리땅 해민족의 이주를 통하여 칸(몽골)으로, 간(지나지역), 안(중동지역)으로 변음된 것이다.
따라서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초원세력의 조상이 바로 해머리땅에서 만주로 이주해 간 해민족이며, 해민족의 갈래인 아리안족의 인도-유럽어(영어)의 조상어가 한국어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나라을 물리치고 부여 단군이 된 고두막 신화와 고구려 추모성제 신화는 왜 유사한가?
흔히 고구려의 시조 고추모를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서 중 하나인 [삼국사기]에 고구려 시조를 동명성왕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추모)과 동명왕은 다른 인물이다. 고구려 개국시조는 추모왕(鄒牟王)으로 광개토태왕릉비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후대 사가들이 쓴 기록과 고구려인이 남긴 기록중 어느게 더 고구려 역사의 진실을 알릴까? 바로 고구려인들이 남긴 기록 즉 광개토태왕릉비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왕은 부여 5대 단군에 오른 고두막이다.
출생의 비밀이 비슷하고 고난과 시련을 받고 부여로 망명한 사연 또한 동일한 부여의 동명성왕 고두막과 고구려 개국시조 추모왕의 설화는 차이가 있다. 기록상으로 본다면 동명왕계 기록이 원형이고, 추모왕의 이야기는 동명왕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수정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부여 고두막 단군의 아들 고무서의 사위가 되어 고무서의 유언에 따라 부여 7대 단군에 올랐다가 부여인들이 반대로 남하하여 고구려를 개국한 고추모 세력이 부여의 황통을 이어 받았다는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부여 동명왕 건국신화를 공유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동일한 문화적 전통을 가졌다는 것과 또 동명과 추모왕이 알과 관련있는 난생설화를 통해 범단군조선(부여)족의 공통정서(부여의 동명왕, 고구려의 추모왕, 지나 동해안에 살던 서이족의 서언왕, 가야의 김수로왕, 신라의 박혁거세가 전부 난생설화를 가지고 있다)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환단고기-북부여기]에 따르면 동명왕은 부여의 고두막한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개국시조 추모왕은 고두막한의 아들인 부여 6세 임금 고무서의 사위가 되어, 고무서가 죽자 그 뒤를 이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한다. 고구려의 존속년도가 700년이 아닌 900년이라는 얘기가 많은데, 이는 해모수가 부여를 개국한 시기를 기준으로 삼는데서 비롯된다.
해모수.고두막.고추모.비류.온조.구태.징기즈칸 선조의 나라인 고리(KOREA)국은 단군조선의 봉후국
봉후국이란 단군천황의 자식들이나 친척들을 왕으로 임명한 제후국을 의미한다. 고리국의 1대 왕 초대 단군천황의 차남 부소다. 그래서 부여를 계승했다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에 성을 쌓고 지은 이름이 '부소'산성이다. 역시 봉후국 부여국의 1대 왕은 초대 단군천황의 막내 아들 부여다. 막내 아들 부여가 학문이 높고 무예가 뛰어나 부여국을 부강하게 만들어서 부여의 명성이 훗대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43대 구물 단군천황은 국호를 조선에서 부여로 바꾸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해모수도 부여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고, 부여는 고구려 문자명왕때까지 1천여년간 존속된 것이다.
고두막이 고리국왕의 아들로 태어 났다고 했는데, 그 당시 고리국은 흑룡강성 지역으로 지금의 부유현 지역이다. 그럼 단군조선 당시 고리국은 어디에 있었나?
[환단고기-북부여 상]에서 기록하기를 "(고두막)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골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을해 3년 (고두막)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 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을미 23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고두막)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동부여 왕)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의 상류에서 한구와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에서 고리국의 옛 지역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구려하는 고리하로 지금의 요하상류를 의미한다. 요하상류를 건너 요동(난하를 기준으로 동쪽지역)의 서안평 지역이 흑룡강지역으로 이주하기 이전의 고리국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뿌리를 단군조선에 두었던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수도로 삼았던 임황지역이 바로 단군조선 당시 고리국이 위치한 지역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대한민국을 세계인들이 KOREA라고 부르는데, 이 KOREA는 바로 단군조선의 봉후국의 이름으로 22대 색불루 단군천황부터 단군조선의 황통을 장악했고 이후 아시아와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경영했던 위대한 해모수.고두막.고추모.비류.온조.징기즈칸까지 배출한 위대한 황금족임을 알고 KOREA라는 국호에 자부심을 가지고 한반도를 넘어 대륙과 바다로 뻗어 나가 세계와 교류협력하여 인류중심민족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