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Pyramid)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
designtimesp=14359 designtimesp=12265> 권2에 있다. 그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 °30 '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 t의 돌을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진정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한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 ‘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이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카프라왕의 제2피라미드가 있다. 높이 136 m, 밑변 216 m,
동쪽에 있는 장제신전에 450 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엎드려 있다. 기자에는
그 밖에 멘카우레왕의 제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소(小)피라미드 6기가 있다.
2.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Pharos)
등대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던 1㎞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세계의 모든 등대의 원조격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된 등대의 높이가 135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졌다. 맨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다. 각 층은 모두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지어졌다(기울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음). 등대 안쪽에는 나선형의 길이 있어서 등대 꼭대기의 옥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아마도 알렉산드 대왕이나 태양신 헬리오스의 모양을 본떴을 것으로 여기지고 있다.
등대 꼭대기의 전망대에서는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고 또 먼 본토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c이후 이집트를
정복했던 아랍인들에 따르면 램프 뒤쪽의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43㎞정도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고, 맑은 날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반사경이 비쳤으며 또 햇빛을 반사시키면 160㎞ 정도 떨어져 있는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B.C280년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등대에 불을 지폈을까?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3.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세미라미스 공중 정원(Hanging
Garden)
BC 500년경 신(新)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티스를 위하여 수도인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다.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있다는 뜻이다. 지구라트에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露臺)에, 성토하여 풀과 꽃, 수목을 심어놓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고 한다. 유프라테스 강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물을 댔다고 전해진다.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왕비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서 공중 정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 왕국의 키약사레스 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하여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기로 결심했다.왕의 명령을 받은 재주가 뛰어난
건축가, 기술자, 미장이들은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세로 각각 400m, 높이 15m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맨 위층의 평면 면적은 60㎡에 불과했지만 총 높이가 105m로 오늘날의 30층 빌딩 정도의 높이었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 꽃이랑 덩굴초랑 과일 나무를 많이 심도록
한 이 파라미드형의 정원은 마치 아름다운 녹색의 깔개를 걸어놓은 듯이 보였다.그런데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는 방을 많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 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공중 정원에 대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바빌론의 페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있다.
4. 에페수스(Ephesus)의 Artemis
신전
에페수스 시는 소아시아에 있는 고대 이오니아 지방의 열두 개 도시 중 하나로서 B.C 6세기 경에 이미 서아시에서 상업의 요충지로 번영하여
가중 부유한 도시로 알려졌다. 이 곳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아르테미스 신전이다.이 신전은 당시 최고 부자였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B.C 560∼B.C 546)때 세우기 시작하였다. 높이 20미터 정도의 훌륭한 이오니아풍의 백색 대리석 기둥을 127개나 사용한 이
신전은 완성되기 까지 120년이 걸렸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에페수스를 방문하여 이 신전을 돌아보고는, 기자에 있는 피리미드에도 떨어지지 않는 걸작으로 묘사하면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에페수스를 방문한 지 1세기 정도 지난 뒤 그 훌륭하고 아름다운 신전은 어리석은 한 인간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B.C 356. 10월 "어차피 나쁜 일을 하려면 후세에까지 알려질 수 있는 악행을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한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자가 신전을 계획적으로 불태워 버린 것이다.
그 후 디노크라테스가 불타 버린 신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에페수스의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을 팔았고, 왕들은
크로이소스 왕을 본받아 기둥을 기증하기도 했다. 더욱이 아시아 원정 길에 올랐던 알렉산더 대왕은 한층 완성중에 있던 아르테미스 신전의 장대함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았겨 "만일 에페수스인이 이 신전을 나의 이름으로 세워준다면 모든 비용을 내가 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페수스인들은 다른 나라의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야심이 강한 에페수스인들은 자신들의 신전을 지금까지 어떤 신전보다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여, 그 당시 가장 훌륭했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파르테논은 길이가 69m. 폭이 30m, 높이 10정도로서, 대리석
기둥을 58개나 사용한 신전이었다. 에페수스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정도의 규모로 만들기 시작했다. 높이 18m짜리
기둥을 127개나 사용했고, 길이는 120m, 폭은 60m로 했다. 또한 신전의 건축용 자재는 가장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중앙의
넓은 홀에는 네 방향으로 대리석 계단을 딛고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그 규모나 화려함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
5. 올림피아의 제우스(Zeus) 신상(神像)
제우스 상이 있는 올림피아는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 앨리스 지방에 있는 제우스의 신역으로서 완만한
구릉 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곳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로 예부터 잘 알려져 있다.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를 믿었다.
제우스는 고대 로마의 최고의 신 '주피터'와 같이 고대 그리스 신 가운데 최고의 신으로 천둥, 번개와 비바람을 만드는 신이며, 그의 주 무기는
벼락이었다. 제우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신이며,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도시마다 제우스 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고대 그리스에는 아테네, 스파르타, 앨리스 등의 도시 국가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처음에는 땅의 신 크로노스와 여신 헤라를 숭배했지만 뒤에 제우스 신을 숭배하게 되어서 B.C457년에 제우스 신전을
만들었고 그 안에 '피디아스'가 만든 제우스 상을 안치하였다.제우스 신상과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네 여신상은 피디아스의 2대 걸작품으로 꼽힌다.
피디아스는 8년여의 작업 끝에 제우스 상을 완성했는데, 그는 제우스의 신성함 위엄과 함께 너그러움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해냈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걸작 중의 걸작 제우스 상은 오늘날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대지 위에 우뚝 세워진 신전에는 양옆에 열세 개씩, 양끝에 여섯 개씩 장엄하고 무거운 도리아식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완만하게 기울어진
지붕이 덮여 있다. 이 신전의 한가운데 있는 제우스 상은 높이가 90㎝, 폭이 6.6m인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12m 정도 되는
상은 거의 천장을 닿고 있다.제우스 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그 위에 보석과 흑단, 상아를 박아 장식한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금으로
된 발 디딤대에 올려져 있는 양다리는 거의 예배자의 눈높이와 일치하였다. 오른손에는 금과 상아로 만든 승리의 여신(Nike)상을 떠받치고 있으며
왼손에는 황금을 박아 장식한 지팡이(왕홀)를 쥐고 있다. 지팡이 위에는 매가 앉아 있다. 상아로 만들어진 어깨에는 꽃과 동물이 새겨진 황금의
아름다운 망토가 걸쳐져 있다.
제우스 신전의 발굴 움직임이 18세기 경부터 일어났고 처음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1829년 프랑스인이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메도프, 기둥, 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1875년경에 독일 정부의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의해
올림피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1950년대 제우스 신전 터에서 피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6.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의 마우솔러스 영묘(靈廟) -
Mausoleum
페르시아 제국 카리아의 총독 마우솔로스를 위하여 그리스의 할리카르나소스에 건조된 장려한 무덤기념물이다.면적
29×35.6 m, 높이 50 m. 할리카르나소스의 묘묘(墓廟)라고도 한다. 마우솔로스의 생전에 착공되었으나, 그가 죽은 뒤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계속 진행하였으나 완성된 시기는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죽은(BC 350) 뒤로 추측된다.설계는 사티로스와 피테오스가 하였다. 동서남북의 장식조각은
각각 스코파스, 레오카레스, 티모테오스, 브리아크시스가 담당하였다.각 면의 조각·프리즈는 발굴되어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또,
로마인은 비슷한 대규모의 분묘건축(墳墓建築)도 마우솔레움이라고 일컬었다. 마우솔레움은 그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다.
7. Rhodes항구의 크로이소스 거상(巨像) -
Colossus
거상(巨像). 그리스어 콜로소스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이집트 기자의 스핑크스 등을 보고나서 칭한 말이 그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시대에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로도스섬의 콜로서스이다.로도스 항구에 서 있던 태양신 <헬리오스 청동상>은 높이가 36
m나 되었으며, 린도스(로도스 섬 동쪽에 있던 고대 도시의 이름)의 카리오스에 의해 BC 280년경 건조되었는데 BC 224년의 지진 때
붕괴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현존하는 것도 많으나 모두 기념비적인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이밖에 잘 알려지지 7대 불가사의
1. 이집트의 피라미드
2. 로마의 원형극장(콜로세움)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콜로세움이란 이름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또
하나는 경기장 옆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의 설이
유력하다.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을
만들었던 자리에 착공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80년) 때 완공하였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거대한 바위 축대위에
축조되었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하 도록 설계되었다.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다.콜로세움은 최대 지름188 m, 최소 지름 156 m, 둘레 527 m, 높이 57 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1층은 토스카나 식, 2층은 이오니아 식, 3층은 코린트 식의 둥근기둥으로 각각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4층을 제외하고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는 아치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조상(彫像)이 놓여 있다.내부는 긴지름 86m, 짧은지름
54m의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는데 지하의 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다. 이 경기장은 지하의 대기실 및 천막 지붕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곳에서는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즐겨 행해졌으며, 심지어는 장내에 물을 채워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등도 벌였다. 제정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신도가 이 콜롯세움에서 야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콜로세움은 완공된 이래 300여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계속 벌어지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마침내 처참한 역사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그 후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데 재료로 쓰이기도 해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다.그러다가 18세기 경 교황의
명에 따라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3. 영국의 거석기념물(巨石紀念物, 스톤헨지)
세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환상열석(環狀列石)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조물의 하나인 스톤헨지(StoneHenge)는 영국 남부
솔즈베리 평야(Salisbury Plain)에 위치하며, 고대 영어로 '공중에 걸쳐 있는 돌'이라는 의미이다.천년전 이 곳엔 초기 석기시대
사람들이 정착했었다.그렇지만 그들은 별 흔적을 남기진 않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적들은 청동기인들의 업적이다.스톤헨지의 건조가 착수된 것은
기원전 2800년경이며, 우리가 보고 있는 형태로 완성된 것은 기원전 156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톤헨지는 원형(圓形)의 유적으로 각각의 거석들은 모두 한 중심점을 향해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바깥 도랑과 둑, 네모꼴 광장과
방향표시석인 힐스톤, 돌기둥을 세워 놓은 입석군(立石群), 중앙 석조물 등으로 이루어졌다.기원전 2100년경 스톤헨지로부터 자그마치 385km나
떨어진 웨일즈 남서부의 프레슬리산에서 청석(blue stone)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져 왔는데, 최고 5톤까지 나가는 이 돌들을 옮기는 일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썰매나 뗏목을 이용해 육로와 해상을 번갈아 가며 운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스톤헨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방향표시석 힐스톤은 동쪽을
가리키는데, 그것도 하지(夏至)에 해가 뜨는 방향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하지날 힐스톤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해가 떠올라 중앙제단을 비췄던 시기는
천문학적으로 BC 1840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그리고 힐스톤을 세운 시기를 과학적으로 측정한 연대와도 맞아 떨어져 기묘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건축자들이 상당한 천문학적 지식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래서 파종과 수확의 시기를 완전히 파악하고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환상열석 중심축에서 30m를 벗어난 자리에는「사르센 원」이라고 불리는 둥근 띠가 있다.사르센 원을 따라 가면 두개의 커다란 돌을 세워
놓고 그 위에 또 다른 돌을 눕혀 놓은 삼석탑(三石塔)을 만난다.돌 한개의 무게는 25t에서 최고 50t까지 나간다. 기중기와 같은 기구가 없던
당시에 50t 무게의 돌을 어떻게 운반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여전히 남는다.학자들은 지레 받침대와 밧줄을 이용해 돌을 움직였을 것이라고 과학적인
추측을 할 뿐이다.
4. 이탈리아의 피사 사탑(斜塔)
이탈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피사 대성당(Duomo di Pisa)의 부속건물(대성당, 세례당, 종탑)중 3번째이며 마지막 구조물로써, 중세 도시국가 피사가
팔레르모 해전에서 사라센 함대에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위해 세워진 종탑이다.흰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꼭대기 종루를 포함해 8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높이는 55.8m, 무게는 14,500t 이나 된다.탑내부는 나선형으로 된 294개의 계단을 통해 종루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종루에는 각각 다른 음계를 가진 7개의 종이 걸려있다.1174년에 착공된 피사의 사탑은 이탈리아 천재건축가 보라노 피사논의 설계도에따라
탑을 만들어가던 중, 3층까지 쌓아올렸을 때 공사관계자들은 지반 한쪽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책임 기술자였던 보나노 피사노는 기울어진
모양을 보정하기 위해 새로 층을 올릴 때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더 높게 만들었으나, 추가된 석재의 무게로 건물은 더욱 가라앉게 되었다.기술자들이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몇 번씩 공사를 중단했으나 결국 1350년에 맨 꼭대기층이 기울어진 채 완성되었다.
물론 건축당시부터 의도적으로 기울어진 탑을 세운것은 아니다.1년에 1mm정도 기울어지는 미세한 자연 현상이 누적되다보니 오늘날과 같이 탑의
꼭대기가 수직선에서 무려 5m나 기울어졌다.현재는 탑의 기울기가 멈춘 상태다. 최근 영국 런던대학의 토질 기계학과 존 부를랜드 교수는 "피사의
사탑은 이제 기우는 것은 멈췄다. 이는 지난 7세기만에 이룩한 개가"라고 말했다.사탑이 이처럼 위태로운 상태에서도 수천년 동안 용케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5. 이스탄불의 성(聖)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이스탄불(현재 터키의 수도이며 이슬람이 많은도시라는 뜻)이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6세기에
건조되었다.비잔틴 문화의 최고 건축물로써 아야 소피아(Aya Sophia)라는 현지어로 불리며 현재 소피아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현재의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532~537년)으로 세계의 교회 중 4번째(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울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로 크며, 현존하는 교회 중 가장 오래됐다.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의 작은 교회로 지어졌으나, 404년 알카디우스 황제 때 화재로 무너졌으며 그 후 데오도시우스 2세 때 두
번째 성 소피아 대성당이 완공(415년)되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일어난'니카의 반란'으로 다시 파괴되었다.니카의 반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황비인
데오도라(이집트 출신의 댄서) 때문에 생긴 반란이었다.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그러나 그녀가 천민
출신이라는 것과 이집트에서는 그리스도의 단성론(콘스탄티노플에서는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하느님 자신이라는 양성론을 채택했다)을 믿는다는 것을 빌미로 히포드롬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 반란군의 기세에 눌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난을 피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려 했으나 그를 데오도라가 저지했다.다음 순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히포드롬에서 농성하는 반란군을 단숨에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제2차 소피아 성당이 파괴되었으며, 그 잔해 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황제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에 걸맞는 새로운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수학자 이시도르를 투입하였다.건축을 시작한 후 5년
10개월 만인537년에 소피아 성당은 마침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6. 중국의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으로써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약
6,400㎞(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다.춘추시대 제(齊)가
영토방위를 위햐여 국경에 쌓은 것이 장성의 기원이며 전국시대의 여러나라도 이에 따랐다.
진(秦) 시황제(始皇帝)는 중국 통일(BC 221) 후 흉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간쑤성(甘肅省) 남부로부터 북으로, 황하강(黃河江)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둥베이(東北) 지구의 랴오허강(遼河) 하류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는데, 절반 이상은 전국시대의
연(燕)·조(趙) 등이 쌓은 장성을 이용한 것이었다.근년에 이 장성의 동부 유지(遺址)가 둥베이지구에서 발견되고 있다.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흉노로부터 지키려고 장성을 란저우(蘭州) 북방에서 서쪽으로 둔황(敦煌) 서편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하였다.
남북조시대에는 북방민족의 활동으로 장성 위치는 남하하여, 6세기 중엽 북제(北齊)는 다퉁(大同) 북서에서 쥐융관(居庸關)을 거쳐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장성을 축성하였다.수(隋)는 돌궐·거란 방비를 위하여 오르도스(내몽골자치구의 중남부) 남쪽에 장성을
쌓았다.당대(唐代)에 들어서 북쪽까지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고,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明)나라시대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관광 대상이 되고 있는 바다링〔八達嶺〕 근처의 장성은 높이 8.5m, 두께는 밑부분 6.5m, 윗부분 5.7m이며, 위에는 높이
1.7m의 연속된 철자형(凸字形) 담인 성가퀴(城堞)를 만들고 총안(銃眼)을 냈고, 120m 간격으로 돈대(墩臺)를 만들어 군사의 주둔과 감시에
이용하였다.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본토와 만주·몽골 지역을 나누는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7.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그 밖에 L.코트렐이 말한 7대
불가사의
1. 크레타섬의 미노스 궁전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와 트로이센 공주 아이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테세우스는 트로이센에서 자랐다. 아버지인 아이게우스는 아이트라에게 테세우스가 자라서 큰
바위를 들어내고 그 아래 감춰 둔 칼과 구두를 꺼낼 수 있을 만큼 장성한 후에 자기에게 보내라고 했다. 테세우스가 장성한 후 아이트라는 아들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테세우스는 그 큰 바위를 간단히 들어내고 칼과 구두를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 긴 여정을
떠났다. 테세우스는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아테네에 도착했다.
당시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의 부인은 마법사인 메데이아였는데 그녀는 마법으로 이 청년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테세우스를 제거하기 위하여 독이 든
술을 권했다. 테세우스가 왕의 앞에 나가 독이 든 술잔을 받아 마시려는 순간 아이게우스는 청년의 칼과 구두를 보고 자기 자식임을 눈치챘다.
그리고는 그 술잔을 쳐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메데이아는 자신의 소행이 탄로날까 두려워 아시아로 도망을 갔고 테세우스는 친자 인정을 받아
왕위계승자로 결정되었다.
당시 아테네에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당시 강국이었던 크레타의 왕 미노스가 청년과 처녀들을 각각 7명씩
산제물로 바치라는 요구를 해 온 것이었다.
미노스는 몸은 인간이고 머리는 황소인 미노타우로스에게 젊은 남녀를 먹이로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동물은 힘이 장사에다 성질이
난폭해서 특수 설계한 미궁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 이 궁전이 미노스 궁전 혹은 크노소스 궁전이라는 것이다. 테세우스는 이런 재앙으로부터 백성을
구하기 위해 제물의 한명으로 자원해서 이 괴물을 처치하기로 마음먹었다.케세우스는 출항 전 아버지와 약속을 했다. 만일 성공하면 검은 돛 대신 흰
돛을 배에 달고 돌아오기로 말이다. 크레타에 도착한 일행은 미노스 앞에 끌려 갔다.
이 때 미노스의 딸인 아리아드네는 일행 중에 끼어 있는 테세우스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다. 아이아드네는 미궁의 비밀을 귀띔해
주면서 칼 한 자루와 실 타래를 주었다. 테세우스는 실 타래를 풀면서 미궁 안으로 들어가 괴물을 죽인 후 다시 실 타래를 따라 무사히 빠져
나왔다. 테세우스는 배를 타고 아테네로 돌아오면서 흰 돛을 단다는 것을 깜빡 잊어 버렸다. 이것을 멀리서 본 아이게우스는 아들이 죽은 줄로 알고
자결하고 말았다.이것이 궁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재로 그것이 발견되지 않아서 아무도 그 존재여부를 알지 못하였다. 트로이를 발굴하고 미케네,
티린스를 발굴한 독일의 쉴리만은 현지 총독과 협상하여 발굴권을 겨우 얻어냈다. 궁전이 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지주와 흥정을 했다. 지주는
2500그루의 올리브 나무 가격을 받아야 한다며 10만 프랑을 요구했다. 결국 4만프랑에 합의를 하고 현장 조사를 하던 중 나무가 888그루밖에
되지 않자 쉴리만은 화가 나서 발굴작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10여년 후 영국인 아서 에반스(Arthur Evans)가 상형문자 해석에 관한 그의 이론을 확인하고 위해서 크레타 섬에 오게 되었다.
그는 쉴리만이 했던 것처럼 올리브 나무가 있는 곳을 궁전의 위치라고 생각했다. 올리브 나무가 있던 지역은 크레타의 수도 헤라크 레이온(혹은
이라크 레이온)에서 5km 남쪽으로 떨어진 곳이었다. 에반스는 신화에서처럼 크레타에 반드시 미노스의 크노소스 궁전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발굴에 착수했다.발굴을 시작한 후, 거대한 궁전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방이 1천개가 넘는 궁전은 3~4층으로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각방은 층계를 통해 각 층을 연결하고 있었다. 크노소스 궁전은 다이달로스가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공주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에게
알려준 미궁 탈출 방법도 그가 알려준 것이라 한다.
궁전 안에는 수도 설비가 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하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각 방의 밝기는 광정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와
건물 내부를 밝혔다. 이 광정은 지붕에서 바닥까지 수직으로 관통하는 공간인데 이것이 건물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그들의 건축술이 고도로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방과 복도의 벽에는 화려한 프레스코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장난치며 물 속을 헤엄치는 돌고래들, 젊은
청년과 머리를 길게 땋은 젊은 여인들의 행렬, 돌진하는 황소와 곡예사들 등이 벽화를 장식하고 있다. 궁전 안에는 거대한 꽃병들이 발견되었는데
꽃병에는 문어가 한 마리씩 그려져 볼록한 꽃병의 윤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또 궁전 곳곳에서 라비린토스(lavyrinthos)라고 부르는
'쌍날도끼'가 발굴되었다.
이 쌍날 도끼는 일종의 종교 의식의 상징으로 많이 이용된 것으로 보이며 악귀를 쫓는다든지 제사를 지낼 때 소를 잡아 받치는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하에는 커다란 항아리들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창고였던 것 같다. 이 항아리 모두에 올리브 기름을 채운다면
19,000갤론 정도로 엄청난 양이 된다. 이 곳에서는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옥좌가 발굴되었다. 신하들이 앉는 긴 의자 사이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자 몸에 독수리 머리와 날개의 괴물인 그리핀 두 마리가 새겨져 있는 옥좌이다.
아직도 의문인 것은 크노소스 궁전과 화려하던 미노아 문명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가이다. 외부의 침입자에 의해 파괴되었는지, 아니면 지진
등 자연적인 재해에 의한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궁전을 발굴해 낸 에반스는 궁전의 방에서 갑작스런 재해의 증거를 발견했다. 연장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완성되지 못한 예술 작품, 가사 도구가 그대로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크레타가 유럽에서 지진 활동이 많은 지역이라는 점이
재해에 의한 멸망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에반스도 강도 높은 지진만이 크노소스 궁전을 파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후 많은 학자들은
에반스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2. 테베·네크로폴리스(묘지)
이집트의 룩소르에는 왕들의 무덤인 왕가의 계곡이 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무덤이 있는 귀족들의 무덤인 네크로폴리스가
그것이다. 어떤 이들은 왕가의 계곡보다 귀족들의 묘인 네크로폴리스가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고 얘기한다.네크로폴리스는 왕가의 계곡보다는 그
유명세가 덜한게 사실이다. 왕족들보다는 한단계 아래 계급인 귀족들의 무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덤의 크기나 형태로 보면 결코 왕가의 계곡
무덤들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 무덤들은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의 묘와는 다르게 벽화나 조각이 무수하게 많으며 그림도 상당한 수준이다. 학자들은
이 귀족들의 무덤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이 무덤들 가운데 라후미라의 묘를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라후미라는 기원전 1502년부터 1448년까지 제 18왕조 토우토메스 3세
때의 재상을 지낸 사람이다. 그의 무덤은 다른 것보다 훨씬 크고 훌륭한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토우토메스 3세는 싸움에 능한 왕으로 전쟁을
즐겼으며 라후미라는 그 빈자리를 지키면서 여러 나라로부터 공물을 받아 관리하고 정리하였다.라후미라의 벽화를 보면 외국 사신으로부터 공물을 받는
그림이 몇 개 있으며, 수단 지방의 흑인종인 누비아인이 상아나 기린, 원숭이 그 밖의 아프리카 산물을 운반하는 장면도 있다.
또 시리아 인이 파라오에게 물품을 전달하는 그림도 있다. 미노아 시대의 크레타 섬에서 온 인물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그림들은 미노아 궁전
안의 그림과 비슷한 점이 많다. 가령 미니 스커트를 입은 모습이나 헤어스타일 그리고 술잔을 든 인물처럼 아주 품위 있는 모습이다. 또한 미노아
특산의 항아리와 손잡이가 있는 술잔 그리고 은제 황소 머리상을 나르는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들은 점령국가의 지배시민이 아닌 크레타
시대의 상인으로 나일 강을 거슬러 룩소르까지 올라오기도 했었다.
라후미라의 묘에는 파티의 흥겨운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의 아내인 메리트가 정장을 하고 자랑스럽게 남편 옆에 서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다.
또 다른 부분에서는 여성 악사들이 하프, 리라, 탬 버린 등을 들고 풍악을 울리는 모습도 있다. 초대된 손님들은 남녀구분없이 아주 흥겨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남부 테베(현재 룩소르)의 장관이었던 센네펠의 무덤도 여기에 있다. 그는 농업과 축산에 관련된 일을 맡아
보았는데 그의 묘의 천장에는 포도잎과 늘어진 포도송이가 그려져 있어 그의 생전의 직업을 연상할 수 있다.
또 하르에포의 묘에는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들도 남아 있다. 하르에프는 고대 이집트 18왕조 왕이었던 아멘헤테프 3세의 왕비였던 티이의 궁내
시종 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려져 있는 벽화는 왕비 티이와 여신 하트홀을 동반한 아멘헤테프 3세가 그들 부부를 칭송하는 춤을 관람하고
있는 장면이다. 파라오의 전답을 관장했던 멘나의 묘에는 파피루스 풀로 만든 배를 타고 호수에서 여가를 즐기는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른손에 투창을 들고 하늘을 향해서 날아오르는 오리를 겨누고 있는 모습이다.
네크로폴리스에는 라후미라, 센네펠, 하르에프, 멘나 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그려져 있다. 학자들은 이것을 서민적인
특징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벽화에 쓰인 물감은 눈부신 광택을 가지고 있으며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어떻게 몇쳔년 전의 그림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3. 왕가(王家)의 계곡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500km떨어진 곳에 룩소르라는 관광지가 있다.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 테베의 남쪽 교외에 해당한다.
왕가의 계곡은 나일강 서안의 메마른 계곡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곳에는 아멘호테프 4세가 중부 이집트의 텔엘아마르나에 천도해 있던 시기를
제외하고 신왕국 제 18왕조(기원전 1400년경) 투트메스(Thutmose) 1세에서 제20왕조 람세스(Ramses) 11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왕의 암굴묘가 세워져 있다. 표고 450m의 알쿠른 바위산이 파라미드 형상을 한 산과 태양이 지는 나일강 서안은 죽은 왕의 매장지로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대에는 타이네트(골짜기), 타세트아아트(위대한 장소)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와디알무르크(왕들의 계곡)라 불리고
있다.
왕들의 계곡은 동서로 갈리어져 있으며, 지금까지 약 60여기의 묘와 20여개의 피트(지면에서 곧게 내리 판 굴)가 발견되었다. 1922년
투탕카멘(Tutankhamen)의 묘가 발견된 이후 새로운 묘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새로운 묘를 찾기 위한 발굴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들은 모두 신왕국 때의 것으로, 왕들의 묘는 험한 바위산을 파고 낭떠러지의 중턱이나 아랫 부분을 파낸 곳에
세워졌다. 그리고 왕묘에 대해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공사에 참여했던 인부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이 묘들은 일반적으로 계단과 경사로로 구성되는
하강 통로, 여러 개의 부속실, 전실, 현실로 이루어져 있다. 제 18대 왕조 시대에는 묘의 통로가 도중에 지각으로 구부러지는 직각형이 전형적인
형태였다.
제 18왕조인 이크나톤(Ikhnaton) 왕은 도읍을 아마르나로 옮겼고 그 곳의 묘는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구조는 빛의 직진성과
관련되어 태양신을 숭배하던 당시 사회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왕묘는 계속 왕가의 계곡에 세워지게 되었다. 제 18왕조 말의
호르멤헤브(Hormemheb) 왕묘 이래로 묘의 구조는 직선형으로 변해갔다. 또 제 20왕조의 람세스 4세 이후는 거대한 입구를 가지게
되었다.1881년 7월, 텔엘바하리의 남쪽 낭떠러지에서 구멍 뚫린 샤프트 묘에서 놀라운 대발견이 있었다. 그 곳에는 금속기나 석제 그릇,
샤프트상 등을 비롯하여 5900점의 부장품과 50구가 넘는 미라가 발견된 것이다. 이 묘는 제 21왕조의 파누젬 2세와 그 가족을 매장하기
위하여 준비된 것으로 드러났다. 매장 후에 제 22왕조 세숑크(Sheshonk) 1세 때 신왕국 시대의 왕과 왕비 미라가 운반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텔엘바하리의 묘를 발견하게 된 것은 한 도굴범의 정보 제공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그의 진술에 따르면 1870년대 초에 이 곳을 발견하여
골동품을 팔아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많은 부장품이 나돌자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그는 더 이상의 도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경찰에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다.그로부터 17년 후인 1898년, 프랑스의 한 학자에 의해 왕가의 계곡에서 아멘호테프 2세의 묘가 발견되었다. 그 곳은
입구가 대량의 모래와 자갈에 의해 완전히 매몰되어 비교적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11구의 미라가 발견되었고 그 중에 8개가 왕의
미라임이 밝혀졌다.
이렇게 텔엘바하리와 왕가의 계곡에서 2군데의 왕의 미라를 숨겨 놓은 곳이 발견되었다. 왜 이 왕들의 미라는 자신의 묘가 아닌 다른 곳에
숨겨졌을까?
신왕국 시대 말기에 왕가의 계곡에서 도굴이 성행하게 되어 많은 왕의 미라가 손상을 입었다. 이 사태를 우려한 아멘
대사제가 안전한 다른 장소로 이송했다고 알려져 있다. 즉, 도굴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묻혀 있던
수많은 부장품과 금으로 도금한 관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아멘 신관단이 왕의 미라를 옮기면서 부장품을 약탈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합법적인(?) 도굴로 얻은 금은 보화는 아멘 대사제를 중심으로 하는 테베 정권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왕의 유체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그들의 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즉, 겉과 속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벌인 일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왕들의 미라는 모두 33구이다. 그 중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거나 확정되지 않은 것은 13구의 미라이다. 그렇다면 또다른
은신처에 이 13구가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2군데의 은신처에서 발견된 왕들의 미라를 안장한 목관이나 미라를 쓴 포대에는 미라가 여러
은신처로 이동, 운반되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호르멤헤브 왕묘에는 왕의 미라가 다른 장소로 운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제18왕조
말기에서 제19왕조 초기의 왕들의 미라는 발견되지 않은 제3의 은신처에 있을 확률이 높다. 앞으로의 발굴에서 새로운 왕묘를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5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집트는 이미 기원전 3500년, 부족 국가들이 탄생을 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300년 경에 최초의
통일 국가인 제1왕조가 세워졌다. 이 때부터 약 2500년동안 26개의 왕조가 생겨났는데 제 10왕조까지를 고왕국, 제17왕조까지를 중왕국, 그
이후를 신왕국이라 부른다.
4. 시리아의 팔미라 고도(古都)
사막
위에 솟아오른 환상의 도시 팔미라. 시리아의 동부 사막지대 한복판에 세워진 대도시 팔미라는 흔히 사막의 궁전으로 불리며,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과 경이로 채워준다. 팔미라는 동서를 잇는 교역도시였으며 그로 인해 사방에서 유입되는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특유의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팔미라가 있는 곳은 유프라테스강과 다마스쿠스 사이의 광할한 사막지대 안에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다. 오늘도 이곳의
에프카(Efqa)샘에서는 맑은 물이 솟아나 일대를 풍요롭게 적셔주고 있다. 이 곳은 10m이상되는 아쟈나무들이 큰 숲을 이뤄 주변의 사막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원래 이 곳 지명의 이름도 타드몰(Tadmor : 고대 셈족어로 야자수)이었다.
팔미라는 동쪽의 페르시아 만과 이란, 서쪽의 지중해를 잇는 동서 무역의 중요한 중계지로서 번영하였다. 팔미라에는 많은 상인이 살았고,
페르시아 제국에서 온 인도와 아라비아 산물을 로마 제국으로 운반하였다. 또한 사막을 왕래하며 장사를 하던 카라반(caravan)들이 피곤한 몸을
쉬고 물을 공급받던 사막의 경유지였다. 셀레우스코 왕조 때부터 중개무역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팔미라는 로마가 점령했던 기원전후 약
300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은 한 때 이 곳에까지 영향을 미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팔미라는 역사의 대부분을 정치적인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곳을
지나는 대상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였으며 사막 교역로를 지켜주는 대가로 통과세를 받기도 하였다. 그 결과 팔미라는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희랍과 로마시대가 전성기였으며, 이 때 타드몰에서 팔미라로 이름을 바꾸고 독자적인 군대를 가진 강력한 도시국가로 발전하기에 이른다.오늘날
팔미라에 남아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은 1~3세기의 로마시대에 건축한 것이다. 거친 표면이지만 세련미가 돋보이는 그래서 팔미라를 대표하는 신전인
벨 신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당시의 석조기술을 알 수 있는 원형극장, 벨 신전 맞은편에 있는 나부신전과 개선문, 정치집회장 혹은 시장으로
이용된 아그라와 그 밖의 많은 석주들. 이 모든 유적들을 보면 눈부시고 황홀한 팔미라가 계획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독자성을
유지했던 팔미라의 문화는 그 미술에서 특히 조각에서 확실히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주변의 구릉에 석회암이 풍부했던 덕택이기도 하다. 많은
팔미라의 조각은 양식화된 정적인 미술이고 서아시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팔미라의 서쪽 시외에 북시리아의 황야가 펼치지고 묘지의 계곡이라는
장소에 팔미라 시민의 묘가 있다. 묘는 영원의 집이라 불리며 팔미라 사람들에게 깊은 의미를 주고 있었다. 공동 묘지도 있었으나 유력한 가족은
일족의 묘를 가지고 있었다. 묘의 형식에는 탑묘(塔墓), 가형묘(家形墓), 지하 분묘(地下墳墓) 등이 있었으며 탑묘의 형식은 팔미라 독자의
양식에 근거하고 있다.
서기 260년대에 아데나투스 2세가 팔미라의 왕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유능해서 팔미라의 융성기를 구가했었다. 그러나 그는
의문의 암살을 당하고 272년 그의 왕비 제노비아는 아들에게 황제의 칭호를 수여하고 황제의 어머니로 자처했다. 로마의 황제가 이를 묵과할 리
없었다. 아무렐리안 황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로 진군해 성을 포위했다. 제노비아는 포위망을 뚫고 팔미라를 빠져 나왔으나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려는 순간 로마 기병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로써 팔미라의 역사를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팔미라는 로마 제국에서 이슬람 왕조로 지배권이
넘어가면서 교통과 군사상 요지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였으나 오스만 제국 시대가 되자 급속히 쇠퇴하고 말았다. 더욱이 11세기에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팔미라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팔미라의 유적들은 모조리 모래더미 속에 파묻혀
버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1930년대에 와서야 팔미라의 발굴과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16만평에 달하는 팔미라를 발굴하는
작업을 언제쯤 끝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조금씩 발굴되고 있는 팔미라의 신전과 석주들이 화려했던 팔미라의 옛모습을 현대에 전해주고
있다.
5. 바위의 돔
기원전 950년경,
유다 왕국의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안의 동쪽편 산지에 순금으로 장식한 장엄미가 넘치는 솔로몬 성전을 세웠다. 성전이 세워진 후 이 지역은
성전산(Temple Mount)이라 불려지게 되었고 성도 예루살렘의 핵심부가 되었다. 이 성전은 이스라엘 최초의 성전으로 그들 신앙의 중심지요
자부심의 원천이었다.기원전 6세기 초, 바벨로니아 제국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도성을 불질렀고 이 때 성전도 소실되게 된다. 유다 왕국의
멸망 후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바벨로니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들의 포로가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승리로 그들은 해방되었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폐허가 된 성전을 소규모로 재건하게 된다. 이 때가 기원전 515년경이었다. 성전산 위에 세워진 이 두 번째 성전은
페르시아, 희랍, 로마시대를 거치는 500여년 동안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기원전 37년에 로마제국의 후광으로 왕위에 오른 헤롯 왕은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두 번째 성전을 헐고 크고
화려한 성전을 새롭게 건축하였다. 대규모의 성전과 부속건물, 주변의 요새 등을 원래의 크기와 위용대로 재건하게 된다. 이것이 세 번째 성전이며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성전이기도 하다.서기 1세기 중엽, 로마제국의 통치에 항거하는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기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전 터에 서기 135년경에 하드리안 황제가 이교도의 아도니스(Adonis) 신전을
건설하였고, 비잔틴 시대에는 이곳을 통치했던 기독교 인들이 유대인 성전의 파괴를 보여주기 위해 황폐한 모습으로 성전산을 방치하였다. 오직
성전산의 서쪽편 축대인 "통곡의 벽"만이 남아 그곳의 역사를 가늠하게 해 줄 뿐이었다.
서기 638년 이곳을 통치했던 아랍인들은 성전산의 큰 바위 위에서 자신들의 최고의 선지자 모하메드가 승천했다는 전설에 따라 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바위를 종교적으로 기념 및 보존하기 위해 서기 692년 당시 예루살렘의 통치자인 압둘 말리크는 그들의 대사원을 건축하게
한다.오늘날도 성전산 위에 우뚝 서 있어 예루살렘의 대표적 건축물이 되고 있는 "바위의 돔"이 바로 그것이다. 지름이 78피트, 높이가
108피트인 돔은 구리와 알미늄의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태양빛이 비칠 때는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반사된다. 1958~1964년 사이에
사원의 돔을 교체하면서 황금색 칠을 하여 황금사원이라고도 불린다.
정팔각형의 건물인 이 사원 실내 한가운데에는 폭 13m, 높이 1.25~2m, 길이가 18m인 나무로 둘러싸인 넓직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고 전해진다. 표면에는 골이 패어 있어서 제물의 피가 흘러 내리도록 되어 있다. 모하메드가 승천했다는
바위도 바로 이 바위다. 이 때문에 회교에서는 메카 메디나와 함께 예루살렘을 3대 성지로 꼽고 있다.바위의 돔 사원의 모든 벽면에는 정교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어 아랍 건축예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돔 내부에는 대리석 기둥들이 있는데 이 기둥의 색깔, 높이, 두께 등이
모두 제각각이다. 그 이유는 이 기둥들이 비잔틴이나 로마시대 신전의 것으로 복잡한 배경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바위의 돔은 새 단장을 하게 되었다.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650만 달러의 사재로 돔을 24K의 순금으로 씌우게 했다. 1993년
시작된 공사는 15개월간 계속되어 1200장의 얇은 순금 판이 돔 위에 입혀져 진짜 황금의 돔이 되었다
6. 클라크 데 슈발리에(시리아의 십자군 성채)
1096년 유럽 기독교 국가들로 구성된 십자군의 대장정은 오늘날 터키의 최남단 도시 안디옥(현재의 안타키아)을 점령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남진을 계속하여 1099년에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기독교 성지를 이슬람교도의 손에서 탈환하자는 구호 밑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의
승리였다. 이로써 200년간 계속된 십자군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십자군은 남북으로 700km나 되는 이 지역에 50개가 넘는 요새 성채를
축성하였다. 이 성채들은 십자군 건축 양식에 따라 하나같이 장대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13세기말 십자군의 패배와 함께 파괴되었다. 그 후
70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직 그 골격들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한 곳 예외가 있다. 십자군 시대 성채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곳이 있다. 그 곳은 시리아의 클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 eval iers)라고 부르는 성채이다. 기사의 성채라는 뜻을 가진 이 곳은 당시 성채의 구조와 축성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유럽 전체를 포함하는 중세 건축물 가운데 건축법이나 건축미가 매우 뛰어난 것 중 하나로 꼽혀 건축사의 연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십자군은 그 숫자로 볼 때 대군은 아니었다.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 십자군 수는 15,000명을 넘지 못했다. 그 후 예루살렘에 주둔했던
십자군 기사들은 고작 300명 정도였다. 소수의 십자군이 다수의 적대적인 지역을 관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십자군은 수적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군사적 요지에 수많은 성채들을 건설하게 되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장악해 갔다. 십자군 성채는 군사들이 주둔하는 요새였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다. 클락 데 슈발리에는 모슬렘의 중요한 도시 홈스(Homs)와 지중해를 잇는 중간지점의 전략적 위치에 세워졌다. 이
성채가 완성되었을 때 모슬렘 사가는 모슬렘 세계의 '목에 박힌 가시'라고 표현했다.
클락 데 슈발리에는 해발 750m의 칼릴(Khalil)산 정상에 오각형 형태로 우뚝 서 있다. 길이는 남북으로 200m, 동서로 140m나
되며, 면적만 해도 1만평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다. 이 성채의 특징 중 하나는 성벽이 완벽한 이중구조라는 것이다. 우선 든든한 외성이 있고 그
안에 외성보다 훨씬 높게 쌓아 올린 내성이 성채를 둘러싸고 있다. 외성과 내성 사이는 도랑을 깊게 파고 물을 채워 해자를 만들었다. 내성은
성벽을 직각으로 쌓지 않고 그 밑부분을 45도 각도로 경사지게 만들어서 해자를 넘어온 적들이 성밑까지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성 밑부분은
경사지게 만든 것은 성벽자체가 지진에 견딜 수 있게 하는 효과도 지녔다고 한다. 성내부에는 바닥이 꺼지면서 적을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장치,
가득 채우면 몇 년까지 버틸 수 있는 곡식저장소, 거대한 물 저장소, 120m에 달하는 대집회소, 예배소, 식당, 숙소, 미로같은 비밀통로 등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슬람교도인 모슬렘들은 이 성채를 빼앗기 위해 여러 번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무적의 살라딘도 이 성채를 공략하러 갔다가
성공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다음날 철군했다는 일화도 있다.1271년 이집트의 술탄 베이발스(Sultan Baybars)는 군대를 이끌고 이
난공불락의 요새 클락 데 슈발리에를 공격했다. 격전 끝에 외성을 뚫는데는 성공했지만 내성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를 함락시키는 것이 무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세이발스는 한가지 계략을 꾸몄다.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성안의 십자군들에게 한 통의 밀서가 전달되었다. 그것은 십자군 총사령관이
보낸 밀서였다. 거기에는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투항하여 유럽으로 퇴각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저항하던 십자군들은 베이발스에게 유럽으로
돌아가는 안전한 귀로를 보장하면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베이발스가 이 조건을 수락하자 십자군 성채에는 백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사실 그 밀서는 베이발스가 꾸며낸 가짜였다. 그러나 그의 밀서로 인해 성채는 파괴되는 운명을 면할 수 있었다. 1271년 이 성채의 함락을
시작으로 십자군 성채들은 차례로 모슬렘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20년 후인 1291년, 십자군 최후의 보루 아코(Acco)가 함락됨으로써
십자군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7.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를 지구의 중심이라 생각했고 그 중에서도 델포이(델피)를 지구의 배꼽이라 하며 신성시했다. 그리스의 유일한 고고학 유적지라 할
수 있는 델포이는 신화에 등장하는 신탁의 장소이고 아폴로 신에게 소속된 그리스 최대의 성지로 통한다. 이곳의 델피 박물관에는 이 곳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델포이 유적의 입구에서 파르나스 산의 구불구불한 참배의 길을 올라가다보면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아폴로
신전을 볼 수 있다. 길 양쪽으로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헌납한 보물창고와 봉납비, 신상, 건조물이 늘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그 대좌와 기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중 프랑스 고고학회가 재건한 아테네인의 보물창고가 거의 완벽하게 복구되어 있는데 도리스식 기둥 2개의 한쪽면에 아테네가 마라톤 전쟁에서
페르시아인에게 승리한 것에 대해 아폴로신에게 헌상한 내용이 적혀 있다. 그 옆에는 브레프테리온이라는 전물터가 있는데 옛 제전의 평의원들이
사용했던 곳이다. BC 3-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폴로 신전의 내실에는 아폴로 상이 놓여 있었으며 지하실에는 대지의
배꼽(옴파로스)라는 돌이 보관되어 있었다. 현재 이 돌은 델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폴로 신전은 현재 그 기둥과 토대밖에 남아 있지 않으나
아폴로 신에 대한 신앙과 그에 의한 신탁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신전이 만들어졌을 당시 그 신전에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곳
바위 틈에서 올라오는 물 기운을 마시며 황홀해진 신관이 아폴로 신에게 신탁을 고했다고 한다.
신전 전실의 벽에는 고대 현인 7명의 격언이 새겨져 있는데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에서 광명, 의술, 궁술, 시, 음악, 예언, 가축의 신이다. 아폴론이라고도 한다. 그는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신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신이었고 또한 음악의 명수로서 예술의 수호신이 되어 뮤즈의 여신들이 그를 따른다. 그는 때로 태양과 동일시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아폴로가 그리스, 로마인에게는 지성과 문화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7대 불가사의(7wonders of the modern
World)
1) 유로터널(영불해협)
영국사람들은
도버해협이라고 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칼레해협이라고 일컫는 영불해협의 정식명칭은 '채널(Channel)'이라 하며, 이 해협을 육로로 연결시키는
터널의 공식명칭은 '채널터널(Channel Tunnel)' 또는 채널과 터널을 합성한 신조어인 '처널(Chunnel)'로 명명된다.사실상 유로
터널(Euro Tunnel)이라는 명칭은 이 터널의 건설과 유지관리를 전담하는 민간회사의 이름이다. 이 회사는 영쇓불 양국정부로부터 건설공사
준공후 운영, 유지관리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권한을 착공시점부터 55년동안 위임받아 관리한 후, 2042년에 양국 정부에 소유권을 넘 겨 주게
된다.
유로 터널사는 150억불에 달하는 막대한 공사비를 정부의 자금지이나 보증 없이 주식공모와 은행융자로 조달했다. 이 공사는 국가간의 초대형
인프라건설을 순수민간자본이 주도한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그러나 '94년 터널의 개통이후,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심각한 경영난으로 인해
파산위기에 직면했었다. 당시 보도에 의하면 건설공사와 관련하여 채무액만 약 750억 프랑(한화 12조원)이고, 한해 지불이자액만 60억
프랑(한화 9600억원)이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96년 12월에는 터널 내부에서 차량화재사고가 발생하여 승객과 화물량이 격감하는 사태를
맞기도 했었다.
그러나 최근의 외신에 의하면, '97년도에 이뤄진 유로 터널사의 구 조조정에 이어, 최근 들어 승객과 화물량이 갈수록 폭증하여 머지 않아
흑자전환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즉, 2004년경이면 이자 지급을 완료하고 2005년부터는 그 동안 체념(?)하고 있었던 주주들에게 이 익
배당까지 예상된다고 하니, 가히 지옥에서 천당으로의 위상변화 가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나아가서, 제2의 해저터널건설계획이 날 로 구체화되고
있다고 한다.기존의 포크스톤과 칼레를 왕래하는 기차전용의 터널은 2015년이면 포화상태에 이를 전망이다. 제2의 터널은 기존의 터널과 나란히
달리는 자동차 전용터널로 건설되는데, 이 노선의 청사진은 2000년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2) CN TOWER(캐나다)
지상에서 높이
553m이니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타워라 할만 하다. 워낙 높다 보니 바로 밑에서 보면 바람에 타워가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울 남산
타워처럼 통신용으로 지었다가 개방하였는데 평일에도 줄을 서야 할만큼 붐비는 관광 명소이다.입구로 들어서면 매표소 앞의 인파부터 볼 것이다. 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른 시설은 빼고 엘리베이터 표만 사는 것이 좋다. 사람이 많다 보니 탑승 시간이 적혀 있다. 그 동안에는 밖에 나와 타워
외벽에서 등산 연습하는 사람도 보고 군것질 하면서 타워를 올려다 보는 것도 좋을 듯.
초고속 전망 엘리베이터는 58초 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에 닿는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출입문 쪽에 서면 전망을 보면서 올라갈 수
있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 줄서서 타다 보면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보게 된다. 좋은 자리 얻는 것도 운이다.
3)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미국)
1931년
완공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건축가 슈립 람하먼의 설계로 뉴욕 한복판에 102층 철골구조로 건축었으며 건물이 높이 올라갈수록 좁아져야 한다는
당시의 규정에 따라 계단식 설계로 되어 있다.381미터 높이에 6천 4백여 개의 창, 64대의 엘리베이터, 화장실만도 2천 5백 개가 넘는다.
청소부 2백여 명을 합쳐 모두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빌딩 안에서 일하고 있으며 매일 찾는 관광객만도 4만 명이다.
또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최단기 최고층 건설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불과 1년 45일 만에 당초 예정보다 크게 밑도는 비용을 들여
완공했는데, 빠른 시공과 함께 그 견고함은 지금은 건축가들도 귀감으로 삼아야 할 정도.엠파이어 스테이트(Empire State)는 원래 뉴욕의
별칭이다. 1972년 맨해튼 남쪽에 세 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들어설 때까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41년간 세계 최고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지금도 가장 높은 빌딩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떠올린다
4) 금문교(미국)
1933년에 착공하여
1937년에 완공한 다리로 샌프란시스코와 북쪽의 머린군을 연결하고 있다. 길이 2730m, 폭 27m로 매일 10만대가 넘는 차량이 통행하고
있으며, 경치를 바라보며 걸어서 건널 수도 있다. 다리의 양쪽에는 비스타 포인트라는 전망대가 있으며 특히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이 아름답다.
5) 이타이푸댐(브라질/파라과이)
댐높이
196m. 길이 7.37km. 저수량 190억m3. 중공중력(中空重力), 록필, 어스필 등 여러 가지 형식을 조합한 콤바인댐으로, 1975년에
착공하여 1982년에 준공되었으며, 총출력 1만 2,600kw이다.
6) 북해보호공사(네덜란드)
7) 파나마운하(파나마)
태평양 연안의
발보아에서 대서양 연안의 크리스토발까지 전장 64 km. 카리브해(海)로 흘러드는 차그레스강(江)을 막아 축조한 가툰호(면적 약 420 km2)
안에 만들어진 34 km의 수로 및 파나마만(灣) 쪽의 미라플로레스호(湖) 안에 만들어진 1.6 km의 수로와, 이 두 호수 사이에서 지협의
척추 구실을 하는 구릉지를 15 km나 파헤쳐 만든 쿨레브라 수로(에스파냐어로 ‘새우’라는 뜻, 굴착 감독자의 이름을 기념하여 게일라드
수로라고도 한다)로 구성되어 있다. 가툰호와 쿨레브라 수로의 수면표고(水面標高)는 25.9 m, 미라플로레스호의 수면표고는 16 m이다. 이 두
호수 사이의 표고차는 물론 호수와 해면(海面)의 표고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갑문방식(閘門方式)이 이용되고 있다. 파나마만에서 미라플로레스호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2단식(二段式) 미라플로레스 갑문, 여기에서 쿨레브라 수로로 통하는 입구에는 1단식의 페드로미겔 갑문, 가툰호에서 카리브만으로
나가는 출구에는 3단식 가툰 갑문이 건설되어 있다. 연간 평균 이용 선박의 수는 1만 5000척, 운하를 통과하는 데에는 약 8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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