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기존 게시글
숭산 소림사 뒷편 "달마동"은
중국인 스스로 "치우동"이라 합니다
즉
동이의 구리시대 14대 치우천자의 유적이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찾아야지요
자랑스런 우리의 역사
("달마동"은 "치우동")
- 자료출처 : 한배달 2001년 2, 3월호 (통권 53호)
(이규행이 쓰는 달마이야기) "달마동굴의 내력"
달마는 신룡이 떠난 자리에서 입정에 들었다
뜨거운 불길이 솟아올랐다
굉음이 울리면서 온 산이 진동
금빛 찬란한 화룡이 비상했다
달마는 천천히 동굴 속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발소리는 커다란 울림이 되어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마치 동굴의 메시지인 것 같기도 했고 우주의 소리인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그 소리는 사람의 살갗을 뚫고 내면의 세계로 스며들었다.
달마는 일찍이 이런 천연의 동굴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치우천황이 득도한 동굴이라고 가르쳐 준 스승 반야다라의 계시가 새삼스럽게 가슴에서 소용돌이쳤다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강렬한 빛이 굴 구석에서 ‘번쩍’ 하더니 뜨거운 불길이 솟아올랐다.
굉음이 울리면서 온 산이 진동했다.
바위가 구르고 작은 돌이 흙먼지와 함께 하늘로 튀어 올랐다.
큰 나무들도 가지가 꺾이고 잎사귀가 떨어졌다.
달마는 황급히 몸을 낮추면서 벽 쪽으로 붙어 섰다.
그 순간 불길을 따라 금빛 찬란한 화룡(火龍)이 동굴 밖으로 비상했다.
휙- 하는 소리가 하늘을 가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앞산을 넘어 자취를 감췄다.
화룡이 지나간 자리엔 안개만 자욱했다.
천지는 이내 어둠으로 뒤덮였다.
치우천황이 득도한 동굴에 오랫동안 화룡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곳에 보리달마가 찾아들었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다.
소림사의 사적기(寺跡記)에 보면
오유봉에 있는 ‘치우동굴’이 ‘화룡동굴’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달마동굴’로 불리게 된 내력이 자세히 쓰여 있다.
‘달마동’ 또는 ‘달마동굴’이란 이름은 달마가 소림사를 떠난 뒤에 붙여진 것이고
달마가 9년 면벽할 당시에는 ‘화룡동굴’이라 불렸다.
이 ‘화룡동굴’이란 이름은
달마가 동굴을 찾아든 고사와 이적(異蹟)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전까지는 ‘치우동굴’이었다.
‘치우동굴’은 그때까지만 해도 풍상 속에 버려진 망각의 터였다.
아무도
그 곳에 ‘치우동굴’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치우천황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설로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바로 그 곳에,
수천년의 시공을 넘어 달마가 찾아든 것이다.
그 곳은 동쪽에서 싹튼 하나(一)의 진법(眞法)을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주기 위한 터전이었던 셈이다.
<삼성기(三聖記)>에는
치우천황이
배달 나라의 14대 환웅(桓雄)인 자오지(慈烏支)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치우천황에 대한 기록은 이밖에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기록으로는
<성호사설> <규원사화> 등을 꼽을 수 있고,
중국쪽 기록으로는 사마천의 <사기>가 대표적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치우를 엄연한 역사적 인물로 명기(明記)하고 있다.
치우가 중원의 역사에 등장한 연대는 단군왕검의 등극보다 훨씬 앞선다.
<사기>의 기록을 보면 치우와 황제가 탁록대전( 鹿大戰)을 벌였다고 쓰여 있다.
역사 이래로
지나족(支那族)
즉 오늘날의 중국을 이루는 한족(漢族)들은 그들의 조상으로 황제를 받들고 있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 또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황제를 비하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에선 치우천황이 잊혀진 지 오래다.
심지어는
단군왕검의 존재조차도 부인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뿌리를 잊은 민족의 비극과 비애는 새삼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이것은 이른바 도(道)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도맥(道脈)을 바로 알고 바른 도법(道法)을 배우지 않고선 바른 길로 들어설 수 없는 법이다.
<삼성기>를 보면 치우란 말이 ‘용’과 관련이 있다고 쓰여 있다.
당시의 속언(俗言)에서
치우는 ‘우레와 비를 크게 내려 산하를 갈아치운다
(雲雨大作 山河改換之意也)’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우뢰와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이
용이 맡은 소임이기도 하거니와
치우란 말은 오늘날의 ‘치우다’ 또는 ‘갈아치우다’의 말 뿌리가 된다고도 한다.
달마는 한동안 화룡이 날아간 방향을 응시했다.
절로 합장의 자세가 되었고 어느덧 몸과 마음은 하나가 돼 있었다.
달마는 날아간 화룡이 다름 아닌 신룡(神龍)임을 금새 알아차렸다.
그는 치우천황 이래 2천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온 신룡이
이 터전을 자신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떠난 까닭을 새삼 곱씹어 보았다.
그는 이 곳에서 부처님의 정과(正果)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해 마지않았다.
달마는 합장한 채 멀리 허공을 바라보며 절을 했다.
치우천황과 부처님, 스승 반야다라와 신룡의 보살핌과 자비가 천지에 가득한 듯했다.
달마는 스승으로부터 받은 일자(一字)진언을 무수히 외운 다음 절을 마쳤다.
그리고 나서는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살폈다.
신룡이 떠난 자리엔 아직도 서기(瑞氣)가 감돌았다.
좌선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달마는 다시 굴 밖으로 나와 소나무 가지와 풀뿌리, 칡덩굴을 엮어 빗자루를 만들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굴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달마는 비록 헤진 법의지만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신룡이 떠난 그 자리에 가서 좌정했다.
두 눈은 살짝 내려 코끝을 보고, 코는 단전 자리를 보고, 단전은 마음에 하나 되게 하여 입정에 들었다.
오늘날 소림사의 ‘달마동굴’에 모셔진 달마상은
당시의 면벽수행하던 모습을 상징화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 곳의 달마상은 여느 불상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는 좌법이다.
대개의 불상이 결가부좌의 좌법을 하고 있는데 비해서 달마상은 궤좌법을 하고 있다.
궤좌법이란 무릎 꿇고 앉는 자세를 말하는데 정좌법(正坐法)이라고도 불린다.
우리 나라의 이른바 고불(古佛)의 좌법은 바로 달마의 궤좌법과 일치한다.
고구려의 벽화나 발해 시대의 석상을 보면 한결같이 궤좌법을 하고 있다.
이 좌법은 전통적으로 일좌법(一座法)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일좌법이란 ‘하나(一)의 진법’과의 관련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두 무릎을 꿇어 하늘과 내가 하나되게 하는 앉음새가 곧 일좌법이라는 얘기다.
달마동굴의 달마상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이른바 수인법(手印法)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불상의 수인법은 대개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누구나 알 수 있다.
따라서 수인법만 보면 어떤 부처님인지 쉽게 분간할 수 있다.
그러나 달마상은 그런 수인법을 알 수 없게 돼 있다.
법의(法衣)로 두 손이 완전히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달마의 수인법은 흔히 비전(秘傳)의 수인법이라고 일컬어진다.
밀교(密敎)에서 수인법이 중시되는 것처럼 달마선법에서도 수인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심지어는 세 가지 비법의 하나라고 손꼽히기도 한다.
달마선법에서의 세 가지 비법의
첫째는 현빈(玄牝)의 일규(一竅) 즉 하나(一)의 구멍이고,
둘째는 밀주(密呪) 즉 하나(一)의 진언이다.
그리고 셋째는 비밀의 수인법 즉 하나(一)의 수인법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하나(一)의 수인법을 천부(天符)수인법이라 일컫기도 한다.
천부수인법의 전형(典型)은 신라의 화성(畵聖) 솔거가 그린 단군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수인이 두 소매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 손을 잡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돼 있다.
단군의 수인법과 달마의 수인법은 하나(一)의 진법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통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치우동굴’이 곧 ‘달마동굴’로 불리는 사연과도 닮은꼴이다.
달마는 치우동굴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면벽좌선에 들어갔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앉은 자세로 일관했다.
면벽은 흔히 벽관(壁觀)이라고도 일컬어진다.
한데 면벽이나 벽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분분하다.
면벽의 경우
달마가 벽을 바라보고 앉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풀이와 함께
달마가 벽을 등지고 앉은 것을 말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그러나
선법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면벽에서 어디를 보고 앉아 있느냐는 아무런 논란거리가 못 된다.
참뜻의 면벽이란 결코 벽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등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벽관’이란 이런 점에서 면벽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벽관’이란 한 마디로 심성이 빛나고 깨끗하여 마치 구슬처럼 물들지 않았다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참선에 임함에 있어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입(理入) 그 자체가 벽관이랄 수도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렇지만
달마는 중생 누구나 자기 안에 동일한 진성(眞性)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객진(客塵)에 장애를 받는 까닭에 그것을 없애지 않고는
진성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중생의 삶이다.
그것을 이루는 길이 바로 좌정하여 벽관하는 것이다.
벽관하면 궁극적으로 자신도 사라지고 남도 사라진다.
범(凡)과 성(聖)이 하나가 된다.
굳건히 벽관을 지속하면 하나(一)의 길(道)로 통하여
적연(寂然)한 무위(無爲)의 세계에 들어간다.
이것을 일러 ‘이입’이라고 하는 것이다.
달마의 벽관은 말도 잊고 생각도 끊어야만 갈 수 있는 길이다.
그것은 마음으론 전혀 얻는 바가 없는 무소득심(無所得心)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분별을 넘어선 ‘중도(中道)’와 무상(無相)의 ‘실상(實相)’을 증명하려는 것이 벽관인 셈이다.
일체의 성(聖)과 범(凡)에 대한 생각 자체를 쓸어 버리고
일체의 상대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 곧 벽관이다.
달마가 금릉에서 무제 소연과 견해가 맞지 않았던 근본적인 분기점도
바로 벽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마의 면벽좌선은 어느덧 시공을 초월하는 듯싶었다.
몇 날 며칠을 지샜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달마의 심성은 날로 초연(超然)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달마는 사람의 몸이었다.
비록 조사의 위치에서 남다른 수행과 도력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몇 년을 하루같이 초연하여 사물 밖에 처하기는 어려웠다.
그에게 있어서도
불법에서 요구하는 만법개공(萬法皆空)의 완벽한 무아경지에 이르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날도 달마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한 마음으로 좌선하고 있었다.
그런데 까닭도 없이 온몸에 피로감이 엄습해 왔다.
반쯤 뜬 눈이 자꾸 감기면서 꾸벅이기 시작했다.
달마에게 있어 이런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달마는 자세를 바로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온몸이 떨리면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여태까지 해 왔던 면벽좌선이 아무 것도 아니었단 말인가 하는 강한 좌절감에 빠져들었다.
진정으로 벽관에 들었다면 어째서 피곤을 느끼고 수마(睡魔)에 시달릴 수 있다는 말인가?
벽관으로 선정의 바른 가르침을 이끌어 가야 할 사람이
스스로의 문제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많은 승도를 설복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수만 리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불법을 널리 펴고 선을 전하려는 본래의 목적도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 소림사가 있는 숭산
▒ 소림사
출처..
'세상만사 이모저모 > 미스터리 및'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님 손가락에 '우담바라' (0) | 2006.09.16 |
---|---|
※잉카문명 (0) | 2006.09.13 |
미스테리 생물들~① (0) | 2006.09.13 |
미스테리 생물들 ② (0) | 2006.09.13 |
미스테리 생물들 ③ (0) | 2006.09.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