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1984년’ | |||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이 정치와 관계가 없다고 하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다. ”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1984년 4월 4일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것으로 ‘1984년’은 시작된다. 1950년 핵전쟁으로 세계는 3개의 초강대국인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로 재편되었는데, 그 중 오세아니아가 이 소설의 중심무대다. 오세아니아는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사고까지 감시하는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억압적 사회다.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이 개인의 모든 활동영역을 감시하고 도청함으로써 개인성은 파편화되고 해체되어 있다. 당이 만든 가공인물인 ‘빅브라더’가 권력의 정점에 있다. 오세아니아는 개인의 일기조차 죄가 되는 사상적 말살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 윈스턴은 일기를 써 반역적 행위를 하고 나아가 당의 전복을 꾀한다. 그러나 그는 불빛 속으로 빠져드는 한 마리 나방의 운명처럼 전체주의의 절대권력 앞에 힘없이 굴복 당한다. 이제 ‘무산자계급의 혁명이 전체주의 당을 전복시킬 것’이라는 그의 꿈은 무자비하게 짓밟힌다. 그는 당의 한 요원이 쏜 총에 맞아 죽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은 비평가들로부터 극단적인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은 후 세계 3대 ‘반(反) 유토피아 소설’ 중 하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읽어보았다면 두말 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과 그가 이 소설에서 만들어 낸 신조어인 ‘빅브라더’는 저널리즘에서 널리 다루어져 이제 일상용어가 되다시피 해 친숙함을 느낄 정도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오웰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1984년’에서 그가 예언하고 있는 다양한 미래 상황이 과연 우리의 눈앞에 언제 그리고 얼마만큼 닥칠 것인가라는 우려와 궁금증 내지는 재미(?)가 서로 맞물려 강한 시사성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소설이 어떤 작품이며 또 어떤 문학적·사회적 함의를 담고 있는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도 오웰과 ‘1984년’을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1984년’의 반(反) 유토피아 이 소설의 문학적 이해의 잣대가 되는 ‘반 유토피아(anti-utopia)’라는 용어는 ‘유토피아’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 ‘유토피아’의 기원은 1516년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라는 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공상의 섬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 ‘u’와 ‘장소’라는 뜻의 ‘topos’가 결합된 복합어다. 결국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는 땅’이라는 뜻이다. ‘유토피아’가 인간의 고귀한 꿈이 실현되는 지고의 선과 행복이 존재하는 이상향이라 한다면 ‘반 유토피아’는 그 반대로 예견되는 최악의 미래상황이 된다. 이렇게 되면 ‘유토피아 문학’의 메시지는 희망과 자신감이 되고 ‘반 유토피아 문학’에서는 현대인의 절망감과 무력감이 드러난다. 오웰의 반 유토피아는 당대 전체주의 체제의 폭력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문학장치이다.
■ ‘1984년’의 운명적 탄생 오웰이 이 소설을 철저히 ‘반 유토피아’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은 물론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결코 허구적인 것이 아니다. 작가에 의해 경험된 것이라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비록 그 초고가 1947년에 완성되었지만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반 유토피아적 분위기는 20세기 전반기 미증유의 격동의 시대 전체를 반영하고 있다. 미얀마에서 보낸 제국주의경찰 생활, 파리와 런던에서 체험한 극빈자 생활, 스페인 내전 참전 등을 통해 오웰은 대영제국주의의 허구성, 자본주의의 모순, 전체주의 특히 스탈린주의의 실체를 깨닫게 된 바 그의 정치문학관은 만년으로 갈수록 더욱 비관주의에 빠져든다. 이제 그가 예견해 볼 수 있는 미래사회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소설 속 ‘오세아니아’와 같은 절망적 사회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있어 ‘1984년’의 탄생과 그 내용은 운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 ‘1984년’의 현재성 ‘1984년’을 흔히 스탈린주의가 중심이 된 전체주의만을 다룬 것으로 착각하는 독자가 있다. 거꾸로 스탈린이 죽은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이 소설 속의 상황은 거짓이며, 더 이상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고 위안한다는 것도 순진한 생각이다. 우선 오세아니아에 속해있는 ‘에어스트립 원’은 영국을 가리키며 주인공 윈스턴이 살고 있는 도시도 ‘런던’이다. 거기엔 초고층건물이 많고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이 요소요소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된 국가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오세아니아 사회는 정치적으로 전체주의 국가인 동시에 고도의 기술적 전체주의 국가다. 즉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된 미래의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上程)시켜 놓은 반 유토피아적 세계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소설은 당대의 정치적 전체주의하의 인간의 운명과 인간성 말살을 그린 것인 동시에 인간이 물품화되어 기계처럼 정형화된 고도의 관리 산업사회시대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는 넓게는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각종 테러의 위협 속에서 살고 있고 좁게는 폐쇄회로, 도청, 감청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를 들어 1974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정치적 탄핵을 모면하기 위해 ‘어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개인의 정보를 입수했을 때 이를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고도의 사생활 보호안을 만들어 발표한 적도 있다. 그리고 작년, 시끄러웠던 안기부 X파일 사건 같은 것은 바로 현대판 ‘빅브라더’가 저지른 결과물인 셈이다. 이런 것은 일찍이 오웰이 예견하고 우려했던 것이 아닌가. ‘1984년’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정치적 풍자도, 무의식적 심리상태의 증언도 아니다. 이 작품은 혼돈의 역사 속에 흐느적거리고 있는 현대인을 깨우치고자 한 작가의 고뇌에 찬 산물이다. 작가는 윈스턴의 희망처럼 인간적인 인간으로 대변되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사회로의 복원을 촉구하고 있다. 박경서 영남대학교 영문학과 강의전담객원교수·‘1984년’ 번역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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