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저는 두려움에 시달린 나머지 지쳐버렸습니다. 두려움을 정복하거나
죽일 수 있을까요? 만일 가능하다면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A. 두려움은 죽일 수도 없고, 정복할 수도 없다. 다만 이해될 뿐이다. '이해' 라는
단어가 핵심이다. 이해를 통해서만 변형이 일어난다. 그 밖의 다른 가능성은 없다. 그대가 두 려움을 정복하려고 하면 그 두려움은
사라지는게 아니라 억압된 채 남을 것이다. 두려 움은 그대 안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숨을 것이다. 이것은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상
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그대가 두려움을 너무 깊이 억누른 나머지 의식의 층에서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두려움을 지각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 나 깊은 곳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다. 그 두려움이 영향을 미친다. 깊은 곳에 숨 어서
그대를 조종한다. 그 조종방식이 매우 우회적이고 교묘하기 때문에 그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이것은 더 위험한 상황이다. 이제 그대는
두려움의 존재를 인식하지 도 못한다.
두려움은 정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다. 사실, 두려
움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려움에는 일종의 에너지가 담겨 있다. 그런데 에너지 를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려움과 분노는 똑같은 에너지의 두 가지 측면일 뿐이다. 분노는 공격적이고 두려움 은 비공격적이다. 두려움은 소극적 상태의
분노며, 분노는 적극적 상태의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에너지를 창조한다. 두려움이 곧 에너지다. 그리고 에너지는 파괴가 불가능
하다. 아주 미세한 단 하나의 에너지일지라도 존재계에서 없어지지 않는다. 항상 이것 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려움을 이해해야 한다. 두려움이란 무엇인가? 두려 움은 왜
솟아오르는가? 어디에서 비롯된 두려움인가? 두려움이 전하는 메세지는 무엇 인가??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말고 두려움을 들여다보라.
그래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이미 두려움을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면...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는 생각 을 갖고
있다면, 이 두려움은 제대로 관찰할 수 없다. 이미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다면 어떻게 두려움과 얼굴을 맞대고 정면으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두려움을 이미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면 어떻게 두려움을 직시할 수 있겠는가?? 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사람은 없다.
먼저, 모든 비난과 판단을 버려라. 두려움은 현실이다. 그 현실을 직시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해를 통해서만 변형이
일어난다. 실제로 두려움은 이해를 통해 변형된다. 이 외에 다른 일은 할 필요가 없다. 이해가 두려움을 변형시킨다.
두려움이란 무엇인가? 두려움은 항상 어떤 욕망의 주변에 형성된다.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여기에 두려움이 있다. 만일 그런 사람이 되는데 실패한다면?? 이로부터 두려움이 싹튼다. 욕망의 부산물로 두려움이 솟아난다. 그대
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로부 터 두려움이 솟아난다. 두려움은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두려움은 소 유욕의 부산물이다. 그대는 소유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만일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두려움은 없다. 미래에 이런저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 망이 없다면 두려움은 없다. 그대가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두려움은 없다.
순간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두려움은 욕망을 통해 온다. 기본
적으로 욕망은 두려움을 낳는다. 두려움을 들여다보라.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그 두려 움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떠한 욕망이 두려움을
낳았는지 살펴보라. 그리고 그 욕망의 헛됨을 알아라.
두려움은 그대가 소유를 원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왜 소유를
원하는가? 소유욕을 버려라. 그러면 두려움은 없다. 그리고 두려움이 사라지면 그 두려움 안에 갇혀 있던 많은 에너지가 활용
가능해진다. 그 에너지를 창조적인 일에 사용할 수 있다. 그 에너 지는 춤이 되고 축제가 될 수 있다.
그댄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그러나 붓다는 죽음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애시당초 그대는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내면 깊은 곳으 로 들어가 살펴보라. 거기에 죽을 자가 있는가? 그대는 어떠한 에고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죽음의
가능성은 없다.
에고라는 관념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 낸다. 에고가 없으면 죽음도 없다. 그대는 전적인 침묵이다.
그대는 불사(不死)의 존재이며 영원한 존재이다. 그대는 '나' 라는 관념에 오염되지 않은 드넓은 하늘이다. 경계선도 없이 무한한
하늘이다. 이것을 알면 두려움은 없다.
어떻게 두려움을 정복하거나 죽일 수 있는지 묻지 말라. 두려움은 정복당하거나 살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두려움은 다만 이해될 뿐이다. 이해를 그대의 유일한 법(法)으로 삼으라.
인간은 자유다. 한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그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자유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인간은 자유라는 재료로 만들어졌다. 의식 또한 그렇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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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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