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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 AD197년 고국천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산상왕(연우)은 형수 우씨와 결혼했다.

by 현상아 2016. 1. 24.

AD197년 고국천왕의 갑작스러운 죽음!

남편의 죽음을 숨긴 우씨 왕후는
궁을 나섰다.

고구려의 운명을 건 하룻밤의 거래!


그날 밤.
고구려의 역사가 바뀌었다!

                                 - 작가 고은희

 

 

                    

 

 

1. 사건 하나. - 고구려 왕자의 반란!

 

 

197년 고구려 국내성.

고구려 왕자(발기의 난)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동생에게 왕위를 빼았겼다고 했다.

"차례를 어기고 왕위를 찬탈한 것은 큰 죄악이다." 

 

"왕위를 찬탈했다." - <삼국사기>

 

그리고 한 여인을 배후로 지목했다.

"형수 우씨와 왕위에 오를 것을 공모했다." 

  

"형수 우씨와 공모했다." - <삼국사기>

 

왕자들의 형수 우씨.

그녀는 고구려의 왕비였다.

 

우씨 왕후는 왕을 능가하는 고구려의 지배자였다.

 

서기 197년.

고구려는 왕좌에 오르려는 두 왕자의 싸움으로 혼란에 빠진다.

 

형제간의 싸움은

결국은 적국이었던 한나라까지 개입하면서

국가적인 위기로 번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두 형제간의 싸움만은 아니었다.

두 형제 사이엔 한 여인이 있었다.

 

고구려의 왕비이자,

두 형제의 형수.

그녀는 왜 두 시동생의 싸움에 끼어든 것일까?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 통구 계곡.

 

고구려의 무덤 만 2천여 기가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고분군이다.

 

왕릉급 무덤이 즐비한 계곡의 끝자락.

환도산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고구려의 성이 있다.

 

환도산성(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자연 능선을 따라 돌을 층층히 쌓아올린 성벽이 7킬로에 달한다.

성의 뒤로는 가파른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흐르는 천혜의 요새였다.

 

"지금 보시는 것이 남옹문(南甕門)이라는 것입니다.

고구려 때 이 성에는 6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남옹문입니다.

이 성은 산 아래부터 위까지 사방을 둘러 벽을 쌓았는데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습니다.

바로 이곳이 입구입니다."

                                     -됴우 리칭 (환도산성 해설원)

 

고구려인들은 외부의 침입이 가능한 남문에

 'ㄷ자형'의 방어구조를 구축한다.

 

이는 유사시 삼면에서 적을 공격하는

고구려 특유의 방어전략이었다.

 

성벽은 기단부부터 돌을 조금씩 들여쌓아 안정성과 견고성을 높였다.

(들여쌓기 기법)

 

환도산성은

해발 600미터에 쌓은 고구려의 기술과 전략의 집약채였다.

 

<삼국사기>에는

이 성에 얽힌 한 여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녀는 우씨,

고구려 10대왕인 산상왕의 부인이다.

 

서기 234년 9월.

우씨는 임종을 맞고 있었다.

 

고구려의 왕후로

50여 년을 살았던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7년전에 죽은 남편 산상왕 곁에 묻히는 것이었다.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주시오."

 

우씨의 남편 산상왕은 누구일까?

 

환도산성 북쪽에 위치한 마선묘구(麻線墓區 626호묘) 지역.

 

너비 40미터,

높이 7미터의 산 중턱의 거대한 돌무덤이 있다.

 

이곳은 시신위에 돌을 쌓은 '돌무지무덤'으로 밝혀졌다.

우씨가 살았던 2~3세기 고구려 무덤 양식과 일치한다.

 

무덤의 가운데는

시신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되었다.

 

고구려 특유의 붉은기와, 철로 만든 못과 화살촉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규모와 부장품으로 보아 왕릉급 무덤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왕의 시호는 장지명이라고 해서

 무덤이 묻힌 곳의 지명을 따서 왕호를 붙이게 됩니다.

 예컨데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이런 식입니다.

 

 그중에 산산왕은 '산상'이라는 입지를 생각해볼때

 마선묘구 626호묘가 가장 유력한 산산왕 무덤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 임기환 교수(서울교대 사회교육과)

 

산 위에 무덤을 써서

'산상왕'이라는 시호가 붙은 왕.

 

축조 시기와 방법, 시호까지 일치해

마선묘구 626호는

산상왕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 위의 릉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산상왕이라 했다."

                                    - <삼국사기>

 

이 무덤엔 왕만 묻힌 것이 아니었다.

 

시신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흔적이 발견됐다.

 

이에 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그 유언대로 장사 지냈다."

                                       - <삼국사기>

 

우씨는 유언대로 남편곁에 묻힌 것이다.

 

왕후의 장례를 치룬 후 고구려엔 이상한 일이 생겼다.

한 혼령이 무당의 꿈에 나타나 우씨를 비난했다.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걸 보고는

 분을 참을 수 없어 마침내 우씨와 다투었다.

 

 내가 돌아와 생각하니

 낯이 아무리 두꺼워도 부끄러워

 차마 백성들을 대할 수 없구나"

 

그는 고국천왕(故國川王).

우씨의 남편인 산상왕의 형이었다.

 

고국천황이 왜 남편곁에 묻힌 우씨를 그토록 비난했던 것일까?

 

"이 책이 동국통감(東國通鑑)이군요."

 

"예. 이 책이 조선 초기 왕명으로 편찬된 관찬 역사서입니다.

 

 <동국통감>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부분과, 

 그 부분에 대한 논평을 싣고 있는데,

 여기 보면 우씨 부인에 대한 평가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위가 돼지보다도 심하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보면 '방자하게 행위하고 간음하였다'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 강문식 박사(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그것은 사상 최대의 스캔들이었다.

 

우씨는 한때 고국천왕의 부인이었다.

 

"고국천왕 2년(180년) 봄 2월에 왕비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고구려 9대왕 고국천왕과 결혼해

17년간 살았던 우씨.

 

그녀는 고국천왕이 사망하자,

차기왕인 산상왕(山上王)과 재혼했다.

 

우씨는 한 몸으로 두 번 국모가 된

역사상 유일한 여성이었다.

 

"한 몸으로

 두 번 국모가 되었다."

                                - <동국통감>

 

 

2. 사건 둘, 고국천왕의 개혁 정치!~

 

 

왕후가 차기왕과 재혼을 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사건엔 우리가 몰랐던 초기 고구려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있다.

 

고구려 두번째 수도이자,

가장 오래 수도였던,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현.

 

이곳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시내 곳곳에 걸린 한국어 간판.

1,800년이 지나도 남아있는 한민족의 흔적이다.

 

주택가 아파트 단지.

건물 사이에 거대한 성벽이 있다.

 

총 둘레 2,700미터의 거대한 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國內城)이다.

 

고구려 700년 역사중

400년이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서기 180년.

고국천왕은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그녀는 연나(椽那)라는 부족의 딸이었다.

 

우씨의 연나부는 어떤 부족이었을까?

 

초기 고구려는

연나부를 비롯한 다섯개의 부족이 함께 이끌어가는

'연맹체국가'였다.

 

관나부(貫那部)

비류부(沸流部)

연나부(椽那部) - 왕비족

계루부(桂婁部) - 왕족

환나부(桓那部)

 

이중 왕족 계루부는

주로 연나부의 여인들을 왕비를 맞았다.

 

두 부족은 일종의 공동 정권을 세우고 있었다.

 

"고구려는 초기 5부족 체제 유지했습니다.

  권력이 다섯개 부족에 공존하는 그런 형태였었는데

  차츰 왕족과 왕족의 파트너 역할을 하는 왕비족의 

  두 개의 부족으로 권력이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 김용만 소장(우리역사문화연구소)

 

고국천왕 당시 연나부의 힘은 막강했다.

 

이들은 왕후를 배경으로 권세를 누렸다.

나라의 부와 권력이 왕후의 가문에 집중됐다.

 

"남의 자녀를 데려갔다." - 삼국사기

 

"밭과 집을 빼앗았다." - 삼국사기

 

고국천왕은 분노했다.

연나부의 힘은 왕실의 힘을 능가하고 있었다.

 

왕은 연나부를 치기로 했다.

그러자 이를 눈치챈 연나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연나부가 반란을 꾀했다."  -  삼국사기

 

왕은 직접 군사를 몰고가 이들을 제압했다.

 

"고국천왕이 도성 부근의 군사를 동원해 평정했다." - 삼국사기

 

친정 가문의 갑작스런 몰락.

왕후 우씨에겐 위기였다.

 

반란을 진압한 고국천왕은

왕권을 강화할 근본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왕에겐 귀족 출신이 아닌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다.

왕은 파격적 인사를 단행한다.

 

압록강 서쪽에 사는 한 농부를 발탁한 것이다.

그가 을파소였다.

 

서압록곡 좌물촌의 을파소.

 

"왕후 우씨의 반란을 통해서

 고국천왕은 왕권강화의 필요를 느꼈을 것이고,

 참신한 인물 등용의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 금경숙 박사(동북아역사재단)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국상,

오늘날의 국무총리직에 임명했다.

 

"(을파소를) 국상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게 했다."    - 삼국사기

 

농부 출신으로 백성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을파소는

대대적인 민생안정책을 실시했다.

 

"관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진휼 대여했다." - 삼국사기

 

춘궁기에 관의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추수하여 갚게 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장제도, 진대법을 실시한다.

 

이는 가난한 백성들이 귀족들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아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사실상 계루부 단독 정권을 세우겠다는 뜻이었다.

 

귀족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을파소를 미워했다." - 삼국사기

 

"외척들을 견제하고,

 그동안 국내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커가고 있었던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금경숙 박사(동북아역사재단)

 

 

 2. 사건 둘. - 왕후 우씨. 새로운 국정 파트너를 찾다!

 

               “왕이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마땅히 뒤를 이어야한다. (王無後, 子宜嗣之)”   - <삼국사기 中〉

 

 

 

 

 

서기 197년 5월.

왕권 강화를 추진하던 고국천왕이 사망했다.

 

국가적 위기였다.

왕에겐 후계자가 없었다.

자칫 큰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왕은 아들이 없었다." - 삼국사기

 

왕후는 왕의 죽음을 비밀에 붙였다.

이날밤 그녀는 몰래 궁전을 빠져나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왕의 죽음을 감추고 발표하지 않았다." - 삼국사기

 

왕후는 왕의 국정 파트너로 권력의 한 축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전횡이 심해지고

왕이 이를 제압하자

왕후와 그 부족은 위기에 내몰렸다.

 

그런 의미에서 고국천왕의 죽음은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밤길에 나선 우씨.

과연 그녀는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중국 국내성 서쪽 1킬로에 위치하는 태왕(太王)진 민주(民主)마을.

 

이곳에서 고구려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됐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돌기둥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기둥의 높이는 3미터.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사다리 모양이다.

 

돌기둥 일대의 흙을 걷어내자

건물과 담을 짓기 위해 기초를 다진 흔적이 드러났다.

 

민주유적.

 

이 일대는 3,600평방미터의 세 개의 대형 건물이 있던 주거지였다.

이중으로 깍은 팔각 주춧돌도 발견되었다.

최고급 건물에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고구려의 주거형 건축은

 규모도 작고 온돌 하나만 있는 정도인데,

 

 회랑(回廊)으로 둘러져 있다든가

 띠 기초를 한 아주 정교한 집이라는 형태에 있어서는

 품격이 높은 규모의 집은 분명한데,

 

 그 용도에 있어서는 사찰이라든가,

 관청 건물이라는 추정들이 있습니다만,

 

 국내성 밖에 있다는 점,

 또 당시의 고구려 가람 배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일반 민가는 아니면서 품격이 높은 성 밖의 건물터로 보입니다."

                                                                          - 최종택 교수(고대 고고미술사학과)

 

이곳은 국내성 밖에 거주하던

왕족이나 귀족들의 거주지로 추정되고 있다.

 

197년 5월.

왕이 죽은 그날밤.

 

왕후는 성을 나와 귀족들의 거주지로 갔다.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났다.

 

"계시오. 왕께서는 아들이 없으니 당신이 그 뒤를 이어야 합니다."

 

왕후는 남자에게 왕위를 제의했다.

 

그의 이름은 발기(發기).

고국천왕의 동생이자 차기 왕위계승자였다.

 

"우씨 왕후는,

 왕의 죽음을,

 자신과 자신의 부족을 위한 운명의 갈림길로 생각을 하고,

 

 정치적인 대협상을 위해

 왕의 동생을 찾아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 김용만 소장(우리역사문화연구소)

 

우씨는 왕의 죽음을 숨긴 채

새로운 정권 수립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하늘의 운수는 다 돌아가는 방향이 정해져 있으니

가볍게 논할 수 없습니다."                                        - 삼국사기

 

어차피 왕위는 자신의 것이라는 뜻이었다.

 

"발기로 봤을 때는

 그 당시 당연히 왕위 계승 1위였으니,

 어차피 자신에게 왕위가 돌아올거니까,

 굳이 왕후와 정치적 협상을 할 필요가 없었겠죠."

                                                                      - 김현숙 박사(동북아역사재단)

 

그리고 치명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더구나 부인으로서 

 밤에 다니는 것을

 어찌 예의라 하겠습니까"

 

그것은 치욕이었다.

 

"왕후는 부끄러웠다." - 삼국사기

 

왕후는 상처만 안고 돌아서야 했다.

 

 

3. 사건 셋. - 남편이 죽은 그 밤. 시동생과 정혼하다.

  

 

“대왕께서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없습니다. (王無後,無子)”

 

                                                                                      - 〈삼국사기 中〉
   

 

 

무용총(舞踊塚) - 접객도.


고구려에서는

시종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나,

연우는 몸소 왕후를 대접했다


왕위를 댓가로 자신의 입지를 보장받으려고 했던 우씨.

 

그러나 시동생은 형수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을 뿐아니라

인간적인 모욕까지 주었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만약 발기가 왕위 운운하는 그녀를 문제 삼는다면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었다.

 

그날밤 왕후는 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갔다.

 

"발기가 큰동생으로 마땅히 왕위를 이어야겠으나

 그는 나에게 딴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오만하고 무례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주버님께 온 것입니다."

 

고국천왕에게는 세 명의 동생이 있었다.

 

아주버님.

그는 또 한 명의 시동생이었다.

 

왕위 계승권자 발기가 첫째 동생이었고,

 

왕후가 두번째로 찾아간 동생은

둘째 동생 연우(延優: 산상왕)였다.

 

이번엔 그녀도 승부수를 던졌다.

 

"대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 삼국사기

 

고국천왕의 죽음을 알린 것이다.

 

"발기는 이미 권력을 가지고 왕이 될 사람이었지만

 연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연우는 왕위 계승에서 밀렸고 힘이 없었고

 우씨와 손을 잡는 게 필연적임을 알리기 위해서

 우씨는 자기의 카드를 다 내보인 것이라 할 수 있죠."

                                                                           - 김용만 소장

 

연우의 태도는 발기와는 달랐다.

 

극진한 예를 갖추고

직접 고기를 썰어 형수를 대접했다.

 

"예절을 더욱 극진히 하여

 직접 칼을 잡고 고기를 베었다." - 삼국사기

 

그것은 파격이었다.

고구려 사회에서 이런 손님 접대는 하인들의 몫이었다.

우씨와의 협상에 응하겠다는 적극적 의사의 표현이었다.

 

무용총(舞踊塚) - 접객도.

 

익숙치 않은 일,

그는 손을 다쳤다.

 

이를 본 왕후의 행동은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왕후는 시동생 앞에서 치마끈을 풀었다.

그리고 그 끈으로 연우의 손가락을 감쌌다.

 

"왕후가 치마끈을 풀었다.

 치마끈으로 다친 손가락을 감쌌다."  - 삼국사기

 

"연우가 피를 흘렸다는 것은

 '피로 맺어진 동맹 관계',

 

끈으로 묶었다는 것은

'연우와 우씨는 이제 하나가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 김용만 소장

 

그날밤.

왕후 우씨는 시동생 연우와의 거래에 성공했다.

개인적이면서도 또한 역사적인 동맹의 시작이었다.

 

 

4. 사건 넷. - 고구려에는 형사 취수혼이 있었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한다’〈태평어람〉

 

우씨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연우와의 거래에 나서게 된다.

그날밤 이들은 사실상 정혼을 한 셈이다.

 

오늘날의 윤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패륜적인 행동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국내성 동쪽 17킬로 지점에 위치한 집안 태왕향(太王鄕) 상해방촌(上解放村).

이 마을 뒷산은 고구려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산 중턱 바위 지대에 자리잡은 동굴.

나라 동쪽에 있는 큰 동굴이라는 뜻을 가진 국동대혈(國東大穴)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제천행사 동맹이 열리는 매해 10월이면

이곳에 신상을 모셔다가 압록강변에다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인이 모신 신은 여신이었다.

 

"이것은 관음보살인데 사람들이 가정의 평화와 건강과 행복을 빌어요."

"왜 저 관음보살에 기도드리죠?"

"관음보살이 사람들을 보호하기 때문이죠. 신에게 보호를 구하는 거죠."

 

고구려 여신은 누구였을까?

 

중국의 사서

<주서(周書) - 북주열전(北周列傳)>에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구려 여신을

'하백의 딸'이라 적고 있다.

 

"나무로 부인상을 깍아 모시는 데 대개 하백의 딸이라고 했다." 

 

삼국사기는

하백(河伯)의 딸을 보다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그녀는 유화(柳花), 건국시조인 주몽의 어머니였다.

 

"유화부인은 부여의 금와왕의 부인이죠.

 주몽은 아들이고.

 그런데 주몽이 쫓겨가게 되잖습니까.

 유화부인이 도망가게 도와주고

 또 가서도 국가를 건설하는데 중요한 농경을 도와주고,

 그렇게 고구려 건국과 생산적 기반을 다져준 의미가 있기 때문에

 건국시조로 주몽과 더불어 유화부인을 같이 모셨습니다."

                                                                                 - 최광식 관장(국립중앙박물관)

 

장천 1호분 백희기악도.

 

여성이 수호신인 나라.

 

고구려의 여인들은

사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서 노는데

 신분이 귀하고 천한 것의 구분이 없었다."     - 북사

 

제천 의식이자 국가 축제이기도 했던 동맹이 열리면 남녀가 한데 어울렸다.

남녀 관계도 개방적이었다.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 교제했고

마음이 맞으면 결혼했다.

 

"혼인을 함에 있어서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바로 했다."                      - 북사

 

때로 여성이 관계를 주도하기도 했다.

 

"쌍용총 벽화에서 그런 모습이 보이는데

 부인이 절에 공양을 하러 갈 때 오히려 나서서 주도하는 모습이라든가,

 

 남녀의 차별도 없었고,

 남녀가 접촉하는데 있어서도

 어떤 규율이 있어 통제하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는 없었던 걸로 보입니다."

                                                              - 전호태 교수(울산대 역사문화학부)

 

삼실총(三室塚) 벽화

 

결혼 풍습도 간소하고 실용적이었다.

서로 재물이 오가는 것을 수치스러워해 간단한 잔치만 했다.

 

"혹시 재물을 받으면 모두 이를 부끄럽게 여겨

 딸을 노비로 팔아먹은 것이라 여겼다."              - 북사

 

 

요녕성(遼寧省) 도서관

 

결혼 이후에도 고구려의 여성들은 특별했다.

 

중국 송나라의 백과사전 <태평어람(太平御覽>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다.

 

"최초의 책이름은 태평총류(太平總類)였습니다.

 

 송나라 황제 태종이 매일 직접 봤다(御覽) 해서

 태평어람(太平御覽)이라 이름을 고쳤습니다.

 

 이 책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책들 가운데

 고대의 사료들이 가장 많이 수록된 책입니다."

                                                                   - 류빙 과장(요녕성 도서관 고서실)

 

<위략(魏略)>

고구려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을 담고 있다.

이곳에 고구려의 특별한 결혼 방식을 적고 있다.

 

"형이 죽으면(兄死)

 형수도 부인으로 맞아들인다(妻嫂)"

 

이른바 '형사취수제(兄死取嫂制)'다.

 

다른 역사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형사취수제는

고구려의 원류인 부여 시대부터 내려온 고대의 풍습이었다.

 

"(부여에서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처로 삼았다."

 

한나라와 치열히 싸우며 건국한 고구려.

많은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죽었고 미망인도 적지 않았다.

 

형사취수제는 미망인 아내와 남겨진 아이들을 위한

일종의 사회 보장 제도였다.

 

"미망인과 어린 자식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형사취수혼을 행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노태돈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그날밤 왕후 우씨는 고구려 사회가 여성에 허용한 보호 장치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당시 우씨가 시동생과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건

고구려에 '형사취수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동생 연우는,

우씨가 형사취수제를 통해 새롭게 찾아낸 국정 파트너였다.

그런데 그를 맞기 위해선 넘어야 할 관문이 있었다.

 

이제 궁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녀에게 적은 많고 시간은 짧았다.

 

"밤이 깊어 생각지 못한 일이 생길까 염려되니

 그대가 나를 대궐까지 데려다 주시오."                           - 삼국사기

 

"왕후는 연우의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갔다."                    - 삼국사기

 

두 사람의 연합은 이날밤부터 시작됐다.

 

다음날 새벽 우씨는 마침내 왕의 죽음을 알렸다.

 

그리고 고국천왕이 임종전

연우를 차기왕으로 임명했다고 공표했다.

 

우씨의 거짓말이었다.

 

"선왕의 유명(遺命)이라 거짓말했다."   - 삼국사기

 

뒤늦게 사실을 안 발기는 분노했다.

 

"형이 죽으면 아우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이 예의거늘

 네가 차례를 어기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큰 죄악이니 빨리 나오너라"

 

"왕위를 찬탈했다"    - 삼국사기

 

찬탈.

그것은 쿠데타였다.

 

발기는 사흘 동안 궁을 포위하고 왕위 계승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연우와 우씨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론마저 발기를 따르지 않았다.

 

"아무도 발기를 따르는 이가 없었다."      - 삼국사기

 

"국내의 다른 사람들은 아직 왕의 서거 소식을 모르고 있는 상태이죠.

 그런 상태에서 밤에 몰래 궁을 나와서 같이 연우와 궁궐로 들어갔기 때문에

 선왕의 유언이라고 해도 발기외에 다른 사람들은 알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 김현숙 박사(동북아역사재단)

 

 

5. 사건 다섯.

           발기의 복수 - '고구려의 적'과 손잡고 공격하다!

 

                                                 "내 동생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하여

                                왕위에 올라 천륜의 대의를 어겼습니다.   

                                     군사 3만 명을 빌려주십시오."                                         

                                                                                       - 삼국사기

 

 

발기는 고구려를 떠나 망명했다.

 

그가 찾아간 곳은 중국 요녕성 요양.

당시 요양은 한나라 요동군의 치소로 '양평'이라 불리고 있었다.

 

발기는 왜 이곳에 온 것일까?

 

2004년 요녕성 외곽에서 20여 기의 무덤들이 발견됐다.

무덤에선 수많은 인물 벽화가 출토됐다.

 

조사 결과 한나라 말기에서 삼국 시대 초기의 것으로 판명됐다.

무덤은 2~3세기경 이 지배층의 것이었다.

 

벽화의 주인공은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도 나오는

공손씨 가문이었다.

 

당시 공손씨의 수장은

하급 군인 출신으로 요동태수까지 오른

공손도(公孫度)라는 인물이었다.

 

"189년 삼국 시대가 막 시작되었을 때 그는 요양태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요동태수가 된 후, 지역에 파견된 다른 관리들을 쫓아내고 독립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요동 후(侯)'라고 여겼는데

 명의상 왕이라고 칭하지는 못했지만

 사실상 정권을 장악하고 왕 노릇을 했습니다."

                                                                  - 장융판 교수(심양사범대 중문계)

 

공손도는,

한나라가 망해

위, 촉, 오, 삼국으로 나뉘자,

 

요양에 자리를 잡고

사실상 독립 정권을 세웠다.

 

당시 이들은 요동 지역을 두고

고구려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발기는,

고구려의 적,

공손씨에게 망명한 것이다.

 

"내 동생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하여 왕위에 올라 천륜의 대의를 어겼습니다."

 

그는 공손도의 힘으로 왕위를 되찾으려고 했다.

 

"군사 3만 명을 빌려주십시오."   - 삼국사기

 

공손도에겐 숙적 고구려를 칠 절호의 기회였다.

그의 군대는 고구려의 왕자를 앞세우고 국내성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형수 우씨의 계략으로 시작된 왕위 계승은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요동의 강자인 공손씨와 손잡은 발기.

그는 조국으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이제 고구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중국 길림성(吉林省) 환인(桓仁)시.

 

사면이 모두 백미터 이상의 절벽으로 둘러싸인 철옹성이 있다.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인 오녀산성(五女山城,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건국 시조 주몽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험준한 산 위에 성을 쌓았다.

 

성을 감싸고 흐르는 혼강(渾江)

옛 이름은 비류수(沸流水)다.

 

고구려 다섯개 부족 중 비류부가 이 강을 기반으로 삼았다.

2세기말 비류수가에 손님이 찾아왔다.

요녕에 망명해 살아온 발기였다.

 

"(발기가) 비류수로 돌아와 살았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공손씨와 손을 잡아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나중에 이들이 비류수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왕실 세력이었던 발기

 비류수에 기반을 두고 있는 비류국 세력,

 또 소서노 세력하고 손을 잡았다 그런 의미로 말할 수 있습니다."

                                                                       - 임기환 교수(서울교대 사회교육과)

 

당시 발기에게 동조한 세력은 3만여 명에 이르렀다.

 

"(비류부의) 여러 장수와 백성 3만 여명"

 

마침내 발기는

공손도의 군대와 비류부의 연합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한다.

 

결과는 참패였다.

 

"한나라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   - 삼국사기

 

왕위에 눈이 멀어 고구려에 칼을 겨누었던 고구려의 왕자 발기.

그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다.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 삼국사기

 

 

 6. 사건 여섯. - 왕후 우씨. 두 번 왕후가 되다.

 

更作新國’(갱작신국)'

 

 

"(왕후 우씨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更作新國)" 

                  -  중국 사서인 <삼국지>



<삼국지 위지 동이전>

 

   

197년 9월.

마침내 우씨는 승리했다.

 

우씨의 도움으로

왕이 된 산상왕(연우)

다른 부인을 얻지 않고 형수 우씨와 결혼했다.

 

"우씨 때문에 왕위를 얻었으므로

 다시 장가 들지 않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 삼국사기

 

그렇게 우씨는 다시 고구려의 왕후가 되었다.

이후 고구려엔 큰 변화가 있었다.

 

즉위 다음해 산상왕은

환도성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환도산성의 중심부.

 

건물의 흔적이 발견됐다.

직경이 1미터에 달하는 돌들.

거대한 건물의 주춧돌로 확인됐다.

 

발굴 결과 이곳엔 네 개의 단에 대형 건물까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을 보면 네 단 정도로 경사를 이루면서 건물이 구상이 되어있습니다.

 한 단 정도의 건물의 길이가 백미터 이상  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그렇게 넓은  지역의 건물이 있었다면

 그것은 개인이 한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경영에 의해서 건물이 구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이병건 교수(동원대 실내건축과)

 

이 건물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왕궁이었다.

산상왕은 즉위 13년만에

이곳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산상왕 13년(209년)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 삼국사기

 

국내성을 떠나 이곳으로 궁을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궁성이 내려다보이는 산중턱.

 

이곳엔 병사들의 거주지가 확인됐다.

군대가 주둔했던 것이다.

막사 바로 앞엔 요망대(瞭望臺)가 있다.

일종의 망루인 이곳에선 국내성을 비롯한 집안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발 600미터 산 위에 위치한 환도산성은

감시와 방어가 용이한 천혜의 요새였다.

 

"환도산성이라고 하는 곳은 산성이기 때문에 방어력이 확보되기 때문에

 환도성으로 이주했다는 것은

 대외적인 정세의 위기속에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의미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 임기환 교수

 

왕후 우씨는 산상왕과 함께 환도산에 산성을 쌓았다.

그리고 8천 제곱미터에 이르는 대지에 궁궐과 사당을 지어 왕성을 세웠다.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왕성 앞에 망루를 세웠다.

 

환도산성은

외세의 침입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은 왕후가

고심끝에 마련한 고구려 방어 전략의 결정체였다.

 

이후 왕후는 왕실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왕후의 부족 연나부

우씨가 사망한 후 백년이 지나도록 왕후를 배출했다. 

 

"(연나부가) 대대로 왕과 혼인하였다."   - 삼국지

 

"우씨 왕후의 정치적인 행위로 인해서

 연나부왕비족으로서의 지위를 보다 오랫동안 유지합니다.

 

 그렇지만 우씨 왕후의 쿠데타로 인해서

 다른 부족들의 힘은 더 약화되었고

 고구려 5부족 체제가 서서히 해체되어가는 큰 계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용만 소장(우리역사문화연구소)

 

이후 고구려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

 

"다시 새 나라를 세웠다."   - 삼국지

 

왕후 우씨는 초기 고구려의 역동적인 역사를

자신만의 힘으로 헤쳐간 당당한 고구려의 여성이었다.

 

조선 시대의 역사서 <동사강목>.

우씨를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있다.

 

"완악하고 음탕하기가 고금천하에 이 한사람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의 윤리에 의한 평가일뿐이다.

고구려는 개방된 나라였고,

왕후의 행동은 당대의 관습과 규범을 벗어나지 않았다.

 

고구려 왕후 우씨.

그녀는 자신의 방식으로 반세기 동안 고구려를 이끈 '철의 여인'이었다.

 

 

출처 : 내마음의 보석상자(上善若水/木鷄之德)
글쓴이 : 대륙철도횡단열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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