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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이모저모/다큐멘터리 및

최배달-무술인

by 현상아 2007. 5. 15.





<최영의는>
1923년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에서 최승현(부), 김부영(모)의 6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평생을 ‘武’에 받친 명실상부한 무인이다. 근대 일본의 전통무술 중 하나인 오키나와 가라데에 한계성을 느껴, 일결필살의 공수도를 창시, 진검승부를 주장하고, 무도계의 이단아로 낙인이 찍힌 후, 이에 도전하는 당대 최고의 무사들을 각개격파한 인물이다.
지상 최강의 격투기는 자신의 武라 주장하며, 세계적인 격투가나 맹우와의 싸움, 자신의 몸으로써 그 강함을 증명하기도 한다. 맥주병을 수도로 자르고, 돌도 부수었던 그 손은 ‘신의 손’이라 일컬어지며, 현재에는 전설로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후, 자신이 쌓아올린 극진가라데의 전승과 보급에 힘을 쏟고, 처음으로 영문으로 된 가라데서‘What is KARATE?’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자신을 모델로 그려진 梶原一騎원작으로 한 만화 ‘가라데 바보일대’가 가라데 붐을 일으킨다. 영화나 만화로 제작되기까지 가라데의 인기는 그칠 줄 모르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그의 위치는 사뭇 다르다. 그 또한 한국에서의 자신의 武에 대한 보급및 평가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유인 즉은, 한국의 전통고유무술과의 피할 수 없는 대립으로, 일제치하와 6.25전쟁등 민족상잔의 비극 앞에 또 다른 민족의 비극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심사숙고 해야만 하는 일임이 틀림없었기에, 자신의 모국에 대해서만은, 보급은, 그 생애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배달이 기요즈미산에서 하산한 1947년 봄
쿄도(京都) 마루야마 공회당에서는 패전의 울분을 씻고,
전국민의 사기를 진작 시킨다는 명분 아래 전후 최초로
전일본 공수도(空手道 : 가라데) 대회가 개최된다.
이 대회에는 당시 여러 유파로 나뉘어 있던 가라데의
거의 모든 유파가 참가함으로써 그 상징성이 높았고,
자기 유파의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해 각 유파의 대표급
선수들이 모두 출전함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회였다.
당시 가라데는 당수(唐手)라고도 불렸는데, 중국에서 건너와 예전에 독립왕국
이었다가 속국으로 전락해 버린 오키나와의 무사들이 정벌하러 온 본토의
무사들에 대항하기 위해 완성한 무술로 알려져 있어, 정통적인 일본 특유의
무술로 인정받고 있던, 유도나 검도보다 훨씬 인식이 낮은 상태였고,
유도나 검도가 학교에서 정규과목으로 인정받았지만, 가라데만 인정 받지
못하는 등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천시받는 무도였다.
이런 가라데 대회가 이처럼 큰 호응을 얻은 것은,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손꼽히던 목베기의 달인 난바의 영향이 컸는데, 난바가 목베기의 달인으로
불리던 이유는 돌려목차기라는 난바 특유의 기술이 마치 발로 죄수의 목을
참수하는 것과 같아서 였다고 한다.
1946년 난바는 이 특유의 기술로 중국에서 온 영춘권의 권사(자신의 권법을
치욕스럽게 했다하여, 이름을 밝히지 않아 그냥 육서방으로 불린다.)를 격파
반신불수로 만들어 놓아, 패전으로 기죽어 있던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살렸다
하여, 매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첫번째 시합으로 기와격파가 있었다.
한가지 유의할 것은 이 격파에 쓰인 기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약해빠진 기와가 아닌 찰흙으로 구워
격파시에 쇳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한 훈와(燻瓦)라는
사실이다.
먼저 난바 4단은 우승후보답게 7장도 쩔쩔매는 다른
유단자들을 비웃듯 무려 10장을 가볍게 격파한다.
그러나, 무명이었던 최배달은 무려 19장을 격파하며,
초반부터 이변의 징조를 보인다.
난바는 우승후보답게 승승장구 대련 상대를 연파하며 결승에 오르고,
최배달 역시 경시청 기노시타 4단, 족기(足技)의 명수 다헤이 5단 등을 한판
으로 격파하며, 결승에 올라 마침내, 난바와의 운명의 일전을 치르게 된다.
최배달은 필살의 팔굽치기로 난바를 KO시키지만, "상대를 직접 가격해서는
안된다."는 가라데 규정상 많은 논란끝에 난바와 공동우승을 하게 된다.
무명 최배달의 우승은 일본 가라데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대련 결과
에 승복하지 못한 난바는 경기후 무규칙 재대결을 신청 최배달과 다시한번
겨루지만 최배달의 수도치기에 오른 발의 뼈가 으스러져 다시는 가라데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최배달은 이 전일본 공수도대회를 통해 상대방 앞에서 가격을 멈춰야하는
기존 가라데에 다시 한번 염증을 느끼고, 진정한 실전 가라데의 길을 가기
위해 일본 각지에 숨어있는 가라데 고수들을 찾아 무도 여행을 떠나게 된다.
마치, 에도시대에 각지의 고수를 찾아 목숨을 건 수련을 하던 검성(劍聖)
"미야모토 무사시"처럼...

그의 무도여정에 첫번째 대상이 된 곳은 송도관(송도류:松濤流)
가라데의 원류라는 교토 니조도장 이었다.
이 도장에는 "니조십걸"이라 불리는 열명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가라데계에서 알아주는 고수들이었다고 한다.
시간도 체급제한도 없는 무한 대결이 펼쳐졌고, 니조십걸은
마쓰야마부터 차례로 격파당하고, 마침내는 부관장 마쓰이마저
최배달의 강력한 복부차기에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니조도장은
쑥밭이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이 목격자들을 통해 넓게 퍼져, 마침내 언론에 주목을
받게 되었고, 신문지상을 통해 최배달은 자신이 추구하는 실전
가라데를 아래와 같이 만천하에 표방한다.
"무도의 본질은 싸워서 이기는 것 뿐,
실전이 아닌 시합은 춤이나 체조에 불과하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실전공수(實戰空手) 그것 뿐이다." - 최배달

다음날 신문들은 서막을 올린 최배달의 무도 순례를 아래와 같이 대서특필했다.
<가라데의 미야모토 무사시! 니조도장을 초토화 시키다.>
<악몽의 순례자 전일본 공수도계에 도전>
<실전공수의 야수 최배달, 누가 그를 막을 것인가?>
이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오직, 전진뿐 패배는 곧 최배달식 실전공수(實戰空手)의 죽음이었다.
두번째 상대는 나라에 있는 오키나와 실전공수의 사카하라였다.
사카하라는 두꺼운 전화번호책을 뚫는다는 관수(貫手 : 손가락으로 타격하는 매우
실전적인 기술로 주로 눈이나 명치, 인후등 치명적인 급소를 노린다)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사카하라 역시 최배달의 정권에 손가락이 부러지고, 족도
차기에 의해 격파당하고 말았다.
이외에도 많은 유파의 가라데 고수들을 격파해 나가던 최배달에게 일본의 무도계는
물론, 민족주의 성향의 과격파들로부터 엄청난 협박이 날아들었다.
패전후 겨우겨우 자존심을 세워나가던 일본인들에게 최배달이라는 조선인의 존재는
눈엣가시 같이 일본의 자존심을 짓밟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매일밤 숙소에 돌이 날아들었고, 습격에 대비해 하루에도 몇번씩 숙소를 옮겨야만
했다. 최배달은 온통 적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최배달은 고베의 가미소리(면도날)라고 불리던 모리에게 도전
하였고, 면도날 같은 발차기 테크닉을 가졌다는 모리도 결국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치 질풍노도와 같이 일본의 가라데계를 격파해 나가던 최배달에게 어느날
반대로 도전장이 날아든다.
상대는 어둠의 사나이라 불리는 나고야의 닌자 미와 노부오였다.
미와 노부오는 닌자집안 태생으로 닌자무술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대결에서 최배달은 지금까지의 대결과는 달리 엄청나게 고전한다.
한쪽 눈이 거의 안보일 지경에 이르렀고, 한쪽 발도 움직이기 힘들정도로 많은
타격을 입고, 거의 패배 직전까지 가게된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으로 미와 노부오를 껴안고 열길이 넘는 나고야 축성 밑
물웅덩이로 몸을 던지는 자살공격으로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처절한 격투 후에 최배달의 실전공수를 신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무술이 꼭 가라데라고만 볼 수 없다.
중국권법 일수도 있고, 조선의 무예일 수도 있으며, 신라 황창랑의 본국검법에서
유래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무술에는 어떠한 형식도 법칙도 없다.
마치 바람과 물처럼 본능적으로 싸우는 야수의 투쟁술 같다.
최배달
그는 기성의 어떤 유파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의 사나이이다.>

닌자 미와 노부오와의 혈전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의 폭풍(暴風)의 나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폭풍보다 더욱 거대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도가중 한사람으로 손꼽히는 미야모토 무사시. 젊은 시절 다케다 신켄의 편에 서서 합전에 참전했다가 패전한 후 방랑무사의 길을 걷게 되었고... 장검의 달인 사사끼 고지로와의 결투를 끝으로 69번에 걸친 목숨을 건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이천일류를 탄생시킨 장본인. 아직도 그가 쓴 오륜서는 일본 굴지의 병법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1584 ~ 1645 (天正[텐쇼오]12 ~ 正保[세이호]2)

검 뿐만이 아니라 인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전국시대의 대 검호. 十手[짓테 : 던지는 무기의 일종]를 주무기로 사용했던 신멘 무니사이의 아들로 美作[미마사카]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지금 얘기하는 Power Bomb과 같은 기술(당시는 전란이 끉이지 않던 세상이었던 점도 있어, 수 많은 무기가 있었던 모양이다.검술이라기 보다는 종합무술이라 표현하는 편이 이미지하기에 편할 것이다.)로 有馬喜兵衛[아리마 요시베에]에게 이긴 것을 시작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검사들과 시합을 쌓아 모두 승리.

29세 때는 너무나도 유명한 간류우 섬에서 결투를 치뤄 사사키 고지로를 이긴다. 그 이후는 각지를 전전하고, 검을 추구하며 仕官[시칸 : 낭인 중인 무사가 다이묘오를 모시는 것]자리를 찾아 다녔다고 전해진다. 검술가로서 무사시의 명성은 높았지만, 시칸으로 요구한 知行[치교오 : 봉급을 일컷는 말]가 1000석이상으로 상당히 높았다.(당시의 검술사범은 많아도 500석 정도로 200석 정도가 평균이었다고 한다.)

또한, 고집 센 성격으로 어느 곳에서도 등용을 꺼려 했다고 한다. 1640년, 우여곡절 끝에 肥後熊本[히고 쿠마모토]에 藩[한 : 에도시대 다이묘오의 지배기구]을 둔 細川忠利[호소카와 타다요시]의 객으로서 안주 할 땅을 얻은 무사시는, 그 곳에서 남은 생애를 그림과 병법서를 남기며 보냈다. 그 중에서 하나가 현재 비즈니스맨에게도 필독도서로서 일본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평가가 높은 오륜서이다.

최배달이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 산에서 수련할 때 미야모도무사시가 지은 오륜서를 들고 입산했다고 한다




일본에 건너가서 처음으로 사귄 일본인친구가 있었다.
그는 명문고등학교에 다니는 학구파였는데,
어느날 그가 깨진 안경을 쓰고 있는걸 보았다.
그에게 다그쳐 물으니 학교 유도부 부장이란 녀석이 돈을 뜯으면서
자기를 괴롭힌다는 것이다.내가 혼내주겠다고 하자 그는 극구 말렸다.
내가 "진심이냐?" 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그토록 말리는데야
별도리 없었다.
그러고나서 며칠후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했다.그의 옆에는
또 안경이 깨어져 있었고 그는 여기저기 멍투성이었다.나는 그를 일으켜 안경집에 데려가 주머니를 털어 안경을 맞추어 주었다.
그를 집으로 보내놓고 당장 유도부로 쳐들어갔다.
나는 도장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여기 부장을 만나러왔다."
그러자 구석에 있던 덩치큰 녀석이 앞으로 나오며 "내가 부장인데
무슨일이냐?" 나는 "안경값을 받으러왔다."
그는 "안경값이라니?" 나는 "네놈이 내친구의 안경을 깼는데 내가 대신
사주었다.그러니 그안경값을 나에게 줘야겠다."
그는 "별난놈 다보겠군.내가 누군줄 알고 여길온거야?"
난 "네놈이 누구인지는 나와 상관없다. 안경값이나 내놓아라."
그는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더니 순간적으로 나를 잡아채려고 덤볐다.
나는 옆으로 슬쩍 비키며 돌려차기를 그의 가슴에 날렸다.
그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옆에서 보던 유도부원들은 "저놈이 우리부장을 팼다.저놈잡아라"
떼거지로 몰려들었다.
나는 닥치는대로 녀석들을 두들겼다. 평소에 무수히 연습하던대로
팔과 다리를 움직여주기만 하면 그뿐이었다. 몇분후 도장바닥에는 녀석들이
즐비하게 드러누웠다.
나는 "네놈들이 이러고도 신성한 무술인 유도를 한다고 말할수 있느냐?"
나는 부장에게로 가서 놈의 멱살을 쥐고 "안경값 내놔."
그는 힘없이 책상서랍을 가리켰다. 나는 책상서랍에서 안경값을 정확히
꺼낸후 뒤도 안돌아보고 나왔다.

< 2 >
일본이 패전한후 맥아더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밤에 미군들이 벌이는 범법행위로 인해 치안이 엉망이었다.
그중에서도 미군들이 일본여자들을 범하는 강간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어느날 밤에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골목쪽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쪽을 힐끗 쳐다볼뿐 어느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불과 몇년전만 해도 우리 조선인 처녀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군대위안부로 부려먹던 놈들이 이제는 자기네 처녀들이
농락당하는걸 보고도 아무소리도 못하고 있다니.이렇게 비겁한 놈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골목쪽으로 가서 막 일본여자를 범하려던 미군을 향해 "저리 비켜라."
고 외쳤다.그는 얼른 바지를 치켜올리더니 재크나이프를 꺼내들고 이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흑인이었고 덩치가 나의 두배는 돼보였다.
그는 내가 작은 동양인이라는걸 확인하자 코웃음을 쳤다.그는 칼을 좌우로
흔들며 나에게 접근했다.그가 칼을 찔러왔다. 나는 그걸 옆으로 흘리며
발로 그의 허벅지를 찍었다.그러자 그의 자세가 약간 낮아져서 공격하기에
적당한 높이가 됐다. 나는 틈을 주지않고 돌려차기를 안면에 날렸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발에 느껴지는 둔중함에 나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쾌감같은걸 느꼈다.그렇다. 이제껏 내가 상대한 자들은 일본인
이었다.확실히 작은 일본인들보다는 덩치큰 미국인을 ko시켰을때가 더 통쾌한
것이다.일본여자는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황급히 사라졌다.
이후로 나는 이일에 재미와 보람을 느껴 밤마다 거리를 쏘다니며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일본여자들을 구해줬다.
그일은 입소문을 타고 일본인들에게 퍼졌고 나는 의적쯤으로 칭해졌다.
어느 일본작가는 신문에 "전쟁때 우리가 조선처녀들을 농락했는데,이제는
우리여자들의 정조를 그 조선인의 손을 빌어 지키고 있으니 이게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란 말인가." 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곧 맥아더사령부의 나에 대한 수배령이 떨어졌다.
경찰을 대신해서 강간범을 때려잡는 행위는 어쨌거나 불법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고, 그것은 무도를 수련하기 위해
입산할때까지 계속되었다.




<좌절은 없다>
신용을 잃어버리는 것은 큰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 최배달

소는 우리에게도 참으로 친숙한 동물이다.
그 빨려들듯한 선한 눈망울을 보고 있자면,
사람들의 마음까지 편안해 진다.
그러나, 이 순한 소가 한번 화가나면, 그 폭발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보통 소의 얼굴은 어른의 상반신만하다.
무게가 700kg이 넘는 소가 그 커다란 얼굴과 눈엔
핏발을 세우고 전속력으로 달려와 받으면 10cm
두께의 철판도 뚫는다는 무시무시한 뿔을 앞세운 채,
마치 전차처럼 덤벼든다면, 과연 어떤 느낌이 들까?
공포라는 단어조차 그 두려움을 다 표현하진 못할
것이다.
최배달은 자신이 꿈꾸는 실전가라데를 위하여 그
무시무시한 공포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데라다" 명인과의 만남을 끝으로, 가라데계와의
일차적 결투를 마친, 최배달이 찾은 곳은 도쿄 외곽
다테야마 도축장이었다.
맹수라면 호랑이나 사자가 아무래도 더 강하겠지만, 최배달이 굳이 소를 자신의 시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힘으로는 호랑이나 사자에 별로 뒤지지 않고, 주변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숨은 맹수가 소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처음에 최배달이 도축장 주인에게 소를 맨손으로 잡겠다고 했을 때, 그곳에 있던 사람
들은 그를 미친 사람 보듯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배달 특유의 두손가락으로 동전
구부리기와 차돌격파 시범을 보이자 도축장 주인은 그의 도전을 인정했다 한다.

여기서 잠시, 최배달이 시범시에 자주 썼다고 하는 두손가락으로 동전 구부리기에
관해서 알아보자.
<엄지와 검지만의 힘으로 동전 구부리기는 보통의 사람으로는 어림도 없다.
특별히 타고난 장사가 아니라면, 순수한 힘만으로는 무척이나 어렵다.
최배달 역시 순수히 힘만으로 동전을 구부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가 구부린 동전을 맨손으로 받으면, 손을 댈 정도로 뜨겁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기의 작용이 관계해서 였을 것이다.
힘으로 동전을 구부렸다기 보다는, 기로써 동전의 가운데 부분을 녹여 구부렸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최배달 본인도 이 시범 후에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피가
섞인 소변을 보는 등,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인체는 과도한 에너지를 단시간에 쏟아붓게 되면 반드시 부작용을 일으킨다.
최배달의 데미지는 그런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저 위력은 만만치 않은 것으로 만약 저 손가락 두개가 목에 울대를 잡거나
낭심를 쥔다면, 살아남기 힘든 무서운 살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날부터 최배달은 바로 우사에 들어가서 수련에 돌입
첫 상대로 150관(약 560kg)짜리 황소를 선택하여 고삐만
기둥에 묶어둔 채, 한참을 노려보다가 회심의 정권을 소의
미간에 적중시키지만, 맞는 순간 털썩 앞무릎을 꿇었던
소는 금새 다시 일어나 미쳐 날뛰었다.
최배달은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었다.
첫번째 시도 실패 이후, 기둥에 고삐를 묶어놓은 소를
매일 10마리 이상 가격해봤지만, 번번히 실패였다.
이상한 것은 그에게 가격당한 소들을 잡아보면, 두개골이
크게 깨져 있는데도, 소는 죽지 않는 것이었다.
이 시절 최배달은 자신의 정권에 죽지 않는 소들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용기도 서서히 잃어갔다.
두번째 입산수도를 생각할 정도로 몹시 지쳐 있었다.
좌절하던 최배달에게 도축장 주인 노인은 격려와 함께
소의 장단점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최배달은 다시 도전한다.
정권의 너클을 더욱 단련시켜 그곳에 정을 박아 소를 가격해 보기도 하고, 소를 묶어
놓지 않고 자신의 쪽으로 달려오게 하여, 카운터를 날려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소는
죽지 않았다.
여기서 최배달의 유명한 일화가 나오는데, 죽지 않는 소에 대한 절망감과 자신에
대한 분노로 몸부림치던 그는 우사를 박차고 나와 통나무 전신주를 괴성과 함께
가격했는데, 그 충격에 전신주가 흔들리고, 전신주 줄에 앉아 있던 참새가 기절하여
떨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참새가 떨어졌다기 보다는, 그의 강력한 정권파워가 조금 와전 되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배달은 계속되는 좌절과 실패속에서 마지막 돌파구로 발경(發勁)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전일본 공수도 대회를 통해 알게 된, 영춘권사를 찾아간다.
육서방이라 불리던 이 영춘권사는 이미 술에 절어 폐인이 되어 있었지만, 최배달
에게 중국권법의 비술 철사장(鐵砂掌)을 전수한다. 이날 이후로 최배달은 두번 다시
육서방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철사장(鐵砂掌) 연마에는 순서가 있는데, 처음엔 콩을 솥에 가득넣고, 손으로 찌르고.
쥐는 연습을 하고, 그 수련이 어느정도되면 뜨거운 모래로 수련을 하며, 최종적으로
잘게 부숴진 철사(鐵砂 : 쇳가루)로 수련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최배달하면 또한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절권도 창시자 "이소룡"인데,
혹자들은 이소룡의 발경(發勁)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으나, 이소룡의 수련과정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의 수련에는 항상 샌드백 세개가 등장한다.
이소룡은 자신의 집에 놀러오는 무도인 친구들에게 이 세개의 샌드백을 쳐보도록 하곤
했다고 하는데, 아무 생각없이 그 샌드백을 쳐나가던 무도인들은 세번째 샌드백에서
손이 부서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그 이유는 샌드백속에 들어있는 심상치 않은 내용물 때문이었다.
첫번째 샌드백에는 콩이 들어있었다고 하며,
두번째 샌드백에는 모래가 들어있었다고 하고,
마지막 세번째 샌드백에는 철사(鐵砂)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어떤가?
내용물의 순서가 어쩐지 철사장(鐵砂掌) 수련 과정과 같다는 느낌이 오지 않는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소룡은 이미 철사장(鐵砂掌) 수련을 마쳤다는 사실이다.
수련을 마치고 남은 잔여물을 샌드백속에 넣어놓고 꾸준한 반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니, "최배달과 이소룡이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는 류의 우문을
많이 보곤 하는데, 결론은 없다.
두사람 모두 발경(發勁)의 경지를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고, 실전에서 가장 효과적
이라는 "극진가라데와 절권도"라는 무도를 창시해 낸 사람들이다.
시대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겨룰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저런 류의 질문은 위대한 무도가들에 대한 무례일 뿐이다.
최배달과 이소룡
이 두사람을 엄청난 자기개발과 수련을 통해 인간한계에 도전했던 무도가로 기억하자.
누가 이기느냐를 떠나서, 두 분 모두 위대한 무도가임에는 틀림없으니...

잠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다시 최배달의 수련장으로 돌아가보자.
최배달은 고된 수련끝에 손톱이 다 빠지고, 손가락의 굳은 살이 떨어져 나가 피범벅이
되기를 수십차례 되풀이 한 끝에 발경(發勁)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터득하게 되었다.
※ 발경(發勁)이란? 수준급 이상의 무도가들만이 독특한 수련에 의해 펼칠 수 있는 극강
의 무도경지로 쓰는 거리에 따라 분경(分勁), 촌경(寸勁), 척경(尺勁)으로 나뉘고,
명경(明勁)과 암경(暗勁), 혹은 양경(陽勁)과 음경(陰勁)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통상
적으로 명경(明勁)과 양경(陽勁)은 원거리인 척경(尺勁), 암경(暗勁)과 음경(陰勁)은
근거리인 분경(分勁)과 촌경(寸勁)으로 볼 수 있다. 윗 글에 등장하는 철사장(鐵砂掌)
은 암경(暗勁)이나, 음경(陰勁)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암경(暗勁)이나, 음경(陰勁)이
일정수준에 오른 수련자들은 전화번호부에 손만 댄 상태에서 겉은 멀쩡하고, 속의
종이만 산산조각을 낸다고하며, 기와나 벽돌에 손만 얹은 상태로 움직임없이 격파해
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발경(發勁)의 단계는 각 문파들마다 다른 명칭을 쓰는 경우가 많지만, 통상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단계가 방경(放勁)으로 상대를 뒤로 몇미터씩 튕겨버린다고 하며,
그 다음단계가 의경(意勁)으로 상대가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고 하고, 최종단계가
사경(死勁)으로써 외상이 전혀 없이 상대의 내장을 파괴하여 즉사 시킨다고 한다.
장애물에 상관없이 침투해 들어간다하여 일명 침투경(浸透勁) 이라고도 한다.
사경(死勁)은 세부적으로 더 나뉘어 지지만, 아쉽게도 지식의 한계로 발경(發勁)의
최고수들이 타격한 뒤 한시간 혹은 세시간 후 이렇게 시간을 정해서 살상할 수 있는,
시각혈(時刻穴)의 단계가 사경(死勁)의 상위단계에 있다는 정도밖에 설명할 수 없
음이 안타깝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무도인중에 이 발경(發勁)을 시범해 보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절권도 창시자 "이소룡"으로 그가 자주 시연해 보였던, 1인치 펀치는
태극권의 촌경(寸勁)타법을 응용한 것으로 보이며, 2m의 거인을 몇미터씩 날려버린
것으로 보아 아마도 방경(放勁)을 쓴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또한, 지금도 유명한 실전의 달인 신창 "이서문"도 팔극권 일격필살의 발경(發勁)으로
위명을 떨쳤다고 하는데, 맹호경파산이라는 한 수만으로 수많은 도전자들을 격파
"이서문에겐 한방이면 끝난다"라는 노래가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정도 자신감을 얻은 최배달은 다시금 소와 맞선다.
이번에는 도축장 주인인 노인의 말을 들어 소의 미간이나 정수리가 아닌, 관자놀이를
노렸다. 그리고, 정권이 아닌 수도를 쓰기로 했다.
요오∼ 이야압!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그의 기합이 터짐과 동시에 철사장(鐵砂掌)으로 단련된 수도가
소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았고, "퍽"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소가 튕기듯 옆으로 쓰러져,
입과 코에서 피를 뿜은 채 비명소리도 없이 죽어 넘어졌다.
마침내, 최배달은 맨손으로 소를 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후에 죽은 소를 해부해 보니, 처음과는 달리 두개골은 하나도 상하지 않았으나, 뇌와
내장은 모두 터져있었다고 한다. 침투경(浸透勁) 이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최배달은 다시금 신문지상을 뜨겁게 했고, 일본 청소년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일본 청소년들의 열광은 일본 무도계 전체를 긴장시켰고, 가라데계
만이 아닌 전일본 무도계가 그에 대한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최배달의 두번째 폭풍(暴風)의 나날은 그 전주곡을 서서히 울리고 있었다


<싸움소 라이텐구와의 대결>
실전이 아닌 것은 인정받지 못하며
인정받지 못하면 신용을 얻을 수 없게 되고,
신용이 없어지면 존경 받을 수 없다. - 최배달

최배달이 맨손으로 소를 잡는데 성공하고,
청소년들 사이에서 우상으로 떠오르자
가뜩이나 그를 경계하고 있던, 일본 무도계에서는
즉각, 성명을 발표하고 그를 사도(邪道)로 몰아
세운다.
검도협회와 유도협회에서는 그의 자연석 격파와
소와의 고투를 평가절하하며, 무도계에 사악한
자라고 혹평했고, 가라데계에서는 그가 조선인임
을 은근히 퍼뜨리고, 그의 실전가라데를 깡패의
싸움질로 악평했다.
이에 최배달도 "무술의 유파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내 앞에서 맨손으로 소를 때려눕힐 수 있다면,
나와보라"고 반박하면서, 전일본 무도계와 최배달
사이에는 폭풍전야의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즈음, 최배달은 그의 실전가라데를 일반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대사건을 맞이
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소를 맨손으로 잡았다는 소식이 신문에 알려지면서, 그와
소가 대결하는 모습을 영화로 찍어보고 싶다고 찾아 온 TV 프로듀서 "이노우에"와의
만남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막 TV와 영화가 보급되고 있던 시절이었고, TV나 영화같은 방송매체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도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매체를 통해 소와 싸우는 최배달의 실전가라데가 상영된다면, 목숨을 걸고 추구
하고 있는 실전가라데를 일반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 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일본 무도계의 비아냥도 잠재울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최배달은 "이노우에"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곧바로
훈련에 돌입한다.
이번의 훈련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야 했다.
일단 상대가 묶여있는 소가 아닌 자유롭게 움직이는 소라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체력을 위한 양팔과 다리에 납덩이를 달고 모래밭 달리기, 악력을 위한 두 손가락
턱걸이, 엄지만을 이용한 물구나무 서기, 균형감각을 살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배에서
콩가마 날으기, 수도와 정권 단련을 위한 베니어합판 격파, 저항력을 기르기 위한
커다란 베니아합판을 들고 파도에 버티기, 순발력을 위한 빠른 줄넘기(한번 뛸때 다섯
번을 넘는다고 한다.)등을 착실히 해나갔다.
자신과 상대할 소를 고르던 최배달은 근방에서 최고라는 싸움소 라이텐구(雷天狗)를
상대로 지명한다.
이 라이텐구(雷天狗)는 악명이 자자한 싸움소로 체중이 약 750kg에 창날처럼 앞으로
뻗어있는 뿔 길이가 무려 25cm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시합일은 10월 13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는 관계로 운명의 날은 14일이 되었다.

결전의 날 14일
도살장 앞 해변에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과 기자
들로 북적댔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총을 든
포수가 배치되었다.
마침내, 라이텐구(雷天狗)를 붙들어 놓고 있던
우리가 열리고, 라이텐구(雷天狗)가 뿔을 곧추
세우고 지축을 울리며 최배달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소는 직선형 공격을 한다.
육중한 몸으로 마치 기관차처럼 달려와 뿔로 들이
받는 공격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급선회을 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그러한 이유로 소와 싸울때는 근접거리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야 한다.
(투우사들이 소와 싸울때의 모습을 연상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최배달은 라이텐구(雷天狗)에게 거리를 주지 않기위해 뿔을 잡고 관자놀이를 수도로
가격하려 했지만, 엄청난 소의 힘 때문에 뿔을 잡고 있기에도 벅차 수도로 내리칠
기회를 쉽게 얻지 못하다가 등에 올라타 수도를 내리치는데 성공했지만, 자세가 불안
했기 때문에 제대로 힘을 싣지 못하여, 뿌리치는 라이텐구(雷天狗)의 힘에 밀려 떨어
지면서 다리를 다치게 되고, 곧바로 들이미는 뿔을 가까스로 잡지만, 이미 가슴에
깊은 상처를 받아 피가 넘치고 있었다.
부상당한 몸, 피를 보고 미쳐버린 싸움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위기의 순간 뒷걸음질 치던 최배달의 눈에 푸른물결이 일렁이는 바다가 보였다.
"그렇다, 물이다 물을 이용해야 한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바다를 향해 굴렀다.
라이텐구(雷天狗)는 그의 피를 목표로 달려오고 있는 상황, 최배달이 먼저 바다로
들어가는데 성공했고, 자세를 잡으며 일어섰다.
그의 예상대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라이텐구(雷天狗)는 물에 발이 닿으면서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 찰라의 순간 최배달의 눈에 라이텐구(雷天狗)의 미간이 한가득 들어왔다.
그의 발경(發勁)이 실린 정권이 총알처럼 날아가 라이텐구(雷天狗)의 미간에
정확히 꽂혔다.
"퍽" 둔중한 소리와 함께, 라이텐구(雷天狗)의 육중한 몸이 멈춰서는 듯한 느낌이
들고,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 정적만이 최배달과 라이텐구(雷天狗) 사이에 흘렀다.
이윽고,
"우어∼"
단말마의 비명이 라이텐구(雷天狗)의
입에서 터져나오며, 그 거대한 몸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라이텐구(雷天狗)의 입과 코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최배달은 죽음의 마지막 경련을 하고
있는 라이텐구(雷天狗)를 향해 기어
갔다.
그리고, 라이텐구(雷天狗)의 뿔을
향해 있는 힘껏 수도를 내리쳤다.
잘려진 라이텐구(雷天狗)의 뿔을 들고 일어선 최배달은 곧바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간다.
이미 탈진한 온 몸은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이 라이텐구(雷天狗)와의 대결에서 최배달은 많은 것을 느끼게 되는데,
특히 가까이 붙어서 맞잡고 싸우는 그라운드형 무도에 대해 일정 거리를 확보
해야 공격이 가능한 가라데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지피지기(知彼知己)로 유도를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때 배운 유도는 훗날 세계 격투사들과의 대결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첫 미국 원정>
1952년 3월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유도 6단인 엔토우 고오기찌와 가랑비가 내리는 하네다 공항을 출발했다.
이것이 나의 미국 원정여행의 시작이었다.
평소 생각했던 일이 실현된다는 기쁨과 처음으로 타는 여객기에 어린애처럼 마음이 들떠 있었다.
지금처럼 제트 엔진이 아니라 프로펠라로 하와이에 도착하는데 10시간 가까이 걸렸다.
호놀룰루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 8시간. 로스엔젤레스는 을씨년스럽게 가랑비 내리는 하네다와는 달리 맑은 날씨였고 태평양의 태양이 빛나 있었다.

마중나온 일본인 마에시마씨의 집에 여장을 푼 다음, 여기에서 일본 옷을 받아 기모노 차림으로 시카고로 떠났다.
엔도우 고오찌씨는 알다시피 당당한 체격이므로 기모노를 입어도 위풍 당당했다.
당시의 나는 과연 근육은 강철처럼 강했으나 지금처럼 체중도 나가지 않았고 그와 함께 걸으면 어딘지 빈약하게 보였다.
이래서야 모처럼 미지의 토지에서 일본의 무예가라는 것을 인상주기 위해서 입은 기모노였는데 과연 효과가 있는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시카고까지 7일가량 걸렸다고 생각된다.
그 동안 연일 강행군을 했다. 나는 음식이 바뀐 점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엔도우는 반대로 어떤 것이던 좋아했고 몸의 컨디션이 매우 좋은 것 같았다.
엔도우는 그레이트 토오고우와 프로레스 순연으로 나는 그들이 개최하는 링에서 일본공수를 미국인의 소개, 보급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것인데 한마디로 소개보급이라고 하지만 많은 어려움을 각오 해야만 했다.
일본 무도에 대해선 전혀 예비지식도 소양도 없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하면 공수의 기라던가 정신을 이해시킬 수 있는지, 말은 통하지 않으며 소개하는 사람도 없는 악조건에서, 더구나 살벌한 프로레스 회장에서 공수를 공개하는 것이므로 어떤 인간이 내게 도전해 올런지 모른다.
바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내가 건곤일척 버틴다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크게는 일본 공수를 세계에 도약시키는 기틀이 된다.
심약하게 되거나 주저할 때는 아니다.
나는 이미 사지에 몸을 던지는 각오로 도미한 처지였다.
시카고는 눈이 내려서 차가웠으며 밝고 따뜻한 시카고가 그립기만 했다.
시카고에서 나를 맞은 그레이트 토오고우는 미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일종 기묘한 풍모를 한 사나이였으며 그 수염난 얼굴은 유모러스하기조차 했다.

그와 통역에 안내되어 우리는 시카고의 큰 호텔인 프라잔 호텔의 12층에 여장을 풀기로 했다.
먼저 그들과 마을에 일본인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했는데 호텔로 돌아와 나는 먹은 것을 모두 전부 토했다.
서투른 비행기 강행군과 기후의 격변으로 몸의 컨디션이 아주 흐뜨러졌다.
가까스로 오렌지 주스를 마실 수 있었다.
러고 있을때 그날 저녁에 공수의 시범공연에 나오라는 프로레스 협회의 조리오 지배인의 이 전해졌다.
는 참으로 당황했다.
게다가 완될려니까 그때 도전자가 나타나서 내가 지면 앞이 없으니까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왠만한 일엔 실망하지 않는 나였지만 절식으로 배에 힘이 들어있지 않은 현재의 체조(體調)로는 진퇴유곡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물러설 수 없었다.
그렇다면 기력으로 맞서겠다고 각오했다.
회장인 시카고 홀은 1만 5천명의 관객을 수용했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려서 나는 엔도우, 토오고우의 대기실에 들어갔다.
그 순간 나는 압도당했다.
그 방에 있는 프로레슬러들의 거구에 비하면 나는 마치 어른사이의 아이와 같았다.
그러나 나는 비록 말랐지만 강철 같은 자기의 팔에 희망을 걸었다.
군중의 고함소리가 여러 번 들리더니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어쨌던 공수를 처음 보는 것이므로 먼저 그 위력을 보여서 간담을 서늘케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쪼개기를 하기로 작정했다. 처음 6인치가 되는 판자를 쪼개고 끝으로 도저히 깨지지 않는다고 청중이 믿은 벽돌을 몇 번 실패한 다음에 깼다.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새 감탄성을 올렸다.
절식한 몸이었기에 단번에 깨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에 내가 공수의 형을 시연해 보이자 청중은 그치라고 외치거나 또는 무슨 춤으로 착각하고 레코드를 틀어주라고 놀렸다.
그랬으므로 손님끌기로 처음에 쪼개기로 한 것이 잘 되었었다.
그 중에도 돌을 깼더니 정말 감격했던 모양이어서 홀안은 박수소리로 떠나갈 지경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 손을 해머로 두드려 보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 두드리는 장면을 관중에게 보였을때는 정말 감격한 모양이어서 홀안은 박수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호평중에 링을 내렸더니 그레이트 도오고우가 달려와서 최초의 실시치고는 대성공이라고 기뻐했다.
그리고 기자가 촬영해 갔다고 전했다.
다음날의 텔레비전엔 간밤의 비디오가, 신문엔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다.
그날 밤, 시카고홀에서 실제로 내 수를 본 사람조차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정도였으니... 이 신문이나 텔레비전 보도에 접한 미국 대중은 정말 일까 반신반의였다.
그러나 우선 미국인의 이목을 보았다는 당초의 목적은 뜻하지 않게 달성했다고 볼 것이었다.
시카고를 시발로 자동차로 각지를 순회하고 아이오아주의 데모한스의 거리에 왔을때 처음으로 내게 도전자가 나타났다.
그날 밤, 늘상 하는대로 내가 쪼개기를 해보 이자 관중들은 어디에서나 그랬지만 어떤 장치가 있었는가, 라고 의심했다.
그래서 토오고우가 링위로 올라가서 "절대로 사기가 아니다 그 증거로 누구든 자신있는 자는 이것을 쪼개 보도록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장치가 있는지 얇든지를 알 것이다.
만일 깨면 그 사람에게 1000달러를 주겠다."라고 고함을 쳤다.
그러자 링 곁에서 보고 있던 거구인 프로레슬러 딕이 "1000달러야 좋아. 내가 하겠어."라고 링으로 거드름을 피면서 올라왔다.
그는 유도 3단으로 지구 챔피언이라는 간판을 가진 거치른 수를 쓰는 프로 레슬러 였으며 203파운드 되는 거한이었다.
그는 아주 작은 벽돌도 공연히 손가죽을 깔 뿐이어서 깨지 못했다.
허튼 소리를 한 주제에 깨지 못했다는 것과, 그 같은 벽돌을 내가 보라는 듯이 깼다는 것으로 그는 억지로라도 링에서 내려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내게 싸움을 걸어왔다.
그리고 이 승부에서 10000달러를 걸라고 말했다. 도저히 물러설 수 없었다.

끝까지 싸워서 공수의 힘을 충분히 보여야 했다.
그는 벌써 다 이긴 셈으로 여기고 유유히 거체를 흔들면서 코너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거체에 비하면 흰 연습복을 입은 170 파운드인 나는 고양이에게 쫓긴 쥐와 마찬가지로 미덥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소나무 뿌리처럼 근육이 울퉁불퉁한 팔을 펴면서 위로부터 붙잡으려고 나를 덮쳤다.

참으로 방약무인한 자세였다.
갑자기 눈에 찌르기를 넣는 나의 손은 재빠르게 번뜩였다.
그는 놀라서 눈을 비볐다. 눈을 정말로 찔러서 멀게 할 생각은 없다.
다음으로 그의 급소를 노려서 금적(고환)을 찼다.
눈에서 금적으로 연속된 빠른 움직임이 그의 수비는 전혀 비게 되었다.
눈과 금적을 동시에 공격한 것은 양동작전이며 그의 자세를 허물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의 동체는 완전히 비었다.
나의 정권찌르기가 그의 가슴단에서 4번 눈깜짝할 틈으로 울렸다.
그가 코너에서 내쪽으로 온지 30초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후에 들었더니 갈비뼈가 3개 부러졌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는 나도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상대가 무법자라고 하지만 갈비뼈를 3개나 부러뜨릴 필요는 없었다.
역시 정신없이 행동했던 모양이다.
이 사건으로서 내 실력을 실컷 본 사람들은 내 실력을 인정한다기 보다 오히려 쨉(jap) 같으니 라는 반감을 품었다. "금적을 차다니 비겁하다. 토오조를 잡아라." 그들 새에서 이런 외침이 일어나 순식간에 퍼졌다.
진주만 공격의 토오조와 내 링의 이름이 같았다는 것이 또 나빴다.
폭도화한 군중은 나를 죽이라고 호텔로 몰려왔다.
다행이 경관의 처치가 적당했으므로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잘못했으면 린치를 당할 뻔 했다.
우리는 걸음아 나 살려라고 시카고로 돌아갔다.
이런 사건도 있었지만 링에서 한 번도 지는 일이 없었다.
11개월간에 대소 합해서 250회에 걸쳐서 시합을 하고 다녔으며 시카고를 시발로 32주에 걸쳤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공수가 상륙했다.
미국 동부에서 나는 '미국에서의 공수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최초에 내 고생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을 퍼뜨린데 있다고 한다.

 

Good Actual Condit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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