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 라즈니쉬는 섹스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섹스는 구속과 집착과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탐닉하는 사람이나 산중의 수도승이나 사이좋은 부부나 모두 섹스에 갇혀있다. 섹스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섹스를 이해해야 한다. 오쇼가 누누이 되풀이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다.
섹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거친 숨소리와 절정을 향해 서둘러 가는 동작이 머리에 떠오른다. 우리는 그 행위를 섹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섹스가 아니라 섹스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몸 속에서 꿈틀거리는 힘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 힘을 처리할
방법을 찾는다. 마땅한 상대를 찾아서는 처음부터 끝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한다. 결국 힘을 다 써버린다. 그리고 섹스를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섹스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전시회에가서는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힘을 다해 한바퀴 달리고 나와서 전시회에 갔다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조금만 지나면 다시 성욕이 몸속을 돌아다니고 우리는 또다시 처리할 방법을 찾아 헤맨다.
언제까지고 똑같은 일이 되풀이된다.
우리는 평생동안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면서도 섹스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섹스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듯 그때그때마다 성욕을 처리하고 지나치려 한다. 그러는 동안 삶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잃어가고 마주하기 두려운 공허만 남는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선다. 새로운 상대가 공허함을 채워줄 것으로 믿는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또다시 공허함을 느낀다.
문제는 섹스의 상대가 아니라 섹스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우리는 섹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섹스에 관한 한 우리는 미개인인 셈이다.
섹스의 구속을 벗는 길은 섹스를 이해하는 것
섹스란 과연 무엇일까? 인도의 카주라호에 있는 사원의 벽에는 갖가지 자세로 섹스를 하는 조각이 새겨져 있다.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여럿의 도움을 받아 섹스를 하기도 한다. 우리 머리 속에 있는 온갖 성적인 환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사원의 안은 텅 비어있다. 카주라호에 있는 이 사원은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제일 바깥쪽 의식은 성적인 환상으로 빈틈 없이 채워져 있다. 그곳을 거치지 않고는 내면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내면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통로인 섹스를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성욕을 드러내려면 사회적인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만일 밥 먹는 일을 그처럼 수치스럽고 비난받을 일로 여긴다면 숨어서 급히 먹느라 모두 위장병에 걸릴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즐기지 못했던 음식의 맛을 머리에 떠올리며 내내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섹스를 하고 있다. 머리 속에서는 성적인 환상이 떠나지 않지만 실제의 섹스는 빈약하기만 하다. 섹스가 끝나면 미련을 느끼게 되고 그 미련이 집착으로 이어진다. 섹스에도 집착하고 섹스의 상대에도 집착한다.
우리는 섹스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또한 누리지도 못한다. 섹스를 표현한 조각을 즐기지도 못하고, 텅 빈 사원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한다. 우리는 섹스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에게 섹스는 내면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아니다. 사랑이나 명상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더욱 아니다. 우리의 섹스는 구속과 집착과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탐닉하는 사람이나 산중의 수도승이나 사이좋은 부부나 모두 섹스에 갇혀있다. 섹스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섹스를 이해해야 한다. 오쇼가 누누히 되풀이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다.
섹스는 매우 강렬하다.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에너지의 움직임이 섹스에는 있다. 남자의 경우 그 에너지의 흐름에 밀려가면서 정액을 배출하게 되는데, 그 순간에 육체적으로 가벼운 충격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섹스의 충격은 작은 생명체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이것이 육체에서 일어나는 섹스이다. 그러나 섹스는 육체에서 끝나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상대의 따뜻한 살갗에 얼굴을 부비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 섹스가 계속되는 상대와는 남다른 친밀감을 갖는다. 섹스는 우리의 가슴을 열리게도 하고 닫히게도 한다. 이름을 붙이자면 섹스의 심리적인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섹스에 대해 여기까지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섹스에는 종교적인 측면이 있다.
섹스의 절정에서 무너지는 에고의 성벽
우리는 섹스를 통해 생명의 흐름과 하나가 된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에서 잠깐이지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그리고 시간이 멎는다. 우리는 섹스의 에너지에 휩싸여 언뜻 저 너머의 빛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은 너무 짧고 그래서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에너지의 흐름에 몸을 맡기자 에고가 사라지고 시간은 그 순간 멈춰버린다. 바로 명상의 체험이다.
섹스는 단순히 육체에서 일어나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섹스를 원하는 그 힘이 우리를 명상으로 이끈다. 섹스의 에너지가 움직이면서 우리는 에고라는 단단한 갑옷에서 잠시 풀려나온다. 에너지는 격렬하고 순수해서 에고라는 방어벽을 무너뜨린다. 단단한 갑옷과 방어벽을 넘어서 우리는 비로소 상대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섹스는 자연이 허락한 단 하나의 출구이다. 섹스의 절정에서 우리는 자기를 가두고 있는 벽 너머의 빛을 잠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빛나는 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순간을 다시 누리고 싶어하게 되고, 상대의 몸이나 섹스라는 행위에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반복해도 우리가 보통의 섹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이다. 빛나는 순간에 대한 기대를 갖고 마치 하늘 끝에라도 오를 기세로 섹스를 시작하지만 빛에 가까이 다가선 순간, 힘을 모두 빼앗기고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 섹스는 상승과 추락의 끝없는 되풀이로 우리를 지치게 한다. 하늘의 빛을 보여주지만 빛에 다가설 생명력을 빼앗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섹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게 된다. 섹스에 대한 욕망을 억눌러 보지만, 억누르는 것으로는 벗어나지 못한다. 억누르면 욕망은 더욱 강해진다.
섹스를 적으로 삼고 전쟁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섹스는 적이 아니다. 우리는 섹스의 에너지로 태어났고 그 에너지로 살아가고 있다. 생명체를 창조하는 에너지가 바로 섹스의 에너지다. 삶의 곳곳에는 섹스가 스며들어 있다. 우주의 힘은 섹스의 힘이다. 섹스를 부정하고는 삶을 사랑할 수 없다. 섹스를 경멸하는 사람은 섹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를 경멸하게 된다. 섹스로 가득찬 삶을 증오하게 된다.
똑같은 일의 끝없는 되풀이는 섹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섹스는 신성한 힘이다. 섹스의 에너지를 그대로 놓아둔다면 그 에너지는 저절로 사랑이 된다. 섹스가 사랑으로 변화하는 것을 막는 것은 에고이다. 에고란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착각이다. ‘나’는 높고 견고한 벽으로 섹스 에너지가 흘러 넘치는 것을 막아 버린다. 두 사람의 에너지가 하나로 합쳐져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을 방해한다. 에고는 세계와 따로 분리된 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네가 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한 착각에서 벗어나면 섹스의 에너지는 막힘 없이 흘러가 그대로 자비가 된다. 문제의 시작은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뿌리깊은 미신이다. 섹스는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섹스의 에너지로 태어났고 그 에너지로 살아가고 있다.
생명체를 창조하는 에너지가 바로 섹스의 에니지다.
삶의 곳곳에는 섹스가 스며들어 있다. 우주의 힘은 섹스의 힘이다.
섹스를 부정하고는 삶을 사랑할 수 없다.”
탄트라, 성을 통해 우주와 하나 되는 길
섹스를 하지 않고는 섹스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섹스를 많이 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단 한번의 섹스로도 섹스를 이해할 수 있다. 삶을 소모시키는 섹스가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섹스를 한다면 우리는 섹스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와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오쇼는 제자들에게 섹스를 하면서 지켜야 할 세가지를 일러주었다. 첫째는 섹스를 하기 전에 명상할 것, 둘째로는 상대방을 경배할 것, 그리고 세 번째로는 섹스가 일어나도록 허용할 것.
우리는 아무런 준비없이 허겁지겁 옷을 벗고 욕망의 불이 꺼질까 두려워하며 서둘러 섹스를 시작한다. 성기의 간질거림만 덜어내려는 그런 섹스이다. 섹스는 강렬한 경험이므로 준비가 필요하다. 섹스의 에너지에 합류하려면 명상을 통해 의식의 깊은 단계에 다다라야 한다. 두 사람 모두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쉰다. 긴장이 풀리고 몸 속의 에너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섹스를 위한 준비가 된 것이다.
명상을 한 다음에는 상대에게 경배를 드리는 시간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던 우리의 에고는 섹스와 무관하다. 우리의 모습도 우리의 이름도 섹스와는 관련이 없다. 섹스와 마주했을 때는 순수한 에너지만이 존재한다. 순수한 에너지로 존재할 때, 서로는 서로에게 남신이 되고 여신이 된다. 남성은 시바로 변하고 여성은 샤크티가 된다. 이제 상대의 에너지를 통하여 우리는 신비한 힘에 다가설 것이다. 그러므로 경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섹스가 시작된다. 섹스를 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벌써 끝을 향해 달려간다. 또다시 섹스를 피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해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상대의 육체를 느끼고 자신의 육체를 느끼고 그 에너지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오르가슴에 도달하면 온 몸의 세포가 조화로운 리듬 속에서 춤을 추기 시작할 것이다. 이 순간을 내면에 이르는 통로로 이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의식은 제삼의 눈, 즉 양미간에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 여섯 번째 차크라인 아즈나 차크라의 자리이다. 의식을 이 중심에 두고 있을 때 섹스는 깊어진다. 호흡은 아주 느려서 거의 없을 정도가 되어야 오르가슴의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
탄트라에서는 오르가슴의 시간을 늘리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오르가슴의 시간이 연장될수록 그만큼
섹스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잠깐의 오르가슴이라면 다음 날 다시 섹스를 꿈꾼다. 그렇지만 오르가슴이 칠 분 이상 계속되면 삼 개월 동안 섹스를 원하지 않게 되고, 만일 세 시간 동안 오르가슴이 지속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섹스에서 해방된다.
우리는 자극의 끝에서 맞는 오르가슴만을 알고 있다. 그러한 오르가슴은 그 이상 더 나아갈 수 없다. 에너지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무거운 짐을 덜은 것처럼 홀가분해진다. 계속되던 긴장에서 잠시 풀려난다. 그러나 탄트라에서는 또 하나의 오르가슴을 이야기한다. 산봉우리를 넘으면 깊은 계곡이 나오듯이 흥분의 절정을 지나고 맞이하는 평화의 오르가슴이다. 이곳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면 된다. 발기가 수그러들었을 때만 약간의 움직임과 흥분이 필요하다. 그 뒤에는 다시 긴장을 푼다. 섹스를 끝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편안하게 머무르는 것이다. 두 사람은 포옹한 채로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탄트라의 오르가슴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속으로 녹아들어갈 때 많은 일이 일어난다. 서로의 체액과 생체 에너지가 섞이면서 남녀 모두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보통의 섹스와 탄트라의 섹스는 완전히 다르다. 보통의 섹스는 섹스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지만 탄트라의 섹스는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흥분을 향해 밀고 올라가기만 하던 오랜 습관 때문에 처음에는 뭔가 빠진 듯이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탄트라의 오르가슴 속에서 우리는 완전한 만족을 맛보게 된다.
급히 끝내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섹스는 영적인 체험이 된다. 두 사람의 육체가 섞여버리고 결국 육체가 사라진다. 육체와 함께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섹스의 상대는 우주로 향하는 문이 된다. 우리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로 탄트라이다.
성과 사랑, 그 변환의 연금술
우리는 즐거움과 쾌락이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저 먼 곳에 가서 어떤 문을 열면 자기가 찾던 것이 그곳에 가득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자신 안에 들어있다. 바깥에서 오는 것은 거짓일 뿐이다. 우리가 맛본
오르가슴도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오는 것과 같다. 물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다만 흙을 걷어내고 돌을 들어낸 것 뿐이다. 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샘솟을 수 있게 빈 공간만 만들어주면 된다.
섹스의 에너지는 샘솟지 못하고 주변을 온통 습지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그러나 몇 개의 돌을 치우기만 하면 그 에너지는 아름다운 샘물이 된다. 그 샘물에서는 섹스가 샘솟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샘솟는다.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
'세상만사 이모저모 > 지금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오의 음악 샘플2-14 (0) | 2006.10.04 |
---|---|
에오의 음악 샘플2-17 (0) | 2006.10.04 |
얼마나 언어의 피해를 입고 잇는가? (0) | 2006.09.30 |
에오가본 얼간이들... (0) | 2006.09.17 |
초월은 하나의 성취가 아니다. (0) | 2006.06.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