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라” “살려라”… 장안을 달군 시골아낙 재판 소동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함경도 시골마을의 한 아낙이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의 결과는 사형. 그러나 재판정에 나온 피고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한 사람들은 재판장에게 투서를 날리며 무죄를 호소한다. 진술 번복으로 재개된 2심 공판을 둘러싼 종로 일대의 대혼잡, 오로지 미인이기에 집중됐던 각계각층의 뜨거운 관심. 과연 그는 남편을 죽였을까. |
1924년 10월10일, 종로 거리에는 늦가을 새벽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인파가 몰려들었다. 새벽잠을 설친 사람들은 말 못할 비밀이나 간직한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을 재촉했다. 장에 가는 것도, 회사나 공장으로 출근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른 아침 종로에 출현한 군중은 마법에 걸린 듯 일제히 경성복심법원 정문을 통과해 굳게 닫힌 제7호 법정 앞에 줄지어 늘어섰다. 개정을 한 시간 앞둔 8시30분, 법원 청사 앞에는 이미 500~600명의 군중이 운집해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제7호 법정이 수용할 수 있는 방청객은 고작 60여 명. 열에 아홉은 몇 시간씩 기다린 보람도 없이 씁쓸히 발길을 돌려야 할 처지였다. 사람에 치여 숨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에 이르자 법원 마당에 모인 군중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고 한 마디씩 내뱉었다. “여보시오. 나는 조반도 거르고 7시부터 줄을 섰다오.” “예끼 이 사람, 겨우 7시에 온 걸 가지고 웬 생색이우. 나는 5시에 나왔다오.” “나는 상점문도 걸어 잠그고 왔소.” “끼여 죽겠소. 그만 미시오.”
장안을 뒤집어놓은 촌색시 개정 시각이 가까워오자 인파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법원 부근에만 2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서른 명씩, 마흔 명씩 떼 지어 몰려온 군중은 제지하는 순사들을 밀치고 제7호 법정 앞 입장 대기행렬에 더덕더덕 엉겨 붙었다.
꼭두새벽부터 법원 앞에 모인 2000여 인파는, ‘김정필 본부 독살사건’ 경성복심법원 재개 공판을 구경 나온 사람들이었다. 쥐약으로 남편을 독살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스무 살 촌색시 김정필이 그처럼 거대한 인파를 한 곳으로 불러 모은 것이었다. 그날 법원 앞에 모인 2000여 명은 3·1운동 이후 종로에 운집한 최대의 인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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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역꾸역 몰려드는 인파를 제지하느라 공판은 예정보다 1시간20분이나 지연된 10시50분에야 개정됐다. 입장이 허가된 60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2000여 명은 공판이 시작된 이후에도 발길을 돌리지 않고 법원 주위를 배회했다. 차도까지 뒤덮은 인파로 인해 종로거리는 하루 종일 극심한 교통 체증을 빚었다. 인파에 막혀 법원 출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김정필 공판’을 제외한 모든 민형사 재판이 취소되는 사태까지 연출됐다. 시내 각 신문사는 장문의 보도기사를 싣는 것으로도 모자라 앞 다투어 방청객 수기를 게재했다. ‘김정필 공판’이 이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시대일보’에 실린 방청객의 수기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함경도 두메마을에서 발생한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이 종로의 교통을 마비시킬 만큼 장안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살인혐의를 받고 있는 여인이 절세미인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얼마나 미인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려는 호기심 반, 미인이 살인을 저질렀을 리 없다는 동정심 반으로 사람들은 재판이 열리는 종로로 꾸역꾸역 몰려든 것이었다.
요절한 신랑 김정필은 1905년 함경북도 명천군 궁벽한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 김경열의 오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한 데다 여자는 공부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인습까지 남아 있어 보통학교조차 다니지 못했다. 일본어는 물론 한글조차 읽고 쓸 수 없는 평범한 구여성이었다. 1924년 김정필이 스무 살이 되자 부친은 혼기가 꽉 찬 맏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신랑감을 물색했다. 집안은 비록 가난했지만 김정필은 소문난 미인이어서 신랑감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김경열은 오촌당숙이 중매해준 김호철에게 맏딸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 사람도 똑똑하고 집안에 재산도 있다 하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1924년 4월27일, 김정필은 세 살 연하의 김호철과 혼례를 치렀다. 구식혼례다 보니 신부 김정필은 물론 장인 김경열조차 혼인식 당일에야 신랑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김호철의 첫인상은 못생긴 것은 아니지만 핼쑥한 것이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혼례를 치른 김정필은 친정에서 80리 떨어진 김호철의 집으로 가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그 직후 김정필은 10여 일 동안 시댁 일가 친척집을 돌며 혼인인사를 드렸다. |
시집간 지 보름 남짓 지난 5월9일, 김정필은 시어머니가 흰 약으로 쥐를 잡는 것을 보았다. 시집가기 전 김정필은 집에 쥐가 많아 골머리를 앓았다. 눈이 번쩍 뜨인 김정필은 동네청년에게 흰 약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청년은 흰 약이 ‘랏도링(황린·黃燐)’이란 쥐약인데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는 무서운 독약이라 알려주었다. 이튿날 김정필은 읍내에 가는 시댁 칠촌아주머니에게 부탁해 랏도링 30전어치를 사다가 헝겊으로 싸두었다. 결혼한 지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인 5월23일, 김호철은 심한 구토를 하며 앓아 누었다. 5월29일,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들 병세에 차도가 없자 모친 최씨는 도대체 무얼 먹고 그 지경이 됐느냐고 물어보았다. 김호철은 그때서야 아내가 준 주먹밥과 엿을 먹은 후부터 배가 아프다고 말했다. 모친 최씨는 며느리가 아들에게 독약을 먹였다고 주재소에 고발했다. 사건을 접수한 주재소 순사는 김정필을 체포하는 한편, 의사 최승하를 불러 죽어가는 김호철을 진찰하게 했다. 최승하가 진찰해보니 김호철의 피부는 누렇게 변색되었고 입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다. 토사물과 대변에서도 입에서와 똑같은 악취가 났다. 황린 성분이 든 독약을 마셨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세였다. 독약을 마신 지 4, 5일은 지난 것처럼 보였다. 독 기운이 이미 온몸에 퍼질 대로 퍼진 상태여서 의사로서도 도저히 손쓸 도리가 없었다. 김호철은 심한 통증에 시달리다 이튿날인 오후 4시에 사망했다. 결혼한 지 겨우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사망 직후 부검해보니 입과 코에서 암갈색 진물이 흘러내렸고, 창자와 간장은 적갈색으로 변색된 상태였다. 부검을 담당한 최승하는 ‘황린에 의한 독살’이라고 결론지었다. 김정필은 명천경찰서에 유치돼 강도 높은 신문을 받았다. 수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움직일 수 없는 물적 증거를 내밀자 김정필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김정필의 숨겨진 과거와 범행 동기도 속속들이 밝혀졌다.
김정필의 자백으로 수사는 탄력을 받았다. 경찰 조사, 검찰 조사, 예심을 거쳐 1심 판결에 이르기까지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청진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한 김정필은 6월26일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함경북도 명천에서 벌어진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은 조용히 종결될 것만 같았다.
고조되는 관심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김정필은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1924년 7월, 사건은 경성복심법원으로 넘어왔다. 사건은 그때야 비로소 신문지상에 보도됐다. ‘동아일보’ 1924년 7월17일자에 보도된 한 단짜리 기사는 뜻밖에도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방년 스물의 꽃 같은 미인이 자기 남편을 독살하고 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건이 작일에 경성복심법원으로 넘어왔다”는 기사 도입부의 한 문장 때문이었다. 김정필이 1심 재판에서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한 상태였기에 2심에서 재판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절세미인의 목숨이 걸린 항소심 공판은 개정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
공판은 8월15일 오전 10시 경성복심법원 제7호 법정에서 개정했다. 삼복더위가 한창이었음에도 방청석은 미인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방청객들로 가득 찼다. 요시다(吉田) 재판장은 주소, 성명, 직업, 연령을 차례로 묻고 곧바로 피고인 신문에 들어갔다. “피고인은 결혼 전 이웃에 사는 십이촌 김옥산과 수삼차 통정한 사실이 있는가?” “김옥산과 관계를 가진 것은 사실이나 강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초췌한 얼굴의 김정필이 억센 함경도 사투리로 힘없이 답했다. “피고인은 남편 김호철이가 일자무식이요 성질이 어리석고 얼굴이 못생긴 것을 싫어해 남편과 한 차례도 부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지?” “제 남편이 무식하기는 했지만 사람은 좋았습니다. 결혼한 지 닷새 만에 남편의 국부에서 고름이 났습니다. 그전까지 다섯 번 정도 부부관계를 가졌습니다.” “피고인은 금년 5월23일에 랏도링이라는 쥐 잡는 약을 엿과 밥에 섞어 먹여 남편을 죽인 일이 있지?” “쥐 잡는 약을 사서 헝겊에 싸두기는 했지만, 남편에게 먹인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김정필은 1심에서의 공술을 번복하고 범죄 사실을 부인했다. 의외의 답변에 당황한 재판장이 되물었다. “피고인은 경찰, 검찰, 예심은 물론 1심에서까지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느냐?” “경찰서에서 순사가 때리면서 없는 일이라도 그렇게 말하라고 하기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평소 임질과 위병을 앓았습니다. 시어머니가 남편이 병으로 죽은 것을 애매하게 내가 죽인 것이라고 경찰에 고발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김정필은 눈물을 흘리며 거듭 결백을 항변했다. 피고인 신문이 끝난 후 검사의 논고가 이어졌다. 후쿠다(福田) 검사는 피고인이 비록 범행을 부인했지만 범행을 입증할 확실한 물적 증거와 증언이 있고, 피고인 스스로가 경찰 조사에서 1심 재판까지 일관되게 범죄 사실을 인정했으므로 중형에 처해 마땅하다며 1심과 같이 사형을 구형했다. 관선 변호인 모리이(森井) 변호사는 피고인이 아직 젊고 계도의 여지가 있으니 극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의례적인 말로 변론을 마쳤다. 요시다 재판장은 일주일 후인 8월22일 판결하겠다며 폐정을 선언했다.
투서한 동기 간단히 끝날 것 같았던 2심 재판은 김정필의 부인으로 한층 흥미를 끌었다. 재판정에서 공개된 김정필의 미모는 대중의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판결을 하루 앞둔 8월21일 오전에는 요시다 재판장과 모리이 변호사 앞으로 일본어로 씌어진 장문의 투서가 날아들었다. ‘한 방청인’이라고만 밝힌 익명의 투서였다.
그러나 구구절절 김정필의 무고함을 항변한 투서의 내용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김정필의 법정진술을 어떻게든 끼워 맞춰보려고 애쓴 것일 뿐 논리적인 구석이라곤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이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제3자가 피고의 미모에 취해 재판부와 변호인에게 투서를 보낼 만큼 김정필의 재판은 세간의 화제가 됐다. |
8월22일 ‘김정필 본부 독살사건’ 선고공판이 예정된 경성복심법원 제7호 법정 앞에는 오전 8시부터 방청객이 모이기 시작했다. 한 시간 후에는 방청객 숫자가 300여 명에 달했다. 종로경찰서에서 출동한 경관 6, 7명은 법정으로 밀려드는 방청객을 제지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김정필은 용수를 쓰고 467호 명패를 단 푸른 옷을 입고 다른 사건의 남자 피고인 10여 명과 함께 입장해 피고인석에 앉았다. 법정을 꽉 메운 60여 명 방청객의 시선은 김정필에게 집중되었다. 김정필이 용수를 벗자 방청석 곳곳에서는 탄식소리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천하일색이다!” 오전 10시 요시다 재판장이 두 명의 배석 판사와 함께 입장했다. 다른 사건 두 건에 대한 판결이 있은 후 김정필의 차례가 돌아왔다. 판결을 앞둔 법정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김정필 본부 독살 사건은 더 조사할 필요가 있어 판결을 무기 연기한다.” 김정필은 재판장이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몰라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통역관의 설명을 들은 후 “저는 애매하니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애원하며 자리에 앉았다. 선고 연기로 재판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김정필에게도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들끓는 동정여론 선고 연기 이후 독살 미인 김정필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은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경찰 수사에 강압이 있었고 피고인에게 적대적인 시부모측 인물만 증인으로 채택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관선 변호인의 불성실한 변론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일본인 관선 변호인에게 사건을 맡길 수 없다는 여론이 들끓자 대구 출신의 이인(李仁) 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자청했다. 훗날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을 맡게 되는 이인은 당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지 1년밖에 안 된 혈기왕성한 소장 변호사였다. 이 변호사는 재판부에 공판 재개를 신청하면서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요시다 재판장은 이 변호사의 공판재개 신청을 받아들였다. 김정필 본부 독살사건 재개공판은 10월10일 오전 9시30분 개정하기로 결정됐다. 김정필의 친정아버지 김경열, 죽기 전 김호철을 진단한 의사 최승하, 김호철의 모친 최씨와 형 김영철 네 사람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공판 일자가 다가오자 재판부와 언론사에는 투서가 답지했다. 심우섭이라고 실명을 밝힌 투서자는 자기는 8월15일 공판을 방청한 사람인데 통역관의 통역이 서툴러 피고인의 진술을 재판장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으니 이 점을 참작해서 판결을 내려달라고 당부했다. 통역관의 부실한 통역이 여론의 도마에 오르자 요시다 재판장은 조선 법조인을 대표하는 김병로 변호사를 경성복심법원 접견실로 불러 당부했다. “나도 조선말을 조금 알아서 피고인의 진술을 못 알아들을 리 없소. 통역관의 자질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거든 부디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라고 말해주시오.” 김정필을 동정하는 투서만 답지한 것이 아니었다. 공판을 열흘가량 앞두고 요시다 재판장 앞으로 60여 명이 연서한 진정서가 들어왔다.
아니나다를까 명천 주민의 진정서가 들어온 다음날 요시다 재판장 앞으로 또 한 장의 투서가 날아들었다. ‘김정필이 사는 동리의 사정을 썩 자세히 아는 사람’이라고만 밝힌 익명의 투서자는 ‘명천 주민의 진정서는 김정필의 시부모가 뒤에서 운동하여 60여 명의 연명을 받은 것이니 재판장은 그리 알고 김정필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려줄 것’을 호소했다. 언론 역시 진정서를 제출한 명천 주민을 거세게 질타했다.
살인사건 공판을 앞두고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 피고인을 살려야 하느니 죽여야 하느니 투서전을 벌이는 것은 기현상이었다. 절세미인이 남편을 독살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동정 여론은 엉뚱하게도 가련한 여인을 고발한 시부모에 대한 질타로 옮겨갔다.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두 차례의 공판을 거치면서 김정필은 부조리한 조선의 가족제도에 희생당한 가련한 희생양으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됐다. 함경북도 명천의 이름 없는 구여성 김정필은 일약 전국적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부검의의 불리한 증언 김정필 사건 공판이 재개된 1924년 10월10일에도 종로 거리는 공판을 구경 나온 인파로 하루 종일 몸살을 앓았다. 8월 공판 때보다 열 배나 불어난 거대한 인파였다. 종로경찰서에서 파견한 수십명의 경관이 인파를 해산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드는 인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용수를 쓴 채 호송차에서 내린 김정필은 군중이 다섯 겹 여섯 겹으로 에워싼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재판장이 출입하는 안문을 이용해 겨우 법정으로 들어왔다. 그는 부친이 차입해준 깨끗한 옷을 입고 힘없는 걸음걸이로 피고인석에 앉았다.
10시50분 최씨의 퇴장으로 법정 소란이 진정되자 요시다 재판장과 후지무라, 가와시마 배석판사, 후쿠다 검사, 이인, 모리이 변호사가 차례로 입장해 자리에 앉았다. 요시다 재판장은 개정을 선언하고 증인 신문에 들어갔다. 김호철을 마지막으로 진단하고 부검한 의사 최승하가 첫 번째 증인으로 증언대에 올랐다. “증인은 김호철이 죽기 전 진단한 일이 있는가?” “올해 5월29일에 주재소의 부름을 받아 김호철을 진찰했습니다. 피부 빛이 누렇게 변했고 입에서 악취가 나는 것이 음독한 지 4, 5일은 돼 보였습니다. 너무 늦게 진찰한 까닭에 별다른 조치는 취하지 못했습니다. 김호철은 다음날 오후 4시경 사망했습니다.” “부검도 증인이 맡았다지?” “사망 직후 시신을 살펴보니 입과 코에서 암갈색 진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부검해보니 창자와 간장은 적갈색으로 변색돼 있었습니다. 황린을 먹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 증세라서 독살이라 판단했습니다.” “김호철이 황린 성분이 든 쥐약을 먹었다면 어째서 곧장 죽지 않았나?” “황린은 먹더라도 즉시 죽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지방에 용해되어 4, 5일 후, 늦으면 일주일 후에 죽습니다.”
오전 10시50분에 시작된 증인신문은 오후 2시에야 끝이 났다. 심문을 마친 재판장은 한 시간 휴정을 선언했다. 새벽부터 법정에 나온 방청객들은 혹시라도 법정 문을 나섰다가 못 돌아올까봐 점심도 거르고 자리를 지켰다. 종로거리의 인파는 교통순사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재판이 끝날 때까지 요지부동이었다. 오후 3시 요시다 재판장은 개정을 선언했다. 개정 직후 이인 변호사는 총독부병원 의관이 김호철의 사체를 재부검할 것을 요청하고, 증인 신문이 불충분했다며 주재소 주임 다케다 경부보, 김영철의 처 최씨, 김정필의 모친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요시다 재판장은 변호인의 요청을 모두 각하하고 곧장 논고로 넘어갔다. 후쿠다 검사는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피고인의 유죄가 명백해졌고, 피고인은 범죄사실을 부인으로 일관할 뿐 반성하지 않으므로 중형에 처해 마땅하다며 사형을 구형했다. 재판장이 최후변론을 요청하자 모리이 변호사는 피고인의 범죄는 강제결혼의 폐단으로 생긴 것이니 죄가 있다 해도 극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변론했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이인 변호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원고의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스무 살에 무기징역
최후변론이 끝나자 요시다 재판장은 김정필을 일으켜 세우고 “재판소에서 조사한 바도 피고인에게 불리하고 증인들의 증언도 피고인에게 불리하나 변호사들은 피고인이 남편을 죽였을 리 없으며 죽였다 하더라도 사형은 불가하다고 했다. 그러나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고, 피고인 자신도 청진에서 자백한 일이 있으니 남편을 죽였으면 지금이라도 자백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자백을 권유했다. 김정필은 울먹이며 “남편 죽어서 과부된 것도 원통한데 남편을 죽였다는 누명까지 쓰게 되었으니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만 밝혀진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최후변론이 모두 끝난 후 요시다 재판장은 후일 선고하겠다며 선고일자를 확정하지 않은 채 폐정을 선언했다. 김정필에게 불리하게 공판이 끝났지만 김정필에 대한 동정여론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김정필 같은 미인이 살인을 저질렀을 리도 없지만, 설령 살인을 저질렀다 해도 환경 탓이지 김정필의 잘못이 아니라고 믿었다. 선고공판은 예정일자를 미리 발표하면 재개공판 때처럼 법정 주변에 대혼란이 야기될까 봐 일반인에게 공지하지 않은 채 10월22일 경성복심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렸다. 숨기다시피 개정한 공판이었건만 어떻게 알았는지 좁은 법정에는 빈 자리가 없었고, 법정 밖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운집해 재판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2심 판결 직후 김정필은 주저 없이 상고하겠다고 말했지만, 상고 기간인 닷새가 지나도록 상고장을 제출하지 않았다. 후쿠다 검사도 상고를 포기해 1924년 10월27일부로 김정필의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상고 포기로 법정재판은 끝났지만, 여론재판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김정필의 형이 확정된 이후에도 요시다 재판장 앞으로 재판 결과에 항의하는 투서가 여러 통 날아들었다. 가히 ‘김정필 신드롬’이라 할 만큼 대단한 관심이었다. 경성복심법원 직원이 “판결을 받은 후까지 이처럼 말썽 많은 사건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시골 여관의 가난한 하녀 독살 미녀 김정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무기징역이 확정된 이후에도 식지 않았다. ‘동아일보’ 1925년 1월1일자 ‘재감(在監) 동포 특집’을 필두로, ‘동아일보’ 1925년 10월23일자 ‘보고 싶은 사진 : 김정필’, ‘시대일보’ 1926년 1월1일자 ‘철창생활 특집’, ‘조선일보’ 1927년 2월9일자 ‘문제의 미인 수인 김정필 감형’, ‘조선일보’ 1928년 1월7일자 ‘일시 소문 높던 여성의 최근 소식 : 남편 죽인 독살 미인 김정필’, ‘삼천리’ 1930년 5월호 ‘법정에 선 독살 미인 김정필’, ‘삼천리’ 1933년 10월호 ‘미인 독살 김정필의 옥중 근황’, ‘삼천리’ 1935년 7월호 ‘12년 만에 출옥한 김정필, 그는 다시 결혼하려는가’ 등, 김정필의 수감생활은 지속적으로 신문 잡지에 보도됐다.
김정필은 수감생활 대부분을 바느질을 하며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기 바쁘게 공장에 나가서 해질녘까지 바느질로 기모노를 지었다. 김정필의 바느질 솜씨는 여죄수 중에 단연 최고여서 서울에 사는 일본인 상류가정의 기모노는 도맡아 지었다. 김정필은 성실하고 마음씨도 따뜻해 서대문형무소 여죄수 사이에서도 단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새로 수감되는 여죄수를 반가워해서 틈만 나면 찾아가 세상소식을 묻곤 했다. 옥중에서 한글을 깨치고 일본어까지 배웠다. 1927년 은사칙령으로 징역 20년으로 감형됐고, 1928년 은사로 15년, 1934년 은사로 13년으로 감형됐다. 이로써 김정필의 만기는 1936년 12월18일이 됐다. 만기를 1년8개월 앞둔 1935년 4월, 김정필은 서른두 살, 수감 12년 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
미녀는 즐거워 유죄가 확정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김정필이 남편을 독살했는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인지 여전히 아리송하다. 사건 당사자들 사이에 진술이 엇갈리고, 무엇보다도 독살한 동기가 불분명하다. 남편이 못생겨서 이상적인 남편에게 새로 시집가고자 남편을 독살했다는 게 말이 되는 것일까. 그럼에도 김정필이 거센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킨 것은 박해나 억울함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당시 본부 독살 사건은 이야깃거리조차 될 수 없을 만큼 흔하디흔한 사건이었고, 시대를 앞서간 일부 신여성을 제외하면 조선 여성 모두가 강제결혼으로 희생당한 가련한 여인이었다. 당시 본부 독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다른 모든 여성도 어느 정도는 강제결혼의 희생자였고,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그마한 동정여론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미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독살한 무기수 김정필이 1920~30년대 조선 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그가 절세미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미인이었기 때문에 세인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고, 미인이었기 때문에 세인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아름다운 것에 끌리고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주목하고 동정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닌 한 미인을 주목하고 동정하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다. 미인을 주목하고 동정하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 미인 아닌 사람을 주목하지 않고 동정하지 않는 것이 나쁜 것이다. 오늘날까지 미인은 여전히 즐겁다. 미인이 즐거운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미인만 즐거운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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