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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사랑과 진실

권력자들을 둘러싼 끝없는 스캔들의 유혹!!

by 현상아 2006. 9. 10.

권력자들을 둘러싼 끝없는 스캔들의 유혹!

권력과 섹스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당나라의 현종, 존 F. 케네디, 예카테리나 여제 등 권력을 이용해 섹스를 취해온 이들이 있는 반면, 에바 페론이나 양귀비처럼 섹스를 이용해 권력을 취해온 이들도 있다. 또 역사 속엔 사랑과 결혼을 위해 권력을 버린 사람들도 있다. 권력과 섹스가 만나면? 최근 발간된 「스캔들의 역사」는 부와 권력을 가졌던 이들의 감춰진 사생활과 섹스 스캔들을 통해 권력과 성의 상관관계를 새롭게 조망한다.


양귀비는 당나라 현종의 첩으로 환갑에 달한 황제가 한눈에 매혹된 여성이었다. 현종은 권력으로 성을 샀고, 양귀비는 성을 팔아 권력을 얻었다.  2·3·4 언론에 포착된 케네디와 재클린 부부의 모습은 케네디의 참모들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조작된 케네디의 젊음과 활력, 행복한 가정생활에 대한 이미지 중 하나였다. 5 케네디는 성인이 되고 난 후 아주 문란한 성생활을 했다. 그의 상대는 마릴린 먼로 같은 유명인부터 이름 모를 낯선 여자들까지 다양했다고 전해진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하여 적들마저 굴복시켰고, 물려받은 왕국을 통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집트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던 야심만만한 군주였다. 그녀는 담요에 숨어 카이사르의 숙소에 숨어들어가 하룻밤 사이에 카이사르와 연인 사이가 되었고 결국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왕권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예카테리나 대제의 사생활에 관한 통속적인 이야기는 그녀의 위대한 업적을 훼손시키기 위한 음모로도 볼 수 있다. 사실 그녀만큼 ‘정상에 서면 외롭다’라는 금언이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4·5·6·7·8 에바 페론은 성을 이용하여 성공에 이른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업가였다. 9 찰스 스튜어트 파넬은 10년 가까이 내연의 관계를 지속해오던 캐서린 오세이 부인의 이혼이 확정된 후 정치적 생명을 잃었고, 그가 추구했던 아일랜드의 자치라는 정치적 이상도 연기되었다.


섹스를 위한 권력, 권력을 위한 섹스!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

당나라 현종과 그의 애첩 양귀비의 이야기는 권력과 섹스의 긴밀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양귀비는 원래 황제의 열여덟째 아들의 첩이었다. 어느 날 황제는 양귀비가 목욕하는 광경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만다. 언제나 황제를 기쁘게 해주려는 내시는 환갑에 달한 황제와 10대 소녀의 은밀한 만남을 주선했다. 황제는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졌고, 아들에게서 그녀를 빼앗아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양귀비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조금 뚱뚱하긴 했으나 아름다웠고, 탁월한 이야기꾼이었으며, 사치스러웠다. 현종은 양귀비가 원하고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현종과 양귀비는 서로 깊이 사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둘 사이가 항상 이상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양귀비는 황제의 측근과 염문을 뿌렸으며, 현종의 동생과 오럴섹스를 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눈치 챈 황제는 그녀를 궁궐에서 쫓아냈으나 곧 용서해주고 만다.)

아마 당나라가 몰락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영원히 계속되었을지 모른다. 변방의 장수인 안녹산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를 점령했을 때 현종은 자신이 양귀비를 빼앗아왔던 바로 그 아들에게 권좌를 넘겨줘야 할 상황에 처한다. 군사들의 반란에 직면한 황제는 양귀비에게 자결을 권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양귀비는 변방으로 귀양살이를 떠나 생을 마쳤다고 하지만, 오래된 자료들을 보면 그녀는 궁궐에서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종은 그녀를 잃은 슬픔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섹스와 권력의 복잡하고도 역동적인 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현종이 그녀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한 것은 우선 그의 권력이었지만, 양귀비는 현종과 맺은 관계를 통해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다. 현종은 섹스를 위해 권력을 사용했고, 양귀비는 권력을 얻기 위해 섹스를 이용한 것이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바람둥이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들의 스캔들 역사는 뿌리가 깊다. 43명의 미국 대통령 가운데 현재까지 바람을 피운 것으로 알려진 대통령은 존 F. 케네디를 포함해 최소 14명.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결혼하기 전날 절친한 친구의 아내 샐리 패어팩스와 바람을 피웠으며, 독립선언문을 만든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28세 연하의 흑인 노예 샐리 허밍스와 36년간 사랑을 나누었다. 제퍼슨이 처음 샐리와 관계를 가질 때 샐리의 나이 14세였다니, 우리나라로 따지면 원조교제 혐의까지 받아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뉴 프런티어의 기수 케네디 대통령은 말 그대로 ‘종마’였다. 케네디는 성인이 되고 나서 재클린과 결혼한 1953년 전후, 하원과 상원의원, 대통령 재임 시절을 막론하고 아주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다. 여기저기서 이런 일을 문제 삼았지만, 위험한 일에 말려들 수 있다는 사실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케네디는 계속해서 여자에 탐닉했다. 케네디의 여인으로 거론된 이는 마릴린 먼로, 앤지 디킨슨, 제인 맨스필드 등 다수의 유명 여배우와 프리실라 웨이어, 질 코완 같은 백악관 스태프들을 비롯, 스트립 댄서 블레이즈 스테어, 악명 높은 마피아 샘 지아카나의 정부 주디스 엑스너 켐벨에 이르기까지 많다.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답게 모든 계층의 여성들을 다 ‘소화’해낸 케네디는 백악관에 입성한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바람둥이로 손꼽히고 있다.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해 우리나라의 기미독립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 또한 전형적인 바람둥이. 그는 신혼여행 와중에 바람을 피웠고, 그뒤로 두번째 부인 이디스를 맞이해서도 유부녀 메리 헐버트 팩과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우는 소아마비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집권 기간 동안 여러 여성들과 섹스 스캔들을 일으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아내의 비서부터 자신의 비서, 백악관의 사무요원들은 물론, 2차 세계대전 당시 백악관에서 기거했던 노르웨이 왕세자비까지 섭렵할 정도로 왕성한 정력을 자랑했다.

이밖에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여성 운전사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으며, 빌 클린턴은 ‘지퍼 게이트’로 법정에 서는 수모를 겪었다.

대통령은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과 관련된 섹스 스캔들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권력 지향점의 끝에는 늘 섹스가 함께 했다.


팜므 파탈의 신화! 클레오파트라&예카테리나 여제


권력을 섹스의 도구이자 수단으로 삼은 예는 비단 남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등은 남성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만의 성생활을 즐겼다.

18세에 남동생과 함께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가 된 클레오파트라. 그녀는 타고난 지도자이자 야심만만한 군주였다. 클레오파트라는 하룻밤 만에 카이사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또 카이사르 암살 이후에는 안토니우스의 연인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서 과거 식민지들을 되찾았고, 마침내 그와 결혼했지만 로마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버린 안토니우스를 용납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군대는 로마에서 보낸 옥타비아누스 군대에 대패했고, 두 사람은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만다.

클레오파트라는 용모와 자태에서 드러나는 여성적 매력과 몇 개 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외교 수완을 발휘,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두 사람의 로마 영웅을 자유자재로 조종하여 격동기의 왕국을 능란하게 유지해나간 여왕이었다.

클레오파트라와 비슷한 경우로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를 들 수 있다. 1729년 5월 2일, 독일 왕자의 딸로 태어난 예카테리나 여제(원래 이름은 소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브스트). 14세에 러시아로 가서 예카테리나란 세례명을 받고 16세에 훗날 표트르 3세가 되는 카를 울리히와 결혼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략 결혼이 그러하듯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표트르는 예카테리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예카테리나 역시 그런 표트르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었다. 명목상 황태자와 황태자비인 채로 두 사람은 각자 정부를 두고 18년간을 함께 살았다. 예카테리나가 낳은 세 아이도 모두 정부의 소생으로 아버지가 각각 달랐다.

예카테리나의 남편 표트르는 황제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1762년 왕위를 계승받긴 했지만 변덕스런 행동과 정치적 무능력 탓에 그 해 7월 9일 왕위에서 쫓겨나고 만다. 황실 경호대는 예카테리나를 여제로 추대했고 며칠 뒤에 표트르는 살해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남편의 시해를 사주했다고도 한다.) 이렇게 해서 외국 태생의 공주가 러시아의 최고 통치자가 된 것이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생애 후반기 동안 왕실과 외교 클럽에서는 그녀 주변의 젊고 매력적인 남자들에 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일각에선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한 남자가 족히 3백 명은 넘는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잘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의 양 옆에는 섹스 파트너가 될 남자의 성적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검사기 역할을 하는 여자 둘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기마호위병 장교였던 알렉산더 란스코이는 23세의 나이에 고열로 죽었는데, 정통한 소식통들은 그가 성욕을 촉진시키는 최음제를 과다 복용하고 ‘예카테리나와 섹스를 하던 중에 죽었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생활이 그녀의 목숨과 통치 기간을 단축시킬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실제로 그녀는 34년간이나 통치했고 67세에 자연사했다. 그녀의 죽음은 수십 년 동안 외설적인 흥밋거리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이 지나친 성행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살해된 남편과 대조적으로 예카테리나는 빈틈없는 정치가였다. 비록 그녀의 통치에 대한 평가가 다르긴 하지만 어떤 기준에 따르더라도 그녀는 매우 강력하고 열정적인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녀가 여러 분야에서 이룬 업적들은 때때로 궁정의 젊은 남자들을 총애하던 그녀의 사생활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잠자리를 통해 정상에 오르다! 에바 페론

과거 권력을 가진 남자들이 섹스 대상을 얻는 데 그 힘을 이용했다면, 여자들은 권력에 접근하기 위한 도구로 섹스를 이용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바 페론. 그녀는 잠자리를 통해 정상에 오른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은 마을 로스 톨도스의 농장에서 요리사 미혼모가 여자아이를 낳았다. 아버지 이름은 후앙 두아르테. 농장주인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아이뿐 아니라 아이의 세 언니 중 어느 한 명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거부당해야 했던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남성’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소녀가 12세가 됐을 때 가족은 후닌이란 도시로 이사를 한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한 정치인을 만났다. 이후 어머니를 ‘보살펴주기’ 시작한 그는 어머니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숙집을 장만해준다. 이것이 단순한 하숙집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많은 남자들은 ‘하숙집’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하숙집의

소녀들’ 역시 투숙객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소녀의 세 언니들은 ‘하숙집’에서 묵고 간 장교, 변호사, 승강기 기사와 각각 결혼을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소녀는 ‘남자와의 성관계를 통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소녀에게 ‘남성’은 이제 중요한 수단으로 부각됐다.

10대 초반이었지만 ‘필요한 각종 기술’은 이미 익혀둔 상태. 그녀는 보다 높은 곳에 뜻을 두기 시작한다. 이후 ‘소녀를’ 거쳐간 사람들, 아니 ‘소녀가’ 거쳐간 사람들은 가수, 영화배우, 광고주, 사업가, 육군 대령 등 그녀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모두 해당됐다. 소녀는 그들의 몸뚱이, 아니 자신의 몸뚱이를 돌다리 삼아 원하는 것을 하나씩 얻어냈다. 소녀는 상대를 고를 때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24세 때 ‘마지막 상대’를 만난다. 긴 여정 후에 도착한 ‘종착역’의 이름은 후앙 페론. 최고 권력자와 결혼한 소녀가 ‘에바 마리아 두아르테’에서 ‘에바 페론’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이다.

에바는 꾸준히 파트너를 디딤돌 삼아 정상에 올라섰다. 그녀에게 페론은 단지 마지막 상대였을 뿐이다. 페론이 에바에게 권력을 향한 길을 열어주었다면, 그녀는 노동자와 빈민들을 본능적으로 이해하여 그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페론 부부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을 지녔으면서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은 커플로 기억된다.


사랑과 권력의 제로섬 게임, 파넬과 오셰이

19세기 후반 아일랜드 민족자치운동의 기수 파넬은 영국 여성이며 자기 당원의 아내 캐서린 오셰이를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당시 여러 차례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별거하던 캐서린은 향후 5년 동안 파넬의 아이 셋을 나았다. 부인의 부정을 안 오셰이 대위는 파넬에게 정치적 보상과 돈을 보장받고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인한다. 거의 10년간 유지되던 이 관계는 돈 많은 캐서린의 숙모가 죽으면서 오셰이 대위에게 유산을 남겨주지 않자 그가 이혼 소송을 제기해 공론화되었다. 파넬과 캐서린이 침묵하는 가운데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자로 몰아간 오셰이 대위는 결국 재판에서 승리한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이혼 소송은 가장 인기 있는 뉴스거리였고, 파넬은 가정파괴범으로 매도당했다. 이 사건은 일차적으로 가족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로 인식되었지만, 결국 파넬은 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그는 사랑을 얻는 대신 권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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