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의 연인 까미유 끌로델 (1864~1943 )
그녀의 이름은 항상 로댕의 그림자 뒤에 가려있었다.
근대 조각의 신기원을 기록했던 로댕의 유명한 여성편력에서 유독 까미유 끌로델이 거론되는
이유는 그녀가 단순히 그의 작업모델이자 정부가 아닌 한 사람의 조각가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
쳤기 때문이다.
까미유에게 있어 로댕은 여성의 신체조건으로는 힘든 조각의 세계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이해하는 동지이자 스승이었다.
로댕 역시 까미유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기다려왔던 구원의 여인으로 자신의 비법을 전할 수 있
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미 5섯살 때 마당의 진흙으로 해골을 만들어 오븐에 구워먹겠다는 그녀의 천부적인 흙과 돌
에 대한 애착은 그녀가 본능적으로 조각작품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남다른 그녀의 행동을 그녀의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태어난지 2주일만에 죽은 아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녀의 부모는 '까미유'라는 양성(兩性)적
인 이름을 까미유 끌로델에게 지어주었다.
까미유의 어머니는 유독 막대 여동생 루이즈만 사랑했으며, 그러한 편애는 일생동안 계속됐다.
반면에 까미유는 4살 아래인 남동생 폴과 (폴이라는 이름은 자살한 아저씨의 이름에서 따온 것
이다) 가깝게 지내는데 폴은 훗날 시인이자 극작가로 이름을 떨친다.
어린시절부터 까미유는 타고난 감성과 열정으로 잠자는 일도 잊은채 흙반죽에 열중하곤 했다.
작품의 영감은 나폴레옹 흉상, 비스마르크 흉상,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 기초한 조각등을 비
롯하여 그녀의 가족들과 그 지방의 농부들로부터 얻는다.
그녀는 단지 본능이 이끄는대로 움직였을 뿐 이었다.
그러던 중, 마을의 노장 조각가에게 조각의 기초 지식을 배우며 정식적인 조각수업을 받고자
파리로 가기를 원했다.
<다나이드>
그러나, 전문적인 예술 세계는 여성에게 거의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가장 권위있는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그 당시 여학생들을 받지않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녀는
사립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으며 공동 작업실을 마련해 작업에 몰두
하던 중 조각가로서 정상에 위치한 로댕을 만나게
된다.
까미유와 로댕이 처음 만났을 때 까미유는 19살의 생일이 되기전이였고 로댕은 43살이었다.
로댕은 끼미유의
작품에서 자신의 조각과의 내적인 유사성을 느끼며 까미유가 천재적인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자신의 작업실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그 당시 로댕이 새로 만드는 장식 미술관의 주문으로 <지옥의 문>을 창작하고 있었는데,
까미유는 몇몇 지옥 여인의 모델이 되기도 하고, 손과 발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까미유는 로댕에게서는
없어서는 안될 공동작업자가 되었다.
이 공동작업 시기에 제작한 그들의 작품은 서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한 점이
많았다.
이때문에 이 시기의 작품들은 비평가들의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까미유보다 24세 연장자인 로댕은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까미유의 성숙함과 아름다움
에 매료되어 두 사람은 깊은 관계에 이른다.
그러나,
까미유와 로댕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 이상으로 예술가로서 서로의 작품에 대한 질투심
등으로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게된다.
로댕과 함께한 기간 중에 클로델도 작품을 더러 전시했으나 결코 세 점이상은 되지
않았다.
1886 년 노르르담 데 샹의 작업실에서 까미유는 < 사쿤달라
>를,
제시 리스콥은 < 스트레칭 하는 여자 > 를 작업하고 있다.
프랑스 예술가 살롱전에서 힌두교의 전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사쿤탈라(Sakuntala)>
마술에 걸려 눈이 멀고 말 못하는 사쿤탈라가 남편과 재회하는 모습의 대리석 작품은
최고상의 영예를 얻는다.
로댕 또한 1883-1893사이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는등
많은 공적 생활을 하게 되고 이 생활
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클로델과 나누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질
못했다.
지방출신인데다가 다리를 절었고, 예술계의 막후 거물들 중에서도 고작 '옷을 못입는 사람들' 만을 보았을 따름 이었다.
"나는 예술에 대한 이론적인 문제는
모릅니다."
스스로 자신을 장인의 역할에
국한 시키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까미유는 예술적 천재성은 개인의 내면에서 나오며 타고난 재능에 비례하여 인정받게 될
거라
생각하고 은둔 생활을 하며 작업하였다.
까미유는 로댕과의 관계를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고 주위사람들에게 단지
로댕의 제자로
만 인식되어 있었지만, 로댕과의 성적 관계가 탄로나면서 그녀는 집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허름한 작업실에서 작품 제작에만 몰두하며, 때가 되면 자신의 재능이 공식적으로
인정
받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시기 까미유는 로댕의 그늘에서 벗어나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 때까지 로댕은 로즈라는 여인과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로즈를 그의 곁에서 떠나가
게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로댕과 로즈의 관계를 비난하면서 세점의 그림에서 독특한 개성으로 경멸감을
표현했
다.
사랑의 배신과 더불어 자신의 예술 세계까지 망가져가는 까미유 끌로델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우울증과 피해 의식, 편집광적 증상을 보이며 거리를 방황하며 밤마다 로댕의 집을 향해
돌팔매
질을 해대지만, 결국 그녀는 어둡고 침침한 지하 별장에서 고통 속에 빚어낸 여러 작품들을 뒤
로하고 정신
병원으로 향하는 마차에 실려가게 된다.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왈츠>
그녀의 개인적인 모든 예술의 특성이 표출되는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은 "겉으로 나타나는 모양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화하고 확대시
켜 더
깊은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접근하려했다"는 평을 받고있다.
까미유는 로댕의 영향에서 벗어나 그녀만의 독창성을 나타내
보였다.
까미유의 작품은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많은 비평가들이 신문, 잡지등에서 찬사를 보내기
시작
했다.
옥으로 만들어진 뜬 소문(Les Causeuses).
샹 드 마리스의
살롱전에 출품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공은 그녀에 대한 모멸 또한 부채질
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물질적인 어려움은 없겠군"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수근거렸다.
사람들은
그녀가 아틀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잊기 위해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899년 까미유는 살롱전에 대리석올 된
클로토를 출품했다.
이것은 로댕과 까미유가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까미유는 이 작품을 룩셈
부르크의 박물관에 전시하기를 원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몇년이 지나
도록 그것은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행방도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로댕은 그 연유를 알기 위하여 모르하르트와 의논하였으나 사건은 점점 더 악화 되어갔다.
까미유는
로댕이 이 작품을 훔쳐갔다고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까미유는 로댕이 자신의 영감을 도용했다고 하여 그에 대한 증오를 날로
쌓아갔다.
까미유의 로댕에 대한 강박관념적인 증오는 로댕이 죽은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1899년 까미유는 부르봉가
19번지로 거처를 변경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정신병원에 들어가지 전까지 약 14년간을 혼자서
살았다.
1905년은 까미유에게 작품활동의 마지막해이다.
<비상하는 신>로댕과의 관계가 짙게 나타나고 있다.
<중년>
최초 석고상에서는 한가운데 선 남자가 오른손으로 노파의
어깨를 껴안고 왼손은 웅크린 젊은 여성의 가슴에 대고 있다.
이 남자는 로댕이며 노파는 로즈, 젊은 여성은 까미유 자신이다.
1899년에서 1913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작품의 브론즈 상에서는 이미 남자는 완전히 노파의 수중에 들어가 있고, 젊은 여성은 웅크린
채 허공을 향해 양팔을 헛되이 뻗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 이러한 변화는 로댕과 까미유 관계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까미유에 대한 첫 주문작인 <중년>이 청동으로 제작되는 것을 로댕의 영향력으로 정부가 막게 되는데, 이에 까미유는
본래의 석고상을 자신의 작업실에 보관하면서 비밀리에 두번씩이나 청동작품을 만듦으로써 정부의 처사를 반박하고 경제적, 정신적으로 지친
까미유는 모든 창작활동을 중단하고 파괴적인 칩거생활에 인생을 맡긴다.
1906년에 사랑하는 남동생
폴 끌로뎅이 결혼을 하자마자 중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이게 충격을
입은 까미유는 이때부터 매해 여름 까미유는 그녀의 창작활동을 모두
중단하고 그 해의 모든 작
품들을 고의적으로 부숴버렸다.
그녀의 작업실은 점점황폐해져 갔다.
그녀는
일꾼들을 불러 부숴진 파편들을 어딘가에 묻어 버리라고 하곤 주소도 남기지 않은채 몇
달동안 사라지곤 했다.
까미유는
벽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더러운 의자는 부숴진 채 놓아 두었다.
부르봉에 있는 까미유의 아름다운 작업실은 7년 동안 자신을
가두어 놓고 전혀 외부 출입을 삼
가한 채 고독한 예술가의 쓸쓸한 독방으로 전락했다.
옛연인이며, 영광 속에 살고있는
로댕에 대한 강박관념이 그녀의 이성과 영감을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까미유는 정신병원에
집어넣어졌다.
그녀는 30년을 수용소에서 외롭게 지내다 삶을 마감했다.
까미유가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
다.
환자를 가족들 가까이 살게하거나
퇴원시키는 것에 대해서 의사들이 별로 반대하지 않았지만,
까미유의 광폭한 정신병적 증상때문인지 까미유의 간곡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물론 남동생도 절망에 빠진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다.
정신병원에 강제로 감금된지
30년 후인 79세의 나이로 가미유 끌로델은 씁쓸한 삶을 마감했다.
'이자벨 이자니'가 까미유 끌로델로 분한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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